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을 며칠 앞두고 경기도 파주시 교하면 야당리에 있는 송학식품을 찾았을 때 공장 곳곳에선 모락모락 올라오는 하얀 김 사이로 먹음직스러운 가래떡들이 끝도 없이 이어져 나왔다. 기다란 가래떡은 찬물에 담가 열기를 식혔다. 그런 다음 일정한 길이로 잘라 노란 상자에 가지런히 눕혔다.
떡을 떼던 아주머니가 정겹게 건네준 떡 한 조각을 입에 넣으니 쫀득쫀득하고 구수한 맛이 옛 추억을 떠올렸다. 눈을 돌려보니 말린 가래떡들이 자동 절단기를 거쳐 주정액(99% 술 원액)에 샤워한 후 포장돼 나가고 있었다. 다른 쪽 기계에선 냉면과 쫄면이 나오고 있었는데, 이것들은 발에 걸려 마른 뒤 주정액에 잠깐 담겼다가 바로 진공 포장됐다.
송학식품의 성호정(54·成浩貞) 사장은 “신정과 설은 가래떡의 최대 성수기이기 때문에 이 무렵엔 15∼20일 공장을 24시간 가동한다”고 했다. 이 시기엔 판매량도 평소보다 3배 이상 높은데, 설 보다는 신정 때의 판매량이 더 많다고 했다. 설날에는 신정보다 명절 기분이 더한데다, 가족들끼리 모여 앉아 떡을 써는 재미를 즐기려고 방앗간에서 직접 떡을 빼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겨울에 많이 나가는 제품이 가래떡과 만두라면 여름엔 단연 냉면과 국수다. 그래서 냉면과 국수 소비가 가장 많은 7~8월에도 20여일 동안 24시간 생산에 들어간다고 한다.
우리 전통식품 맛 내기에 40년. 부친에 이어 2대째 100여종에 달하는 우리 음식을 개발, 생산해온 송학식품은 동종 업체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회사로 맛과 품질면에서도 일찍부터 인정을 받아왔다. 올해로 4년째 육·해·공 3군에 떡국 떡을 독점 납품해왔고, 수제비와 국수 등은 92년부터 미국 일본 호주 중국 유럽 등지로 수출했다.
떡에서 누룽지까지
송학식품은 5000평에 달하는 경기도 파주의 제1공장과 2000평 규모의 충북 청원 제2공장에서 270여명의 직원이 연간 350억원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생산품목은 쌀떡(떡국, 떡볶이) 국수(건국수, 칼국수) 냉면 쫄면 당면 수제비 우동 만두 누룽지 김치 등.
국수류는 밀가루국수를 비롯해 쌀국수 보리국수 메밀국수 감자국수 쑥국수 도토리국수 등 10여종에 달하고, 냉면도 평양식 냉면과 함흥식 냉면 칡냉면 뽕잎냉면 녹차냉면 등 대여섯 가지나 된다. 이중 25개 품목은 OEM으로 하청을 주고 있는데, 한 하청 회사가 한 품목만 생산하도록 하고 있다. 품질과 위생 관리에 철저하기 위함이다. 이렇듯 다양한 제품으로 재래시장 점유율 1위를 차지하고 있지만 신제품 개발도 게을리 하지 않는다.
“연 매출의 5∼10%를 개발비로 투자하고 있어요. 10여가지 신제품을 개발하면 겨우 한 가지 정도가 상업적으로 성공하는데, 쓰던 기계를 이용해 신제품을 개발해도 상품화에 실패하면 5000만∼6000만원의 손해를 입게 돼요. 기계까지 새로 구입했다가 실패하면 1억원이 날아갑니다. 그렇다고 신제품 개발을 등한시하면 발전은 기대할 수 없죠.”
송학식품처럼 전통음식을 만드는 회사는 군소업체까지 전국에 100여개에 달해 이들보다 앞서가려면 꾸준한 연구를 통한 신제품 개발에 매진해야 된다는 것. 제품의 다양화는 경쟁력을 확보하는 첩경이기 때문이다.
슈퍼마켓이나 대형 할인매장에 가보면 가래떡 한 가지에도 다양한 상표를 단 제품들이 즐비하게 진열돼 있다. 이 때 소비자의 선택은 어느 회사의 이름이 더 눈에 익었는가에 달려 있다. 따라서 소비자의 다양한 기호를 충족시키는 여러 가지 제품을 선보임으로써 회사 인지도를 높여야 한다는 것이다.
‘송학(松鶴)’이라는 이름은 성사장의 부친 성귀현씨(78)의 아호에서 딴 것으로, ‘소나무와 학처럼 귀하고 오래 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주부들에게는 이미 친숙한 이름이다.
성귀현씨는 일본에서 식품사업을 하다 광복을 맞으면서 대구로 돌아와 한동안 고물상을 했다. 그러다 1960년 부산으로 내려가 동구 범일동에서 송학식품을 설립하고 국수를 만들기 시작했다. 성호정 사장이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1946년 경북 영천군 화북면 대천리에서 2남4녀의 맏이로 태어난 성사장은 아버지가 벌여놓은 사업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일에 파묻혀 살았다고 한다.
“다른 형제들은 다 놀러나가도 나는 놀지 못했어요. 중학교에 입학하던 해엔 아버님이 아예 거래처 중에서 스물 몇 군데를 떼주면서 배달에서 수금까지 책임지게 했습니다. 말이 ‘거래처’지, 대부분 ‘뻥튀기’ 장사를 하는 가난한 상인들이었어요(뻥튀기 재료가 밀가루에 사카린을 넣어 뽑은 국수였다).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사람들이니 수금이 제대로 될 리 없죠. 어떤 날은 미수금을 받으러 가보면 이사를 가버리고 없을 때도 있었어요. 이럴 때는 아버님께 혼이 났죠. ‘어떻게 거래처 사람이 이사를 가도록 모르고 있었느냐’고.
자전거 행상으로 재기 발판
대여섯 명의 직원을 데리고 시작한 부친의 사업은 성사장이 중학교 2학년이 됐을 무렵엔 직원이 50여명에 이를 만큼 번창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2년 후 공장을 넓힐 계획으로 공장 한 곳을 내놨다가 사기를 당하면서 사업은 기울기 시작했다. 부친은 3년동안 소송에 매달리느라 공장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 성사장이 고교를 졸업할 무렵엔 하나 남은 공장마저 남의 손에 넘어갔다. 남들 보기도 뭣해서 더는 부산에 남아 있을 수 없었다.
성사장이 배정고교를 졸업하던 해 그의 가족은 빈털터리인 채 서울로 올라왔다. 영등포구 신길동에 거처를 잡고 삼각지에서 뻥튀기 장사를 시작했다. 맏이인 성사장이 실질적인 업주였다.
뻥튀기 기계를 한 대 사다 놓고 과자를 만들어 하루는 수원, 하루는 인천으로 나가 팔았다. 자전거에다 뻥튀기 한 자루를 싣고 아침 일찍 출발하면 정오쯤 수원에 닿았는데, 그 때부터 구멍가게들을 돌며 과자를 팔았다. 한 자루를 다 팔고 나서 다시 자전거 페달을 밟아 집으로 돌아오면 밤 11시가 넘었다. 다음날엔 같은 방식으로 인천을 돌아다녔다. 그렇게 2년을 뛰어다녔더니 국수 뽑는 기계 한 대를 살 돈과 시장판에 작은 가게 하나를 얻을 돈이 생겼다. 다시 국수 장사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1970년 신길동 신남시장에 8평짜리 가게를 얻어 국수 기계 한 대를 놓고 온 가족이 국수 만들기에 나섰다. 성사장은 이때부터 대표자 명의를 자신으로 하고 아버지의 훈수를 받으며 사업을 꾸렸다. 가족들이 국수를 만들어 놓으면 국수를 내다 파는 일은 성사장 몫이었다.
“매일 아침 40관이나 되는 국수를 자전거에 싣고 상점들을 돌며 파는데, 다들 거래처가 있다 보니 거들떠보지도 않는 거예요. 하루는 아침에 들렀다 퇴짜를 맞은 ‘경남상회’라는 가게를 낮에 다시 찾아가서 사정을 했어요. ‘아침부터 돌아다녔는데 하나도 못 팔았다. 부산에서부터 국수를 만들었는데, 물건이 좋으니 일단 한 번 받아다 팔아봐라. 대신 밀가루를 당신 가게에서 소매가에 사다 쓰겠다’고. 한참 사정을 했더니 딱해 보였던지 가게 주인이 ‘놓고 가라’고 하더군요. 그렇게 첫 거래처를 뚫었어요.”
주인은 그 후 1년쯤 성사장과 거래하면서 그의 성실함에 반해 적극적으로 돕게 됐다.
그는 이렇게 주위의 도움을 받으며 차츰 기반을 잡아가기 시작했다.
그의 몸에 밴 절약정신도 사업을 일으키는 데 한몫 했다. 당시 국수가 가장 많이 팔리던 곳 중 하나가 남대문시장이었다. 노점 상인들이 점심으로 국수를 주로 사먹었는데, 성사장은 남대문에서 국수를 삶아 파는 가게를 거래처로 확보해 하루 80관씩 배달했다. 그 무렵 자전거에 국수를 가득 싣고 언덕배기를 오를 때면 아이들이 뒤에서 자전거를 밀어주고 10원씩 받았다. 성사장은 그 돈을 아끼려고 국수를 40관씩 나눠 싣고 두 차례씩 남대문시장으로 실어다 날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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