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슷한 이유로 뒤늦게 새로운 분야에 도전해 열정을 불태우는 사람이 국내에도 적지 않다. 은퇴 후 대학에 편입해 회화를 전공한 이서형 전 금호건설 사장,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를 거쳐 현재 명예교수로 재직 중인 강현두 교수, 기자 출신의 김종식 전 경향닷컴 사장, 은행감독원 부원장보를 역임한 편원득 전 금융결제원 감사 등이 그들. 또한 명사미술회 회장으로 매년 회원 전시회를 주관하는 강석진 전 GE코리아 사장(현 CEO컨설팅그룹 회장), 한국능률협회 신영철 회장도 꼽을 수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여러 차례 전시회와 개인전을 열고‘화가’로 왕성하게 활동 중이라는 것.
1950~6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낸 이들은 일찌감치 화가의 미래를 동경했다. 하지만 그 시절 대한민국 부모 대부분은 자식이 화가가 되는 것에 반대했다. “평생 밥 빌어먹을 짓”이라는 게 이유였다. 고교시절 미술반에서 활동하며 미술선생에게 칭찬을 받곤 했다는 편원득 전 감사는 “만약 그때 나 같은 아버지를 만났다면 틀림없이 미대에 진학했을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미대생 된 전직 CEO
환갑을 앞두고 용인대 미대 3학년에 편입해 2008년 봄 대학원을 졸업하는 이서형(李瑞炯·64) 전 사장은 서울대 건축학과를 나왔다. 대기업 건설사 CEO 자리까지 올랐던 그가 인생에서 가장 알차고 보람 있는 시기로 꼽는 것은 대학에서 미술공부에 몰두하던 지난 4년이다. 그는 “초등학교 때 성적이 꼴찌에서 1, 2등을 다퉜지만 그림에는 소질이 있었다. 아버지도 잘 그린다며 칭찬하셨다. 그런데 여덟 살 때 세상을 떠나셨다. 아버지가 살아계셨더라면 틀림없이 그 길로 매진했을 것”이라고 했다. 꿈이 꺾인 뒤 일반 대학을 가기 위해 할 수 없이 죽어라 공부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이서형 전 사장은 최근 금호아트갤러리에서 첫 번째 개인전을 열며 화가로 데뷔했다. 넘쳐나는 손님들로 발 디딜 틈 없는 전시회 오프닝 행사에서 인사말을 하게 된 금호아시아나그룹 박삼구 회장은 “이 사장이 미술공부 하러 대학 간다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그 나이의 열정이 부러웠는데 정말 이 사장다운 발상”이라며 말문을 열었다. 박 회장은 “과 수석 하고 장학금도 받았다는데, 이 사장 같은 사람에게까지 장학금을 주면 용인대 재정이 상당히 악화될 것 같다. 오히려 돈을 받아야지. 다음 학기엔 장학금 주는 것 다시 생각해보라”고 해 폭소를 자아냈다.
이론부터 체계적으로 배워 제대로 된 그림을 그리고 싶었던 이 전 사장은 40년간의 사회생활을 뒤로하고 은둔하다시피 대학 캠퍼스로 돌아갔지만 첫 학기 6개월은 순조롭지 못했다. 학교 분위기나 학생들이 과거 대학시절과 많이 달랐고, 대기업 CEO에서 학생으로 갑작스레 바뀐 처지에 적응하는 데 진통을 겪은 것. 그는 학생 본분에 충실하려 노력했다. 기사 딸린 차 대신 손수 운전을 했고, 교내식당에서 학생들과 어울려 1600원짜리 식사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