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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어붙은 남북관계 녹일 최후 보루는 음악” [+영상]

남북 오케스트라 협연 꿈꾸는 바이올리니스트 원형준

  • 박세준 기자

    sejoonkr@donga.com

    입력2023-11-29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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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차 세계대전 잠시 멈추게 한 음악의 힘

    • 남북 협연 위해 14년간 고군분투

    • 2015년 판문점서 만나자는 약속 지키지 못해

    • 2019년 北 소프라노 김송미와 협연

    [+영상] 북한 소프라노 김송미의 마지막 말



    1990년 1월 다보스포럼 회의장에는 14세 소년이 있었다. 포럼의 주제는 ‘새로운 세계질서’. 동독과 서독의 통일 문제도 다뤄졌다. 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동서독의 통일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소년은 포럼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했다. 린덴바움 페스티벌 오케스트라 음악감독이자 바이올리니스트 원형준의 이야기다. 그는 “이날의 연주가 계기가 된 것 같다”며 입을 열었다.

    바이올린 연주로 독일의 통일을 환영했던 소년은 고국으로 고개를 돌렸다. 중년이 된 지금은 남북으로 갈라진 한반도의 반목을 줄이려 힘쓰고 있다. 그가 찾은 도구는 음악이다. 2009년부터 남북한 클래식 협연을 위해 힘쓰고 있다. 그의 목표는 남북이 함께하는 정기 오케스트라 공연. 15년째 이 일에 몰두하고 있지만 아직 성공하지 못했다.

    대신 2019년 북한 소프라노 김송미와 협연에 성공했다. 남북 음악가의 협연은 중국 상하이와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두 차례 이뤄졌다. 그는 이때 음악의 힘을 실감했다. 협연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남북한 음악가의 첨예한 대립은 없었다. 악보로 약속한 음과 박자를 함께 짚는 데 집중했다. 이 과정에서 원 감독은 희망을 봤다. 수십 년 넘게 다퉈온 민족도 음악 앞에서는 편견 없이 함께할 수 있음을. 남북 협연을 위해 힘쓰는 그를 10월 31일 서울 충정로에서 만났다.

    원형준 린덴바움 페스티벌 오케스트라 음악감독. [조영철 기자]

    원형준 린덴바움 페스티벌 오케스트라 음악감독. [조영철 기자]

    독일까지 도우려 나섰지만 실패한 협연

    중년의 나이지만 원 감독은 지금도 소년 같은 모습이었다. 갈색 비니에 모직 재켓 차림에선 장난기까지 느껴졌다. 십수년간의 실패에도 아랑곳하지 않을 주관이 옷차림에서 엿보였다. 모자에 시선이 가자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TV 광고를 찍을 때 이 비니를 한번 써봤는데 주변에서 잘 어울린다더라고요. 그 이후로는 인터뷰 자리마다 쓰고 있습니다.”

    그가 음악을 남북 소통의 도구로 쓰는 이유도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 원 감독은 제1차 세계대전 개전 초기인 1914년 서부 전역에서 발생한 ‘크리스마스 정전’을 예로 들었다. 전장에 캐럴이 울려 퍼지자 전쟁 중이던 영국군과 독일군은 무기를 내려놓았다. 그는 “음악은 세계대전도 잠시 멈추게 할 만한 힘이 있다”며 “분단된 국가를 음악으로 통일할 수는 없지만, 분쟁을 잠시 멈추거나 줄일 수 있다는 생각에 이 일을 시작했다”고 밝혔다.

    원 감독은 음악의 힘을 믿고 2009년부터 남북 오케스트라 협연에 도전했다. 다양한 음악 중 굳이 클래식, 그것도 오케스트라를 선택한 이유가 있었다. 오케스트라는 경쟁이 아닌 협동으로 빛을 발한다. 원 감독은 교향곡을 연주하는 동안만이라도 남북이 협력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무턱대고 남북 오케스트라 협연에 도전했지만 넘어야 할 산이 많았다. 첫 단추부터 난관에 봉착했다. 북한 측 인사를 만나는 것부터가 불가능에 가까웠다. 북한 사람을 만나려면 통일부에 보고해야 한다. 문제는 이 보고 서류였다. 만날 사람의 이름, 직책, 나이, 연락처, 주소 등을 적어야 한다. 북한 측 초청을 받은 사람만 이 서류를 작성할 수 있는 구조다. 남북 협연이라는 아이디어만 가지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서류 준비에만 2년이 걸렸다. 처음 원 감독이 만난 북측 인사는 유엔 북한대표부 소속이었다. 원 감독은 평양에 사무실을 두고 있는 주한 스위스 대사와 벨기에 대사를 만났다. 이들을 통해 북한에 남북 협연 제안서를 전달했다. 지성이면 감천인지 유엔 북한대표부와 연결이 됐다. 2011년 6월에는 북한 문화성 산하 조선예술교류협회의 초청을 받게 됐다.

    북한에 갈 수 있을 줄 알았지만 무산됐다. 남북관계 경색으로 원 감독은 한국에 남아야 했다. 대신 린덴바움 오케스트라의 지휘를 맡았던 샤를 뒤투아 지휘자가 북한을 찾았다. 이때 서울과 평양에서 남북 청소년 오케스트라 합동 연주를 하겠다는 북측 동의를 받아 왔다. 잠정 공연일은 2012년 8월 15일이었다. 원 감독은 “북한 측은 10·4 공동선언을 기념하는 의미로 10월 4일에 하길 원했으나 정치적 입김을 배제하고자 우리는 8월 15일을 주장했다”고 말했다.

    남북 청소년 오케스트라 협연을 기다리던 중 북한에서 큰 사건이 터졌다. 2011년 12월 17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사망했다. 남북 협연은 무기한 연기됐다. 3년간 인고의 시간을 거쳐 2014년 다시 북한의 문을 두드렸다. 유엔 북한대표부 박철 참사를 통해 독일 통일 25주년을 맞이해 남북 합동 오케스트라 협연을 제안했다. 독일도 적극적으로 도왔다. 외교부 장관이던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 독일 대통령은 2014년 3월 한독 정상회담의 주제로 협연을 다루기로 약속했다.

    한독 정상회담 직후 남북관계는 급격히 경색됐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2014년 3월 28일 드레스덴 공대에서 남긴 연설이 발단이 됐다. 박 전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 이 시각에도 자유와 행복을 위해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는 탈북자들이 있습니다.”

    발언의 골자는 남북 협력이었지만 이 서두가 북측의 심기를 건드렸다. 결국 2014년의 협연도 북측의 반대로 실패로 돌아갔다.

    北은 약속을 지켰지만…

    원 감독에게 이 실패는 뼈아팠다. 드레스덴 연설 이후 그간 대북 소통 창구였던 유엔 북한대표부와 연락이 끊겼다. 원 감독은 포기하지 않았다. “명분을 만든다면 다시 협연을 추진할 수 있을 것 같았다”고 회상했다. 마침 2015년은 광복 70주년이었다. 시점은 좋았다. 문제는 장소였다. 독일은 실패했고, 서울도, 평양도 어려워 보였다.

    장고 끝에 묘수가 나왔다. 각자 영토에서 연주하되 가깝게만 모이면 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떠올린 것이 판문점이었다. 원 감독은 “남북이 각자 오케스트라를 결성한 뒤 한국은 최대한 북쪽으로 올라가고 북한은 최대한 남쪽으로 내려오면 된다는 생각이었다”며 “국경을 넘지 않으니 양국의 허가만 있으면 협연이 가능했다”고 말했다.

    이 기획은 주독 북한대사관을 통해 평양에 전달됐다. 린덴바움 오케스트라는 유엔군사령부, 국방부, 통일부를 설득했다. 연주할 곡은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 린덴바움 오케스트라는 교향악단을, 북한은 합창단을 준비하기로 했다. 이들이 만나는 날은 2015년 8월 15일. 70번째 광복절이었다. 린덴바움 오케스트라가 모집한 교향악단은 8월 13일 독립문에서 연주를 하고, 같은 날 북한 합창단은 백두산에서 공연한 뒤 출발해 이틀 뒤에 판문점에서 만나는 일정이었다.

    통일부는 이 기획의 성공 가능성을 낮다고 봤다. 통일부 관계자는 원 감독에게 “북한 일반인이 판문점에 마지막으로 내려왔던 게 1995년”이라며 “사람들이 내려올 가능성이 낮다”고 충고했다. 의외로 북한은 적극적이었다. 7월경 조선중앙TV가 남북 협연 기획을 보도하며 참여 의사를 밝혔다.

    8월 4일을 기점으로 한국 정부는 이 행사의 진행을 막았다. 경기 파주시 육군 제1보병사단 예하 수색대대 부사관 2명이 비무장지대(Demilitarized Zone·DMZ) 철책 통로에서 북한의 목함지뢰를 밟아 다리를 잃었다. 국방부와 유엔군사령부는 북한이 DMZ에 침범해 목함지뢰를 설치했다고 밝혔다. 8월 15일 교향악단 단원을 태운 버스는 경기 고양시를 지나 통일대교를 앞두고 멈췄다. 국방부가 남북 협연을 취소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2시간을 버스에서 기다렸으나 번복은 없었다. 교향악단 단원들은 판문점 대신 북한과 가까운 경기 연천군 백화면 석장리 미술관에서 연주를 했다.

    놀랍게도 북한은 약속을 지켰다. 원 감독은 “협연이 무산된 지 한 달여가 지난 뒤 우연히 일본에서 뉴스를 보게 됐는데 북한 합창단이 광복절에 판문점에 내려온 내용이었다”며 “우리가 가기만 했어도 남북 협연이 성사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연이은 실패는 또 다른 기회가 됐다. 음악 교류 실패 여정에 세계가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2016년부터 원 감독은 하버드, 옥스퍼드 등 세계 유명 대학 강단에 서 실패담을 알렸다. 강연 덕분에 원 감독은 2017년 12월 다시 유엔 북한대표부 인사를 만나게 됐다. 미국 학계 및 시민단체 관계자들이 원 감독을 도운 결과였다. 남북 협연의 기회는 끊어질듯 계속 이어졌다. 2018년 4월 원 감독은 북한 장애인예술단을 맡고 있던 리광선 서기장과 연이 닿았다. 그와 식사하며 남북 협연에 대해 대화를 나누던 중이었다.

    갑자기 리 서기장이 어딘가로 전화를 걸더니 원 감독에게 “소개해 줄 사람이 있다”라며 대뜸 원 감독을 데리고 나갔다. 이 자리에서 원 감독은 북측 김 소프라노 김송미를 처음 만났다. 남북 협연 추진 9년 만에 처음 만난 북측 음악가였다.

    김송미 소프라노와 원 감독은 이 자리에서 협연을 약속한다. 두 사람의 협연은 제주도에서 이뤄질 예정이었다. 당시만 해도 김정은 북한 노동당 총비서가 제주도에 방문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나왔기 때문이다. 2018년 9월 남북 정상회담에서 김정은은 한국을 방문하기로 약속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회담을 마친 뒤 기자회견에서 “백두에서 한라까지라는 말도 있으니 (김 위원장이) 원한다면 한라산 구경도 시켜줄 수 있다”고 말했다. 이 발언으로 김 위원장이 제주도 방문설이 불거졌다.

    2019년 5월 12일 중국 상하이 오리엔탈 아트센터에서 원형준 린덴바움 페스티벌 오케스트라 음악감독(왼쪽)과 북한 김송미 소프라노가 합동공연을 펼치고 있다. [린덴바움]

    2019년 5월 12일 중국 상하이 오리엔탈 아트센터에서 원형준 린덴바움 페스티벌 오케스트라 음악감독(왼쪽)과 북한 김송미 소프라노가 합동공연을 펼치고 있다. [린덴바움]

    모든 교류 다 끊겨도 음악은 남겨야

    김 위원장의 제주도 방문이 불발되며 연주할 장소가 사라졌다. 공연할 곳을 찾던 중 중국에서 연락이 왔다. 2019년 3월 중국 상하이 시티 심포니 오케스트라 지휘자 카오 펭이 두 사람에게 손을 내밀었다. 두 달 뒤에 자선 연주회를 여는데 이 자리에서 협연의 장을 마련해 준다는 이야기였다. 그렇게 2019년 5월 12일, 남북 첫 협연 날짜가 잡혔다.

    순조롭게 보이던 첫 협연에는 알려지지 않은 사정이 있었다. 협연을 나흘 앞둔 5월 8일 원 감독은 리허설을 하러 공연장을 찾았다. 이때 오케스트라의 악장이 그를 불렀다. 악장은 “참 힘들게 성사된 공연”이라며 입을 열었다. 중국 정부가 원 감독의 공연을 막아섰기 때문이다.

    2016년 주한미군의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erminal High Altitude Area Defense·THAAD) 배치가 문제였다. 원 감독은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만 해도 한한령(限韓令) 때문에 한국 유명 연예인도 중국 진출에 어려움을 겪던 시기였다”며 “한국인이 중국에서 연주하는 것 자체가 어려웠던 시절”이라고 설명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2019년 5월 4일 북한이 동해상에 미사일을 발사하며 남북관계까지 얼어붙었다.

    중국 정부를 설득한 것은 카오 펭 지휘자였다. 상업적인 연주가 아니라 자선 연주회일 뿐이니 협연하게 해달라 부탁한 것. 그렇게 연주가 진행되나 싶었지만 공연을 사흘 앞둔 2019년 5월 9일 북한은 또 미사일을 발사한다. 이번에는 북측에서 협연을 그만두라는 종용이 있었다. 김송미 소프라노가 극적으로 북한을 설득하며 협연은 성공적으로 마쳤다. 민간 주도의 남북 클래식 협연은 이날이 최초였다. 원 감독은 “중국과 북한의 방해에도 협연이 성사됐다”며 “협연이 정치적 의미보다는 화합의 장이 된다는 사실을 남북과 그 주변국에 알리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첫 성공은 다음 연주의 교두보가 됐다. 같은 해 9월 22일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두 사람이 다시 협연할 기회가 생겼다. 주중국 스웨덴 부대사의 부인이자 목회학 박사인 미셸 몹 앤더손(Michelle Mope Andersson)과 국제 오모던트 축제(Festival O/Modernt) 대표인 휴고 티시아티(Hugo Ticciati), 스웨덴 클래식 음악 교육기관인 릴라 아카데미(Lilla Akademien)가 두 음악가를 초청해 협연을 요청했다.

    원 감독은 쉽게 스웨덴행을 결정했으나, 문제는 김송미 소프라노였다. 일단 북한이 협연을 원치 않았다. 2019년 6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이 성과 없이 끝나며 남북관계가 악화됐다. 김 소프라노는 원 감독에게 “그날 공연에 설 수는 있지만 협연은 어려울 것 같다”고 알려왔다.

    공연 하루 전날 원 감독은 김 소프라노를 설득했다. 전 세계가 남북이 음악으로 소통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한다는 말에 김 소프라노는 결단을 내렸다. 공연 후 헤어지는 자리에서 원 감독은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남북관계가 경색되며 모든 분야의 남북 협력이 멈췄지만 음악만은 최소한의 소통 창구로 남아야 한다.” 그 말을 들은 김 소프라노는 “기회가 된다면 이 말을 김정은 국무위원장 앞에서 한번 더 해달라”며 자리를 떠났다.

    원 감독은 다시 한번 남북 협연을 성사시키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그는 “오랜 남북관계 경색으로 북한과의 대화 창구도 모두 닫혔지만,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생각으로 남북 오케스트라를 준비 중”이라 밝혔다.

    인터뷰가 끝날 무렵 그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남북 협연이 경제협력처럼 돈을 벌 수 있느냐는 질문이었다. 그는 크게 웃으며 “사실상 자원봉사”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수익은 없어도 보람은 있다. 남북관계가 아무리 경색돼도 정부가 아닌 사람은 음악으로 얼마든지 소통할 수 있다는 사례를 만들었다. 이제는 그 사례를 더 많이 더 자주 만들고 싶은 마음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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