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우그룹이 무너진 이유를 오너와 전문경영인의 관계와 연관지어 설명하는 이들도 있다. 대우 계열사의 회장을 지내고 지금은 B사 사장을 맡고 있는 O씨가 그렇다.
그에 따르면 김우중(金宇中) 대우 회장과 창업멤버들은 서로 호형호제하는 사이였다.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김회장을 깍듯이 모셨지만 술자리 같은 사적인 만남에서는 스스럼없이 ‘형님’ ‘아우’ 하는 사이였다. 이런 관계는 기업 경영에도 나타나 계열사 전문경영인인 창업멤버들이 김회장을 견제하는 긍정적인 효과를 낳았다.
“예를 들어 김회장이 해외에서 큰 사업을 따오면 자금 조달과 재무 책임자인 L씨가 사업 이행 여부를 결정했다. 김회장이 따온 사업은 대부분 추인됐지만 가끔은 L씨의 반대로 사업이 보류되기도 했다. 재무 전문가로서 판단한 것인만큼 김회장도 고집을 피울 수 없었다.”
하지만 바람직하던 이 관계는 90년대 중반 대우가 최고경영진을 젊은 층으로 교체하면서 성격이 달라졌다. 창업멤버들이 하나 둘 최고 의사결정 과정에서 배제되거나 일선에서 물러났고 이들의 자리는 김회장의 비서를 지낸 젊은 경영인들이 메웠다. 김회장과 나이가 비슷했던 창업멤버와는 달리 젊은 경영인들은 김회장보다 적어도 열다섯 살 이상 아래였다.
“세대교체가 분명 긍정적인 기능을 하는 게 사실이지만, 대우의 경우는 사정이 달랐다. 창업멤버들이 대우 관계사로 나가거나 아예 은퇴해버리자 자연히 김회장 혼자 모든 것을 결정하는 구조로 변했다. 요즘 창업멤버들끼리 만나면 ‘만일 우리가 대우에 그대로 있었다면 대우가 이렇게까지 되었을까’ 하고 한탄한다.”
이런 분석은 공감할 만하다. 김회장의 세계경영이 본격화한 90년대 중반부터 대우에서 버블현상이 감지되기 시작했다. 특히 재무 분야의 투명성이 떨어지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는 세대교체가 이뤄지면서 창업멤버들이 대우를 떠난 시기와 묘하게 맞아 떨어진다.
이명박은 2만1번째 경영자
한 기업의 오너와 전문경영인의 위상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일반인들은 그 차이를 피부로 느끼기 어렵겠지만, 오너와 전문경영인 사이에는 좀처럼 접점을 찾기 어려운 간극이 있다.
한때 ‘이명박(李明博) 신화’가 세인의 관심을 끌었다. 말단사원으로 입사해 35세에 사장 자리에 올랐고 마침내 현대건설 회장에 오른 이씨의 성공 스토리는 TV 드라마 소재가 되기도 했다.
현대 정주영 명예회장의 동생인 한라그룹 정인영(鄭仁永) 회장이 한 번은 “이명박 회장을 어떻게 평가하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러자 정회장은 “한국에 큰 기업이 모두 몇 개나 되느냐”고 반문했고, 2만개 정도가 기업다운 모양새를 갖추고 있다는 답을 듣자 정회장은 “그러면 이군은 2만1번째 경영자일 뿐”이라고 가볍게 받아넘겼다.
이회장이 비록 당대 최고의 경영인으로 찬사를 받았지만, 정회장의 눈에는 그가 경영의 최고책임자인 오너와는 비교할 수 없는 한낱 ‘능숙한 심부름꾼’ 정도로 비쳤던 것이다.
삼성전자가 세계 유수의 반도체 업체로 성장하는 데 가장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는 K씨. 그는 이병철(李秉喆) 삼성그룹 창업주가 자서전에 ‘그가 찬성했기 때문에 반도체 사업을 시작했다’고 썼을 만큼 신임이 두터웠다. 그런 그가 몇 년 전 석연치 않은 이유로 삼성전자를 떠났다. 삼성 관계자가 전하는 속사정은 이렇다.
당시 삼성전자는 사상 최대의 순익을 올릴 만큼 호황을 누리고 있었는데, 그래서 당시 사장이던 K씨의 목에는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다.
그 무렵 삼성전자는 매출이 신통치 않은 신라호텔의 객실 절반을 사용해 호텔 매출의 절반을 책임지고 있었다. 사실상의 계열사 지원이었다. 그러다 보니 K사장은 마치 신라호텔의 최고경영자처럼 행동했는데, 이에 대해 삼성의 오너 패밀리 가운데 한 사람이 그에게 강력한 경고 메시지를 보냈다고 한다. “삼성전자 사장이면 삼성전자 경영에나 신경 쓰지, 왜 신라호텔더러 이래라 저래라 하느냐”는 얘기였다. 더욱이 신라호텔은 이건희 회장 내외도 자주 찾는 곳인만큼 신라호텔을 쥐고 흔드는 것은 명백한 월권행위라는 것이었다.
이 메시지를 접한 K사장은 뒤늦게 자신의 행동을 해명하느라 백방으로 애를 썼지만, 그는 그 해 연말 그룹 인사 때 사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 인사조치가 신라호텔 건 때문이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적어도 그가 삼성전자의 오늘이 있기까지 기여한 바를 생각하면 그런 전격성 인사는 쉽게 납득할 수 없다.
오너 앞에선 왜 작아지는가
오너와 전문경영인의 위상 차이는 그들이 이끄는 회사의 규모나 산업에 끼치는 영향력과도 무관해 보인다.
93년 제2이동통신(지금의 신세기통신) 사업자 선정 때의 일이다. 재벌그룹 오너들이 회장단의 주축인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정부로부터 사업자 선정권을 위임받았다. 최종 후보는 포항제철과 코오롱그룹 컨소시엄. 사업자를 최종 결정하기 위해 전경련 회장단이 자리를 함께했다. 전경련 회장단 멤버이기도 한 이동찬(李東燦) 코오롱 회장이 사업자 후보 당사자로 참석했고, 정명식(丁明植·69) 포철 회장도 당사자 자격으로 자리를 함께했다.
공기업인 포철은 공정거래위원회가 지정한 대기업은 아니지만 자산 규모로 보면 재계 랭킹 5∼6위 그룹과 맞먹었다. 또한 기간산업의 주요 소재인 철강을 생산, 공급하고 있었던만큼 산업 전반에 끼치는 영향력은 1∼2위급이었다. 반면 코오롱은 자산 규모로 재계 20위권이었고, 섬유를 주 업종으로 하는만큼 산업에 끼치는 영향력도 포철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렇지만 이회장은 전경련 회장단과 함께 시종 밝은 표정으로 여유롭게 담소를 나누면서 결과를 낙관했던 데 비해 정회장은 허리를 반듯이 세운 채 무릎을 붙이고 깍듯한 자세로 일관했다. 마치 어려운 윗사람들을 대하는 자세였는데, 오너의 ‘영원성’과 전문경영인의 ‘일회성’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결국 자금력 등 사업능력에서 월등히 앞서는 포철이 1대 주주가 되긴 했는데, 그것으로 끝이 난 게 아니었다. 포철은 자신보다 지분이 불과 1% 적은 2대 주주 자리를 코오롱에게 내줘야 했다. 제2이동통신의 대주주 구성이 이렇게 된 게 오너인 이회장과 전문경영인인 정회장의 무게 차이 때문이었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한국의 전문경영인들이 하나같이 ‘오너 앞에만 서면 작아지는 존재’였던 것은 아니다. 경제발전 과정에 상당하게 이바지한 전문경영인도 적지 않다. 일부는 창업자 못지 않게 기업의 성장은 물론, 국가경제 발전에 견인차 노릇을 했다.
우선 전자 업종에서는 강진구(姜晉求·73) 삼성전기 회장(전 삼성전자 회장)이 삼성그룹을 대표하는 전문경영인으로 꼽힌다. 62년 동양방송에 입사, 삼성과 인연을 맺은 후 ‘전자산업을 맡으라’는 이병철 창업주의 지시에 따라 전자산업에 투신, 오늘의 삼성전자를 일으킨 한국 전자업계의 산 증인이다. 평사원으로 삼성에 입사해 회장직에 오른 첫 케이스.
98년 LG인화원 회장을 마지막으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이헌조(李憲祖·68) LG전자 고문은 강진구 회장과 함께 우리나라 전자산업을 이끌며 ‘별들의 전쟁’을 치렀던 전자업계 원로 전문경영인. 국내 전자업계의 ‘영업과장 1호’인 금성사 판매과장으로 출발, LG전자 회장에까지 올랐다.
전자업계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또 한 사람의 전문경영인으로 김광호(金光浩·60) 전 삼성전관 회장을 들 수 있다. 그는 98년 건강상의 이유와 후진 양성을 위해 퇴진하기까지 35년간 전자와 반도체 분야에서 한 우물을 판 경영인이다. 강진구 회장과 이헌조 회장이 가전 분야에 오래 몸담았던 반면 김회장은 반도체 분야에서 뼈가 굵어졌다. 삼성전자 수원·기흥공장 건설 당시 비만 오면 진흙탕으로 변하는 공사현장을 군화 차림에 오토바이를 타고 누벼 ‘워커와 오토바이’라는 애칭을 얻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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