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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차 산업혁명時代, 대한민국 강대국 될 기회

[이근의 텔레스코프]

  • 이근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前 한국국제교류재단 이사장

    입력2023-10-03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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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대국 실마리 = 국내 질서·국제질서 정합성

    • 과거 질서 강대국? 강력한 군사력 가진 ‘제국’

    • 근대화로 제국 해체, 산업화 강대국 美·蘇 출현

    • IT·녹색 에너지·문화 강국이 미래 강대국

    [Gettyimage]

    [Gettyimage]

    많은 사람이 국제사회를 매우 폭력적이고, 때론 야만적이며, 오직 강한 국가만이 살아남는 곳으로 보고 있다. 잠시라도 방심하면 19세기 말 외세에 의해 이리저리 흔들리던 구한말의 악몽이 재현될 수 있다고도 생각한다. 아직 일제강점기에 태어난 사람이 생존해 있고, 우리가 읽은 세계사 대부분도 과거 수천 년 동안 이어온 제국과 전쟁의 시대로 점철돼 있으니 이러한 관점이 생기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그렇지만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것이야말로 변하지 않는 진리다. 이제 과거 수천 년간 폭력적 국제질서와는 매우 다른, 새로운 국제질서가 자리를 잡았다. 어떤 질서든 질서란 강한 자의 구상이 투영되게 마련이다. 민주주의 세력이 강하면 민주주의 질서가 생겨나고, 전체주의 세력이 강하면 전체주의 질서가 생겨난다.

    국제질서도 마찬가지다. 제국이 주인공이면 국제질서도 제국적 양상을 띠게 되고, 근대화된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주인공이면 국제질서도 자유민주주의화된다. 강대국 지도자의 사상과 믿음이 국제질서에 투영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국내 질서와 국제질서가 서로 구조적 정합성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국내 질서가 제대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이를 받쳐주는 국제질서가 있어야 한다. 제국이 존재하려면 국제질서가 제국적이어야 하고, 강대국의 자유시장경제가 돌아가려면 국제질서 역시 자유시장경제를 받쳐주는 것이어야 한다.

    강대국의 국내 질서가 국제질서로 투영되고, 국내 질서와 국제질서가 구조적 정합성을 가져야 하는 원리는 한국이 강대국이 되는 데에 매우 중요한 단서다. 특히 요즘 강조되는 보편 가치와 규범 기반 국제질서, 자유롭고 개방된 인도·태평양을 지향하는 외교정책은 국제질서를 만드는 것만이 아니라 이에 조응하는 한국의 국내 질서를 만들어나가는 데에도 매우 중요하다. 국제질서를 만드는 만큼의 노력을 국내에서 하면 강대국으로 향하는 길이 보인다는 뜻이다.

    제국·전쟁 축으로 돈 전근대 국제질서

    흔히 지정학 질서라고 하는 전근대 국제질서에선 땅·바다와 같은 지리적 요인이 매우 중요하다. 전근대는 농업경제 시대이기에 비옥한 땅과 많은 노동력이 중요 자원이다. 비옥한 곳에 자리 잡은 세력이야말로 풍부한 농업경제를 일으켜 강대한 군사력을 가질 수 있다.



    강대한 군사력을 운용·유지·투사하기 위해 세제·관료제 같은 발전된 국가 제도가 생겨난다. 군사력을 통해 획득한 더 많은 비옥한 땅, 노동력에서 얻은 풍부한 생산력을 기반으로 발명·혁신·창조가 이뤄지기도 한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광범위한 공간을 지배하는 국가를 일반적으로 ‘제국(empire)’이라고 한다. 제국은 자국 경계에 위치한 변방 세력에 조공·충성을 요구하며 상하관계를 구축한다. 국가 간 일종의 ‘신분적 위계’가 생기는 것이다.

    척박한 자연환경에 위치한 변방 세력이 제국의 강대함과 풍요, 문명에 매료돼 제국을 따르면 이 세력은 종속국이 된다. 반면 제국의 풍요·문명을 탐내 이를 갖고 싶어지면 군사력을 키워 제국을 침략한다. 제국은 강력한 군사력으로 이를 수비하지만 때때로 변방 세력의 군사력에 눌려 나라를 빼앗기기도 한다. 게르만에 눌린 서로마제국, 오스만투르크에 눌린 동로마제국, 몽골과 만주족에 눌린 중국 제국이 그 예다. 이렇게 제국과 변방 세력(주로 기마 유목민족) 간 전쟁은 전근대의 국제 공간을 수없이 장식한 전근대 국제질서의 진면목이라고 할 수 있다. 전근대 시기의 국제정치는 이처럼 ‘제국 만들기’와 ‘제국 지키기’라고 할 수 있다.

    또 농업경제 기반 아래 신분제와 같이 위계적 폭력으로 만들어진 제국 내부 모습은 제국 밖으로도 투영돼 제국과 변방 세력 사이에 위계적 폭력 및 제도가 형성됐다. 이는 제국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국제질서가 생겼음을 의미한다. 이렇게 여러 개 ‘제국권’이 유럽, 아프리카, 중동, 아시아 등으로 나뉘어 형성됐다. 18세기 산업혁명을 통한 원거리 이동이 가능해지기 전까지 이들은 상대적으로 분리돼 병존했고, 국제정치의 핵심은 제국과 변방 세력 간 상하관계였다.

    물론 또 하나의 지리적 공간인 바다를 통해 또 다른 형태의 제국이 형성되기도 했다. 이들은 물길을 따라 원거리에서 귀한 상품, 즉 향료나 차·비단 등을 실어 와서 교역으로 부를 축적한 국가들이다. 이들 해양 세력은 교역으로 축적한 부를 통해 강한 해군을 양성하고, 이를 통해 자국의 해상 공급망을 방어하거나 혹은 타국의 그것을 탈취했다. 해양제국의 흥망은 이렇듯 바다에서 이뤄졌고, 역시 전쟁이 제국의 명운을 갈랐다.

    이들 해양제국은 교역을 통해 강대해졌기 때문에 제국 안팎에서 교역을 활발히 할 수 있게 하는 질서를 발전시켰다. 국제적으로는 원활한 교역을 위해 체결된 약속을 보장하고 이행할 수 있는 상대와의 관계를 발전시켰다. 통상이 중심인 현재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연원을 추적해 올라가면 이들 유럽 해양제국에 닿는다.

    해양에서 통상을 중심으로 발전한 해양제국의 질서가 투영·조응되는 국제질서가 만들어진 것과 마찬가지로 대륙에서는 제국권이라는, 제국의 질서가 투영·조응되는 국제질서가 만들어졌다. 여기까지가 제국, 전쟁이 중심인 전근대 국제질서다. 이 질서에서 강대국이란 자국에 유리한 지리적 조건을 확보하고 지켜내는,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한 제국이다.

    산업혁명發 제국주의에서 자유주의 국제질서로

    18세기 영국에서 촉발된 산업혁명은 근대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라고 할 수 있다. 농업은 많은 산업 가운데 하나로 바뀌었고, 사람들의 먹고사는 방식은 농업·교역·전쟁을 통한 탈취뿐 아니라 하나의 직업을 통해 얻은 화폐 소득으로 시장에서 필요한 것을 교환하는 형태로 바뀌었다. 본격적 자본주의 시장경제 시대로 들어선 것이다.

    철도 및 증기기관의 발명으로 육로·해로 모두에서 신속한 원거리 이동이 가능해졌다. 원거리 운송수단으로 다양한 상품을 넓은 범위에 실어 나를 수 있어 전국 규모 시장이 만들어졌다. 근대의 시작과 근대민족국가 형성은 이러한 광범위한 민족 단위 자본주의 시장이 만들어진 것과 궤를 같이한다. 국가는 산업화·시장화로 내달렸고, 이에 조응하는 국내법 및 제도를 만들어갔다. 가장 빠르고 성공적으로 이 길을 간 국가가 영국이고, 주변국들이 뒤이어 영국을 모방하면서 산업화의 길로 들어섰다.

    근대 초기엔 근대 민족국가 간 시장 확장 경쟁이 벌어졌고, 이는 곧 제국주의로 이어진다. 식민지를 탈취해야 시장이 커지고, 시장이 커져야 더 부강해지기에 당시 산업혁명을 이뤄낸 국가들은 제국주의 경쟁에 뛰어들었다. 경쟁 참여국들이 다양한 요인으로 인해 서로 충돌하면서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다. 시장이 분업과 가치사슬로 연결되면 윈-윈 경제성장이 가능하다는 지혜를 아직 얻지 못한 시기였다. 이에 국제질서는 하나의 시장으로 통합되지 못하고 제국이라는 배타적 경제권의 형성과 충돌로 귀결된 것이다.

    제국주의라는 근대로 전환하는 시기를 거친 뒤 1945년 이후엔 제국이 해체되고 새로운 근대 산업화 강대국 미국과 소련이 출현한다. 전자는 자본주의 산업화 강대국이고, 후자는 사회주의 산업화 강대국이다. 이들은 각기 자국의 국내 질서를 국제질서에 투영하고 이에 조응하는 국내 질서를 주변 국가에 심는 작업을 시작한다.

    소련은 사회주의 국가로 구성된 국제질서를 만들었다. 이에 대응해 미국도 자본주의 국가로 구성된 국제질서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요즘 말하는 ‘자유주의 국제질서’로 진화한다. 이 질서는 국제질서 전체에 자유롭고 개방된 국제시장과 보편 가치 기반 다자주의 질서를 이식한다. 보편 가치 기반 다자주의가 필요한 이유는 이것이 결여하면 시장에 불확실성이 증가해 시장 질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이러한 자유주의 국제질서에 조응하는 국내 질서가 다른 근대국가로 전파되는 과정에선 국제시장·국제여론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어떤 국가에서 반시장적 정책이 채택되거나 보편 가치가 보장되지 않으면 투자가 빠져나가고, 제재가 가해지며, 비판적 여론이 형성돼 해당 국가 집권 세력에 타격을 입힌다. 이런 학습과정을 통해 자유주의 국제질서에 잘 조응한 국가는 경제성장을 통해 이 질서의 주인공으로 떠오르게 된다. 한국과 대만, 중국 등이 그 예다.

    1954년 한 농촌에서 어린이들이 유네스코(UNESCO) 대원에게 교육을 받고 있다. 자유주의 국제질서에선 강대국이 약한 나라를 개발 원조하며 자유민주주의를 전파한다. [동아DB]

    1954년 한 농촌에서 어린이들이 유네스코(UNESCO) 대원에게 교육을 받고 있다. 자유주의 국제질서에선 강대국이 약한 나라를 개발 원조하며 자유민주주의를 전파한다. [동아DB]

    이는 자유주의 국제질서가 폭력적·야만적 국제질서가 아니라 자유민주주의를 유도하는, 진화한 국제질서라는 것을 시사한다. 가난하고 약한 나라를 식민지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개발을 돕고자 원조하고, 분쟁 지역엔 군대를 파견해 해결을 시도하는, 어떤 의미에선 ‘선(善)한’ 국제질서라고 할 수 있다.

    이와 달리 먹고사는 방식에서 제국주의를 대체한 사회주의 국제질서는 효용이 한계에 부딪히면서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반에 걸쳐 붕괴했다. 전 세계는 미국이 구축한 국제질서가 지구를 뒤덮는 세계화, 즉 세계가 하나의 자유롭고 열린 시장으로 연결된 본격적 자유주의 국제질서 시대로 돌입했다.

    한국, 충분히 강대국 될 수 있다

    이제 ‘지리적 요인’이 중요한 전근대 지정학적 국제질서를, 시장이라는 ‘인위적 공간’이 중요한 근대 자유주의 국제질서가 대체한 것이다. 이 질서 아래 강대국은 자유롭고 열린 시장의 발전에 가장 잘 조응하는 질서·시스템을 가진 국가다. 산업화 시기 강대국이 미국·일본 등 산업 강국이었듯 4차 산업혁명이 시장을 바꿔나가는 시기 강대국은 이 분야에 강한 국가가 될 것이다.

    IT 등 4차 산업혁명에 더해 기후변화에 대응하는 녹색산업, 에너지 전환 역시 앞으로 국제시장의 내용을 바꾸게 될 터인데, 이 시장을 비롯해 AI 발달로 생겨난 여가를 소비하는 문화산업에서 강한 국가가 미래의 강대국이 될 것으로 보인다.

    한국 국민은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 더 자유주의 국제질서에 잘 맞는 ‘자유시장형 국민’이다. 시장 변화에 맞춰 대학의 인기학과가 바뀌고, IT 시대에 들어서면서 벤처 붐이 일어나고, 문화산업에 관심이 쏠리면서 오디션을 보기 위해 전국에서 모인 젊은이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그만큼 시장에 민감하고, 시장을 따라가고, 시장에 온몸을 던질 줄 아는 국민이다. 반(反)시장 세력을 막아내고, 시장의 폭력에 대응하면서 자유주의 국제질서에 조응하는 국내 질서를 만들어나간다면 대한민국은 이 시대의 강대국으로 충분히 올라설 수 있다.

    이근
    ● 1963년 출생
    ● 서울대 외교학과 졸업, 미국 위스콘신대 정치학 박사
    ● 前 외교안보연구원(국립외교원) 교수
    ● 前 세계경제포럼(다보스포럼) 한국 위원회 의장
    ● 前 한국국제교류재단(KF) 이사장
    ● 現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 저서: ‘도발하라’ ‘대한민국 넥스트 레벨’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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