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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진 ‘아파트 왕국’ 우방, 5년 만에 부활의 노래

1조원 공사 수주, ‘유쉘’ 브랜드로 정상 재등극 시동

무너진 ‘아파트 왕국’ 우방, 5년 만에 부활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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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낯설지 않은 이름 ‘우방’이 다시 일어선다. 5년 전 부도를 낸 우방은 1990년대 말 아파트 공급량과 기술력에서 단연 국내 최고였다. 우방은 지난 2월 법정관리를 졸업하고 8개월 만에 1조원대 공사를 수주했다. 변재신 우방 사장은 “최고급 아파트로 정상에 다시 오르겠다”고 자신한다.
무너진 ‘아파트 왕국’ 우방, 5년 만에 부활의 노래
최근‘경기도 고양시 일산 신도시에서도 10억원이 넘는 아파트가 등장했다’는 뉴스가 보도됐다. 1993년 입주한 일산 마두동 강촌마을 우방아파트 59평형, 68평형이 그 주인공이다. 지은 지 12년이 지났는데도 ‘우방’ 브랜드가 오늘날 일산의 최고가 아파트가 된 사실에 ‘우방맨’들은 1990년대의 ‘화려했던 영화’를 다시금 떠올린다.

(주)우방은 대구지역 건설회사로 출발했다. 그러나 연배가 30대 이상이라면 전국 어디에 살더라도 ‘우방’ 브랜드가 낯설지 않다. 그만큼 1990년대 우방의 성장은 지방기업의 모범이라 할 만큼 눈부셨다.

그러나 2000년 우방은 급작스럽게 부도를 맞았다. 시민이 일어나 ‘우방 해체’만은 막았다. 법정관리에 들어가는 등 지난 5년은 ‘우방’에 기나긴 세월이었다. 마침내 올해 쎄븐마운틴그룹에 인수되면서 법정관리가 끝났다. 그 직후 우방은 대규모 공사수주 실적을 올리며 ‘유쉘(usell)’이라는 새 브랜드를 내걸고 부활했다. 이 회사만큼 기업의 ‘흥망과 재기’ 과정이 드라마틱한 경우도 드물다.

10월7일 대구 북구 (주)우방 본사에서 이 회사 대구사업부문 변재신(卞在信·63) 대표이사 사장을 인터뷰했다. 그는 지난 6월1일 서울사업부문의 김영웅 대표이사 사장과 함께 공식 부임했다. 변 대표이사에게서 환희과 좌절, 희망이 교차하는 우방의 과거와 현재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대구사업부문 대표이사’라는 직함이 조금 생소한데요.



“우방은 서울사업부문과 대구사업부문에 각각 대표이사를 두고 협업체제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각 지역의 아파트 건설 등 여러 사업을 수행하면서 의사결정을 신속히 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방은 아파트 건설회사로서는 역사가 깊다고 알고 있습니다.

“우방은 1978년 대구에서 설립됐습니다. ‘(주)우방주택’이라는 이름으로 대구시 수성구 만촌동에 단독주택 16가구를 지은 것이 첫 사업이었죠.”

1997년 순이익 1위, 공급량 2위

당시만 해도 우방은 군소 건설회사에 불과했다. 1980년 우방은 대구에 아파트(동부우방아파트) 30가구를 지으면서 아파트 사업에 뛰어들었다. 1981~82년에는 313가구의 아파트를 건립했다. 수백가구에 달하는 대단지 아파트라는 개념이 없던 시절이었다. 지방 건설사로서는 드물게 새로운 영역에 도전한 셈이었다.

1980년대 말부터 90년대 초 수도권에서 본격적으로 진행된 신도시 건설 붐을 타고 우방은 수도권을 비롯해 전국으로 사업영역을 확장했다. 1995년부터 아파트 공급과잉 현상으로 아파트 건설업체 사이에 경쟁이 치열했지만 우방은 고도성장을 구가했다. 우방은 1995년부터 99년까지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당시 우방이 거둔 성과는 숫자로 증명됩니다. 우방은 1986년 대구지역 내 주택보급 실적 1위에 오른 데 이어 1989년에는 주택건설 실적 전국 2위에 올랐습니다. 지방에 본사를 둔 건설회사로서 대기업 계열 건설사들과 치열한 경쟁을 벌여 이뤄낸 괄목할 만한 성과였습니다. 우방의 상승세는 그후 10년간 지속됐습니다. 1997년엔 전국 건설업체 가운데 상반기 순이익 1위를 기록했죠. 같은 해 아파트 공급량에선 전국 2위를 차지했습니다. 이런 놀라운 성과는 2000년 우방이 부도나기 직전까지 이어졌습니다.”

-1990년대에 그렇게 많은 주택건설 실적을 올릴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방아파트엔 예나 지금이나 ‘거품’이 없습니다. 철처하게 고객 중심으로 지었습니다. 집은 이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살기에 편해야 합니다. 실제 거주하기에 가장 좋은 아파트를 만들려고 노력했습니다. 당시의 실적은 그런 노력을 소비자들에게 인정받은 결과였습니다. 대구에서 퍼진 ‘입소문’이 영남의 다른 지역으로, 수도권 신도시로, 나아가 서울로 확산됐습니다. 기술경쟁에서도 우방은 최고를 지향했습니다. 이런 까닭에 비록 지방 기업이지만 전 국민이 우방을 신뢰하게 됐습니다. 덕분에 아파트를 건설해달라는 주문이 쇄도했고 분양도 잘되니 실적이 올라갈 수밖에 없었지요.”

인지와 신뢰도가 대기업에 비해 상대적으로 취약한 상태에서 출발한 지방기업이 대기업과 경쟁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인구가 많은 영남지역에서 ‘지역 연고 기업’이라는 이유만으로 독점 공급의 특혜를 누린 덕분이 아니냐고 의심할 법도 하다. 그러나 변 사장은 “우방은 오직 기술력으로 정정당당히 승부해 소비자의 호감을 샀다”고 말한다. 소비자의 처지에서 볼 때 고가의 상품인 아파트를 선택하면서 시공사의 지역 연고까지 염두에 둘 것 같지는 않아 보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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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만섭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mshu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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