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교의 경제력과 관련해 주목해야 할 것이 동남아 화교다. 일본 후지쓰연구소가 몇 해 전 동남아 5개국의 상장주식 중 화교가 보유하는 주식의 점유비율을 조사한 결과 태국은 81%, 싱가포르 81%, 인도네시아 73%, 말레이시아 61%, 필리핀은 50%로 나타났다. 특히 인도네시아, 필리핀, 태국은 인구 구성비에 비춰볼 때 화상의 막강한 자본력이 두드러진다.
전세계 화상 가운데 최고의 부자는 홍콩 허치슨왐포아와 장강실업의 대주주이자 회장인 리자청이다. 그는 1928년 광둥성 차오저우(潮州)부의 산터우에서 태어났다. 세계에서 화교를 가장 많이 배출한 5대 지역에서도 인구나 경제력에서 선두그룹을 형성하고 있는 차오저우방의 세계적인 리더다.
교사 출신인 그의 부친은 초등학교 교장을 지냈으나 중일전쟁이 발발한 1939년 전란을 피해 홍콩으로 이주했다. 부친은 리자청이 14세 때 과로로 쓰러져 사망했고, 장남인 그는 학업을 포기하고 임시 공원으로 일하면서 가족을 부양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종전되던 1945년, 그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면서 푼푼이 모은 7000홍콩달러로 조그마한 플라스틱 공장을 열었다. 17세 때였다. 이 회사가 장강공업공사로, 현재 리자청 기업집단의 핵심기업인 장강실업의 모태가 된다. 이 회사가 만든 플라스틱제 완구와 생활용품은 세계적으로 히트해 1957년엔 회사 매출이 1000만홍콩달러 규모에 달했다. 1950년대 후반 유럽에는 플라스틱으로 만든 꽃이 큰 인기를 얻어 수출량이 급증했다. 덕분에 그는 업계로부터 ‘화왕(花王)’이란 별명을 얻는다.
그는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1958년 홍콩섬의 북단인 북각지역에 토지를 매입, 12층짜리 건물을 지어 부동산업에 뛰어든다. 1967년 홍콩에서 좌파의 폭동으로 땅값이 폭락하자 싼값에 많은 토지를 매입했다. 1972년 홍콩 주식시장이 최초로 호황기를 맞자 장강공업공사를 상장했고, 주식시장을 통해 조성한 자금을 다시 부동산 투자에 쏟아부었다. 그해 장강의 자산액은 5억3000만달러에 달했고 업계에선 그를 ‘슈퍼맨 리’라 불렀다.
초인적 노력, 미래 안목, 적시 투자
1979년 리자청은 홍콩상하이은행그룹의 허치슨왐포아그룹 주식 22.4%를 취득했고, 1985년엔 영국계 대기업 이화양행이 재정위기에 빠지자 이 기업이 소유한 홍콩전등공사 주식 23%를 확보해 경영에 참여한다. 이어 그는 사업영역을 해외로 확대한다. 1986년 캐나다에 진출, 허스키석유 주식 과반을 확보하며 경영권을 장악했다. 2년 뒤 홍콩의 화교 사업자인 리자오지(李兆基), 정위(鄭裕?)과 함께 캐나다 밴쿠버 세계박람회 개최지 개발권을 확보했다. 유럽의 통신사업에도 뛰어들었다.
리자청은 사업범위를 부동산, 항만, 창고, 유통, 통신 분야로 다각화했고 사업지역도 아시아에서 북미주, 유럽, 호주 등 전세계로 확장했다. 중국에도 베이징의 장안가에 ‘동방광장’이란 거대한 건물을 짓는 등 투자를 늘리고 있다. 중국 투자(계획포함)는 200억달러에 육박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2000년 ‘포브스’ 보도에 따르면 리자청 일가의 재산은 91억달러로 세계 화교 중 최고의 거부다. 그는 자신의 초인적인 노력과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 적시 투자, 뛰어난 경영감각으로 세계 최고의 화상으로 부상했다.
수하르토 대통령이 권좌에서 물러나기 전까지 인도네시아의 최대 화교재벌은 린사오량(林紹良) 살림그룹 회장이었다. 그는 1916년 푸젠성 하이커우(海口)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이른바 ‘푸젠방’이다. 고향 사숙에서 공부하고 부친이 경영하던 국수가게에서 일하다가 22세 때 고향이 수재에 이어 전란에 휩싸이자 징병될 것을 우려해 인도네시아로 이주했다. 숙부가 경영하는 식료품점의 점원으로 4년간 일하고 이후 형제, 친구들과 함께 두부, 콩나물, 의약품, 의류 장사를 하면서 힘겨운 나날을 보냈다.
그는 전란 시기에 장사를 하려면 물품의 안전한 수송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봤다. 자신이 취급하는 상품 가운데 의약품과 식량을 군에 제공하는 대신, 자기 물건을 안전하게 운반할 수 있게끔 군의 도움을 받았다. 그 과정에서 그가 절친한 관계를 맺은 군인이 바로 중부 자바섬에 주둔했던 제4군구의 수하르토 중령이었다. 1950년대 초기 중부 자바에서 자카르타로 옮겨온 린사오량은 방직제품을 군대에 납품하기도 하고 자전거 부품에도 손을 댔다.
권력을 장악한 수하르토는 오랜 친구 린사오량에게 많은 특권을 주었다. 살림그룹 성장의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은 밀가루의 독점 가공판매와 정향을 독점 수입하도록 한 것이다. 밀가루는 2억명 인도네시아인의 주식이고, 정향은 담배 제조에 필수적인 재료다. 그는 아시아에서 가장 큰 시멘트회사를 건립, 국내 시멘트 수요의 40%를 담당했다. 주로 인도네시아 국민의 의식주와 관련된 산업으로 큰돈을 거머쥐고 이를 바탕으로 그는 홍콩에서 금융회사를 인수, 제일태평금융공사로 개명했다.
다시 이를 제일태평그룹으로 확장해 금융업과 함께 전세계적인 사업다각화에 나선다. 살림그룹은 아시아 금융위기가 오기 전 계열사가 640여 개에 연간 매출액이 200억달러에 이르는 거대 기업군으로 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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