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족히 100켤레는 넘을 듯한 형형색색의 신발은 언뜻 여느 구두와 다름없어 보인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모양과 생김새가 다 다르다. 생김새만으로는 장애인이 신는 특수 구두 같아 보이지 않는 신발들. 그 속에서 간혹 눈에 띄는 한 짝의 신발, 이름과 제작날짜가 꼼꼼하게 적힌 구두의 표찰들이 갖가지 장애와 사연을 간직한 주인을 떠올리게 한다.
전국에서 찾아오는 고객들로 한창 붐비는 오후. 구두 모양을 도안하는 책상과 고객의 발 상태를 측정하는 기계 사이를 바삐 오가는 남궁 소장의 모습엔 특별한 데가 있었다. 소매가 짧은 셔츠 밖으로 드러나야 할 오른팔이 보이지 않았다. 불의의 사고로 한 팔을 잃고 1급 장애인이 된 그는 또 다른 장애인을 위해 한 손으로 묵묵히 구두를 만들어온 것이다.
“지금도 가끔 ‘환상통’이라 해서 잘려 나간 오른팔이 심하게 아플 때가 있습니다.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찾아와 눈물이 핑 돌 때도 있어요. 팔이 없어진 지 벌써 10년이 지났는데….”
맘씨 좋은 할아버지처럼 푸근한 인상에 시종 보살 같은 웃음을 머금던 그의 표정이 이때만큼은 어두워졌다. 눈가엔 물기가 비쳤다.
전동차에 깔린 오른팔
1995년 11월의 어느 날 밤 11시경 서울 지하철 2호선 신도림역. 전동차에서 내린 그는 여느 날과 달리 거나하게 취해 있었다. 이날은 그가 다니던 제화업체의 월급날이었다. 그러나 회사 사정이 어려워 직원들에게 월급이 제대로 지급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남궁 소장은 자신의 월급을 다른 직원에게 양보했다.
쥐꼬리만한 월급에서 그나마 일부만 손에 쥔 그는 울적한 기분을 달래려고 동료들과 모처럼 술잔을 기울였다. 팍팍한 직장생활에서 누구나 한번쯤 겪는 그저 그런 하루를 무사히 마감하는가 싶던 순간, 엄청난 불행이 닥쳤다. 누군가에 떠밀려 술기운에 중심을 잃고 지하철 선로로 떨어진 그는 자신이 방금 내린 전동차에 깔려 오른팔을 잃고 말았다.
“119 대원이 와서 저를 들것에 싣고 나갔죠. 피투성이로 뭉개진 오른팔이 덜렁덜렁하던 것만 기억납니다. 병원에 도착해 집 주소와 전호번호만 가르쳐주고 바로 의식을 잃었습니다.”
수술이 끝나고 깨어나니 훤하게 밝은 아침이었다. 너덜거리던 오른팔은 어깨 근처에서 잘려 나가 흔적도 없었다. 소매가 긴 환자복을 입고 있던 그는 무의식중에 오른팔이 있는 줄 알고 왼손으로 오른팔을 끌어당겼지만 헐렁한 옷자락만 잡힐 뿐이었다.
아침에 멀쩡한 몸으로 출근한 남편이 졸지에 장애인이 돼 병상에 누워 있자 아내는 “왜 술을 마셨냐?”며 원망했다. 차마 회사 사정과 월급 때문이었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하루 빨리 장애를 잊지 않으면 여생을 제대로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의사의 만류를 뿌리치고 수술 열흘 만에 퇴원했다. 치료비로 200여 만원이 들었다. 수중에 모아놓은 돈은 없었지만 다행히 자녀가 모두 장성해 학비가 들지 않을 때였다.
“아이들이 학교를 그만둬야 할 처지였다면 아마 절망해서 자살이라도 했을 겁니다.”
오른팔을 잃기 전까지 남궁 소장은 40여 년간 제화기술자로 일해왔다. 한 때 하루 200켤레의 구두를 만들며 직접 제화점을 운영했던 그는 열두 살 때 사환으로 제화업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광복 후 부모님을 따라 일본에서 귀국했습니다. 그런데 전쟁통에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와 누나를 돌보는 소년가장이 됐습니다. 그때야 목공, 양화, 철공, 이발 기술말고는 특별히 배울 것도 없었고 취직할 데도 많지 않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