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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시, 전제조건 없이 평양 껴안아라”

한반도 전문가 케네스 퀴노네스 박사의 북핵 위기 해법

“부시, 전제조건 없이 평양 껴안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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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한의 핵 보유 시사 발언으로 조성된 제2 북핵 위기가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한 채 확산되고 있다. 북한은 최근 핵 동결 조치 해제를 선언, 한반도에 긴장의 파고를 높이고 있다. 북한의 좌충우돌식 행태를 어떻게 볼 것인가. 난마처럼 얽힌 북핵 위기를 타개할 방법은 없는 것일까. 1차 핵 위기 당시 북한과의 합의를 이끌어낸 퀴노네스 박사가 ‘신동아’에 보내온 글을 소개한다(편집자).
“부시, 전제조건 없이  평양 껴안아라”

2000년 2월 인공위성에 잡힌 북한 영변지역 핵 시설

최근 한 북한 관리를 만나 점심을 먹으면서 미국과 북한이 1993∼1994년 첫 핵 위기를 맞았을 때를 회상한 적이 있다. 그 북한 관리는 핵 위기를 진정시켰던 북-미간 기본합의안(제네바 협약) 협상 때 함께 일한 적이 있으며, 이후 1997년까지의 합의안 이행기에도 협조하면서 일을 진행시킨 인연이 있었다. 당시 나는 미 국무부의 북한 담당관이었고, 그는 뉴욕에 있는 UN 주재 북한대표부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합의안이 체결되고 8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다시 만나 정답게 인사를 나누고 악수를 했다. 재회의 기쁨을 나누는 우리 두 사람의 얼굴에는 웃음이 번졌지만 속으로는 여전히 불편한 관계에 있는 북-미 두 나라와 한반도에 몰아닥친 제2의 핵 위기를 걱정했다. 그의 눈에는 몇 달 안에 이루어질 양국 정부의 불확실한 선택에 대한 깊은 우려가 배어 있었고, 그 점에서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조용히 말을 꺼냈다.

“1993년을 다시 보는 것 같군요. 또 시작이네요.”

나도 그의 말에 동의했다. “불행하게도 핵문제 때문에 두 나라가 대결과 불신의 관계로 되돌아가는 것 같습니다.”

대북 정책 둘러싼 3개의 목소리



우리는 첫 번째 핵 위기 때 전쟁을 방지하고 외교적 해결책을 모색하려 애쓰던 1993년과 1994년의 기억을 되살렸다. 북-미간 첫 공식 합의인 1994년의 제네바 기본합의안을 만드는 데 우리의 협조는 큰 도움이 되었다.

우리 두 사람 중 누구도 그 합의안이 파기되거나 무효화되었다고는 보지 않았다. 그는 북한 정부 역시 그 합의안이 ‘파기’된 것으로 보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했다. 왜 이렇게까지 나쁜 상황으로 악화되었는지를 두고 그와 논쟁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었다. 이런 위기에는 상대방에게 항의하며 견해차를 넓히기보다는 적일지라도 공통의 기반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 외교관 생활에서 내가 얻은 교훈이다.

두 번째 핵 위기를 맞은 이때 양국 정부는 모든 외교채널을 동원해 공동 작업을 함으로써 평화적이고 항구적인 해법을 모색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 역시 동의했다. 몇 개월 안에 제2의 한국전이 일어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기 때문이다.

워싱턴에는 대북 정책에 대해 의견이 다른 세 개의 그룹이 있었다. 평양과 대화(dialogue) 및 협상(negotiation)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그룹과 대화는 하되 협상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그룹, 그리고 어떠한 대화나 협상도 하지 말고 봉쇄정책으로 회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그룹이 그것이다.

국무부의 동아태국은 협상을 주장했으나 국제안보담당 차관 존 볼턴은 협상을 강력하게 반대했다. 국방부도 국무부와 마찬가지로 의견이 갈려 있었으며, 합참의 장성들은 대화와 협상 모두를 반대했다. 이들은 봉쇄로 회귀할 것을 주장했다. 이렇게 의견이 분열되어 있었지만 왜 이런 내부 분열이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는 겉으로 전혀 드러나지 않았다.

‘중대한 위반’

2002년 8월 부시 대통령은 워싱턴의 무더운 날씨와 습도를 피해 텍사스 농장에 가 있었다. 대통령은 다가오는 중간 선거와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 문제에 매달려 있었고, 대통령의 북한 정책 자문들은 북한 문제를 놓고 계속 토론을 벌였다.

한편 서울과 도쿄에 대한 평양의 제의, 특히 김정일-고이즈미의 평양 정상회담은 부시로 하여금 행동을 하도록 만들었다.

10월 초, 국무부의 켈리 차관보가 평양에 파견됐다. 합참의 던 중장, KEDO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 미 대표인 잭 프리처드 대사, 국무부 한국과장인 데이빗 스트라웁, 국가안보회의 마이클 그린과 통역관이 켈리와 동행했다. 켈리 방북의 가장 큰 목적은 북한이 두 번째로 시도한 비밀 핵무기 프로그램에 대한 증거를 들이대고 북한의 반응을 알아보는 것이었다. 북한 외무성의 강석주 제1부상은 미리 준비한 성명서를 읽는 중에 북한이 사실은 핵무기 물질을 생산하려는 목적으로 고농축 우라늄 프로그램을 시작했음을 확인해 주었다. 이 말에 놀란 켈리 일행은 서둘러 평양을 떠났다.

켈리는 서울과 도쿄에 들렀으나 공식적으로 방북 결과에 대해 입을 다물었다. 북한 외무성은 켈리가 “오만불손하게 행동했다”는 성명을 내놓았다.

10월16일 마침내 워싱턴에서 켈리의 방북에 대한 이야기가 언론을 통해 나왔다. 평양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가장 먼저 접한 사람은 ‘USA투데이’의 바버라 슬래빈 기자였다. 부시 행정부의 한 관리가 비보도를 전제로 북한이 기본합의안에 대한 ‘중대한 위반(material breach)’을 했다는 것을 확인해 주었다고 주장한 것이다. 한편 부시 행정부는 서울과 도쿄와도 이 문제를 상의했으며, 서울과 도쿄는 워싱턴이 공식 성명을 내는 것에 동의했다.

그날 밤 백악관은 언론보도를 확인해주었고, 국가안보회의 역시 기자들에게 켈리의 방북 결과를 브리핑해 주었다. 이와 동시에 국무부 대변인은 켈리의 방북 때 북한 관리들이 “핵무기 제조를 위한 고농축 우라늄(HEU) 생산용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했고, “핵 기본합의는 파기된 것으로 간주했다”고 말했다.

강석주가 켈리에게 정확하게 어떤 말을 했는지가 불투명했던 탓에 북-미 양측의 혼돈과 불신이 한데 얽혀버렸다. 불행하게도 켈리 일행은 평양회담 때 강석주가 읽은 성명서 사본을 얻지 못했다. 기록을 보여줄 수 있느냐는 한 일본인 기자의 요구에 켈리는 서류를 얻지는 못했으나 서로 주고받은 말을 정확하게 기록한 것은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켈리는 그 기록을 공개할 의향은 없다고 말했다.

북한은 현재 강석주가 읽은 성명서를 공개하기를 거부하고 있다. 켈리 일행이 강석주의 언급을 오해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 문장의 일부만 계속 반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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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케네스 퀴노네스 번역 : 이흥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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