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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격려 아끼지 않은 영원한 ‘첫 독자’

“자네 때문에 한국 詩의 지형이 바뀔 걸세”

평생 격려 아끼지 않은 영원한 ‘첫 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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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다니던 중학교는 사범 병설 중학교로, 졸업 후 거의 사범학교로 진학하게 되어 있어 졸업을 앞두고도 진로 상담 같은 것이 없었다. 한데 담임인 정 선생님이 진로 상담을 하겠다며 나를 교무실로 불러서는, 대뜸 고등학교로 옮기라고 했다. 첫째, 풍금을 못하니 소학교 교사를 할 자격이 없고 둘째, 대학으로 진학해서 더 공부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

소학교 교사가 되어 어느 강가의 작은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겠다는 감상적인 꿈에 젖어 있던 나는 당연히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풍금은 이제부터 배우면 되고 대학엔 가고 싶지 않다고 항변했다. 그러나 그는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여러 번 나를 불러 설득하다가 안 되니까 내 아버지까지 동원했다. 결국 나는 소학교 교사가 되는 꿈을 접고 학년이 바뀌자 고등학교로 옮겨갔다.

“속임수는 통하지 않아!”

그러나 그와의 인연이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2학년으로 진급하기 전에 그가 고등학교로 옮겨온 것이다. 이번에는 독일어와 서양사 담당으로였다. 선생님도 친구도 다 낯설어 잔뜩 주눅이 들어 있던 나는 엄청난 후원자라도 얻은 것처럼 갑자기 우쭐해졌다. 나는 선생님과 특별한 인연이 있다는 점을 친구들 앞에서 늘 과시했고, 어떠한 경우에도 그가 내 편이 되어주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학교에서는 해마다 늦은 봄 행사를 하나 열었다. 시내를 벗어나면 바로 나오는 호수를 지나 강을 따라 달려갔다가 8km 되는 지점에서 팔뚝에 도장을 받고 되돌아오는 전교생 달리기였다.



호수까지 달려 나간 우리는 잔꾀를 내었다. 힘들게 끝까지 달릴 게 아니라 여기서 놀면서 기다렸다가 먼저 달려 들어오는 동급생이 있으면 팔뚝에서 도장자국을 옮겨 받아 학교로 되돌아간다는 꾀였다.

과연 일찍 달려 들어오는 동급생이 있어 쉽게 도장 자국을 옮겨 받았고, 그들을 뒤따라 학교로 달려 들어갔다. 교문에 서 있는 감독관이 정 선생님임을 알고서 안심한 것은 까다로운 선생님에게라면 발각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일말의 불안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 선생님은 우리를 그냥 통과시키지 않고, 일단 옆에 서 있게 했다. 운동과는 담을 쌓은 우리들이 선수급 학생들과 거의 나란히 들어온 점이 의심을 샀던 모양이다.

“선생님, 좀 봐주십시오.”

나는 이렇게 농조로 사정했다. 우리 일행이 대체로 모범생인데다 상대가 나를 인정하는 정 선생님이었으므로 무난히 통과될 줄 알았다. 그러나 그는 가타부타 말이 없이 뙤약볕 아래 한참을 세워두었다가 달리기가 거의 마무리될 무렵 우리를 교무실로 끌고 갔다.

“쪼그만 것들이 벌써 속이는 법부터 배우고!”

우리는 팬티 바람으로 교무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다시는 속임수를 쓰지 않겠다는 반성문을 썼다. 그리고 다음날 출석하자마자 다시 교무실로 끌려갔고, 속임수를 쓰지 않겠다는 다짐을 한 번 더 한 뒤에 운동장을 50바퀴 도는 벌을 받았다. 이 세상에서 속임수는 결코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 못 하면 안 된다고, 징계가 끝난 뒤에 선생님은 강조했다.

“쟤 버릇은 정 선생이 다 버려놨어”

선생님과 더 가까워질 일은 생기지 않았다. 나는 그가 담당한 독어에는 영 흥미가 없었고, 그가 담당한 다른 과목인 서양사는 이미 우리는 배우고 있지 않을 때였기 때문이다. 그때 학교에서 교지(校誌)를 창간하게 되었는데, 내가 편집 실무자로 참여했다. 지도교사가 “정 선생님이 책을 많이 읽고 글을 잘 쓰니 원고를 하나 청탁해보는 것이 어떠냐”고 해서 그 청탁을 내가 맡은 것이 그때 나와 선생님 사이의 유일한 개인적 접촉이었을 것이다. 그는 시를 한 편 썼는데 아주 관념적인 시였다.

내가 쓴 시 한 편과 에세이 한 편이 실렸는데 책이 나오자 정 선생님이 독어시간에 여러 학생 앞에서 내 시와 에세이를 극찬했다. 이만하면 기성 시단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것이라는 바람에 나는 우쭐했다. 그리고 그 칭찬을 학과에 등한해도 좋은 특권을 허용한 것쯤으로 해석하면서 싫은 과목 시간에는 드러내놓고 시집이며 소설책을 읽어 선생님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쟤 버릇은 정 선생하고 유 선생이 다 버려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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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림 시인·동국대 석좌교수 skyungrim@par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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