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거치며 높아진 ‘여당 견제론’
문재인에서 오세훈으로 갈아타다?
尹이 구사하는 적대의 수사(修辭)
“‘발목 잡기’ 도 넘었다 판단한 듯”
“유럽 극우도 민생 내세우거늘…”
“우파 운동권 됐다? 野에 호재”
윤석열 대통령이 8월 28일 인천 중구 인천공항공사 인재개발원에서 열린 ‘2023 국민의힘 국회의원 연찬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이날 윤 대통령은 “제일 중요한 게 이념”이라고 말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렌즈를 세대로 바꾼다. 방송 3사 출구조사 결과 30대(1983~1992년생)에서 윤 후보는 48.1%, 이 후보는 46.3%를 얻었다. 개표 결과와 가장 유사한 표심을 보인 세대다. 20대 이하에선 이 후보(47.8%)가 윤 후보(45.5%)를 앞섰다. 지역과 세대를 조합하면 어떨까. 서울의 30대에서는 55.5%가 윤 후보를, 39.6%가 이 후보를 택했다. 30대에서 윤 후보가 앞선 지역은 서울을 빼면 TK(대구·경북)와 PK(부산·울산·경남), 강원뿐이다. 전통적인 보수 강세 지역이다. 서울과 30대는 21대 총선까지만 해도 민주당 지지 성향이 강했다. 이를테면 이들은 정치학 용어로 스윙보터다.
한국의 스윙보터는 누구인가
최근의 지표는 여권 처지에선 위기감을 느낄 만하다. 한국갤럽은 매달 한 차례씩 ‘내년 국회의원 선거와 관련해 다음 중 어느 주장에 더 동의하십니까?’를 묻는 조사를 실시한다. 주어진 보기는 ‘현 정부 지원 여당 다수 당선’과 ‘정부 견제 야당 다수 당선’ ‘모름/응답거절’ 등 세 가지다. 총선에 대한 민심의 향배를 살피기에 용이한 데이터다. 8월 1주차 조사(8월 3일)와 9월 1주차 조사(9월 7일)를 비교하되, 초점을 서울과 30대로 좁혔다.정지혜·윤영관·윤왕희의 2021년 논문 ‘한국의 스윙보터는 누구인가?: 2017년 대선과 202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를 통해 본 무당파 유권자 분석’(‘의정논총’ 제16권 제2호)은 그런 의미에서 우리에게 유의미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민주당이 압승한 2017년 대선과 국민의힘이 압승한 202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를 비교해 서울의 표심 동향을 살피고 있어서다.
논문은 202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오세훈 국민의힘 후보를 택했으나, 2017년 대선에서 문재인(민주당), 안철수(국민의당), 유승민(바른정당) 후보에 투표한 유권자를 스윙보터로 봤다. 2017년 대선에서 홍준표(자유한국당), 2021년 보궐선거에서 오세훈을 택한 사람은 고정 지지층이다. 흥미롭게도 2021년 오세훈 투표자의 43.7%는 2017년 대선에서 문재인을 뽑았다. 이어 안철수(25.2%), 홍준표(17.7%), 유승민(9.8%) 순이다. 즉 오세훈을 서울시장으로 만든 유권자의 가장 큰 덩어리가 과거 문재인을 대통령으로 택했다.
말하자면 2020년대 들어 보수를 지탱하는 유권자의 상당수는 변심한 사람들이다. 바꿔 말하면 또 변심할 수도 있는 사람들이다. 대체 누굴까. 필자들은 이렇게 서술한다.
“스윙보터층의 연령은 20~30대가 가장 높은 비중(38.8%)을 차지하고 있으며, 40~50대(32.0%), 60대 이상(29.3%)으로 연령이 증가할수록 점점 비중이 줄어드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특히 다른 연령층과 달리 20~30대가 스윙보터층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전통적 보수층의 그것에 비해 2배 이상 높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중략) 스윙보터층은 중도 이념을 지닌 중산층 유권자가 대부분으로 선거 당시 사회적 이슈나 각 정당의 정책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다는 점을 데이터 분석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사기적 이념에 굴복하면 진보 아냐”
주목할 표현은 “사회적 이슈나 각 정당의 정책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대목이다. 8~9월 사이 스윙보터가 민감하게 반응한 이슈는 무엇이었을까. 여권발(發) ‘이념 전쟁’일 가능성이 높다. 주체는 다름 아닌 대통령 자신이다. 시간순으로 나열하면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8월 15일: “공산 전체주의를 맹종하며 조작 선동으로 여론을 왜곡하고 사회를 교란하는 반국가 세력들이 여전히 활개치고 있다. 공산 전체주의 세력은 늘 민주주의 운동가, 인권운동가, 진보주의 행동가로 위장하고 허위 선동과 야비하고 패륜적인 공작을 일삼아 왔다.”(윤 대통령, 제78주년 광복절 경축사)
8월 25일: “시대착오적인 투쟁과 혁명, 사기적 이념에 우리가 굴복하거나 휩쓸리는 것은 결코 진보가 아니다.”(윤 대통령, 대통령 직속 국민통합위원회 1주년 성과보고 인사말)
8월 25일: “북한을 대상으로 전쟁 억제를 하고 전시에 이기기 위해 필요한 인력을 양성하는 곳에서 공산주의 경력이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하느냐는 문제가 제기됐다.”(이종섭 국방부 장관, 국회 국방위원회 전체회의 중 육군사관학교 내 홍범도 장군 흉상 이전 관련 답변)
8월 28일: “철 지난 이념이 아니라 나라를 제대로 끌고 갈 수 있는 그런 철학이 바로 이념이다. 우리 당은 이념보다는 뭐 실용이다 하는데 기본적으로 분명한 이런 철학과 방향성 없이 실용이 없다.”(윤 대통령, 국민의힘 의원 연찬회)
8월 29일: “공산 전체주의 세력, 그 맹종 세력과 기회주의적 추종 세력들은 허위 조작, 선전선동으로 자유사회를 교란시키려는 심리전을 일삼고 있으며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윤 대통령,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간부위원과의 통일대화)
9월 1일: “아직도 공산 전체주의 세력과 기회주의적 추종 세력, 그리고 반국가 세력은 반일 감정을 선동하고, 캠프 데이비드에서 도출된 한미일 협력 체계가 대한민국과 국민을 위험에 빠뜨릴 것처럼 호도하고 있다.”(윤 대통령, 국립외교원 60주년 기념식 모두발언)
적대와 분노의 수사(修辭)다. 역대 대통령 중 색채가 가장 첨예한 단어를 구사한다. 대놓고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민주당이나 친(親)민주당 성향 시민단체 등을 겨냥한 뉘앙스가 읽힌다. 대선 경선후보 시절 “민주당에 생각 있고 뜻 있는 정치인들이 있다. 얼마든지 합리적인 대화가 가능하다”(2021년 10월 13일)고 한 점에 비춰보면 다른 사람처럼 보인다.
이에 대해 국민의힘 고위 관계자는 “대선 때만 해도 기회가 될 때마다 윤 대통령은 ‘민주당에도 양식 있는 정치인들이 많다’는 표현을 주변에 자주 꺼냈다”면서 “그런데 집권 후 민주당의 ‘발목 잡기’가 도를 넘었다고 판단한 것 같다. 그로 인한 반감이 (잇따른 ‘반공 발언’에) 영향을 미친 게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한편에서는 “(윤 대통령이) 뉴라이트 늦바람이 분 것 같다”(유인태 전 국회 사무총장)는 표현까지 나온다.
이동수 청년정치크루 대표는 “청년세대가 문재인 정부에 등을 돌리게 된 원인 중 하나가 검찰개혁과 남북 화해 등에 치중한 이념 정치”라면서 이렇게 부연했다.
“30대는 1980년대 중반~1990년대 초반 출생으로, 소련 해체 전후 태어난 세대다. 이들에게 반공은 소구력이 없는 이슈다. 이들은 IMF(국제통화기금)와 글로벌 금융위기 등 경제위기와 양극화를 겪은 세대다. 국정을 통해 노동시장 이중구조와 자산 격차 문제 극복에 집중하는 게 더 중요한 이유다. 유럽의 경우 프랑스 국민전선(RN) 같은 극우 정당이 에너지 부가세 인하, 고속도로 국유화 등 민생경제 공약을 내세워 돌풍을 일으켰다. 윤 대통령은 유럽 극우 정당보다도 과격하고 낡은 방식으로 이념 이슈를 주도하는 격이다.”
“이념 발언 더 나올 수도”
8월 29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대전 유성구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 내 홍범도 장군 묘역을 찾아 참배를 마치고 취재진 질문에 답하고 있다. [뉴스1]
거기다 ‘이념 전쟁’을 장기 지속하면 상황은 또 달라진다. 야권의 대표적 전략통인 최병천 신성장경제연구소 소장의 설명이다.
“탈권위적이고 개방적인 사람도 권력을 쥐면 비판적인 얘기를 피하게 된다. 하물며 대통령이라면 비판적인 얘기는커녕 주변에 ‘예스맨’이 우글거릴 수밖에 없다. 윤 대통령이 뒤늦게 ‘우파 운동권’ 내지 ‘뉴라이트 운동권’이 됐다는 해석이 유효하다면, 이것은 일회적이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이념과 관련한 발언이 두세 차례 이상 더 나올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민주당 입장에서는 호재다. 지난 정권을 거치면서 민주당에는 ‘이념 세력’이라는 딱지가 붙었는데, 되레 윤 대통령과 국민의힘이 이념을 강조하면 그것이 희석되는 효과를 누릴 수 있다. 윤 정부가 더 이념 편향적 정치세력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사 윤석열’의 질주는 민주당에 반전의 지렛대다. 대선과 지방선거를 통해 민주당이 두 차례나 심판받았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거야(巨野) 심판론 정서는 누그러졌다. 민생과 경제를 선거의 콘셉트로 삼으면 ‘이념 전쟁’과의 또렷한 균열선이 형성된다. 표심의 조타수인 서울과 30대부터 고심에 빠질 것이다. 관건은 민주당 지도부가 이것을 가능케 할 혁신 공천에 나설 의지가 있느냐다. 돌고 돌아 공은 민주당으로 넘어갔다. 윤 대통령이 한때 우군(友軍)이던 서울과 30대를 스스로 밀어내는 사이, 민주당에는 기회의 문이 열리고 있다.
[신동아 10월호 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