인간이 죽지 않을 수도 있다고?
뭔가로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니, 이 상투적인 표현은 그로 인한 내 충격을 그대로 전달하기에는 너무 단순하고 피상적이다. 처음에는 아, 그럴 수도 있나보다 하는, 쏟아지는 정보에 대한 일상적인 반응이었던 것 같은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게 아니다. 그후 며칠간은 매우 심하게, 그리고 지금까지도 계속 ‘인간이 죽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새로운 정보는 내 의식에 출몰하며 나를 계속 황당하게 하고 있다. 그만큼 ‘죽지 않는 인간’이란 새로운 개념이 내 의식의 심연에 메가톤급 돌팔매질을 해댄 것이다.
철이 들고 죽음이 무엇인지를 내 경험의 범위에서 인식하면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죽음을 두려워하고 거부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회피하지는 않았다. 특히 사춘기 무렵부터 나는 죽음을 내 인생에서 해결해야 할 최대의 과제로 여기기 시작했던 것 같다.
이렇게 멀쩡히 살아 숨쉬고 있는 내가 언젠가는 죽어 땅에 묻혀야 한다니,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역시 그 운명을 피할 수가 없다니…. 그럼에도 이 세상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여전히 푸른 하늘에 구름이 흘러가고 새들은 계속 지저귈 것이 분명하니, 이 엄청난 부조리를 어떻게 그냥 받아들이란 말인가.
사춘기에 흔히 갖기 마련인 완고한 자기중심적 사고에서 볼 때 내 존재를 소멸시키는 죽음이라는 현상은 정말 말이 안되고 잔인하며 이해 불가능한 것이었다. 대학에 입학한 이후 죽음의 문제는 더 심하게 나를 옥죄었다. 그때까지 가까운 가족이나 친구의 죽음을 경험한 적이 없었음에도 나는 죽음이라는 화두를 늘 붙들고 있었다.
지금은 희미해진 기억이지만 그 무렵엔 특히 땅거미가 질 무렵이 견디기 힘들었다. 사람들을 삶의 잡다한 욕망과 열정 속에 들들 볶아대던 낮 시간이 지나고 저만큼에서 어둠이 뚜벅거리고 걸어오는 듯한 그 시간이 되면 나는 죽음을 관념이 아니라 온몸을 엄습해오는 무정형의 실체로 느끼면서 절망과 절대고독의 시간을 견뎌내야 했다.
당신들은 어떻게 인생의 가장 근본적인 질문인 죽음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도 그렇게 멀쩡한 얼굴로 살고 있나요? 당시 내가 사람들을 보면서 가장 묻고 싶었던 말이다. 실제로 묻기도 했다.
“마르크스가 죽음의 문제를 해결했나요?”
대학 시절 마르크스의 사상에 대해 설파하려던 한 선배에게 다짜고짜 던진 질문이다. 선배는 좀 황당하다는 얼굴로 나를 쳐다보다가 ‘너 좀 웃긴다’는 투로 피식 웃고 말았는데 물론 그로써 마르크스는 내 관심의 영역 밖으로 가볍게 사라졌다.
그렇다고 당시 내게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구체적인 탐색이나 고민의 장이 분명하게 있었던 것도 아니다. 종교도 기웃거려보고 철학이나 신학 강좌를 들어보기도 하고 삶과 죽음의 문제를 심오하게 다루고 있다는 고전들을 읽어보기도 했지만, 죽음이 제기하는 문제에 대한 답에 이르는 길은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그 첫째 원인은 무엇보다 게으르고 치열하지 못한 내 성정에 있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한쪽 다리는 죽음의 문제에 걸쳐놓고 다른 쪽 다리는 다른 많은 여대생들과 똑같이 미팅하고 몰려다니며 수다 떨고 남자친구 때문에 눈물 질질 짜는 그런 일에 디밀어 놓은 채 대학시절이 흘러갔다. 간간이 끝모를 허무감이나 원인 모를 아득한 그리움에 곤혹스러워하고, 그러다 문득 머리 깎고 산에 들어가 구도자가 될까 생각하는 그런 수준이었다.
대학을 졸업한 후 나는 신문사에서 발행하는 잡지의 기자가 됐는데 그 주요 원인 중 하나도 말하자면 죽음과 관련이 있었다. 비록 머리 깎고 산에 들어가 구도자는 되지 못했지만 기자로 일하면서 이런저런 세상사를 다양하게 접하고 다채로운 인물을 만나다보면 삶과 죽음의 근원적인 비밀을 해독할 열쇠의 그림자라도 만나게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크게 작용했던 것이다.
기자로 일하던 약 10년의 시간을 지금 되돌아보면 그 기대는 완전히 번지수를 잘못 짚은 것이었다. 기자생활은 철저히 현실적인 밥벌이에 불과했다. 내 취재대상은 돈과 명예, 권력에 지배당하는 세상일 뿐이었다. 게다가 그 기간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일하랴 아이 키우랴 정신없이 돌아가는 일상에 쫓기면서 죽음이라는 화두는 내 삶에서 점차 밀려났다.
기자생활을 그만둔 후 지금까지 또 1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별로 한 일이 없는 것 같아도 세월의 몫은 또 나름대로 있는 것이어서 그동안 나와 죽음의 관계에 어떤 변화가 있었냐고 누가 묻는다면 나는 매우 조심스럽지만 ‘그렇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내용을 조리 있게 체계를 갖추어 설명할 수준에 이르려면 한참 멀었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것이 사랑의 발견을 핵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종교적 교리나 관념상의 논리적 유희에 의해서가 아니라 짧지 않은 생의 체험을 통해 나는 죽음의 극복은 사랑을 통해서만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고 그러면서 죽음과 나의 관계는 예전에 비해 조금은 편안해졌다. 안 그래도 나이를 먹으면 육체가 먼저 죽음과 가까워지면서 조금씩 친해지는 것이긴 하지만.
그런데 앞서 말한 문제의 그 다큐 프로그램은 요즘 또 다른 측면에서 내게 죽음의 역할과 의미를 새삼 반추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인간―대학생 시절의 나였다면 환호성을 질렀을 그 인간이 이제 내게는 끔찍하게 여겨지는 것이다.
인간이 영원히 산다면 그 무한대로 뻗쳐나갈 탐욕은 어찌할 것이며, 삶의 곳곳에 똬리 틀고 있는 고통들은 어디서 위안을 얻을 것인가? 이런 의문이 들면서 요즘 나는 그동안 내가 그렇게 두려워하고 부인했던 죽음으로부터 많은 것을 얻어왔음을 새삼 깨닫고 있다.
내가 갖지 못해 더 빛나 보이는 돈과 명예와 권력을 일순간에 조롱해준 것도 죽음이었고 나의 어리석은 탐욕에 절제라는 브레이크를 걸어준 것도 죽음이었다. 죽음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과 남겨둔 시간이 소중해지는 것이고 또 결정적으로 죽음 때문에 사랑의 힘과 가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어차피 누구나 다 죽는 인생이기 때문에 목숨을 건 모험도 할 수 있고 스스로에게 겸손해질 수도 있다. 그리고 모두가 죽는다는 사실은 인간 존재에 주어진 가장 기본적인 평등 조건이기도 하다. 죽음을 앞둔 사람은 대개 선해지고 투명해진다. 죽음이라는 정리과정이 없다면 선함이나 사랑의 자리는 그야말로 영생하는 탐욕에 밀려날 것이고 종교도 없을 것이며 더 크게는 현재의 인류문명 자체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죽지 않는 인간’이라는 개념은 그 자체가 모순어법이다.
지금까지 나는 죽음을, 사랑을 통한 극복 대상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러면서 반쯤은 도를 통한 게 아닌가 으쓱대기도 했는데 이제부터는 내 삶의 친구로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준비를 해야 할 것 같다. 여전히 지난한 과제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