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중반까지 ‘비대칭’ 관계
베트남전쟁과 데탕트라는 변곡점
韓 시민사회 성숙이 만들어낸 힘
美, 북핵 문제도 일방적 관철 못 해
세계 속 韓 위치가 양국 관계 결정
윤석열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해 5월 22일 경기 오산시 공군기지에 위치한 항공우주작전본부(KAOC) 작전조정실을 찾아 장병들을 격려하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한미동맹은 미일동맹과 함께 세계사적으로 유래가 드물게 오랫동안 지속되고 있는 양자 동맹이다. 역사상 동맹 체제는 16세기 말 영국·프랑스·네덜란드 사이의 삼국동맹에서 시작됐다. 19세기 말 독일·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이탈리아가 맺은 삼국동맹, 그리고 20세기 초 영일동맹이 있었다. 그 기간은 대개 20년 이내로 짧았다. 36년간 불안정하게 지속된 1879년의 독일·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이탈리아 동맹 정도가 예외일 뿐이다.
반면 한미동맹과 미일동맹은 냉전과 함께 시작돼 탈냉전 이후에도 지속하는, 세계사적으로 매우 예외적인 경우다. 게다가 미일동맹은 1960년 한 차례 개정됐으며, 북태서양조약기구(나토·NATO)는 1966년 프랑스가 철수했다가 2009년 복귀하는 등 변화를 겪었다. 이와 달리 한미동맹의 축이 되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은 1953년 이래 70년 동안 한 차례의 수정도 없이 지속되고 있다.
한미동맹은 70년 동안 큰 변화 없이 순탄하게 진행된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특히 ‘우리에게 미국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나올 만큼 한미동맹은 역동적이었다. 내용상으로는 군사·안보를 중심축으로 경제동맹·가치동맹으로 확대됐다고 할 수 있지만, 그 성격은 70년간 큰 변화를 보였다.
“중요한 자리에는 미국인들이 있다”
초기 한미동맹에서 나타나는 가장 큰 특징은 ‘비대칭’적 관계다. 한미동맹은 광복과 분단, 전쟁 과정에서 형성됐다. 한국은 신생국이었고 미국은 냉전체제하에서 제1세계의 컨트롤타워였다. 미국은 한국이 제1세계에서 생존하도록 하는 임무를 갖고 있었다. 이에 대규모 원조를 한국에 제공했는데, 이로 인해 군사적·경제적 측면에서 비대칭적 종속관계는 불가피한 것일 수도 있었다.군사적으로 미국은 1954년 합의의사록을 통해 한국군 유지를 위한 군사비를 원조하는 대가로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장악했다. 이는 한국 정부에 의한 단독 북진 시도를 막기 위한 것이었지만, 한국군의 인사와 재정을 장악할 수 있는 방안이었다. 경제적으로도 1952년의 마이어 협정과 1953년의 백-우드 협정을 통해 주한유엔군사령관의 경제고문이 경제조정관으로서 한국의 원조뿐만 아니라 경제정책 전반을 통제하는 역할을 했다.
한미 간의 비대칭 관계는 1960년대 중반까지 계속됐다. 4·19혁명 이후 장면 정부하에서 미국은 경제부흥 원조를 조건으로 환율의 현실화와 공공요금 인상을 비롯한 요구 사항을 관철했다. 5·16군사정변 이후 미국은 군사정부의 경제정책에 적극 개입했다. 1962년 통화개혁의 실패, 1963년 제1차 경제개발계획의 수정 등은 모두 미국의 개입으로 이뤄졌다. 미국은 군사정부 관계자들이 사회주의적 개혁을 실행하고 있다고 판단했고, 이를 막기 위해 적극 개입했다. 그러면서도 한일협정과 CIA를 통해 박정희 정부와 민주공화당을 적극 지원했다.
미국의 브라운 대사는 1966년 8월 26일 다음과 같은 인상적인 편지를 국무부 차관보에게 보냈다.
“우리는 한국인들과 매우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다. 우리가 아니고선 대한민국은 존재할 수 없다. 우리는 한국의 군대가 움직이도록 하며, 모든 중요한 경제적 결정에 참여한다. 경제기획원 중앙에 은밀한 곳에는 항상 미국인들이 있다. 각 지역의 도지사들에게는 미국의 자문관이 배치된다. 우리는 유별난 정보 연계를 맺으며, 미군은 항상 한국의 국방비를 검토한다.
한국의 어느 곳이든 중요한 자리에는 미국인들이 있다. 이들은 종종 한국인들 위에서 자문하는 유능한 사람들이다. 종종 그들의 유능한 활동은 바람직하지 못한 한국의 정치적 압력에 의해서 견제를 받는다. 지금까지는 한미관계가 어렵지 않게 풀렸으며, 상호 보완적이다. 한국은 아직 많은 지역과 문제에서 우리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러한 관계가 계속되거나 계속돼야 한다고 보지는 않는다. 특히 지난 2년간 표출된 것처럼 한국의 경제성장, 정치적 성숙, 그리고 국제적 경쟁력이 높아진다면, 이러한 관계는 변화될 수도 있다.
문제는 오히려 비정상적으로 가까우면서 좋은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에서 발생한다. 우리 관계가 어떻게 두 주권 국가 사이에서 일반적으로 존재하는 좀 더 정상적인 관계로 나아갈 수 있을까?”
기다리면서 주시하는(wait and see)
비대칭적 한미관계에 큰 변곡점이 된 것은 한국의 베트남 파병이었다. 이는 미국의 요청을 한국이 수락한 것이었으며, 미국은 한국군 파병의 대가로 많은 원조를 제공했다. 미국이 베트남전쟁에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고, 그로 인해 동맹국에 대한 군사·경제정책에 변화가 생겼다는 사실은 한미관계 변화에 결정적 동인이 됐다.가장 큰 충격은 1970년 미국이 한국 정부에 주한미군 1개 사단을 철수하겠다고 통고한 일이었다. 미국 정부는 베트남 파병에 대한 대가로 한국 정부와 사전 논의 없이 주한미군 규모에 변화를 주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약속했다. 그러나 베트남전쟁으로 인한 재정 악화 탓에 더는 해외에 대규모 미군 파병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베트남과 태국에서 철군이 진행됐고 필리핀에서는 미군 주둔 규모가 축소됐다. 한국 정부를 두고는 사전 논의 없이 제7사단 철수가 통고됐다. 제7사단은 한국전쟁 시기부터 활약한 주한미군에서도 상징적 존재였다.
미국은 한국의 상황에 더는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없었다. 1970년대 초 미국의 원조가 끝났다는 점도 중요한 요인이 됐다. 한미관계의 변화는 1971년 긴급사태 선포와 1972년 유신 선언 당시 미국이 보인 태도에서도 잘 드러났다. 미국 정부는 데탕트 상황에서 한국의 긴장 상태를 완화함으로써 주한 미 지상군의 철수까지도 검토했는데, 외려 한국 정부는 데탕트를 위기로 보면서 긴장을 고조시키고 있었다. 당시 주한 미국대사였던 필립 하비브뿐만 아니라 주한 유엔군사령관까지도 이러한 박정희 정부의 강경 정책에 불만을 토로했지만, 직접 개입하지 못하고 ‘기다리면서 주시하는(wait and see)’ 정책을 폈다.
1961년 8월 18일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을 방문한 제이콥 E 스마트 주일미군사령관과 가이 S 멜로이 유엔군사령관, 새뮤얼 버거 주한 미국대사 일행. [동아DB]
“한미관계는 평온한 적이 없었다. 사실 강한 의견의 불일치나 양자에게 중요한 문제에 대한 상호 간의 의심이 과거 20년간 한미관계의 주요한 면모였다. 이승만은 격렬하게 정전협정에 반대했고 한국이 통일될 때가지 계속해서 싸우기를 원했다. 우리는 그가 공공연히 주장한 북진정책을 두려워했고 반대했다.(반공포로석방·필자 주)
서울에 있는 우리 대사관은 처음에는 박 장군이 일으킨 1961년의 쿠데타를 반대했으며, 1963년에는 박이 선거를 치르도록 하기 위해 최고의 압력을 넣었다.(민정 이양 번복·필자 주) 푸에블로호 피납과 청와대 습격에 대한 우리의 대응은 박을 격노케 했다.”
한미 갈등에 대한 불만을 표출한 내용이었지만, 더는 한국의 내정에 깊숙이 개입하기 어렵게 된 상황에 대한 미국의 입장을 잘 보여준 것이기도 하다. 물론 한미관계는 1980년대 들어 또 다른 변화의 양상을 보였다. 집권 정통성에 문제가 있던 신군부는 미국의 요구 사항을 대부분 수용했다. 이 시기 미국은 한국의 핵 개발 포기, 금융을 포함한 광범위한 시장개방 등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이는 1970년대 이전만큼 비대칭적 관계에서 나온 결과는 아니었다.
강요·지시에서 상호 협의로
1987년 한국의 민주화를 비롯해 전 세계에 자유화 바람이 불었다. 한편으로는 탈냉전하에서 미국의 세계적 패권이 강화됐지만, 다른 한편으로 한국을 비롯한 개발도상국들의 정치적·경제적 성장으로 과거와 같은 비대칭적 동맹관계는 더는 유지되기 어려웠다. 특히 한국과 같이 시민사회의 힘이 강한 국가에서 미국과의 관계는 대칭적 성격으로 격상되기 시작했다.그 대표적 사례는 1990년대 초 주한미군의 핵무기 철수와 작전통제권 문제였다. 흥미롭게도 1992년 주한미군 핵무기가 철수되자 미국의 조지 H. W. 부시 대통령과 한국의 노태우 대통령은 모두 자신이 주도한 사안이라고 주장했다. 과거라면 나타날 수 없는 현상이었다. 1990년대 이전 시기 한국군의 작전통제권 문제는 미국 정부와 주한미군사령부에서 결정할 사안이었다. 하지만 1994년 평시 작전통제권이 한국 정부에 이양된 이후 현재까지도 진행되고 있는 전시 작전통제권 이양 관련 논의 과정은 다르다. 미국이 일방적으로 한국에 강요하거나 지시하기보다는 상호 간 협의 과정을 거치고 있다.
북핵 문제를 다루는 과정에도 미국의 일방적 입장이 관철되고 있다고 볼 수는 없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둘러싼 양국 간 논의 과정과 시민사회의 대응을 보더라도, 일방적이거나 비대칭적이었던 70년 전과 오늘날 사이에 한미동맹이 큰 변화를 겪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물론 동태적 변화 속에서도 한미 간에는 다양한 갈등이 발생했다. 이는 양국이 가진 서로의 역할에 대한 입장 차이에서 기인했다. 한국은 냉전의 최전선에 있으면서 미국의 가장 중요한 동맹국이라는 입장을 견지했다면, 미국은 동아시아 전체 속에서 한반도 문제를 고려해 왔다.
한국과 미국에 한반도에서 전쟁을 억지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과제임에 분명하지만, 한국 정부는 북한을 압도하기 위한 억지력이 필요했고, 미국은 한국에 더 많은 돈을 쓰기를 원치 않았기에 한반도에서 전면전을 막으려 했다. 이로 인해 군사 측면뿐 아니라 경제 측면에서도 양국 간 갈등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렇듯 70년간 미국은 한국에 ‘제국’이라는 압도적 대상에서 ‘우방’이라는 대칭적 외교 대상으로 진화해 왔다. 이 두 가지 서로 다른 개념은 시기뿐만 아니라 이슈에 따라 공존하기도 했고, 시기와 관계없이 어느 한쪽이 더 강한 의미를 갖기도 했다. 한일관계나 중국, 북한 문제가 발생했을 때에도 미국의 이미지는 어느 한쪽으로 쏠리곤 했다.
한미관계는 또 다른 진화 과정을 거칠 것이다. 이 과정에서 미국은 우리에게 우방이 될 수도, 제국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70년 역사에서 분명히 나타나는 특징이 있다. 한국의 정치적·경제적 성장뿐만 아니라 성숙한 시민사회의 발전에 따라 우리 처지에서 미국의 역할은 달라졌다.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했을 때 하비브 대사가 지적한 갈등이 빚어졌고 미국이 압력을 가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한국의 정치적·경제적 성장이 이뤄졌을 때는 미국이 한국과 협의해 한반도와 동북아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했다. 시민사회의 성숙은 미국이 제국으로서 한국에 일방적인 정책을 실행할 수 없는 국내외 여론을 만들었다.
결국 한편으로는 미국의 국력과 국제정치에서 점유한 지위·위신이 한국에 대한 미국의 위치를 결정하는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의 진화와 세계 무대에서 차지한 위치가 동맹의 성격을 결정할 것이다. 미국의 정책이 일방적으로 한미관계를 결정하던 시기와 달리 성숙한 한국 사회가 미국의 위치를 결정할 수 있는 시대가 다가온 것은 아닐까.
[+영상] “미군이 돕지 않았으면 대한민국이 지금처럼 행복하게 못 살아요”
[신동아 10월호 표지 B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