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적인 척도를 들이대면 스위스는 보잘 게 없는 나라다. 전체 면적이 4만1284㎢로 경상남·북도와 전라남도를 합친 넓이가 채 못되고 인구라야 720만명에 불과하다. 마테호른, 융프라우, 아이거를 위시한 알프스 영봉들이 빼어난 위용을 자랑하지만, 국토의 70%를 차지하는 산악지대에선 경제성 있는 광물자원이나 농업자원이 거의 나지 않는다. 여름이 짧고 서늘한 탓에 농작물 재배도 수월치 않아 농촌에선 대개 비탈마다 넓은 초지를 조성하고 소를 키워 우유며 치즈를 생산하는 데 만족한다. 실제로 스위스는 19세기 말까지만 해도 유럽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다.
단일 민족, 단일 언어권에서 온 사람이라면 이 나라 국민이 과연 하나의 깃발 아래 일상을 영위할 수 있을지 의문을 품을 법도 하다. 스위스는 나라는 작지만 무려 26개 주로 나뉘어진 연방국가다. ‘칸톤(Canton)’이라고 불리는 각 주들은 독자적인 헌법과 법률을 토대로 철저한 자치행정을 실시한다. 지방색도 뚜렷하며, 국민의 64%가 쓰는 독일어를 비롯해 프랑스어(19%), 이탈리아어(8%), 레토로망슈(1%) 등 공용어가 4개나 된다. 북부와 동부, 중부지방은 같은 독일권이지만 각양각색의 방언을 사용한다.
더욱이 스위스 인구의 20%는 다국적기업, 국제기구 등에 근무하거나 비즈니스, 혹은 유학차 스위스에 머물고 있는 외국인이다. 하지만 스위스 국적을 가진 나머지 주민도 따지고보면 각 언어의 모국에 속하는 사람들인 만큼 민족적·언어적 의미의 스위스인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술지상주의 전통
그러나 스위스는 작지만 강한 나라, 즉 ‘강소국’의 전형이다. 스위스의 지난해 GDP(국내총생산)는 2412억달러로 한국의 절반 규모지만, 1인당 GDP는 3만3470달러로 한국의 3.5배에 이르며 룩셈부르크에 이어 세계 2위 수준이다. 스위스의 1인당 GDP는 EU(유럽연합) 국가 평균에 비해 60%, 유럽 최고 수준인 독일과 오스트리아보다도 40% 이상 많다.
지난해 스위스 경제는 3.6%의 성장률을 기록, 1990년 이후 가장 높은 수치를 보였다. 미국 유럽 등 세계 경제의 침체로 올해 성장률은 1.8% 수준으로 둔화될 전망이지만 내년에는 다시 2%대를 회복할 것으로 보인다. 스위스 연방경제부 데이비드 시즈 차관은 “우리에게 적정한 성장률은 2.0∼2.5%선이다. 우리는 현재 수준에서 더 이상 비약적으로 성장하기보다는 이 수준을 유지하는 데 목표를 둔다. 스위스는 노동력 시장이 작기 때문에 경제규모가 더 커져봐야 이를 감당할 능력도 없다”며 여유를 보였다.
지난 3월 영국의 국제경제 전문지 ‘유로머니’는 스위스의 국가 신인도를 100점 만점에 96.75점으로 평가했다. 185개 조사대상국 중 2위였다. 한국은 62.53점으로 47위였다. 스위스의 국가채무는 GDP의 53.8% 규모로 유럽 국가 중 최저 수준(EU 국가 평균은 76.7%)이다.
해마다 280여 개 영역의 경쟁력 지수를 산출, 합산해 국가 경쟁력 순위를 발표하는 IMD(국제경영개발원)는 올해 순위에서 스위스를 10위에 올려놓았다. 지난해의 7위에서 세 계단 떨어졌지만, 올해에도 독일(12위), 영국(19위), 프랑스(25위) 등 유럽의 내로라하는 선진국들을 따돌렸다. 스위스는 자본비용(2위), 노사관계 안정성(2위), 정부 효율성(6위), 금융시장 효율성(6위), 인프라(9위) 등의 영역에서 특히 높은 평가를 받았다.
경제가 성숙한 만큼 스위스 GDP의 70%는 서비스산업 부문에서 창출되지만, 제조업은 여전히 스위스 경제와 산업을 떠받치는 대들보 노릇을 하고 있다. 스위스의 제조업은 고부가가치 기계 수출에서 세계 3위를 차지할 만큼 과학기술 수준이 높다. 특히 정밀기계, 금속가공기계, 발전설비 및 선박용 터빈, 인쇄기기, 정밀측정기기 등에서는 세계 최고 수준의 첨단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하이디의 나라’에서 ‘하이테크의 나라’로 거듭난 것이다.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지가 선정한 2001년 세계 500대 기업에는 노바티스(26위) 로슈(48위) 네슬레(50위) UBS(61위) 크레디트 스위스(85위) 취리히 파이낸셜 서비스(105위) ABB(172위) 등 스위스 기업이 11개나 포함됐다(한국은 삼성전자225위, SK텔레콤 270위, 한국통신 297위, 한국전력 403위 등 4개). 하지만 이들은 스위스에 본사를 뒀을 뿐 실제로는 전세계를 무대로 비즈니스 활동을 펴고 있는 다국적 기업들이다. 예컨대 다국적 식품회사인 네슬레는 총 매출액의 2%만을 스위스에서 창출하고 있으며, 11명의 톱매니저 중 스위스인은 3명에 불과하다.
스위스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는 주역은 회사도 작고 생산량도 적지만 우수한 기술력과 브랜드 파워로 고부가가치 제품을 만들어내는 중소기업들이다. 스위스 기업의 99%는 정규근로자가 250명 이하인 중소기업이다. 주로 시계 제조업으로 출발한 수많은 중소기업들은 오랜 기간 장인정신을 담은 제품을 만들며 축적해온 정밀가공기술에 전자공학을 결합, 이를 의료기기에서 우주비행선에 이르는 다양한 분야에 적용하면서 각종 첨단 정밀산업기술의 선도자로 성장했다.
많이 일하고 많이 받는다
데이비드 시즈 차관은 “우리는 값싼 제품은 만들지 않는다”고 잘라 말했다.
“나라도 작고 자원도 없는 우리에겐 ‘두뇌’밖엔 믿을 게 없다. 그래서 많은 기업에 지속적으로 투자하고 그들의 비즈니스 활동을 고무해왔다. 그 결과 시계 계측기 방직기계 의료기기 등의 제조업은 물론, 제약 의학 화학 등 생명공학, 은행·보험 등 금융서비스 분야에서도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갖췄다. 작게는 볼펜 끝에 들어가는 좁쌀만한 볼에서 크게는 우주선에 설치하는 로봇에 이르기까지 ‘스위스 메이드(Swiss Made)’의 명성은 자타가 공인한다. 세계인이 쓰는 볼펜 10개 중 9개에는 스위스제 볼이 들어 있다. 우리는 부가가치가 낮은 제품과 서비스에는 관심이 없다.”
스위스 전통 제조업의 상징인 시계산업은 금욕정신과 직업에 대한 소명의식이 정착된 캘빈의 종교개혁기에 시작됐다고 하는데, 스위스 시계가 세계적으로 품질을 인정받게 된 것은 이런 신앙적 기반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스위스는 지금도 연간 약 1억 개의 시계를 생산해 그중 95%를 수출하는데, 세계 시장의 13%, 아시아 시장의 40%를 장악하고 있다.
스위스 사람들은 치밀하고 재주 많고 근면한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인구 규모가 작고 고령화 수준이 높다는 약점을 충분히 극복할 수 있는, 양질의 노동력을 보유하고 있는 것이다. 스위스의 총인구 대비 취업인구 비율은 54.4%(1999년)로 중국을 제외하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며, 영국(46.5%), 독일(43.7%), 프랑스(38.4%) 등과는 커다란 격차를 보인다. 실업률에서도 EU 12개국 평균이 8.3%에 달하는 반면, 스위스는 불과 2%대로 완전고용상태에 가깝다.
스위스 근로자의 생산성은 미국에 이어 세계 2위에 올라 있다. 급여수준은 높지만 생산성이 높고 근로시간이 길어 임금 코스트의 경쟁력이 높다. 연평균 근로시간이 1856시간(2000년)으로 선진국 중 가장 많은 반면 결근·병가 일수는 가장 적다.
스위스와 독일 엔지니어의 임금 코스트를 비교한 사례를 보자. 연간 급여는 스위스가 4만3568마르크, 독일이 3만2772마르크다. 하지만 복리후생비 등 간접비를 포함하면 연간 총 인건비는 각각 6만5198마르크, 6만7712마르크로 독일이 다소 높아진다. 연간 근로일수는 262일로 같다. 그러나 국경일, 휴가, 병가 등을 뺀 실제 근로일수는 스위스가 226일, 독일이 206일이다. 여기에 하루 평균 근로시간인 8.50시간(스위스)과 6.42시간(독일)을 곱하면 연간 총 근로시간은 1921시간, 1322시간으로 스위스가 독일보다 1.5배나 많다. 그 결과 스위스의 시간당 실제 인건비는 33.9마르크로, 독일(51.2마르크)의 3분의 2 수준에 불과하다.
노사관계도 안정적이다. 지난해 IMD는 스위스가 싱가포르에 이어 세계에서 두번째로 노사관계가 안정적인 국가라고 평가했다(한국은 46위). 노사분규로 인한 연간 노동손실 일수는 근로자 1000명당 0.38일로 한국(29.16일)의 1.3%에 지나지 않는다. 연방경제부 이레나 크로네 공보관은 “노사 모두 적대적인 자세를 지양하고 협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기풍을 오래 전부터 견지해왔기 때문에 큰 갈등은 빚어지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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