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발틱해 해무海霧.
“김연식 씨죠? 내일 인도네시아에 가서 써니 영(Sunny Young)호를 타세요. 인천공항에서 같이 승선하는 선원을 만나면 됩니다.”
그토록 기다리던 나의 항해는 선사에서 걸려온 다급한 전화 한 통으로 시작됐다. 출항 하루 전날, 아침, 잠결에. 전화기 너머 직원은 적도 반대편에 가는 일을 무척 쉽게 말했다. 이 사람에게 인도네시아는 내가 생각하는 부산쯤 되는 모양이다.
“떠나는구나!”
느닷없는 소식에 머릿속이 하얘졌다. 설렘인지, 아쉬움인지, 기쁨인지, 걱정인지 복잡다단하다. 방 안에 짐이 잔뜩 널브러져 있다. 지난 6개월간 부산 한국해양수산연수원에서 해기사(海技士) 교육을 받으며 쓰던 것이다. 수료식 날 가져와 흩어놓고는 ‘정리해야지, 곧 할 거야’ 하면서 보름을 넘겼다. 마음속으로 늘 출항을 준비했지만, 막상 내일이라니 막막하다.
창밖을 보니 차들이 분주히 달린다. 뛰노는 아이들 소리, 과일장수의 트럭 소리. 나는 내일 떠나는데 밖은 섭섭하리만큼 일상적이다. 일기장을 폈다. 남은 하루 사이에 할 일을 모조리 적었다. 내일 떠나면 10월 부분은 하얗게 남을 테니 뭐라도 채워 넣고 싶었다. 개천절이면 대학 동문이 모여 체육대회를 하겠지. 크리스마스에는 모두 흥겨울 테지. 침대에 몸을 파묻었다. 내 방이 이렇게 포근한 줄은 미처 몰랐다. 산중턱의 녹음이 푸르다. 바람이 상쾌하다.
위기의 청춘
일기장을 펴는데 첫 장의 좌우명이 눈에 들어온다.
“인생은 짧다. 영혼의 소리에 귀기울이자.”
책에서 베낀 건지, 어디서 주워들은 건지, 수첩에 적어둔 내 좌우명은 짧은 글귀에 불과했다. 이것의 쓰임은 남이 봤을 때 내 어깨를 으쓱하게 하는 정도? 그래서 일부러 더 크고 진하게 적은 건지 모르겠다. 나는 이 좌우명을 꽤 오래 잊고 지냈다. 토익 점수를 받느라, 인턴으로 일하느라, 봉사활동 하느라, 어학연수를 떠나느라 일기장의 첫 장을 볼 겨를이 없었다. 졸업을 앞두고 진로를 정할 때도 이력서를 쓰느라 분주했을 뿐, 영혼의 소리에는 무심했다.
이걸 다시 본 건 대학을 졸업하고 2년이 지난 2009년 늦은 가을. 그때 나는 어느 가게의 아르바이트생이고, 청년 인턴사원이었다. 아주 잠깐 어느 작은 회사의 사원이었지만 오래하지는 못했다. 나는 눈은 높고 허리띠는 졸라매기 싫은 그저 그런 청춘이었다. 어렴풋이 드라마 관련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촬영 현장에서 바닥부터 시작하기는 싫었다. 그렇다고 여러 해를 투자해 방송국 공채에 도전하기에는 위험부담이 컸다. 실은 자신이 없었다.
하고 싶은 건 많은데 몸은 게을렀다. 여기저기 쑤셔 넣은 이력서는 어설프게 끼워 넣은 광고지처럼 쓰레기통으로 들어간 모양이다. 아무도 나를 찾지 않았다. 그날도 나는 우울하게 일기장을 펴고 이력서를 보낸 곳과 탈락한 곳, 소식이 없는 곳을 구분했다. 답답한 마음에 의자를 젖히는데 일기장이 주르륵 접히더니 첫 장에서 멈췄다. 그리고 영화처럼 영혼의 소리를 들으라는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내가 지금 뭘 하는 거지?”
어지러운 생각으로 흔들리던 시선이 내가 한때 지하철에서 팔았던 지구본에 닿았다. 그때 나는 대학 4학년이었다. 중심을 놓친 시선과 쭈뼛한 발걸음. 새하얀 케이크에 튄 김칫국물처럼 지하철에서 안절부절못했다. 꽤 오래 머뭇거렸다. 그 사이 수도권 전철 1호선 구로역과 주안역을 열 번도 넘게 오갔다. 어느새 날은 어두워지고 퇴근 행렬도 잦아들었다. 나는 엉겁결에 입을 열었다. 쓰디쓴 약을 눈 질끈 감고 털어 넣듯, 미리 연습한 말을 던졌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기 전 꼭 한 번 지하철에서 물건을 팔아보는 경험을 하고 싶어 용기를 내서 나왔습니다. 앞으로 우리 아이들 침대 맡에 이런 지구본 하나씩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아이들이 매일 아침, 저녁마다 더 큰 세상을 꿈꿨으면 좋겠습니다.”
어설픈 장사꾼이었지만 전동차마다 네댓 개씩 팔았다. 승객들은 3000원짜리 지구본이 아니라 내가 말한 세계를 향한 꿈을 샀다. 그때 나를 보던 고등학생들의 반짝이는 눈망울을 잊을 수 없다. 어른들의 시선도 따스했다. 아직도 ‘세계’라는 단어가 구체적으로 뭔지 모르지만, 나는 그런 이상에 젖은 푸른 젊음이었다.
“그랬지. 나는 세계를 꿈꿨지.”
자정이 지나도록 멍하니 침대에 누웠다. 온갖 생각이 휘몰아쳤다. 나는 공부하기 위해 대학생이 된 게 아니라 대학생이기 위해 학교를 다녔다. 영어를 잘하기 위해 토익 900점을 받은 게 아니라, 취업을 잘해보려고 공부했다. 그러다보니 토익 900점을 수월하게 넘겼지만 영어는 한마디도 못했다.
군대에 갔다. 졸업했다. 때 되면 나오는 식당 밥을 먹듯, 나는 맛도 모르고 젊음을 꾸역꾸역 먹어치웠다. 이제 저녁 식사를 기다린다. 뭘 먹고 싶다는 바람은 없다. 뭐든 일단 먹을 것이다. 단지 남보다 늦지 않으려 애간장을 태우면서. 결혼도 할 것이다. 남이 말하는 ‘때’를 놓치지 않을까 조바심치면서. 돈을 모으려 할 것이다. 돈을 쓸 데도 없는데, 그저 빈 주머니의 초조함에 시달리면서. 아이를 낳을 것이다. 남이 하는 대로. 그렇지만 내가 정말 아내와 아이를 사랑할 수 있을까?
한 친구는 좋은 시를 쓰는 것보다 어떻게 하면 시인이 될 수 있는지 고민한다. 경찰이 되겠다는 녀석은 바람직한 경찰상을 고민하지도 않고 학원부터 찾는다. 나는 고교 시절 민태원의 ‘청춘예찬’을 보고 가슴 설레ㅆ다. 지금 내게 그런 열정은 없다. 끓는 피, 거선의 기관같이 힘찬 심장, 투명하되 얼음 같은 이성, 갑 속의 칼 같은 지혜를 바라나봤는가? 나는 피기 전에 시들었다.
88만 원 세대
나는 우리나라에서 월드컵 대회가 열린 2002년 대학생이 됐다. 젊었다. 새로운 삶을 잔뜩 기대했다. 눈이 녹지 않은 2월, 신입생 예비모임에 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낯선 얼굴들과 버스를 타고 충청도로 향했다. 어색함이 사그라질 무렵 천안휴게소에 들렀다. 그런데 진눈깨비 날리는 주차장에 진풍경이 펼쳐졌다. 또래 학생들이 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전기·전자·건축·토목·체육학과처럼 남학생이 많은 과마다 얼차려를 했다. 예비역 선배들은 창이 긴 모자를 눌러 썼다. 온기 없는 목소리로 ‘하나, 둘’ 외치면 신입생들은 휴게소가 떠나가게 악을 썼다. 학과끼리 경쟁이 붙었다. ‘강철! 공대!’와 ‘점프! 체대!’가 경합했다.
“빨리 가자.”
갓 사귄 동기들이 발길을 재촉했다. 그 말은 외면하자는 말과 다르지 않다. 옳다, 그르다가 아니라 일단 피하고 보는 것이다. 나는 입학과 동시에 대학방송국에서 일했는데 사회문제에 관심 있는 학생이 많았다. 철쭉이 필 즈음 경기도 청평에서 모꼬지(MT)를 했다. 봄이 무르익은 밤, 졸업한 선배들은 건물 뒤 외진 곳으로 우리를 불러냈다. 그날 난생처음 얼차려를 받았다. 내 깊은 곳에서 나오는 신음이 어둠을 흔들었다. 얼차려는 학과 모꼬지에서도 받았다. 대학은 온통 얼차려. 도무지 피할 길이 없었다.
월드컵은 성대하게 끝났다. 얼마 후 새 대통령이 당선됐다. 그의 노란색은 새 시대를 상징했다. 그 대통령이 취임을 앞둔 2003년 2월 어느 날 9시 뉴스에 대학 신입생이 숨졌다는 소식이 나왔다. 신입생 예비모임의 얼차려 도중 꽃잎 하나가 졌다. 새 세상이 열렸다는데 우리 대학생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그해 고려대에서 열린 노동절 전야제에서 나는 갓 취임한 대통령을 비난했다. 이듬해에도 어느 대학교에서 밤을 꼬박 지새웠다. ‘시국’을 걱정하면서 말이다. 나는 정작 이른 아침 수업을 만날 빼먹거나 영상물만 틀어놓는 교수에게는 옳은 말 한마디 못했다. 취업준비소가 돼가는 대학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았다. 밖에서는 더 나은 사회를 말하면서 안에서는 얼차려 같은 구태를 답습했다. 눈앞에 있는 것은 바꿀 생각도 못하면서 국가와 사회를 말하려 들었다. 나는 휴강을 밥 먹듯이 하던 교수에게 학기말 강의 평가를 후하게 줬다. 내 학점이 조금이라도 위협받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그렇게 바짝 엎드린 나는 결국 88만 원 세대로 불린다. 돌아보니 내 청춘은 한없이 초라하다. 나이 서른. 어깨가 무겁다. 부모님은 주름이 깊어지더니 혈색도 어둡다. 짝을 찾아 결혼식을 올리는 친구들 소식과 얼마 전 동네 전철역에 붙은 고교동창의 사법시험 합격 현수막은 나를 조급하게 한다.
잘난 허영심
모든 걸 멈추고 숨을 고르기로 했다. 종일 집에 있어도 부모님은 나무라지 않으셨다. 그러나 TV를 켜면 청년실신(청년 실업자·신용불량자), 청백전(청년 백수 전성시대), 장미족(장기간 미취업족) 같은 신조어가 쏟아졌다. 나는 신경질을 내며 채널을 돌렸다. 그래도 좌불안석. 결국 동네 직업훈련소를 찾아갔다. 노동부의 지원금으로 운영되는 부천 자동차직업학교다. 자동차정비기능사 자격시험 공부와 정비소 취업을 도와준다. 의지만 있으면 얼마든지 일자리를 구할 수 있다. 고교를 갓 졸업한 친구부터 60대 노인까지 일자리 없는 사람은 다 모였다. 어른들은 패배주의에 빠져 있고, 담배에 전 아이들은 머리카락이 샛노랗다. 나라고 다르지 않다. 솔직히 손에 기름때 묻히며 살고 싶지는 않다. 그러니 주머니에 손 찔러 넣고 자동차 수리는 어떻게 하는지 좀 보자는 식이었다. 출석만 잘해도 교통비가 나왔다. 나는 개근해서 매달 11만 원을 꼬박꼬박 받았다. 출석으로만 치면 우등생이었다. 가만 보니 대학교도 이렇게 다녔다. 꿈도 없이 몸뚱이만 왔다 갔다…. 나는 거기서도 어정쩡하게 젊음을 흘려보냈다.
그때 눈에 띄는 동생 하나를 만났다. 숫기 없이 만날 혼자 점심을 먹는, 그러나 자동차에 대한 꿈으로 가득한 스무 살 재준이었다. 어머니는 안 계시고, 아버지의 무관심 속에 혼자 자랐다고 했다. 고교 졸업 후 그리로 직행했다. 그는 수업시간에 빛이 났다. 실습 때마다 먼저 나섰고 질문도 많이 했다. 저렇게 공부했으면 명문대를 갔겠다 싶었다. 나는 재준이의 미래를 가늠해봤다. 녀석이 자동차 수리로 대단한 성공을 한다 해도 동네 정비소 사장이 전부일 것이다. 대학 졸업장씩이나 가진 나는 그의 미래를 내려다보는 듯한 쾌감을 느꼈다. 그러다 문득, 생각했다.
“정작 내 꿈은 뭐지….”
남의 꿈은 깐깐하게 저울질하면서 내 꿈은 달아보지 않았다. 나는 겁쟁이다. 사회적 위치를 배정받는 게 두려워 그러고 있는지 모른다. 대기업 아래 중소기업 직원이 되기 싫어서. 그보다 못한 비정규직이 되기 싫어서 그냥 취업준비생의 백지 상태를 즐기지는 않나. 유치하게도 나는 만족스러운 점수를 받을 수 있을 때까지 토익 응시를 미뤘다. 낮은 점수를 받으면 그게 나일 것 같아서. 그래놓고 남이 받은 700점이니 800점이니 하는 점수는 속으로 ‘그까짓 거’하면서 조롱했다. 재준이는 바닥에 꿇어앉아 더러운 볼트를 닦았다. 세상 전부인 것처럼 열정을 쏟는 모습을 보니 허영심에 팔짱만 끼고 있는 내가 창피했다. 내가 녀석보다 나은 건 아무것도 없다. 그 얼룩진 손앞에 내 하얀 손이 부끄러웠다.
나는 그 즈음 항해사가 되는 계획을 두고 진지하게 고민했다. 사나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품었을 비행기 조종사와 마도로스의 꿈. 지구본을 팔던 대학 시절부터, 아니, 대학을 선택할 때에도 진지하게 관심을 뒀다. 주변의 반대와 선원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 때문에 선뜻 나서지 못했을 뿐이다. 이제 와서 항해사가 되겠다는 건 우주비행사가 되겠다는 것만큼이나 엉뚱하다. 그래서 가슴 한구석에 뜯지 않은 편지로 간직했다. 그러다 한국해양수산연수원에 해기사 단기 양성과정이 있는 것을 알았다. 고민이 많았지만, 앞뒤 재지 않고 열중하는 재준이를 보면서 지원서를 썼다.
고마워요, 알렉세이
이어서 알렉세이는 주점을 소개했다. 농구장처럼 지붕이 높고 넓은 가게는 우리가 들어가자 문을 열었다. 탁자는 달랑 8개. 길손은 우리뿐. 하얗게 입김 나오는 홀에서 마신 맥주가 한 병에 6달러나 했다. 우리는 노인에게 잔뜩 실망했다. 두 번째 상륙 때는 이 여우에게 당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밤사이 배에 올라온 인부들에게 물어 주변 명소를 알아놨다. 알렉세이는 내 메모를 슬쩍 보더니 시큰둥하게 알았다고 끄덕였다. 한참을 달려 노인이 차를 세운 곳은 황량한 주차장. 밖에서는 ‘우우웅’하고 매서운 바람소리가 났다.
“벤츠빌스는 해변이 유명해. 가봐.”
“뭐야, 이렇게 추운데 밖에 나가라고?”
해도 너무했다. 알아듣지 못할 것을 알고 한국말로 노발대발했다.
“잘 보라고! 유. 적. 지. 유적지를 가자고!”
나는 종이를 들이밀며 언성을 높였다. 노인은 다 알겠다는 듯이 웃으며 일단 다녀오라고 했다.
“도대체 언제까지 저 늙은 여우에게 끌려 다녀야 하는 거야.”
일행은 발이 푹푹 빠지는 모래 둔덕을 오르며 투덜거렸다. 꼭대기에 오르자 칼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그런데 어쩐지 이상하다. 이렇게 바람이 부는데도 주변은 고요하다. 알 수 없는 느낌이다. 물가에 가자 다들 탄성을 터뜨렸다. 바다가 얼었다. 그것도 파도 치는 모습 그대로. 난 처음 보는 모습에 눈이 동그래졌다. 바다의 푸른빛을 담은 파도는 마녀의 마법에 ‘뿅’하고 얼었는지 물결을 그대로 간직했다. 수평선까지 모두 얼었다. 새들은 바다 한가운데를 잔디처럼 걸어 다녔다. 얼음 맛을 봤다. 짜다. 우리는 신이 나서 그 울퉁불퉁한 얼음 위를 뒤뚱뒤뚱 오르내렸다. 만날 보는 바다에 이렇게 감동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한참 만에 알렉세이의 차로 돌아갔다. 그는 시계를 보며 ‘얼마나 놀랐기에 이제 오느냐’ 하는 표정이다. 이어서 노인은 영웅 야니스의 동상, 중세 광장, 주말시장, 도서관을 안내했다. 촌음을 다퉈 바쁘게 돌아다녔다. 나는 항구에 정박할 때마다 반나절이면 돌아와야 하는 짧은 여행에서 어떻게든 의미를 만들려 버둥거렸다. 그래서 박물관이니 유적지니 하는 것들에 욕심을 냈다. 오늘도 노인을 그렇게 닦달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열심히 다닌 뒤 기억에 남은 건 겨울의 마법뿐이다. 대단한 유적보다 일상의 작은 변화가 놀랍고 신비하다. 아마 이때부터일 것이다. 가벼운 마음으로 이 짧은 여행을 나서기 시작한 건.
라트비아의 석탄을 벨기에 앤트워프에 하역했다. 동화 ‘플란다스의 개’의 배경이고, 세계 최대 면세점이 있다. 매력 있는 항구지만 항만국 검사를 받는 바람에 상륙은커녕 정신없는 사흘을 보냈다. 다음은 지구의 꼭대기 러시아 무르만스크(Murmansk). 항해하는 내내 노르웨이의 험준한 설산이 보였다.
늦깎이의 실수 연발
항해사는 4시간씩 하루 2번 항해당직을 맡는다. 3항사는 오전 8시부터 정오까지, 저녁 8시부터 자정까지다. 2항사는 매 12시부터 4시까지, 1항사는 4시부터 8시까지다. 항해는 배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GPS와 레이더 같은 첨단장비가 발달해 이제는 사람의 역할은 장비를 감시하는 데 그친다. 배에 사정이 생겨 당분간 나는 4시부터 8시까지 일한다. 새벽에 곤히 자는데 전화기가 울렸다.
“지금 몇 시예요!”
2항사가 냉랭하게 쏘아붙이고 수화기를 거칠게 내렸다. 벽에 걸린 배의 시계를 보니 새벽 4시다. 자명종은 3시를 가리킨다. 아차! 한 시간 전진한 걸 깜빡하는 바람에 당직에 늦었다. 어제 내가 이렇게 방송했다.
“선내에 알립니다. 금일 본선은 한 시간 전진합니다.”
배는 동(東)이나 서(西)로 15도씩 항해할 때마다 1시간씩 시계를 돌리는데 이를 전진, 후진이라 부른다. 지구 한 바퀴 360도를 24(시간)로 나누면 15도다. 서울에서 동쪽으로 15도를 가면 해가 전보다 한 시간 일찍 뜬다. 서쪽은 반대다. 그래서 동쪽으로 가면 시간을 당기고 서쪽으로 가면 늦춘다. 나는 어제 배의 시계를 1시간 앞으로 돌려놓고, 내 자명종은 그대로 놔뒀다. 사고를 친 셈이다. 이미 4시 10분. 교대시간을 한참 넘겼다. 배에서는 근무시작 15분 전에 선교에 오는 게 원칙이다. 항해 상황을 익히고, 어두운 바다에 맞춰 동공이 열리는데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2항사는 잔뜩 화난 표정이다. 그는 내 고등학교 1년 후배다. 하급자로 늦깎이, 그것도 가까운 인연이 왔으니 족보가 꼬이기 시작했다. 이럴수록 내가 실수 없이 잘해야 하는데, 가끔 이렇게 깜빡할 때가 있다. 나는 ‘죄송합니다’를 연발했다. 종일 울적했다.
처음 배에 왔을 때 수직적인 조직 분위기에 적잖이 당황했다. 3등 항해사라면 일단 반말이다. 대부분 해양고교나 해양대학을 졸업하고 승선하기 때문에 3등 항해사와 기관사는 어리다. 상급자일수록 나이가 많다. 또 해양계 학교 출신들은 승선으로 군복무를 대신한다. 이런 사정이 얽혀 위계가 엄격하다. 하지만 나는 병역을 마쳤고, 이곳은 직장일 뿐이다. 그런데 다시 이등병이 된 느낌이다. 어쩌랴. 나는 모두 내려놓고 바짝 엎드렸다.
그 사이 배는 스칸디나비아 반도를 돌아 러시아의 북서쪽 끝 콜라반도에 들어섰다. 눈 덮인 동토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자 무색의 도시 무르만스크가 나왔다. 이파리 없는 나무로 뒤덮인 검은 산, 그 속에서 검은 연기를 뿜는 재래식 가옥. 수면은 무거운 구름을 머금어 하늘처럼 어둡다.
커피공화국, 산토스
우리는 러시아 석탄을 유럽 제 1항 네덜란드 로테르담에 내려줬다. 이제 브라질 산토스에서 설탕을 실어 아시아로 간다. 도버해협을 빠져나온 배는 남으로 남으로 나아갔다. 밤이면 별들이 포도알처럼 매달렸다. 은하수 앞에서는 영웅의 별자리도 보이지 않았다. 너른 바다에 별똥별이 쏟아졌다. 당직 서는 4시간 사이 눈으로 9개를 셌다.
이튿날 아침 우리를 반긴 건 검은 수염고래. 온천수가 보글보글 끓듯이 사방 수십 곳에서 물보라가 뿜어 올라왔다. 그런 곳에서는 어김없이 집채만한 고래가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난생처음 보는 고래다. 이 신비한 물고기가 잠시 모습을 보여줄 때마다 모두 탄성을 질렀다. 배를 타기 전에 꼭 고래를 보길 바랐다. 그토록 바라던 고래를 이렇게 쉽게 볼 줄은 생각도 못했다. 나는 매일 눈앞에 펼쳐지는 자연의 마법에 경탄했다. 우리 지구는 이 깊숙한 곳에 이런 광경을 숨겨놓았다.
열흘을 달려 브라질 중부 연안 산토스(Santos)항에 도착했다. 서울의 관문 인천처럼 이 나라 최대 도시 상파울루와 바다를 잇는 항구다. 짧은 사이 계절이 반대가 됐다. 우리는 개나리와 벚꽃, 철쭉도 구경하지 못하고 싱겁게 여름을 맞았다.
산토스 거리에서는 커피 향이 난다. 담장 너머 마을 어귀까지 풍기던 어머니의 된장찌개 냄새처럼, 가게마다 볶는 구수한 커피향이 도시 구석구석을 메운다. 허름한 식당의 단돈 몇 푼짜리 식사에도, 소독약 냄새 가득한 병원에도 향긋한 커피는 빠지지 않는다. 어둑한 밤 커피향 가득한 골목을 걷노라면 이곳 사람들은 산소가 아니라 커피 향으로 숨 쉬는 것만 같다.
커피는 산토스 경제의 원동력이다. 브라질은 19세기 말부터 커피 경작으로 부를 쌓았는데, 대부분 이 항구에서 수출했다. 커피 덕에 항구가 생겼고, 돈이 흘러들었으며, 일자리를 찾아 세계 각지에서 이민을 왔다. 도시가 커지면서 축구팀이 생겼는데, 축구 황제 펠레가 산토스 축구클럽에 평생 몸담았다.
도시를 활보하다 날이 저물어 브라질 대표음식 추라스코(churrasco)식당을 찾아갔다. 소와 양, 돼지와 닭 등 각종 고기를 꼬치에 꽂아 훈제한 것이 끝없이 나온다. 직원은 ‘네가 얼마나 먹을 수 있는지 보자’는 듯이 고기를 권했다. 겉은 바삭하고 안은 촉촉하다. 방금 덩어리에서 잘려 나온 살점은 숯의 온기를 그대로 담고 있다. 입에 넣자 고기 향이 퍼지며 입안에서 녹았다. 육즙이 스펀지에 담긴 것처럼 뿜어 나왔다.
만찬의 기쁨은 잠시뿐. 다들 약속한 듯 숟가락을 내려놨다. 기름진 음식을 김치 없이 먹는 건 생각만큼 쉽지 않다. 경험 많은 1등기관사가 배에서 김치와 된장을 싸왔지만 냄새 때문에 선뜻 꺼내지 못했다. 머릿속에는 그저 검은 비닐봉지 속 김치를 손가락으로 쭉 찢어 입에 넣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결국 우리는 쌀쌀한 밤바람에도 아랑곳 않고 바깥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지 않고서는 도저히 숟가락을 들지 못할 것 같았다. 진수성찬도 김치 없이 못 먹는 우리는 영락없는 한국 사람이다.
여행은 영화가 아니다. 현실이다. 눈을 마주치고 가볍게 인사하는 게 중요하다. 그러다보면 서로 말하게 되고, 이것저것 주고받게 된다. 주로 티 없는 아이들이 호기심을 감추지 않는다. 그런 낌새가 있을 때 얼른 웃어주거나 한마디 건네면 질문이 와르르 쏟아진다. 부루노가 그런 아이다. 이날 저녁 찾아간 산토스 해변에는 축구하는 인파가 가득했다. 파도소리와 환호성, 공 차는 소리가 섞여 들렸다. 200여 명이 각자 모둠 지어 맨발로 공을 찼다. 공이며 옷이며 갖춘 것은 초라하지만 선수들 눈빛은 총명했다. 해변에서 사진을 찍자, 부루노 이 녀석이 우리 쪽으로 공을 흘렸다. 공을 주우러 오면서 계속 시선을 보내는 게 아닌가. 내가 사진을 찍자며 손을 내밀자 기다렸다는 듯이 멀찍이 지켜보던 친구들까지 우르르 몰려왔다. 그렇게 어울리다 같이 공을 차기 시작했다. 밤이 깊도록 해변을 뛰었다. 선원들 체력은 형편없고 발재간은 어설프지만, 이 친구들이 배려해 즐겁게 어울렸다. 자정이 다 될 즈음, 아쉬움을 뒤로하고 배로 돌아왔다.
부루노와 친구들은 매일 모래 위에 축구장을 그린다. 책가방으로 세운 골대와 낡은 축구공 하나면 충분하다. 해가 지고 숨이 가쁠 때까지 공을 찬다. 그의 축구장은 길이 일흔 걸음, 폭 마흔 걸음이다. 사춘기를 훌쩍 넘은 그의 걸음 폭은 예전보다 길다. 경기장은 코흘리개 시절보다 세 배가 넘게 넓어졌다. 소년이 그리는 건 경기장이 아니라 펠레 같은 축구선수가 되겠다는 꿈이다.
이튿날 우리는 설탕 6만t, 20t 트럭 3000대 분량을 싣고 두바이로 출발했다. 떠나는 날에도 두터운 구름이 내려앉았다. 커피와 추라스코, 그리고 한밤의 뜨거운 축구. 짧은 여행 속에서도 산토스는 잊지 못할 추억을 남겼다.
이제는 중동에 간다. 처음 배에 오를 때 꼭 한 번 태양이 뜨거운 이곳에 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벌크선이 가끔 시멘트나 곡물을 싣고 간다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다. 그러나 유조선이 아니고서야 사우디아라비아나 쿠웨이트 같은 곳에 가는 건 드물다. 그럼에도 언제나 이곳을 바라왔다. 뜨거운 햇살, 40도가 넘는 더위, 물이 한결 소중해지는 곳. 사막의 나라에 가는 기대는 달에 가는 상상만큼이나 나를 설레게 했다.
목적지는 두바이다. 이곳 인공 섬은 중국 만리장성과 더불어 지구 밖에서도 볼 수 있는 인간의 창조물이다. 우리는 3개 인공 섬 중 하나인 팜 제벨 알리(Palm Jebel Ali) 바로 옆 제벨 알리 항에 간다. 기대가 크다.
꼬산의 신발

브라질 산토스 해변.
그날 저녁, 나는 한국에서 챙겨간 두툼한 등산 양말을 조용히 건넸다. 안전화 지급대장을 보니 얼마 전 새 신발을 받아갔다. 안전을 위해 새 신발도 신으라고 권했다. 그러나 꼬산은 이튿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낡은 것만 신었다. 두꺼운 양말과 안전화는 고국에 가져가려고 가방에 넣어뒀단다. 산에서 일하는 동생을 위해, 사춘기인 아들을 위해서 말이다. 저러다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나 걱정이다. 미얀마 선원들은 파스와 두통약, 작은 손전등처럼 제 나라에서 귀한 물건들을 몰래 챙긴다. 꾀병으로 약을 타가는 걸 알면서도 박대하지 못한다. 가족을 생각하는 속내를 알기 때문이다.
하루를 마치며 일기에 이 이야기를 쓰는데, 기억 저편 아버지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어린 시절 부친은 종종 공사장에서 새참으로 받은 단팥빵을 먹지 않고 주머니에 넣어뒀다가 집에 와서 내게 주셨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가 무심코 빵만 받아 왔다.
나는 여태껏 아버지의 고마움을 모르고 살아왔다. 내가 잘나서 스스로 컸다고 생각했다. 등록금 부담을 덜기 위해 지방 국립대에 다녔다. 공사장 잡부, 행사안내원, 배달원 같은 아르바이트는 물론 대학방송국에서 일하면서 받은 봉사 장학금까지 용돈에 보탰다. 대학교 영어대회에서 수석을 해 해외어학연수 장학생이 됐고, 배낭여행도 제출한 계획서가 공모전에 당선된 덕분에 지원금을 받아 다녀왔다. 집에 손 한번 안 벌리고 살았다 믿었으니 부모님의 고마움은 생각도 안 했다.
해적의 바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게 전부인 아버지는 조세희의 소설 속 난쟁이처럼 온갖 고생을 마다않으며 가정을 꾸려오셨다. 나는 그런 부친께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 그러니 내가 잘난 줄만 알았다. 이제 보니 나는 아버지의 꼬깃꼬깃한 단팥빵을 먹으며 자랐다. 이렇게 속 안 썩이고 커나가는 게 효도인 줄 알았는데, 다른 게 아니라 이게 불효다. 오늘 꼬산을 보고 알게 된, 이제껏 내가 모르던 따뜻한 아버지의 사랑에 눈물이 멈출 줄 모르고 터져 나왔다. 맛있게 먹은 것은 빵인데, 그리운 건 아버지 목소리다.
적도를 지나자 걱정이 몰려왔다. 요 몇 년 사이 인도양은 온통 해적이다. 소말리아 연안은 물론 아덴만과 홍해, 멀리 아라비아해 일대에서도 판친다. 남아프리카에서 곧장 중동으로 가는 바닷길은 모두 막혔다. 우리는 7일을 더 항해해서 인도 남부, 몰디브제도 동쪽 해안까지 돌아가기로 했다.
요즘엔 여러 가지 해적 대응책이 나왔다. 우리 정부는 배의 비밀스러운 곳에 선원 피난처를 만들도록 한다. 해적이 나타나면 조난신호를 보내고 숨으면 된다. 그러면 곧 구조대가 도착한다. 인질이 없는 해적은 도망갈 수밖에 없다. 우리는 여기에 더해 무장 안전요원을 태우기로 했다. 28일을 항해한 끝에 스리랑카 서남단 갈레(Galle) 항에 닿았다. 이곳은 인도양 해적위험지역의 입구, 보안요원이 승선하는 정류장이다. 우리는 요원 셋을 태우고 엔진을 전속력으로 돌렸다. 곧장 갑판을 철조망으로 둘렀다. 경험 많은 요원들은 철조망을 더 촘촘히 치라고 닦달했다. 그들은 진지했다. 선원들을 교육하고 배의 모든 것을 통제했다. 갑판으로 나가려면 허락을 받아야 했다. 보안요원이 요구하는 대로 항로를 바꿨으며, 밤에는 창으로 새는 빛을 가렸다. 긴장 속에 7일을 항해한 끝에 페르시아만 입구에 다다랐다. 그전에 오만 무스카트에 들러 보안요원을 떠나보냈다. 장화 같은 아라비아반도의 엄지발가락 부분이다. 해적의 바다를 무사히 건넜다는 안도감 사이로 같이 밤을 새운 요원과 헤어지는 아쉬움이 덮쳤다. 사람을 만나고 떠나보내는데 이골이 났고, 지난 1주일은 스쳐 지난다 할 만큼 짧은 시간이다. 그러나 해적이라는 공동의 적을 막아야 한다는 동질감 때문에 쉽게 마음을 열었다. 사람은 오래 지내는 것보다 같은 감정을 공유하는 것이 중요하다.
두바이 제벨 알리 항은 어마어마했다. 외항에 컨테이너가 목동 아파트단지처럼 높고 빼곡하게 쌓여 있다. 안벽에는 크레인과 배들이 줄줄이 붙어 있다. 배들의 행렬은 안개 너머까지 이어졌다. 조금 들어가자 석유저장고가 다닥다닥 붙어 있다. 온갖 부두가 다 있다. 우리가 가져간 설탕은 물론 알루미늄, 곡물부두도 있다.
부두에 닿자 알싸한 매연과 낯선 이국의 향기가 덮쳤다. 여기는 지구의 신도시. 맨땅에 도시를 만들고 항구를 지어 사람을 모았다. 벽돌 한 장까지 밖에서 들여왔다. 일하는 사람도 외국에서 왔다. 갑판에서 몸으로 일하는 사람은 대부분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 출신이다. 하역은 선장 출신 프랑스인이 총괄한다. 크레인 담당은 영국인. 멀리 인공 섬 위 다리는 우리나라 삼성물산이 짓는다. 나는 그동안 거대한 땅덩이에 맹장같이 붙어 있는 좁은 나라에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힘들어했다. 시야를 지구 전체로 넓히면 여기는 일자리가 넘치는 대도시다. 나중에라도 경력을 쌓고 기회가 생기면 이런 곳에서 일해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부정기선의 항해는 언제나 예측불허다. 다음에 어느 항구에 갈지 마지막까지 모른다. 복권 당첨번호만큼 선원들의 기대를 모은다. 이번에도 소식은 그렇게 왔다. 인도다. 서쪽 중남부 해안 고아(Goa)에 간다. 정식 명칭은 몰무가오(Mulmogao). 우리는 여기서 철광석을 실어 중국 산둥반도 룽커우(龍口)에 내려준다.
인도. 이곳을 다녀온 사람들은 하나같이 뜬구름 같은 이야기를 풀었다. 정신의 고향이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한다. 질서와 무질서가 평행선을 그린다. 신비로운 말뿐이다. 대체 어떤 곳이기에 이렇게 어려운 설명이 붙는 것일까? 호기심과 기대가 차올랐다.
10월 아라비아 해는 고요했다. 바다가 이렇게 온순하면 해적들이 배에 오르기 수월하다. 날이 맑을수록 불안감은 커졌다. 오가는 어선도 많아졌다. 배들은 유유히 우리를 스쳐 지났다. 그때마다 경계하는 눈초리를 켰다. 차라리 폭풍 속을 항해하는 게 낫겠다 싶었다. 인도와 영국해군이 연안에서 사격 훈련을 하는 덕분에 걱정을 덜었다. 멀리 고아 등대가 보이자 선장님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못된 세관원
부두 위에는 현지인 50여 명이 바글거리며 우리를 기다렸다. 현문사다리를 내리기 무섭게 배에 올라왔다. 태반이 장사꾼. 파는 것도 많고 가격도 제멋대로다. 크게 보면 보석, 기념품, 해산물 그리고 전화카드 등이다. 배는 순식간에 북새통을 이뤘다. 우리 돈 1만 원으로 한국에 있는 휴대전화에 한 시간가량 연결할 수 있다. 구석진 항구에서도 무선 인터넷이 제법 빨랐다. 최신 유행곡을 내려받았다. 인도가 정보통신 강국이라는 말을 실감했다.
선박 업무를 돕는 대리점 직원과 세관, 검역, 출입국관리소, 항구 직원도 왔다. 다른 나라에서는 혼자 하는 일인데 각 관청에서 둘, 셋씩 왔다. 배에서 챙겨갈 것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대리점 직원이 중재해 담배 30뭉치를 풀자 모든 게 일사천리다. 이내 전기가 들어오고 항구는 다시 숨을 쉬었다.
날이 어두워지자 낮에 온 세관원이 다시 찾아왔다. 처음 보는 추레한 사내 셋과 함께였다. 능글맞은 얼굴로 ‘낮에 못한 검사를 마저 하자’고 했다. 먼저 공구창고와 페인트창고를 열었다. 공구창고는 들어가지도 않고 밖에서 흘끗 둘러보고 말았다. 페인트창고에서는 검은색 페인트가 있느냐고 물었다. 없다고 하니 작정한 듯 여기저기를 뒤졌다. 집에 검은색이 필요한 모양이다. 그러다 단념한 듯 부식창고로 향했다. 언제나 마지막은 이곳이다. 사실, 앞 두 곳은 모양새 갖추기다. 사내들은 문밖에 둔 가방을 들고 왔다. 셋의 가방을 합치면 공항에서 볼 수 있는 이민 가는 사람의 짐 정도다. 남자는 부식창고에 들어서자마자 주인 없는 가게를 터는 것처럼 무섭게 담았다. 잼과 통조림, 케첩은 물론이고 부피가 큰 라면에도 손을 뻗었다. 큼지막한 손으로 한 번에 대여섯 개를 집었다. 몇 번 손길에 빈 상자만 남았다.
그들은 요란한 세관 검사 끝에 선장님께 인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선장님은 태연하게 응대했지만 속은 까맣게 타는 모양이다. 얄밉지만 어쩔 수 없다. 수백 가지 규정을 들이대고 하나하나 따지고 늘어지면 하역작업이 지체된다. 이 배 하루 용선료가 수천만 원이다. 불합리하지만 그냥 쥐여 보내는 게 상책이다. 나는 배웅하는 길에 웃으며 한국말로 쓴 소리를 뱉었다.
“빨리 가고 다시는 오지 마라. 이 추접스러운 것들아.”
이튿날 아침 식사 시간에 선장님이 꾸지람했다.
“이 사람들도 눈치가 있다. 우리말이지만 네가 추접하다고 말하면 다 짐작한다. 이 사람들이 이러는 건 못사는 나라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우리 어른들도 전에는 다 그랬다. 네가 지금 사관을 하는 건 잘사는 나라에 태어났다는 아주 사소한 이유 때문이다. 네가 아무리 잘나고 성실해도 이곳에서 태어났으면 그들과 같았을 것이다. 다시는 그런 말 말아라.”
짧은 꾸중이지만 깊은 여운이 남았다. 생계의 벼랑 앞에 선 사람을 무조건 나쁘다고 할 수 없다. ‘장발장’을 옹호하던 내가 아니던가. 처지가 같다면 나는 더 심할 수도 있다. 진지하게 마음을 추슬렀다.
미얀마인 뾰 웨이
인도에서 괴짜가 한 명 승선했다. 미얀마 출신 2등 타수 뾰 웨이다. 첫인상부터 보통이 아니다. 두목 원숭이가 생각났다. 웃을 때마다 마른 얼굴 전체에 주름이 진다. 검은 콧수염도 웃는다. 이 친구가 뾰족구두를 신고 승선한 날, 다들 수군댔다. 날라리다, 건들댄다, 또는 건방지다. 좋지 않은 방향으로 의견이 모였다.
이마에 주름이 많은 선원들이기에 틀리지 않았다. 이 친구, 꽤나 뺀질댔다. 그동안 사람들이 나를 보고 뺀질댄다고 할 때는 도통 그 뜻을 몰랐다. 이 친구를 보니 알겠다. 아마 경계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는 것을 말하는 것 같다. 규칙을 어기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 삐딱한 것. 해야 하는 일은 최소한만 하고 자기 시간을 보내는 걸 말하나보다. 영민하지 않고서는 못하는 행동이다.
출항 다음 날 소방훈련을 했다. 선원들 사이에서 깔깔대는 녀석이 눈에 거슬렸다. 어디 보자는 식으로 소화복을 입어보라고 시켰다. 뾰 웨이는 자신감 있게 기지개를 한 번 쭉 켜더니 혼자서 차례차례 입어나갔다. 중요한 것들은 재차 보여주면서 말이다. 어쩌면 내 머리 꼭대기에서 내 심중을 훤히 내려보는 것 같았다. 두목 원숭이 같은 그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내 의도를 들킨 것 같아 뜨끔했다. 어찌됐건 그는 다른 일에도 꽤나 적극적이고, 마음에 들게 해결했다. 건들거리는 것만은 여전하지만.
어쩌면 그는 내가 동경하던 그리스인 조르바를 닮은 것 같다. 호탕하고, 자유분방하며, 유쾌하고, 자신감 있고, 때론 진지하고, 할 것은 똑 부러지게 하는 모습. 담배는 얼마나 맛있게 피우는지, 그걸 보면 담배를 모르는 나도 같이 피우고 싶어진다. 그는 남이 뭐라 하면 받아들이면서도 주눅 들지 않는다. 묘하게 사람 마음을 잡아끈다. 그를 보면서 나는 왜 그동안 상관에게 꾸중 들을 때마다 죽는 시늉을 했을까 억울하기까지 했다. 딱 뾰 웨이만큼만 할 것을…. 아무도 모르게 질투하는 나를 발견했다.
이 녀석이 오늘 사고를 쳤다. 입항 전날 술을 마시고 선교 당직을 안 왔다. 배에서 근무에 늦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더 큰 문제는 운전대를 잡는 타수가 술을 마신 것이다. 배가 좌초할 수도 있다. 종일 배의 이야깃거리는 뾰 웨이였다. 승선한 지 일주일 만에 이런 모습을 보이다니, 그냥 넘길 수 없다. 이런저런 사정 때문에 그를 나무랄 사람은 나밖에 없어 보인다. 녀석을 사무실로 불렀다. 속을 또 게워냈는지 얼굴이 퉁퉁 부었다. 본인도 제 잘못을 아는지 멋쩍게 들어왔다. 진지하고 강력한 경고, 낱낱이 말하기보다 엄중한 눈빛과 말투가 중요하다. 간단하다.
“오늘 네가 우리의 안전을 위협했어. 너는 오늘 옐로카드야. 난 옐로카드가 더 없어. 무슨 말인지 알지?”
그는 ‘나름 반성하고 있어요’하는 표정으로 섰다. 무거움을 털기 위해 옆구리를 쿡 찌르자 스위치를 누른 것처럼 씩 웃는다. 나는 왜 이 날라리가 밉지 않은 걸까. 오히려 그렇게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오가는 그가 부럽다. 얽매여 있지 않은 자유로운 망아지가 떠오른다(사실 좋은 의미로 ‘개’라는 표현을 쓰고 싶다), 그는 정말 자유로운 영혼, 조르바다.
중국의 재발견
배를 타면서 다양한 사람을 만나 가까이 지낸다. 호탕한 사람, 소심한 사람, 거친 사람, 부드러운 사람 등 배를 타지 않았으면 못 만났을 세상 온갖 부류를 접한다. 자연스레 사람을 보는 눈도 넓어진다. 세상에는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만 있는 게 아니다. 뾰 웨이처럼 지저분한 인상에 건들대는 날라리가 일은 잘하고, 술은 잘 먹고, 사고를 치는데도 밉지 않을 수 있다. 그건 사람이 따라 할 수 없는, 신이 내린 묘한 재능이다. 오늘도 뾰 웨이는 갑판을 휘젓는다.
“3항사, 지금 배가 어디 있는 거야? 부두에 접안했는데 아직 바다 위라니 무슨 말이야?”
“그게…. 자이로컴퍼스와 GPS는 이상 없습니다. 그런데 해도상 육지에서 1km 떨어진 바다입니다.”
2011년 6월 15일 중국 룽커우항에 접안한 우리는 혼란에 빠졌다. 해도를 보면 부두가 6개인데, 실제로는 26개나 된다. 심지어 수심이 깊어야 들어올 수 있는 초대형 선박까지 접안했다. 현재 위치는 북위 37도18분, 동경 120도39분. 분명히 바다 한가운데서 항구를 바라보는 곳인데 배는 이미 접안했다. 도선사에게 물은 뒤에야 까닭을 알 수 있었다. 그새 부두를 새로 지은 것이다. 이 항구는 지난 2008년에 길이가 2.2km인 초대형 부두를 완공했다. 지금도 새 부두를 짓는다. 보통 항만시설을 갖춘 선진국은 해도가 변하지 않는다. 반면 개발도상국은 해마다 모습이 바뀐다. 중국 해도를 사는 건 낭비다. 얼마 후면 전혀 다른 모습이 된다.
새 부두는 숨 가쁘게 돌아갔다. 이곳에는 밤이 없다. 오전, 오후, 저녁, 새벽마다 인부들 얼굴이 바뀐다. 우리는 인도에서 나흘간 실은 화물을 크레인 7대로 이틀 만에 내렸다. 항구 밖에는 배 수십 척이 닻을 놓고 제 차례를 기다렸다. 부두 뒤편에는 철광석과 석탄, 보크사이트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이뿐 아니다. 반대편 부두에서는 대형 컨테이너선이 짐을 내렸다. 그 옆으로 원유저장시설도 눈에 들어왔다. 우리는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봤다. ‘상전벽해.’ 나는 산둥반도 이름 모를 항구에서 중국의 성장을 목격했다. 뉴스에서만 보고 듣던 이야기, 중국이 원유와 원자재를 마구 들이는 바람에 국제시장 가격이 출렁인다는 현장이 바로 이곳이다.
아침에 접안하고 점심에 동료 기관사와 시내로 나갔다. 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외지사람이 자주 드나드는 특유의 분위기가 없다. 선원을 꾀는 운전사가 없고, 외국인을 위한 음식점도 없다. 중국대륙 깊숙한 소도시에 온 느낌이다. 별일 없는 우리는 이곳의 유일한 관광지 ‘남산대불’로 향했다. 택시를 타고 왕복 10차선 도로에 올랐다. 길은 곧게 뻗어 지평선에 닿았다.
지금도 항해 중
광활한 중국대륙을 1시간 동안 가른 끝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이곳은 일주문을 지나면 법당이 나오는 우리나라 산사가 아니다. 정문을 들어서자 서울대공원처럼 관광열차가 기다렸다. 산꼭대기 대불 좌상은 멀리 주변 산과 섞여 희미하게 보였다. 우리는 기차로 가는 길을 한 시간 동안 걸었다.
아무 소리도 없다. 간간이 나뭇잎 떨리는 소리가 요란스럽다. 파도와 엔진 소리에 시달려온 내게 이곳은 무릉도원. 우리는 침묵에 젖어 걷고 또 걸었다.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 기나긴 항해에 지쳤다. 흔들리는 배, 밤새 달달거리는 기계들, 쉬지 않고 돌아가는 환풍기, 무엇보다 나를 괴롭히는 긴장감. 넓은 바다를 항해한다지만 내 시선은 좁은 침실에 갇혔다.
바람마저 숨죽이는 호젓한 호숫가. 새들도 침묵하는 경내 앞마당. 이곳에 내리는 햇살은 어느 때보다 온화하다. 남산대불은 360개 계단 위에서 나를 지그시 내려다봤다. 좌상 높이만 38.66m, 무게는 380t에 달한다. 점보다 작은 나는 깊은 평화에 갇힌 듯, 부처의 넓은 가슴에 푹 묻혔다. 그날 나는 남산대불의 고요한 속삭임에 항해를 잠시 쉬기로 마음먹었다.
그길로 귀국해 오랜만에 휴가를 보냈다. 그건 아주 짧은 낮잠. 나는 다시 일어나 이름 모를 바다를 가르고 있다.
바다는 놀라운 풍경으로 넘친다. 항구는 재미난 이야기로 북적인다. 선원들은 바다에서 놀라운 자연을 만난다. 파도를 넘나드는 돌고래 무리의 재롱, 베토벤도 못 본 환한 월광, 발틱의 신기루, 거울처럼 잔잔한 적도 무풍대, 무섭게 쏟아지는 스콜 앞에 정신을 빼앗긴다. 항구에서는 재미난 세상을 만난다.
멋모르고 꿈만 찾아 떠나는 나를 주변에서 많이 걱정했다. 좋은 회사에서 좋은 사람을 만난 덕분에 꿈은 현실이 됐다. 지구본을 보면 점점이 흩어진 추억이 살아난다. 지난 22개월 사이 24개국 36개 항구에 기항했다.
이 중 24곳을 여행(상륙)했다. 여행하면 남는 건 사진뿐이란다. 하루짜리 짧은 여행이 쌓이고 쌓여 사진을 1만 장이나 남겼다. 그러나 내 마음속에 남은 건 하루하루, 장면 장면보다 가볍게, 때로는 깊게 스친 이름 모를 인연들이다. 암스테르담 반 고흐 박물관이나 안네 프랑크의 집보다 브라질 해변에서 같이 공을 찬 부루노와 순둥이 아하마드가 그립다.
항해는 만만치 않다. 어느덧 내 얼굴은 태양에 그을리고 해풍에 갈라졌다. 그러나 바다는 나를 더 크게 만들고, 파도는 나를 강하게 했다. 복잡하게 꼬인 세상에서 정신없이 살면서 놓친 것들을 다시 찾았다. 한동안 놓은 트럼펫을 다시 잡는다. 매일 육체의 탄력을 유지할 만큼 운동한다. 돈과 시간에 초연해진다. 저녁에 손 편지를 쓴다.
기억을 더듬는다. 겁 많고 콧대만 높은 대학 졸업생, 또는 청년 백수. 그때는 모든 게 깜깜했다. 아직도 선원이라면 무시하는 사람을 종종 만나지만, 나는 바라던 대로 이 지구를 신나게 돌아다니는 지금의 내가 좋다. 그 사이 내 통장에 적지 않은 봉급이 쌓였다. 갓 승선한 3항사는 1년에 5000여만 원을 받는다. 은행에 가니 직원이 무척 반긴다. 등밖에 보이지 않던 세상이 나를 향해 두 팔을 벌린다. 이 모든 건 허영심에 가득 찬 손길로 인터넷만 뒤지는 버릇을 끊고, 오직 내 꿈을 향해 용기 있게 나선 결과라고 생각한다.
이제 시작이다. 앞으로도 나는 신이 허락한 이 지구별을 더 세밀하게 더듬을 테다. 내게 세상은 끝없는 보물 상자다. 못난 젊음이 어디까지 가는지 두고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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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소리”
그 겨울, 잘나가는 직장인 여자친구와 배고픈 선비가 전라남도 해남으로 여행을 떠났다. 속 깊은 여자 친구는 내게 제 자동차 운전대를 맡겼다. 백수 남자친구가 조수석에 앉으면 작아질 것을 배려한 것이다. 그 즈음 나는 알 수 없는 두려움에 시달렸다. 여자 친구마저 떠나면 나는 세상 모두에게 버림받는 셈이다. 서른을 목전에 둔 동갑내기 남녀, 아니, 혼기 찬 여자와 무능력한 남자의 여행이다. 우리의 믿음은 충분히 견고하고, 사랑은 뜨거웠다. 그렇지만 나는 갈수록 움츠러들었다. 이 여행이 우리의 미래를 판가름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웃고 떠드는 사이 날이 저물었다. 우리는 남도의 지붕 낮은 술집에서 조용히 잔을 기울였다. 거센 물살에 휩쓸리듯 화제는 우리의 앞날 이야기로 흘렀다. 내가 미래 계획을 밝혀야 했다. 탁자 건너 여자친구의 눈동자는 홍명보의 마지막 페널티킥을 바라보는 관중처럼 반짝였다. 나는 삼포세대(연애, 결혼, 출산 포기)인데 곧 삼일절(31세까지 못하면 취업 길 막힘)이니 영원히 캥거루족(대학 졸업하고도 부모님에게 얹혀사는 청년)이 될 처지다. 조심스럽게 여자 친구에게 계획을 설명했다. 마지막에 물었다.
“부산에 있는 한국해양수산연수원에서 해기사 교육을 받을 수 있는데 모레 면접이 있어. 갈까? 말까?”
나는 답을 세 가지로 예상했다. 첫째, 가지마. 둘째, 너 혼자 가. 셋째, 같이 가자. 면접을 이틀 앞두고 밝히는 건 세 번째 답을 바랐기 때문이다. 나는 두 번째 ‘갈 테면 혼자 가’라는 답만은 않기를 바랐다. 그건 헤어지자는 말이다.
“그럼 내일 가야겠네? 당일에 가면 시간에 쫓기잖아.”
그녀는 아무렇지도,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세 번째 답을 했다. 자장면과 짬뽕을 두고 내린 결정만큼 무덤덤했다. 속으로 안절부절못한 게 억울했다. 버림받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었던 것을 알기나 할까? 혼자 끙끙댄 것이 창피하고 미안했다. 그날 밤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여자 친구의 동의를 받은 것에 불과한데, 나는 벌써 이국 항구에 있었다. 그 거리와 불빛이 아른거렸다.
TV 속 고래를 직접 본다. 아침저녁으로 타는 태양을 맞는다. 밤이면 달을 본다. 별을 센다. 갖가지 구름과 벗하고 소나기와 무지개를 맞는다. 약품 냄새 나는 수돗물은 안녕. 이제 하늘에서 떨어지는 물에 얼굴을 댄다. 매연으로 찌든 공기 대신 시리게 푸른 하늘 아래 크게 숨 쉰다. 아프리카며 지중해며 온 나라를 다닌다. 어릴 적 본 만화 영화 ‘80일간의 세계 일주’와 텔레비전 세계기행 프로그램이 떠올랐다.
물론 염려도 많았다. 부모님이 제일 걱정이었다. 수개월간 파도에 흔들리는 배라니. 분명 어마어마한 태풍과 세상에서 가장 지독한 해적을 만날 것처럼 말씀하실 게다. 동화 같은 연애와 달콤한 신혼을 꿈꾸는 여자친구도 마음에 걸렸다. 주말 조기축구도 못하게 될 터. 집 앞 삼겹살집과 우리 동네 명물 떡볶이도 떠올랐다.
그러나 이 셈에는 계산기가 필요 없다. 세계를 항해하는 꿈 앞에 모든 게 값어치를 잃었다. 항해사는 사양 직종이다. 반 년 넘게 가족과 떨어져 있어야 하니 해양대학을 졸업한 친구들도 다른 일을 찾는다. 지금 내 결심은 평범한 사람들의 기준과 어긋난다. 하지만 인생은 짧다. 이제 남의 꿈이 아니라 내 꿈을 꿀 생각이다. 내가 바라던 것을 직접 할 것이다. 모두 경험하고 싶다. 하늘을 올려보고, 공기의 냄새를 맡고, 음식을 맛보고, 사람을 만날 것이다. 밤이 길었다.
유엔 깃발
이틀 후 한국해양수산연수원에서 면접을 치렀다. 해기사 단기 양성과정에 선발되면 6개월간 부산 연수원 기숙사에서 지내며 국비로 교육받는다. 경쟁률이 4대 1을 넘었다. 해양계 대학과 명문대 졸업생, 해군이나 해양경찰에서 바다 경력을 쌓은 사람 등 쟁쟁한 지원자가 수두룩했는데, 나는 운 좋게 단박에 합격했다.
같이 공부하는 100명을 살펴보면 공통분모를 찾기 힘들었다. 갓 전역한 23세 청년부터 딸아이 대학입시를 걱정하는 46세 가장까지 있었다. 고등학교만 마친 사람에서 석·박사까지 학력도 다양했다. 이전 직업 역시 교사, 연예인 매니저, 운동선수, 요리사, 고시생, 장교, 조선 엔지니어, 공무원, 항공사 직원 등 제각각이다. 서로 다른 우리를 엮는 건 ‘바다’ 외에 아무것도 없었다.
한국해양수산연수원 본관 앞에는 유엔 깃발이 펄럭였다. 파란 바탕에 새하얀 지구를 담은 깃발이 힘차게 나부꼈다. 입교하는 날 깃발을 멍하니 치켜봤다. 지구본을 볼 때보다 가깝고 뚜렷한 무언가를 느꼈다. 6개월 동안 이 깃발 아래서 체조하며 아침을 맞았다. 하루하루가 새로웠다. 해기사 양성 과정은 만만치 않았다. 실전 영어 실력이 필요했다. 선박의 기울기를 제어하기 위해 기억 너머 삼각함수를 끄집어냈다.
수료를 앞두고 연수원에서 취업박람회를 열었다. 선사를 꼼꼼히 알아봤다. 선박의 종류는 무척 다양하다. 흔히 아는 유조선과 컨테이너선을 비롯해 석탄이나 철광석을 싣는 산적화물선, 시너와 벤젠 같은 화학물질 운반선, 여객선, 차량운반선 등이 있다. 일반적으로 정해진 항구만 왕래하는 ‘정기선’과 번번이 다른 곳을 항해하는 ‘부정기선’으로 구분한다. 정기선은 유조선과 컨테이너선이 대표 격이다. 시일에 맞춰 바삐 운항하는데다 항구에서 화물을 신속하게 내리고 올리기 때문에 접안해도 외출하기 힘들다. 수심이 깊은 선진국의 일부 항구에만 기항한다. 그런 면에서 나는 정기선과 큰 배는 피하고 싶었다.
고민 끝에 입사한 중앙상선은 배 5척을 보유한 작은 회사다. 호황일 때 욕심내지 않아 불황일 때 흔들리지 않았다. 덕분에 수많은 회사가 생겼다 사라지는 해운 업계에서 30년 이상 성장했다. 내게 이 회사가 매력적인 건 5척 모두 중형 부정기 벌크화물선이라는 점이다. 배가 여러 대인 회사에서 일하면 자칫 정기선에 배정받을 수 있다. 나는 세계 곳곳을 다니기 위해 배를 탄다. 그러니 내가 일할 곳은 중앙상선뿐이다. 이 회사 배는 주로 콩, 옥수수, 설탕, 석탄, 철광석, 보크사이트를 옮긴다. 다양한 항구에 입항해 오랫동안 짐을 싣고 내린다. 주변 도시를 자주 여행할 수 있다.
이제 출국이다. 세계를 향한 내 소중한 꿈이 이제 막을 올린다. 쉽지만은 않을 거란 걸 안다. 하지만 마냥 설렌다. ‘써니영’은 어떤 배일까? 누구를 만날까? 어디를 갈까? 어떤 음식을 먹을까? 소풍 전날처럼 눈을 감아도 생각이 쏟아진다.
10년 전에 품은 꿈
아쉬운 마음에 놓지 못한 술잔이 늦잠으로 이어졌다. 헐레벌떡 일어났는데 방에 발 디딜 곳이 없다. 아차! 짐을 펼쳐놓고 담지 않았다. 놓친 게 있는 것 같아서 더 챙기려고 내버려뒀다. 부랴부랴 가방에 짐을 쏟아 넣고 인천공항으로 질주했다. 아직 9월인데 싸늘한 바람이 귓불을 때렸다. 멀리 공항 전망대가 보였다. 그래! 올해가 꼭 10년째구나. 옛 생각이 났다.
1999년 어느 겨울날이었다. 40대 젊은 목사가 중·고생 50여 명을 데리고 김포공항 국제선 청사를 찾았다. 변두리에서 온 장난꾸러기들은 공항을 순식간에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피부색이 다른 외국인과 키 큰 승무원에게 시선을 빼앗겼다. 아이들이 찾은 곳은 공항 전망대. 커다란 비행기가 코앞에서 활주로를 박찼다. 손에 잡힐 것 같던 비행기는 금세 창공으로 사라졌다. 그때 그 뜨거운 기분을 어떻게 말로 옮길까. 왁자지껄하던 학생들은 말을 잃고 멍하니 비행기를 바라봤다. 목사는 말했다.
“우리 오늘부터 세계를 향한 꿈을 꿉시다. 10년 뒤에는 우리가 저 비행기를 타고 넓은 세상으로 나갑시다.”
모두 진지했다. 무리 구석에 있던 나 역시 막연하지만 그날 마음속 꿈이 한 치는 자란 느낌이었다. 우리를 이끈 건 서울 신일고등학교 임일국 교육목사님이고, 나는 정확히 10년 뒤인 오늘 비행기를 탄다.
나는 서울 구로구와 경기도 부천시의 경계인 항동에서 자랐다. 여름이면 저수지에서 수영하고 가을에는 마른 논에서 쥐불놀이를 했으니 나와 친구들은 소위 ‘스타 강사’ 아래서 자란 아이들에게 열등의식이 있었다. 지금 보니 사람의 앞날을 좌우하는 건 비싼 과외가 아니라 진심 어린 가르침이다. 학창 시절 임 목사님처럼 좋은 분을 만나 쌓은 작은 체험이 내 삶에 굵은 씨앗이 되었다.

써니 영號.
내가 늦는 바람에 촉박해졌다. 풋내기가 멋모르고 여유를 부렸다. 부랴부랴 출국장으로 향했다. 선원들은 짐을 일반인의 두 배까지 실을 수 있다. 그렇지만 반 년치 세간에 선박 부속까지 얹어야 하니 한참 부족했다.
우리는 면세점 구석에 있는 점포에 찾아가 관광진흥개발기금 1만 원을 돌려받았다. 여행이 아닌 목적으로 출국하는 승객에게는 항공권 가격에 포함된 기금을 환급해준다.
“당신은 관광객이 아니군요!”
손에 든 지폐가 내게 말하는 것 같았다. 놀러가는 게 아니라는 것을 실감했다. 그렇다. 이제 나는 배에서 일한다. 동시에 텔레비전과 책으로 본 세상을 두 눈으로 보러 간다. 그림자가 아닌 실체를 보고, 만지고, 느끼러 간다.
7시간 동안 승무원에게 ‘사육’당한 끝에 활주로에 내려앉았다. 인도네시아다. 적도 위 도시는 몹시 뜨겁다. 널찍한 나뭇잎, 소란스러운 이방 언어, 차도르를 둘러쓴 무슬림 여성들, 코를 자극하는 이국의 향기. 익숙한 게 없다.
수속을 대행하는 직원의 차를 타고 수라바야(Surabaya) 항을 향해 달리기를 3시간, 어느새 땅거미가 내려앉았다. 우리는 칠흑 같은 어둠을 비집고 들어갔다. 얼마 지 않아 환한 불빛으로 뒤덮인 도시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곳은 우리나라 부산처럼 인도네시아 제2의 도시다. 항구에는 굴뚝과 크레인이 잔뜩 솟아 있다. 멀리 부두 가장자리에서 ‘써니영’ 호가 의젓하게 우리를 기다렸다. 우리말로 하면 ‘찬란한 젊음’쯤 되겠다. 나를 만나기 위해 이 외딴곳에서 기다려준 것만 같았다.
배가 무척 크다. 길이 229m, 높이 51m, 너비 32m다. 길이는 축구장의 1.5배, 높이는 15층 빌딩과 맞먹는다. 주 기관은 말 1만3000마리가 끄는 힘을 낸다. 우리나라 대우조선해양에서 건조했다. 곡물이나 철광석 같은 화물을 8만여 t, 즉 20t 트럭 4000대 분량을 싣고 세계를 돌아다닌다. 폭이 좁은 파나마운하 갑문을 통과할 수 있는 최대 크기라 해서 ‘파나막스(Panamax)’라고 부른다. ‘써니영’은 미국 시애틀에서 콩 8만여 t을 싣고 여기까지 왔다. 남·북한 모든 국민에게 1kg씩 나눠줄 수 있는 양이다.
배에 오르려는데 미얀마 선원이 사다리 아래로 후다닥 내려왔다. 3등 갑판수 꼬산이다. 그의 작업복은 페인트와 기름때가 잔뜩 묻어 다 해졌다. 깊게 팬 주름이 고된 항해를 말해주는 것 같다. 이 배에는 한국인 선원 11명과 미얀마 선원 9명 등 모두 20명이 승선한다.
찬란한 젊음
미얀마 사람은 인도계, 중국계, 동남아계 등에 따라 피부색과 생김새가 다르다. 중국계인 그는 우리와 똑같이 생겼다. 나이 마흔인 꼬산은 우리나라 배에서 오래 일한 까닭에 우리말과 대중문화를 잘 안다. 무엇보다 우리 정서를 잘 이해했는데, 그가 제일 조심하는 건 직급에 따른 위계질서다. 출국하기 전 아버지가 가장 강조하신 게 예의다. 아무리 사관이라도 나이 많은 선원들 앞에서 조심하라고 누누이 말씀하셨다. 환갑이 넘은 지금도 막노동판에서 새파란 녀석들에게 ‘김 씨’로 불리는 아버지다. 나만은 그러지 않겠노라 다짐했지만, 꼬산을 보니 헛기침만 나왔다.
배에 오르니 당직 근무자뿐, 아무도 없다. 선원들은 상륙을 나가거나 방에서 잔단다. 이미 자정이 넘었다. 방에 짐을 풀고 침대에 누우니 배가 정박했는데도 좌우로 흔들리는 것 같다. 복잡 미묘하다. 바삐 달려와 짐을 푼 이곳은 너무나 다른 세상이다. 기대와 달리 배는 먼지와 기름투성이. 계단과 통로는 비좁고 천장은 너무 낮아서 머리를 누른다. 밖에 넓은 바다가 있지만 당장 나를 누르는 건 좁은 선실. 전날 잠도 못 자고 설레며 소풍 왔는데 놀이공원에는 뜨거운 태양 아래 끝도 없이 늘어선 줄뿐인 것이다. 세계를 일주하는 환상은 단 1분 만에 산산이 깨졌다.
나는 따뜻한 솜이불을 덮는 대신 듣도 보도 못한 피터 팬이라는 녀석의 손을 덥석 잡아버렸다. 밤공기는 생각보다 싸늘하고, 나는 얇은 잠옷 하나 걸친 초라한 아이다. 이건 금세 돌아갈 수 있는 한 달 여행이 아니다. 짧게는 1, 2년에서 길게는 십수 년을 여행해야 한다. 피터 팬, 이 녀석을 믿어야 하는 걸까? 손을 잡은 것이 꽤나 후회스럽다.
돌이킬 수는 없다. 지금부터 내게 닥친 세상을 살아내야 한다. 어쩌면 그건 곰이 사람이 되기 위해 먹는 마늘처럼 쓰디쓸 것이다. 그 끝에 찾아오는 보석 같은 저 너머 세상은 한결 달콤하겠지? 일장춘몽을 시작한다.
개미나라
잠깐 눈을 붙였다 뗐는데 날이 밝았다. 긴장한 탓에 피곤했나보다. 꽉 막힌 방에 달린 작은 창으로 햇빛 한 줄기가 들어온다. 방 안에는 침대와 책상, 소파, 옷장이 야무지게 들어차 있다. 배가 흔들려도 움직이지 않도록 잘 짜맞췄다.
방문을 여니 좁은 복도와 계단이 나온다. 미로 같은 선실에 똑같이 생긴 방들이 어찌나 많은지, 이 방이 저 방 같고, 그 방은 또 아랫방과 똑같다. 이 좁은 공간에도 각자 잠자리가 있고 밥 먹는 자리가 있다. 어디서 뭘 해야 하나 머뭇거리는데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불쑥불쑥 나온다. 각자 공구를 집어 들고 제 할 일에 바쁘다. 잘 훈련된 개미나라에 온 것 같다.
서울은 슬슬 단풍 이야기가 나오는데 여기는 땡볕이다. 정오 태양이 우산 꼭지처럼 하늘 한가운데 올랐다. 적도에서 남쪽으로 약 800㎞ 지점. 북반구에서 남반구로 넘어가는 해가 적도를 지나 이곳에 닿았으리라 짐작한다. 생애 처음 맞는 적도의 태양은 가혹하다. 수직으로 내리꽂는 뙤약볕에 그림자조차 자취를 감췄다. 열기를 뿜는 디젤 엔진 아래도 그늘이라고 인부들은 앞 다퉈 들어갔다. 이 사람들은 불가마 같은 선체와 철제 컨테이너에 맨몸으로 오른다. 종일 그늘도 없는 곳에서 일한다. 일당은 6만2000루피. 약 7달러다.
솔로몬의 말처럼 ‘모든 것은 곧 지나간다.’ 영원할 것 같던 태양도 때가 되니 사그라졌다. 오후 6시, 일과를 마치고 도시로 향하는 대열에 합류했다. 첫 상륙이다. 현문사다리를 내려가는 발걸음이 가볍다.
신나게 길을 나섰지만 속으로는 불안하다. 이곳은 인터넷으로 검색하면 여행 정보가 줄줄이 나오는 관광지가 아니다. 나는 그동안 여행을 할 때나 영화를 볼 때, 심지어 저녁에 식당을 갈 때도 인터넷으로 알아봤다. 세상 모든 것에 답을 해줄 것 같은 인터넷이 그런데 이곳에 대해서는 묵묵부답이다. 이제 나는 인터넷을 접고 진짜 세상을 만나야 한다. 나는 미숙하다. 겁이 난다. 불안한 마음을 누르고 여정을 재촉했다.
택시 한 대가 부두 정문에 서 있다. 상륙하는 선원을 낚아채려고 종일 기다린 모양이다. 누구든 나를 기다려주는 건 고마운 일이다. 그러나 아무것도 모르는 선원들의 호주머니를 쉽게 생각하는 장사꾼의 등쌀은 싫다.
“살라맛.”
기사 암만이 살살 웃으며 다가왔다. 성격 같아서는 뿌리치고 싶지만 일행이 있다. 떠밀리듯 뒷좌석에 올랐다. 낡고 낡아 안감이 삐져나온 시트, 소음기 어딘가가 터졌는지 귀를 간질이는 엔진소리. 택시를 타자마자 후회가 밀려왔다. 이 택시기사가 좋은 가이드가 되어주는 건 바라지도 않는다. 바가지를 안 쓰려고 악착같이 버티지도 않을 테다. 감당할 수 있을 만큼 바가지를 써주겠다. 대신 나는 정보를 얻어 시간을 알차게 쓰면 그만이다. 그나저나 나는 또 계산기만 두드리는구나.
낡은 택시는 가쁜 숨을 몰아쉬더니 도시의 품으로 냉큼 달려들었다. 낯선 향신료 냄새와 습한 바람, 군데군데 피운 장작불 연기가 매캐했다. 멀리 이슬람 사원에서 잔잔한 기도 소리가 울려 퍼졌다. 여기저기 있는 사원의 경비는 서울 광화문 미국대사관처럼 삼엄했다. 섬 1만8000여 개로 구성된 인도네시아에는 360여 개 부족이 산다. 종교 간, 부족 간 대립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부족 사이에 살인과 폭력이 빈발하고, 종교가 다르면 결혼도 할 수 없다니 한데 섞여 있지만 같은 나라 사람이 아니다. 여기는 인도네시아 한가운데 있는 항구. 종교와 종교가, 부족과 부족이 만나는 공간이다. 남모를 긴장이 흘렀다.
수라바야 항의 밤
상점가로 발길을 재촉했다. 현지 영자신문과 휴대전화를 샀다. 자카르타 포스트에는 우리나라에 전해지지 않는 갖가지 소식이 담겨 있었다. 1면은 이슬람 지도자가 알카에다와 연계한 증거를 발견했다는 뉴스로 도배돼 있었다. 이어 나무를 많이 베는 바람에 비온 뒤에 땅이 주저앉은 현장, 지난 1주일 사이 홍수로 90명이 숨졌다는 뉴스, 기차 충돌 현장 구조 속보가 나왔다. 정쟁·북한·교육·부동산 소식이 대부분인 우리와 다르다.
삼성전자 매장에서 여러 나라에서 쓸 수 있는 전화기를 단돈 4만 원에 샀다. 이곳 휴대전화는 우리나라처럼 통신사에 가입해 고유 번호를 받을 필요가 없다. 일회용 심(Sim)카드만 끼우면 쓸 수 있다. 당연히 로밍도 없다. 국경을 넘어도 해당 국가 통신사 카드를 넣으면 된다. 심카드 값은 우리 돈으로 800원 정도. 인도삿(Indosat)이라는 통신사에서 우리 돈 1만2000원을 충전하면 서울 집과 2시간 가까이 통화할 수 있다. 휴대전화 간 국제통화료가 우리나라 국내 통화료와 비슷하다.

배들의 휴게소 싱가포르.
우리는 암만의 유혹을 뿌리치고 배로 향했다. 마침 비가 내렸다. 인력자전거에 비닐을 씌우고 손님을 기다리는 노인을 보노라니 현진건의 소설 ‘운수 좋은 날’이 떠올랐다. 비가 와서 신이 난 김 첨지가 아마 저런 모습이었겠지? 나도 운수 좋은 상륙이었다. 특별할 건 없지만 수라바야의 환대를 받은 느낌이다. 선상 생활이 꽤나 재미있겠다 싶다.
아하마드는 바보다. 순한 곰이다. 아하마드와 동료들은 크레인이 갑판에 떨어뜨린 콩을 모아 나른다. 선임 동료들은 갓 일을 시작한 스무 살 풋내기에게 잔심부름을 시키고 그의 시원한 그늘을 뺏는다. 그는 고분고분하다. 절대 화내는 법이 없다. 삐쩍 마른 몸이 얼마나 다부진지 동료들 몫까지 척척 해낸다. 오전 11시가 지나면 가방에서 솥과 버너, 그릇을 꺼낸다. 물을 끓이고 꼬깃꼬깃 싸온 음식을 펼친다. 그러다가도 남의 일을 돕는다. 그러다보면 요리는 12시가 다 되어서야 끝난다. 순둥이는 하얗게 불어버린 면과 밥을 산해진미라도 되는 것처럼 맛있게 먹는다. 그렇게 또 하루가 저문다. 나는 노을 속으로 걸어가는 그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
이튿날, 나와 동료들의 전화카드가 바닥났다. 날이 저물 무렵, 나는 착한 아하마드에게 30달러를 쥐어주고 새 카드를 사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예스, 예스’했다. 부탁을 흔쾌히 들어주는 게 고마웠다. 우리 순둥이가 돌아오면 수고비로 이곳 하루 일당에 해당하는 7달러를 주기로 마음먹었다.
순박한 아하마드
착한 아하마드가 빨리 오기를 바랐다. 나는 손에 전화기를 들고 약속한 시간 30분 전부터 현문에 나갔다. 10분전, 5분전, 3분전, 1분전. 기다리는 시간은 길기만 했다. 약속한 6시가 지났다. 하지만 길은 정적뿐. 나는 초조했다. 처음에는 조금 늦겠거니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머릿속은 여러 가지 생각으로 차올랐다. 스무 살 때 혼자 떠난 여행길에 기차역에서 멀쩡하게 생긴 사람에게 돈을 빌려주고 연락이 끊긴 일이 떠올랐다. 가만히 생각하니 우리 배는 내일 떠난다. 그는 하루 쉬고 안 오면 그만이다.
“일당의 4배가 넘는 돈을 쥐어주는 게 아니었는데….”
아하마드는 착하지만 그렇게 큰돈은 유혹일 수 있다. 나는 그가 돌아오기를 바라면서도 마음속 저편에서부터 헐뜯기 시작했다. 10분 사이 그는 ‘도망자’와 ‘국제 사기꾼’이 됐다. 나는 한없는 저주를 퍼부었다. 동료들 카드 값은 어찌할지, 새 카드는 어떻게 사야 할지, 그리고 만일 그가 돌아오면…. 갖가지 생각을 하는 사이 자정이 지났다. 당직을 마치고 쓸쓸히 방으로 들어갔다. 천진난만한 아하마드가 꿈에 나타났다.
잠깐 생각한 것 같은데 아침이 밝았다. 온몸이 찌뿌드드했다. 오늘은 작업을 마치고 떠난다. 평소보다 긴장해야 한다. 옷을 주섬주섬 입고 현문에 나갔는데 간밤에 당직을 선 2항사가 전화카드와 잔돈을 내밀었다. 나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친구 새벽 1시쯤 왔더라고. 뭐라뭐라 하는데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나름 사정이 있었나봐. 오늘은 다른 일로 우리 배에 못 오는 모양이야.”
아하마드는 부탁한 전화카드와 내게는 필요도 없는 인도네시아 잔돈까지 놓고 갔다. 그 늦은 시간에.
“집이나 회사에 급한 일이 있겠지. 그렇다고 새벽에 올 건 뭐람.”
고마움과 미안함, 섣불리 그에게 퍼부은 저주가 회오리쳤다. 생각해보니 나는 단돈 3만 원에 순둥이를 악당으로 만들었다. 곱절로 고맙고, 그 곱절로 미안했다. 깊은 밤 어둠을 헤치고 항구로 왔을 천진난만한 모습이 눈에 선했다. 나는 아하마드 덕에 고국의 소중한 사람들과 연락했다. 그냥 떠날 수 없었다. 짧은 편지와 수고비 10달러, 그가 주고 간 잔돈을 봉투에 담았다. 그걸 전해달라고 동료들에게 부탁하려다 순간 멈칫했다.
“과연 이 친구들이 이걸 아하마드에게 전달할까?”
다른 방법이 없다. 나는 또 의심하지만 이번에는 믿어보는 수밖에 없다. 다시 아하마드가 안쓰럽다. 바보.
믿을 수 없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원주민들이 자연을 벗 삼는 곳. TV에서나 본, 안드로메다처럼 멀어서 직접 가리라 상상조차 못한 곳에 내가 간다. 첫 항해가 원시의 강이라니 뜻밖이다. 이탈리아 나폴리나 호주 시드니처럼 이름난 아름다운 항구를 기대한 게 사실이다. 그러나 이번이 아니면 아마존에 갈 일은 평생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무척 설렌다. 부정기 화물선에 승선하기를 잘했다.
기대만큼 걱정도 많다. 워낙 깊숙한 곳이라 우리 배에는 현지 해도가 없다. 궁여지책으로 컴퓨터로 스캔한 것을 전자우편으로 받았다. 하지만 너무 흐려서 수심이 얕은 강을 항해하지 못한다. 축구장만한 배가 모래톱에 얹히기라도 하면 끝장이다. 만일 오지에서 기관이 고장이라도 나면 수리하는 데 한참이 걸린다.
아마존을 향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