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때 갑자기 밖에서 문을 쾅쾅 발로 차는 소리가 들렸다. 방안은 한순간에 긴장으로 가득 찼다. 누군가 조심스럽게 문가로 다가가 살창문을 열고 물었다.
“쉐이야(누구십니까)?”
바로 그 순간 출입문이 부서질 듯 열리면서 철모를 쓰고 고무곤봉을 든 군인들이 우르르 들이닥쳤다. “삐에뚱(꼼짝마)! 삐에뚱!”을 연발하며 살기 찬 표정으로 방안에 뛰어든 군인들은 닥치는 대로 발로 차고 사정없이 곤봉을 휘둘렀다. 방안에 있던 남자들은 밥상 밑으로, 방 구석으로 피해보았지만 부질없었다.
밥상 위로 올라간 장교가 밥공기를 마구 발로 차며 고함을 쳤다. 30명도 더 넘게 밀려든 군인들은 방안 남자들 머리를 마구 때려 숙이게 한 뒤 수갑을 채웠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잠시 후 군인 세 명이 한 사람을 붙잡는 식으로 이들을 데리고 아래로 내려갔다. 이들은 밑에 대기하고 있던 미니버스에 짐짝처럼 실렸다. 모두 버스 통로에 머리를 박게 한 뒤 좌석에는 공안들이 빙 둘러앉았다. 조금이라도 머리를 들 기미만 보이면 이리처럼 달려들어 발길질을 해댔다.
이들이 도착한 곳은 60평 남짓한 한 차고. 이곳에는 벌써 20여 명의 남자가 바닥에 머리를 박고 감시 속에 줄지어 앉아 있었다.
미니버스는 다시 경적을 울리며 떠났다. 약 1시간 뒤, 다시 10여 명이 발길질을 당하면서 들어왔다. 이렇게 잡혀온 사람은 다음날 새벽 3시까지 모두 76명에 이르렀다. 미국 시민권자인 목사, 한국인 선교사, 탈북자 61명, 조선족 13명으로 모두 남자였다.
이들은 한국 기독교의 후원을 받아 비밀리에 운영되던 북한 선교사 양성조직의 일원이었다. ‘북한 선교는 북한 사람이 해야 한다’는 목표 아래 통일에 대비한 북한 선교사 5000명을 양성하려던 장기간의 계획이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었다. 1998년부터 3년간 창춘(長春), 지난(濟南), 정저우(鄭州), 충칭(重慶), 창두(昌都), 시안 등 광활한 중국 대륙의 도시를 전전하면서 진행되던 북한 선교사 양성은 북한 보위부의 추적과 내부의 배신자, 중국 공안의 협조로 인해 350명 양성을 끝으로 마감됐다.
비록 전 과정을 밝힐 수는 없지만, 기자는 시안에서 벌어진 이 사건에 대해 매우 소상히 알고 있다. 한국 기독교 역사의 한 장을 장식할 수도 있는 이 사건에 대해 언젠가는 그 전모를 기록하리라 마음먹고 있었지만, 선교 초기 상황을 잘 알지 못해 선뜻 기사화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체포됐다 추방당한 최광 선교사(현 열방빛교회 목사)가 최근 펴낸 실화집 ‘내래 죽어도 좋습네다’에 선교 시작 당시를 소상히 기록했다. 이를 바탕으로, 최 목사가 체포 직후 추방된 까닭에 실화집에 실리지 못한 시안 체포자들의 이후 행적은 기자가 보충했다.
한국 기독교 사역자들이 주도한 탈북 선교사 양성작업은 시안에서만 진행된 것이 아니다. 당시 중국 각지에는 일명 ‘통독반’이라고 하는 탈북 선교사 훈련기지가 곳곳에 있었다. 그러나 시안 사역장만큼 큰 규모는 아니었고, 각기 다른 교회의 지원을 받으며 진행된 까닭에 서로 연계가 없었다. 1990년대 말 붐을 이루던 탈북선교사 양성작업은 시안의 대규모 체포 이후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그 와중에 많은 탈북자가 목숨을 잃었다. 이 작은 기록을 통해 그들의 이름이 재조명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