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포토라인은 캐논과 니콘의 ‘첨단기술’ 경연장이다. 흰색 망원렌즈는 캐논, 검은색은 니콘이니 쉽게 구별할 수 있다.
2002년 한일월드컵 한국팀의 첫 경기 폴란드전이 열린 부산 아시아드경기장. 당시 캐논 카메라의 국내총판을 맡고 있던 LG상사 지홍민 과장(현 지논코퍼레이션 대표)은 경기가 시작되기도 전에 팀원들을 얼싸안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월드컵 첫 승을 확신해서가 아니었다. 사진기자들이 밀집한 포토라인에 ‘하얀 대포’들이 대거 포진해 있었기 때문이다.
축구장 포토라인엔 300~500mm 망원렌즈(일명 ‘대포’)를 장착한 카메라를 든 사진기자들이 몰려 있게 마련인데, 어떤 메이커의 촬영장비인지를 한눈에 알 수 있다. 캐논은 렌즈 경통이 흰색이고 니콘은 검은색이다. 그런데 이날은 흰색이 대다수였다. 지 대표는 “2002년 이전 국내 포토라인엔 ‘검은색’이 주류였는데 이날은 ‘흰색’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캐논이 한국 언론시장에서 ‘첫 승’을 거둔 날이었다”고 회고했다.
올림픽, 월드컵 등 대형 스포츠 이벤트를 취재하는 사진기자들이 어떤 촬영장비를 들고 있느냐는 캐논과 니콘 마케터들에게 초미의 관심사다. 대형 스포츠 경기는 세계적인 자동차 경주인 포뮬러1(F1)에 견줄 만하다. 자동차 회사들이 F1을 통해 자사의 기술력을 과시하듯, 캐논과 니콘은 올림픽, 월드컵 등을 통해 자사의 첨단기술을 선보여왔다. 언제부터 캐논과 니콘이 올림픽과 월드컵을 점령했을까. 첨단 이미징(Imaging) 기술은 왜 일본이 주도하고 있을까.
양사의 카메라 개발은 1930년대부터 시작됐다. 일본인들은 ‘모방의 천재’답게 독일 카메라들을 따라 만들면서 광학기술과 메커니즘 기술을 축적했다. 이들이 롤 모델로 삼은 메이커는 ‘라이카’와 ‘콘탁스’.
독일 카메라 모방으로 시작
‘손으로 들고 찍을 수 있는’ 첫 번째 카메라 ‘Leica UR’. 35mm 필름 카메라의 원형이다.
이 무렵에 나온 카메라들이 오늘날 콤팩트 카메라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거리계 연동식’(Range finder·이하 ‘RF’) 카메라로, ‘콘탁스1’과 ‘라이카2’가 그것이다. RF 카메라엔 삼각측정법을 이용한 거리 측정기가 내장됐다. 삼각측정법은 군대의 포병이나 토목공사 기사들의 측거기를 응용한 것인데 뷰파인더를 통해 두 이미지를 일치시켜 초점을 맞추는 방식이다.
캐논과 니콘은 이들 소형 독일 카메라에 충격을 받고 카메라 개발을 꿈꾼다. 1930년대 당시 일본에서 라이카는 400엔 이상에 판매됐다. 은행에 취직한 유명대학 졸업생 평균 초임이 월 70엔이던 시절이다. 캐논과 니콘은 개발만 하면 가격 경쟁력이 충분하다고 보고 라이카와 콘탁스를 분해해 복제를 시도한다.
1930년대는 일본의 군국주의와 독일의 히틀러 제국주의가 동맹을 맺기 시작할 무렵인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군사동맹이 기술제휴로 이어져 양국은 비약적인 공업 발전을 이루게 된다. 캐논은 라이카로부터, 니콘은 콘탁스로부터 기술을 이전받아 카메라 산업에 뛰어든 것.
필자가 카메라를 처음 만져보던 시절, 니콘과 캐논은 렌즈의 초점 림, 조리개 림, 줌 림이 서로 반대 방향으로 돼 있어 의아했다. 캐논은 오른쪽으로 갈수록 큰 수치가 적혀 있는데 니콘은 이와 반대였다. 알고 보니 이유는 간단했다. 독일의 라이벌 기업이던 라이카와 콘탁스의 렌즈 방향이 서로 달랐기 때문이다. 캐논과 니콘은 이런 세세한 부분까지 몽땅 모방해 카메라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 무렵 카를 차이스는 회사명을 ‘자이스 이콘(Zeiss Ikon)’으로 바꿨는데, 심지어 니콘은 회사 이름까지 모방했다. 이콘(Ikon) 앞에 ‘N’을 붙인 것. 1917년 ‘일본광학공업주식회사’로 시작한 니콘은 1946년부터 카메라 브랜드를 ‘니콘’으로 바꾼다. N은 ‘닛폰’(Nippon·日本)의 약자로 알려져 있다.
니콘은 1920년대부터 쌍안경과 현미경을 만드는 등 본격적인 광학제조사의 위용을 갖췄지만, 캐논은 광학기술의 토대 없이 1930년대부터 곧바로 카메라 메커니즘에 도전한다. 창업자인 요시다 고로 회장은 불교에 심취해 있었고 특히 관음보살을 좋아해 첫 카메라(라이카 복제품)에 ‘Kwanon’(콰논·‘觀音’의 일본식 발음)이란 이름을 붙였다. ‘Canon’이란 이름은 1936년부터 썼는데 ‘콰논’을 외국인이 발음하기 쉽게 바꾼 것이다(일본인들은 ‘캬논’이라 한다).
라이카 ‘M3’의 충격
캐논의 첫 카메라는 ‘한사 캐논’이라고 명명되는데, 재미있는 것은 렌즈를 니콘으로부터 조달받았다는 사실. 니콘의 50mm 렌즈를 장착했다. 카메라 메커니즘은 캐논, 광학 분야인 렌즈는 니콘이 각기 맡아 사실상 일본의 첫 상용화 카메라를 개발했다는 것은 상징적 의미가 있다. 이름에 ‘한사’가 붙은 것도 중세 유럽 도시 상인 조합처럼 캐논과 니콘이 손을 잡은 것을 의미했다. 이 당시엔 양사가 향후 수십 년 동안 서로 세계 카메라 시장 패권을 두고 치열한 경쟁을 벌일 라이벌로 성장할 것이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캐논 렌즈의 초점 림과 줌 림(왼쪽). 오른쪽은 라이카 렌즈의 조리개 림과 초점 림. 렌즈를 위에서 보면 라이카와 캐논은 오른쪽 방향으로 수치가 커진다. 콘탁스와 니콘은 이와 반대로 돼 있다.
라이카의 기술을 거의 따라잡았다고 여겨온 일본 카메라 메이커들은 다시 충격을 받는다. 앞차의 뒤만 쫓아서는 절대 앞설 수 없었다. 추월하기 위해서는 차선을 바꿔야 했다. 새로 옮겨간 차선은 SLR(Single Lens Reflex·단일 렌즈 반사식) 시장이었다.
일본의 중소 광학회사 아사히는 동독 카를 차이스의 ‘콘탁스S’에 주목해 SLR이라 명명한 새로운 방식의 카메라를 내놓는다. 이름은 펜탁스(Pentax). ‘아사히 펜탁스’의 등장은 카메라 시장을 뒤흔들 일대 사건이었다. SLR은 사용자가 뷰파인더로 사진이 찍히는 모습 그대로를 볼 수 있는 커다란 장점이 있다. 렌즈 바로 뒤에 거울이 있어 렌즈를 교환해도 뷰파인더를 바꿀 필요가 없다.
카를 차이스는 1930년대부터 이런 방식의 카메라를 연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2차대전이 끝나가던 1945년 2월 동독 드레스덴에 있던 카를 차이스 공장이 연합국의 폭격을 받은 데다 독일이 분단되면서 카를 차이스 기술자들이 대거 서독으로 넘어가 카를 차이스는 서쪽과 동쪽에 각각 같은 이름의 회사로 남게 된다.
최초의 SLR은 1949년 동독의 카를 차이스가 내놓은 ‘콘탁스S’인데, 공산주의 사회이다보니 대중성을 얻기 힘든 ‘저주받은 걸작’이 되고 말았다. 일본의 아사히는 이 카메라에 주목했다(브랜드 명인 ‘펜탁스’는 ‘콘탁스’와 발음이 비슷하다). 라이카를 능가하고 싶었던 서독의 카를 차이스도 1955년 ‘Contarex’ 를 내놓는다.
RF 시대에서 SLR 시대로
캐논 ‘T90’ (1986년). 카메라 디자인에 곡선을 도입했다.
라이카는 1965년 ‘Leicaflex’를 내놓고 SLR 시장에 뛰어들었고 이후 ‘R’시리즈를 발매했지만 대중적 인기를 크게 얻지는 못했다. 렌즈의 품질은 최고였지만 일본 제품에 비해 가격, 편의성 등이 떨어졌다.
1960년대 들어 카메라 시장은 확실하게 RF에서 SLR로 넘어간다. 우리가 흔히 ‘수동 카메라’로 부르는 카메라가 SLR 방식이다. 캐논과 니콘이 SLR 시장을 장악하면서 이후 카메라 시장의 역사는 캐논과 니콘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게 됐다.
경쟁 초기에는 니콘이 한발 앞서 나갔다. 라이카와 콘탁스를 무색하게 만든 ‘F’를 내놓은 뒤 자사 최고 기술력의 정통 계보를 잇는 적자(嫡子)들을 ‘F’ 시리즈로 명명했다. 1971년 ‘F2’, 1980년 ‘F3’, 1988년 ‘F4’, 1996년 ‘F5’에 이르기까지 내놓는 SLR마다 전문 사진가들의 필수품으로 사랑받는다. 특히 F4는 셔터다이얼, 조리개, 링 등 기존 기계식 카메라의 인터페이스를 그대로 쓰면서도 자동노출 등 전자식 카메라의 편의성이 더해져 사진가들에게 ‘완벽한 카메라’라는 찬사를 들었다.
캐논은 니콘의 F 시리즈처럼 확실한 전문가용 SLR로는 인정받지 못했지만 대중적인 인기는 더 높았다. 제품 스펙트럼이 워낙 다양한 데다 아기자기한 기능이 많았기 때문. 그래서 ‘니콘=전문가용, 캐논=아마추어용’이라는 인식이 확산됐다. 하지만 영원한 1등이 없듯 영원한 2등도 없는 법.
1959년에 생산된 니콘 ‘F’.
니콘과 캐논 외에도 아사히펜탁스, 올림푸스, 미놀타, 야시카 등 일본 카메라 업체들은 일본의 급속한 경제성장에 힘입어 세계 시장을 싹쓸이하다시피 했다.
캐논의 일대 모험
1985년 SLR 시장에 일대 변혁이 예고되는데 서막은 엉뚱하게도(?) 미놀타가 열었다. 도둑처럼 조용히 시작됐으나 곧 벼락처럼 대격변을 불러온다. 1985년 실질적인 세계 최초의 자동초점(AF) SLR인 ‘미놀타 α(알파)-7000’이 등장한 것이다. 초기엔 생소한 기능에 사진가들조차 반신반의했으나 카메라 엔지니어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AF 렌즈는 이미 개발돼 있었다. 하지만 렌즈마다 따로 전동모터가 달려있다 보니 렌즈가 크고 속도가 느린 데다 제조 단가가 높아 ‘쓸데없는 기술’로 인식되고 있었다. 이듬해 니콘도 재빨리 AF SLR ‘F501’을 내놓았다.
캐논은 졸지에 후발주자가 되고 말았다. AF SLR이 시장의 대세가 될 것으로 판단한 이상 물러설 수는 없었지만 이왕 늦은 것, 더욱 완벽한 카메라를 만들겠다며 연구에 매달린 끝에 ‘모험’을 감행하기로 결정했다. 기존의 카메라 마운트(렌즈와 카메라의 접합부분)로는 제대로 된 AF 렌즈를 못 만든다고 보고 전혀 새로운 시스템을 준비한다.
그 결과가 ‘EOS’ 시리즈인데, ‘Electric Optical System’의 약자다. 이름처럼 카메라를 완전한 전자기기 개념으로 본 제품이다. 새 렌즈는 마운트가 달라 기존 카메라에는 장착할 수 없었고 이 때문에 기존 캐논 사용자들은 크게 반발했다. 전문가뿐 아니라 수준 높은 아마추어들도 렌즈를 2~3개씩 갖고 있게 마련인데, 새 카메라에는 이들 렌즈를 전혀 활용할 수 없었다(니콘은 AF 방식의 새 카메라에도 옛 렌즈를 끼울 수 있었다). 이런 비난을 각오하고 캐논 경영진이 어떻게 이런 결정을 했는지, 엔지니어들이 어떻게 경영진을 설득했는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캐논의 목표는 완전히 새로운 SLR에 있었다.
캐논은 1987년 ‘EOS 650’, 1989년 ‘EOS-1’을 내놓고 전문가용 SLR 시장의 최고봉 등정에 나섰다. EOS 시리즈는 외관부터 독특했다. 전신인 ‘T90’처럼 둥글둥글한 디자인에 그립 등을 울퉁불퉁한 고무로 감쌌다. 또 셔터다이얼, 조리개 림 등을 없애 ‘전자식 카메라는 기계식과 다르다’는 점을 강조했다. 촬영과 관련된 모든 정보를 디지털 패널로 보게 했으며, 오른손 검지와 엄지만으로 셔터 속도와 조리개를 조절할 수 있도록 했다. 특히 카메라 뒤판에 설치해 엄지로 조작하게 한 다이얼 인터페이스는 오늘날의 디지털 카메라들도 쓰고 있다(물론 조리개보다는 전후좌우 조작 버튼으로 쓰이지만).
하지만 캐논의 진정한 ‘SLR 혁명’은 AF였다. 기존의 AF 모터는 적외선을 이용해 톱니로 렌즈를 돌리느라 ‘윙윙’하는 둔탁한 기계음을 내고 속도가 느렸으며 움직이는 물체는 사실상 촬영할 수 없었다. 이에 캐논은 초음파를 반사시켜 구동하는 USM(Ultra-Sonic Motor) 렌즈를 선보였는데 AF 속도에 근본적인 혁신을 가져왔다.
특이 이 기술은 300mm 이상의 망원렌즈에서 뛰어난 효과를 보였다. USM 렌즈의 출현은 스포츠 사진에도 변혁을 불러왔다. 손으로는 도저히 맞출 수 없는 초점까지 정확히, 그것도 1초에 5~8컷을 순간적으로 오차가 거의 없이 맞춰주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신문 스포츠면에 선수들 표정까지 큼지막하게 편집된 사진이 실렸다. 주요 스포츠 경기장의 포토라인이 검은색에서 흰색으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궁지에 몰린 니콘은 1996년부터 캐논의 USM 특허 일부를 로열티를 주고 사들여와 ‘F5’를 내놓았다.
캐논 ‘EOS-1’(1989년·왼쪽)과 최근 DSLR인 ‘EOS-1D X’(2012년). 23년의 시간차가 있는 두 카메라의 디자인에 큰 차이가 없다. ‘원형 디자인’에 대한 자신감이 드러난다.
세계 3대 필름 회사 중 코닥, 아그파가 사실상 문을 닫았다. 후지필름이 버티고 있지만 필름 매출액은 얼마 되지 않는다. 역설적이게도 디지털 카메라(이하 디카)를 처음 대중화한 것은 필름 회사 코닥이었다. 1995년 코닥은 ‘DC40’을 내놓았는데, 38만 화소에 4MB 메모리를 내장한 제품이었다. 1997년엔 캐논, 니콘 카메라에 디지털 이미징 팩을 장착한 DSLR을 내놨다. 그러나 기초과학 없이 첨단기술이 나오기 힘들 듯, 광학기술 없는 디지털 영상 기술은 공허했다. 가격이 2만 달러가 넘고, 크기가 기존 카메라의 2배인 코닥 제품을 찾는 사진가는 거의 없었다.
본격적인 전문가용 디카 시대의 문을 연 것은 1999년 니콘의 ‘D1’이다. 캐논의 EOS 공세로 고급 SLR 시장을 빼앗겨 가던 니콘은 D1으로 DSLR 시장을 선점한다. 필름 SLR과 무게와 크기 차이가 없는 데다 270만 화소로 당시로선 고화질이었고 가격도 70만 엔 정도로 저렴한 편이었다.
하지만 캐논은 여유가 있었다. D1이 나온 지 2년도 더 지난 2002년 초 400만 화소를 갖추고 1초에 8컷까지 찍을 수 있는 ‘EOS-1D’를 내놓는다. 화질도 향상돼 ‘디지털 영상은 필름보다 화질이 떨어진다’는 상식을 깬 첫 DSLR이었다. 일반 필름을 스캔 받은 것보다 화질이 뛰어났다.
캐논은 출발이 늦은 대신 제품의 완성도를 더 높이는 전통을 쌓아왔다. 캐논의 자신감은 막대한 연구개발(R·D) 투자에서 비롯된다. 디카 부문에만 우리 돈으로 매년 5000억 원 정도의 개발비를 투입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카메라와 의료광학기기가 주력인 니콘과 달리 캐논은 1970년대부터 사업을 다각화해 복사기, 프린터, 팩시밀리 등 광학응용기기 시장은 물론 동영상 카메라 분야에서도 큰 성공을 거두며 매출을 늘렸고 그 돈을 카메라 연구에 투자하는 선순환이 이뤄지고 있다.
2000년대 들어 캐논과 니콘을 ‘라이벌’로 규정하는 것은 어쩌면 무의미할 수도 있다. 2007년 기준으로 일본 캐논 본사와 니콘 본사의 매출액은 각각 2조9000억 엔과 6000억 엔으로 5배 가까이 차이가 난다. 캐논은 2003년에 소니의 주가총액을 넘어섰다. 이렇게 기업 규모로만 보면 양사를 비교하기 어렵지만, 여전히 카메라 부문에선 격차가 크지 않다. 한국법인만 봐도 캐논컨슈머이미징과 니콘이미징코리아의 지난해 매출액은 각각 4100억 원, 2300억 원이다.
2013년 현재 캐논은 ‘EOS-1DX’를, 니콘은 ‘D4’를 플래그십으로 두고 경쟁을 벌이고 있다. 양사가 전문가용 모델을 놓고 경쟁하는 것은 이 시장의 경쟁이 최대 소비자인 아마추어용 DSLR 사용자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두 회사는 사진가들 사이에서 “라이카의 화질을 따라잡았다”는 평을 듣는다. “두 회사가 이미 모든 기술 개발을 다 해놨지만, 시장 판매를 위해 신기술을 한꺼번에 내놓지 않고 서로 눈치를 보며 조금씩 꺼내놓는다”는 루머가 나돌 정도다. 양사의 향후 기술경쟁 양상이 흥미로울 수밖에 없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