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마크 정자은행. [크리오스 인터내셔널 홈페이지]
유럽은 정자은행을 상업적 용도보다 국가 차원의 공공기관 성격으로 운영한다. 프랑스는 중앙정자은행과 함께 지역 거점 대학병원 28곳에 정자은행을 두고 있다. 영국은 도시마다 자리한 국민건강보험 불임센터 안에 정자은행이 일반 은행처럼 간판을 내걸고 있다. 중국은 17개 성(省)의 거점 병원에 정자은행과 체외수정센터가 마련돼 있다. 일본은 비영리단체를 포함해 민간에서 운영하는 15곳의 정자은행이 있다.
한국은 어떤가. 세계의 흐름에 발 빠르게 따라가는 우리나라가 유독 이 분야는 넋을 놓고 있다. 우리나라 남성은 정자를 기증하는 것도, 기증받는 것도 꺼린다. 더 정확히는 아예 관심조차 없다.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유일하게 상업적(영리) 정자은행 시스템이 없는 나라다. 그나마 설립된 공공(비영리) 정자은행도 3년째 기증 정자가 없어 간판을 내려야 할 위기에 처했다.
한국인이 정자 기증과 공여를 극히 꺼리는 이유는 혈통 중심 사고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아서다. 아무리 정자 기증자의 신원을 익명으로 한다고 해도 자신의 정자에서 비롯돼 세상 빛을 본 생명체가 언젠가는 생물학적 아버지(biological father)를 찾아 나설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앞선다. 또 생판 모르는 타인의 유전자(정자)에 대한 거부감도 무시할 수 없다.
문중(門中)만의 정자은행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말이 있다. 나라마다 문화가 다르고 법적 배경이 다르기 때문에 정자은행의 표준 운영 지침이 상이할 수밖에 없다. 우리 정서에 맞게 효율적으로 설립하고 운영하면 된다. 만약 정자 기증이나 공여가 한민족만이 알 수 있는 성씨(姓氏)·문중(門中)별로 이뤄진다면 어떨까. 성씨·문중별 정자 동결보존 방법은 어쩌면 한국적 문화와 정신세계에 가장 부합하는 운영체계가 아닐까 싶다.최근 국내 몇몇 종가(宗家)의 종주(宗主)가 주축이 돼 비혼 혹은 출산을 기피하는 후손을 걱정하며 해법을 내놨다. “문중 전체에서 똑똑하고 건강한 후손(남성)을 찾아내 정자를 보관(익명)해 놓았다가 남성 불임으로 인한 난임을 겪는 후손(부부)에게 공여해 주고 싶다”는 것. 그는 지역 난임 병원에 이른바 ‘문중(門中)만의 정자 동결보존’이 가능한지 문의했다고 한다. 이른바 문중(門中)만의 정자은행인 셈이다.
한국의 종가(宗家)는 특정 가문의 중시조(中始祖)로부터 적장자로 계승돼 온 집을 말한다. 부계 혈통 계승을 원칙으로 하다 보니 증조부, 조부, 아버지, 아들에게로만 유전되는 Y염색체에 대한 자부심이 있을 것이다.
문제는 공공 정자은행 혹은 난임 치료 전문병원이 문중별 정자 동결보관을 위해 노력해 줄 수 있느냐에 있다. 우리나라도 서구처럼 정자은행만 관리하는 정부기관이 생겨야 할 것 같다. 미국은 식품의약국(FDA)이 설립한 HCT/Ps(Human Cell and Tissue or Cell and Tissue Bank Product)에서, 영국은 인간생식배아관리국(Human Fertilisation and Embryology Authority)에서 정자은행을 규제하고 관리한다.
21세기 성씨별 Y염색체의 고유성을 운운하면 꼰대 취급을 받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러한 방식으로라도 건강한 정자 기증이 늘어난다면 좋은 일이 아닐까.
상상해 보자. 예를 들어 무정자증(비폐쇄성)으로 정자를 공여받아야 하는 남성의 성본이 한양 조씨라면 비배우자의 정자 공여 시 이왕이면 한양 조씨 문중에서 기증된 정자가 훨씬 믿음직하지 않을까. 이렇게 되려면 종가마다 종주들이 자발적으로 ‘자자손손 자손만대 캠페인’의 위원장이 돼 발품을 팔아야 할 것이다. 문중 내 건강하고 똑똑한 인재가 얼마나 많겠는가. 뜬구름 잡기가 아니라 훨씬 가능성이 높은, 댐 건설 같은 프로젝트가 아닐 수 없다.
꼭 필요하고 시급한 정자은행
1980년대였다. 전남 구례에서 한 중년 여성이 대학병원 외래에서 산부인과 교수에게 허리 굽혀 여러 번 감사의 뜻을 표하는 걸 봤다. 국내에 ‘냉동정자’라는 것이 없던 시절 남편이 무정자증인 이 여성은 서울까지 올라와 배란 시기에 익명의 의과대학생이 제공한 신선 정자로 임신이 됐다. 그렇게 낳은 아들이 초등학생이 될 무렵 그는 이렇게 자랑했다. “우리 마을처럼 산골에 이렇게 귀티 나고 잘생긴 애는 보덜 못했지라우. 매일 쇠죽을 끓이면서 또 한 번 애를 바라본당께.” 당시 40대 중반의 촌부를 보면서 ‘양질의 정자는 이런 것이구나’라는 생각을 했다.그 시절(1980년대)에는 국내에 정액을 냉동시키는 기술이 부진해 인공수정을 할 경우 배란 예상일에 신선 정액을 질강 내에 넣어주는 질강 내 인공수정을 시행했다. 요즘이야 정액 전체를 냉동하는 게 가능하지만 그 시절에는 남편과 같은 혈액형인 정자를 공여받을 수 있다는 것에 만족해야만 했다.
요즘은 남편과 혈액형이 맞는 정자 구하기도 하늘의 별 따기다. 이런 현실에서 한국의 종가들이 종가 내에서 필요한 정자를 냉동해 종친이 필요하면 쓸 수 있게 하자는 발상은 너무나도 기발해 큰 박수를 보내고 싶다.
문중이 특별 관리하는 정자는 종가 내 종친만 해동해서 쓸 수 있겠지만, 이 같은 분위기가 일파만파 확산된다면 한국인만의 종자(정자) 보존에 머물지 않고 새로운 정자 냉동이나 정자은행 발전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울 것이다.
일반인이 가장 궁금해하는 부분은 꽁꽁 언 정자를 몇 년 혹은 몇십 년 후 해동했을 때 문제가 없는지, 임신에 성공해 건강한 아기가 태어날 수 있는지다. 걱정할 필요 없다.
정액을 냉동할 때 보조제로 글리세롤과 달걀노른자를 사용한다. 이 두 가지는 정자 내에서 물을 빼내는 역할을 하며 마치 식물의 씨앗처럼 정자가 고체 상태로 –196℃에서 보존되도록 한다. 동결보존된 정자는 해동할 때 약 40%가 원상회복한다. 정자 내로 물이 들어가 채워지면서 냉동 보조제가 제거되고 정자의 운동성이 되살아난다.
달걀노른자는 현재 난자나 수정란의 냉동에서는 사용하지 않고 정자 냉동에만 사용한다. 조류독감 감염 가능성으로 대체 보조제가 나오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달걀노른자만큼 높은 회복률을 보이는 것은 없다.
요즘 시험관아기시술(IVF)에 사용되는 정자는 ICSI(난자 내 직접 주입술)라는 수정 방법 덕에 여러 위험 요인이 감소됐다. 해동된 정자가 수정 전에 장시간 배양되면 정액 내 프리 라디칼(free radical)이라는 독성물질이 생겨 정자 DNA에 타격을 줄 수 있다. 하지만 체외수정술에서 ICSI라는 수정 방법을 사용함으로써 독성물질의 노출을 줄이고 수정률도 높일 수 있게 된 것이다.
인류가 오늘날까지 살아남은 것은 ‘태어남(출생)’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정자와 난자를 채취해 인위적으로 체외 수정시켜 임신(출산)을 이뤄낸 로버트 에드워드 박사(영국 케임브리지대학 교수)에게 노벨재단이 노벨 의학상을 수여한 이유도 태어남에 기여해서일 것이다. 정자 기증과 공여를 놓고 ‘옳다’ ‘그르다’, ‘틀리다’ ‘맞다’는 논쟁을 벌이는 일은 무의미하다. 이제는 ‘꼭 필요하고 시급한 일’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조정현
● 연세대 의대 졸업
● 영동제일병원 부원장. 미즈메디 강남 원장. 강남차병원 산부인과 교수
● 現 사랑아이여성의원 원장
● 前 대한산부인과의사회 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