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드라큘라는 강렬한 공포뿐 아니라 은밀한 성적 매력도 갖고 있다.
돌이켜 보면 드라큘라의 공포는 다른 괴물들처럼 주로 ‘시각적’인 것이 아니라 ‘촉각적’이거나 ‘후각적’인 것이었다. 주로 시각적인 공포에 호소하는 여타의 괴물들과 달리 오감을 총체적으로 자극하는 매력적인 괴물이었다. 드라큘라가 나오는 영화가 끝날 때면 나는 나도 모르게 목덜미 주변을 어루만지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곤 했다. 그 날카로운 이빨로 하필이면 연약한 목덜미를 물어뜯다니, 얼마나 끔찍하게 고통스러울까. 게다가 드라큘라가 입맛을 다시곤 하는 그 비릿한 피 냄새란 상상만 해도 어질어질했다. 루시의 목에 남은 드라큘라의 선명한 이빨 자국은 오랫동안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게다가 온몸의 피를 단숨에 들이켤 듯 탐욕스러운 드라큘라의 식욕이라니.
그런데 이상하게도 드라큘라가 나오는 수많은 영화는 청소년 관람불가이거나 미성년자 관람불가였다. 뭔가 이상했다. 어른들은 뭔가 은밀한 것, 뭔가 폭력적인 것을 숨기기를 좋아하는데. 나는 사춘기를 지나면서 드라큘라의 에로틱한 매력을 알게 되었다. 특히 남성들에게 인기폭발이었던 루시가 드라큘라에게 목을 물린 후 몽유병 환자처럼 밤마다 그를 찾아나서는 장면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다. 마치 드라큘라에게 목을 물어뜯기기를 자발적으로 원하는 듯한 루시의 목마른 표정은 사춘기 소녀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해마다 어김없이 드라큘라와 관련된 영화가 전세계적으로 양산되는 것은 단지 서늘한 ‘공포’ 때문이 아니라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은밀한 성적 매력 때문일 것이다. 다른 괴물들이 결코 드라큘라의 매력지수를 따라잡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렇게 매력적인 괴물을 어떻게 마늘이나 십자가 따위로 퇴치할 수 있겠는가.
무서울수록 더욱 매혹적인
드라큘라는 인간이 존재하는 곳이라면 어디에든 있소.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도, 그리고 독일, 프랑스, 인도에도…. 우리에겐 너무나도 먼 곳인 중국에조차 있고, 그곳 사람들은 이 시간에도 그를 무서워하고 있소…. 흡혈귀는 계속 살아남고, 시간이 지난다고 해서 죽는 법이 없소. 인간이 살아 있는 한 드라큘라는 그 피를 먹고 사니까.
-브람 스토커, ‘드라큘라’ 중에서
드라큘라가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각종 미디어를 통해 ‘저절로’ 뇌리에 각인되는 존재였다면, 프랑켄슈타인은 저 악명 높은 공포의 대명사로서 사회적 위치에 비해 제대로 알려진 것이 별로 없다. 알고 보니 ‘프랑켄슈타인’은 원작의 스토리를 보존한 채 영화로 개작되기보다는 원작의 내용을 적극적으로 변형시킨 상태에서 유통된 경우가 많았다. 우선 프랑켄슈타인은 괴물 자신의 이름이 아니라 괴물을 만든 박사의 이름이었고, 괴물은 언제나 ‘그 악마’ 또는 ‘그것’으로 불릴 뿐이다. 한번도 이름을 불리지 못한 괴물의 슬픔은 인간의 입장에서 삭제되기 딱 좋은 내용이었던 것은 아닐까.
게다가 원작의 프랑켄슈타인이 매우 지적 수준이 높고 화술이 뛰어났으며 매력적인 감수성을 지닌 존재였다는 것은 소설을 제대로 읽어야만 알 수 있을 정도다. ‘프랑켄슈타인’의 부제가 ‘현대의 프로메테우스’라는 점도, ‘프랑켄슈타인’의 저자가 시인의 아내이자 아름다운 여성 작가였다는 점도, 원작을 직접 접해보지 않는 한 알기 어렵다. 즉 ‘프랑켄슈타인’은 드높은 명성에 비해 여전히 베일에 싸인, 비밀의 텍스트다.
‘현대의 프로메테우스’라는 부제처럼, 제우스의 불을 훔쳐 인간에게 가져다 준 프로메테우스의 형벌은 인간의 힘으로 생명을 창조한 프랑켄슈타인 박사에게 전이된다. 박사는 자신의 인생을 바쳐 남녀의 성적 결합 없이 생명을 창조하는 방법을 개발했지만, 인간의 시체에서 뽑아낸 각종 잔해를 조합해 만든 괴물은 결정적으로 너무 ‘끔찍한 외모’를 지닌 생명체였다. 박사는 태어난 아기를 안아보거나 이름을 붙여주기는커녕, ‘괴물-아기’가 태어나자마자 냅다 도망친다. 그로부터 ‘아버지’를 찾기 위한 괴물의 기나긴 여정이 시작된다. 괴물은 인간의 가족을 몰래 엿보며 그들의 대화를 통해 인간의 언어를 배우고 인간의 문학과 철학과 역사를 독학으로 마스터하는 천재적 재능을 발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