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 극찬에 걱정 반 기대 반
낯가리는 성격, 연기할 땐 딴판
불혹의 나이 의식하지 않아
‘스트레스 없는 일은 없다’로 마음 단련
정유미는 “나이를 의식하지 않으며 사는 것”이 동안 비결이라고 말했다. [롯데엔터테인먼트]
세계적 거장 반열에 오른 봉준호 감독은 영화 ‘잠’을 이렇게 평가했다. 봉 감독의 극찬에 영화는 개봉되기 전부터 뜨거운 관심을 모았다. 9월 6일 극장에 걸린 ‘잠’은 봉준호 감독이 만든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옥자’ 연출부 출신인 유재선 감독의 입봉작이다. 제76회 칸 영화제 비평가주간, 시체스 국제 판타스틱 영화제 메인 경쟁 섹션에 초청되는 등 해외에서 먼저 주목했다.
영화는 몽유병이 갈수록 심각해져 밤마다 다른 사람처럼 변하는 남편 현수(이선균 분)와 남편의 곁에서 가정과 아기를 지키려다가 점점 광인이 돼가는 아내 수진(정유미 분)의 이야기를 그린다. 영화를 보니 봉 감독이 언급한 ‘유니크한 공포’를 담당한 배우가 정유미지 싶다. 정유미는 예능 프로그램 ‘윤식당’으로 얻은 ‘윰블리’라는 애칭이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영화 속에서 섬뜩한 광기를 발산한다. 오죽하면 이 영화로 ‘맑눈광(맑은 눈의 광인)’이라는 새로운 수식어가 따라다닐까.
촬영 끝나면 바로 털어버려
“광기를 어떻게 표현할지 전혀 계산하지 않고 연기했는데 영화 반응을 보고 더 미쳤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개인적으로는 아쉬움이 커요. 그래서 촬영이 끝나면 되돌아보지 않으려고 해요. 돌아보면 자꾸 아쉬움이 남거든요.”개봉을 앞두고 만난 정유미는 영화 속 수진과는 또 다른 본연의 해맑은 표정으로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잠’에서 연기한 광기의 여진이 남아 있을 법한데 수진 같은 예민한 기색은 온데간데없다.
영화 ‘잠’에서 정유미는 몽유병에 걸린 남편을 지키며 광기가 짙어지는 아내로 열연을 펼쳤다. [롯데엔터테인먼트]
그가 이 영화에 출연한 동기는 한마디로 “재미있는 스토리에 꽂혀서”다. 본인이 출연하지 않았어도 “재미있게 봤을 영화”라고 평할 정도로 시나리오 자체가 그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유재선이라는 신인 감독과의 작업이 조금도 걱정되지 않았다. 영화 반응에 대한 걱정이 생긴 건 완성작을 본 봉준호 감독에게 호평을 받으면서다.
“아예 (봉준호 감독의) 이야기가 안 나왔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어요. 봉 감독님의 평에 영향을 받아 관객의 기대치가 높아지고 선입견이 생길 수 있으니까요. 혹시나 관객이 실망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어요. 한편으론 ‘나도 이 영화 잘 봤다, 재미있더라’는 평가도 오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요. 걱정 반, 기대 반이에요.”
극 중 상대 배우인 이선균은 그와 작품 인연이 깊다. 정유미는 이선균과 홍상수 감독의 ‘첩첩산중’(2009), ‘옥희의 영화’(2010), ‘우리 선희’(2013)에 이어 이번 영화에서 네 번째 호흡을 맞췄다. “전작들이 촬영 분량이 많지 않아 장편영화에서 다시 호흡을 맞춰보고 싶었다”는 두 사람은 그 바람을 이뤘다. 친근한 배우와의 재회는 든든한 버팀목 같은 효과를 발휘했다.
“그냥 너무 편했어요. 대화를 많이 하지 않아도 그냥 믿고 가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시나리오에 평면적으로 그려져 있는 캐릭터를 (이선균) 오빠가 입체적으로 메워가는 모습을 보면서 매번 인생 캐릭터를 만드는 게 우연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배우 아닌 다른 나, 상상이 잘 안 돼
이선균은 정유미를 “연기 천재”라고 평가한 바 있다. 캐릭터를 소화하는 나름의 노하우를 묻자 정유미는 “현장에서 감독의 지시에 충실한 편이고 감독이 내주는 문제를 잘 풀려고 노력한다”고 답했다. 수줍음이 많고 낯을 가리는 성격이 연기에 걸림돌이 되지 않느냐는 물음에는 “다른 문제인 것 같다”며 손사래를 쳤다.“그런 성격인데도 대학 다닐 때 단편영화를 정말 많이 찍었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선배님들의 작품을 망친 적도 많았던 것 같아요(웃음).”
그는 영화 보기를 즐기다 연기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 서울예대 영화과에 진학했다. 단편영화 ‘폴라로이드 작동법’(2004)으로 데뷔하고 이듬해 첫 장편영화인 ‘사랑니’에서 여주인공 김정은의 17세 아역으로 출연하며 대중에게 알려졌다. 데뷔 초에는 빨리 자리를 잡아야 한다는 조바심이 난 적도 있다고 한다. 그럼에도 그는 ‘배우는 연기로 말하는 직업’이라는 소신을 굽히지 않아 불필요한 오해를 사기도 했다. 존재감을 빛낸 대표작으로는 영화 ‘도가니’(2011), ‘부산행’(2016), ‘82년생 김지영’(2019)이 첫손에 꼽힌다. 평탄하지만은 않았던 그의 연기 인생을 관통하며 힘들 때마다 마음을 다잡아준 인생의 나침반 같은 좌우명이 있을까.
“좌우명까지는 아니고 ‘스트레스 없는 일은 없다’고 생각하면 그냥 넘어가지더라고요. 힘들 때는 그냥 무너지기도 해요. 그러다가 넘어지고 또 일어나고 넘어지고 또 일어나요. 잘 일어나는 편이에요.”
어느덧 그의 나이도 불혹이다. 흔히 말하는 결혼 적령기를 지났다. 독신주의인지 조심스럽게 묻자 그는 1초도 망설이지 않고 손사래를 쳤다. 이상형은 밝히기를 꺼렸다.
“독신주의는 아니에요. 지금까지 이렇게 혼자 있게 될 줄은 몰랐네요. 좋아해 주는 사람이 나타나겠죠. 대중에게 제 이상형을 알리고 싶진 않아요. 확실히 누군가가 제 옆에 나타나게 되면 ‘이상형이구나’ 이렇게 생각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도무지 불혹으로는 보이지 않는 얼굴에 소녀 같은 천진무구한 매력을 장착한 그를 보노라면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을 곱씹게 된다. 늙지 않는 비결이 뭘까.
“나이를 잊어주세요. 저도 나이 생각을 안 하고 살고 있어요. 나이를 생각하면 제가 너무 피곤할 것 같아요. 스스로 막는 것도 너무 많을 것 같고요. 이렇게 사는 게 편해요. 누가 그랬어요. ‘그냥 넌 계속 그렇게 살아’라고요”
인터뷰를 마치며 남은 궁금증을 던졌다. 배우가 안 됐으면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좀 더 어렸으면 그려지는 게 있었을 텐데 지금은 배우가 아닌 일을 하는 제가 상상이 잘 안 돼요. (배우가) 천직이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천직이라고 생각하면 너무 부담될 것 같아요.”
김지영 기자
kjy@donga.com
방송, 영화, 연극, 뮤지컬 등 대중문화를 좋아하며 인물 인터뷰(INTER+VIEW)를 즐깁니다. 요즘은 팬덤 문화와 부동산, 유통 분야에도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역사 왜곡 바로잡고 교육 공동체 회복하겠다”
[영상] “겸손과 긍정 마인드가 삶의 밑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