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0년대 한국의 대중음악을 무엇이라 말하면 좋을까.
- ‘신세대 논쟁’과 함께 거센 랩 댄스 열풍이 몰아친 이 시기 가요계는 장년층 이상이 철저히 배제된 ‘10대만의 리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 10년 동안 비주류 장르가 되어버린 발라드를 한결같이 지키며 ‘국민가수’라는 칭호를 선사받은 신승훈이 없었다면 이 시기 대중음악사는 참으로 단조로웠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화염의 절정을 만끽하자마자 곧바로 서태지와 아이들의 랩 댄스 폭풍이 밀어닥쳤다. 절대위기 상황이었다. 그는 그러나 전혀 움츠러들지 않고 ‘널 사랑하니까’ ‘로미오와 줄리엣’ ‘처음 그 느낌처럼’ ‘오랜 이별 뒤에’ ‘나보다 조금 더 높은 곳에 니가 있을 뿐’ 등을 히트시키며 강한 대항력을 발휘했다. 서태지와 아이들, 조금 뒤에 출현한 김건모와 함께 이른바 ‘빅3’ 시대가 열린 것. 과거 1970년대 청소년들이 딥 퍼플, 레드 제플린, 퀸을 놓고 삼각 대립구도를 형성한 것처럼 당시 중·고교 교실은 서태지 김건모 신승훈 팬으로 삼분(三分)되었다.
이 시기에 그는 댄스 열풍에 밀리기는커녕 도리어 발라드의 황태자에서 황제로 승격했을 뿐 아니라 한 연예주간지로부터 처음으로 ‘국민가수’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부여받을 정도로 위풍당당 진군을 거듭했다. 1995년 한 일간지는 ‘신승훈표 발라드’의 가공할 위력을 두고 “서태지나 김건모만큼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한 것을 보상받기라도 하듯 음반시장의 환호는 더 크게 누렸다”고 평가했다.
한번 판 전체의 분위기에 쏠리면 걷잡을 수 없는 것이 대중가요의 속성. 그러나 그는 상대가 될 것 같지 않은 유약한 발라드를 가지고 1990년대를 삼켜버린 댄스음악의 독점상황을 이겨낸 것이다. 어쩌면 랩과 흑인음악 댄스의 소란스런 공세가 계속되면 될수록, 조용한 음악을 선호하는 일각의 팬들은 더욱더 신승훈을 ‘방패’로 삼았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해서 그는 ‘센세이션을 능가하는 조용한 지속’이라는 발라드의 유서 깊은 가치를 입증했다. 그의 파워는 음반으로 한정되지 않았다. 어느 곳에서든 그의 콘서트가 열리기만 하면 수천 명 이상의 인파가 몰려들었을 만큼 공연무대 또한 그의 영토였다. 신승훈은 1990년대 내내 발라드의 왕자인 동시에 라이브의 왕자였다.
하지만 세월의 흐름은 거역할 수 없는 듯, 10년이 넘는 영광의 전성기를 보낸 지금 신승훈의 위치는 결코 예전 같지 않다. 음반시장이 위축된 탓도 있겠지만 예전에는 마치 제 집 드나들 듯했던 방송사 히트순위나 앨범판매차트 상위권과도 조금은 멀어진 상태. 신승훈 스스로도 “이제는 나도 주류가 아닌 비주류”라고 말한다.
새 음반작업에 몰두하고 있던 그는 처음에는 “스튜디오에 파묻혀 작곡과 녹음을 하면서 이것저것 먹었더니 살이 많이 쪘다”며 나서기를 주저했지만 곧 “나를 말하는 좋은 기회가 될 것 같다”며 흔쾌히 인터뷰에 응했다. 서울 강남에 있는 그의 개인 사무실 근처 한 레스토랑에서 만났더니 전화와는 달리 전혀 살찐 모습이 아니었다. “전보다 더 보기 좋다”고 했더니 “며칠간 열심히 운동했다”며 호쾌하게 웃었다. 매사 준비에 철저한 그다웠다.
그는 열성적인 대화로 인터뷰를 주도해갔다. 질문에 충실하게 답변했으며 때로는 예상한 듯 나중에 물어볼 것도 미리 말해버려 준비해간 질문이 필요 없을 정도였다. 예상외로 다변이었고 달변이었다. 시종일관 귀공자풍의 자세와 웃음을 잃지 않은 그는, 창작의 고민과 음악정체성에 대한 생각을 비롯해 데뷔 시점의 역경, 서태지 김건모와의 관계, 1998년 탈세사건이 몰고 온 위기 등 자신의 음악과 음악 외적인 모두를 상세히 털어놓았다.
-먼저 축하드립니다. 얼마 전 한 주간음악순위차트지로부터 ‘1위를 가장 많이 한 가수와 작곡가’로 꼽혔더군요. 1위를 차지한 곡을 전부 신승훈씨가 작곡했다는 사실에 저도 놀랐습니다.
“고맙습니다. 작지만 의미 있는 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상을 받고 새삼스레 제가 싱어송라이터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졌습니다. 사실 제가 ‘가수’ 이미지가 강해, ‘작곡자’로는 잘 알려지지 않았거든요. 아직도 제가 곡을 직접 쓴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많아요.”
-최다 1위곡 가수보다 최다 1위곡 작곡가로 인정받은 게 더 기쁜가 보죠?
“그럼요. 제 자신이 싱어송라이터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제 필생의 영웅이 고 유재하씨인데, 그의 유작 앨범에 작사 작곡 편곡자가 모두 유재하로 되어 있는 것을 보고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공교롭게도 그가 사망한 날과 제가 데뷔한 날이 11월1일로 같아요. 역시 싱어송라이터로 제가 평소에 존경했던 김현식 선배도 11월1일에 돌아가셨지요. 그런 연유 때문에라도 싱어송라이터를 제 숙명처럼 생각해왔습니다.”
-언론에 소개된 대로 중국진출을 고려하고 있는 게 사실인가요. 이제는 나이도 있고 전성기도 아닌데다, 중국에 진출했던 한국 가수들이 댄스음악 일색이었음을 감안하면 걱정도 있을 것 같은데요.
“솔직히 중국에 가서 내가 할 게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던 것은 사실이에요. 앞서 진출한 가수들에게 마땅한 성과가 없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언젠가 조용필 선배가 제게 이런 충고를 해주신 적이 있어요. ‘어느 정도 위치에 올라섰을 때는 시선을 해외로 돌려야 한다’는 것이었죠. 그 말에 자신을 얻었어요. 지금은 면밀하게 준비중입니다.
발라드가 약점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중국의 음악 시장이 원래 발라드 중심이고요. 중국을 다녀온 후배가수 강타(전 H.O.T.의 멤버)도 ‘중국 사람들이 한국에는 전부 빠른 노래만 있느냐고 한다. 형이 한번 가야 될 것 같다’고 말하더군요. 영화 ‘엽기적인 그녀’에서 부른 ‘I believe’가 중국과 홍콩에서 호응을 얻었고 중국 최고의 인기여가수 쑨난도 제 노래 ‘Loving you’를 불러 현재 1위에 올라있습니다. 중국 진출은 성공 여부도 고려해야겠지만 우리의 음악 이미지를 알리는 데 더 큰 의미가 있지 않을까요.”
이 대목에서 그는 “중국에서는 가수보다 작곡자나 프로듀서로 활동해달라는 요청이 더 많다”고 전하면서 어떤 쪽으로 가는 게 좋겠느냐고 솔직하게 조언을 구하기도 했다.
포기할 수 없는 ‘哀而不悲’
-신승훈 음악의 정체는 말할 것도 없이 발라드입니다. 그간 줄곧 발라드만을 해왔는데 지겹지는 않습니까. ‘신승훈표 발라드’의 시장 파괴력이 점점 떨어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고 일각에서는 너무 패턴에 안주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하기도 합니다. 한번 음악 스타일을 바꿔볼 의향은 없는지 궁금합니다.
“뭐든지 우열이 있지요. 음악에도 우열이 존재해서 통상적으로 급진적인 음악은 우(優)로, 저처럼 서정적인 음악은 열(劣)로 규정되는 것 같아요. 특히 음악적 패턴이 너무 빨리, 너무 크게 변해온 1990년대에는 ‘바뀌는 음악’이 우가 되고 ‘바뀌지 않는 음악’은 열이 돼버렸습니다. 그러나 열일지라도 신승훈에게는 신승훈만의 색깔이 있고 그 색깔은 변하기 어렵다고 봅니다.
제 음악의 정서적 기반은 ‘애이불비(哀而不悲)’예요. 속으로는 슬프지만 겉으로는 울지 않는다는 거죠. 특히 저는 요즘처럼 사랑이 인스턴트화하는 시점에서 그런 전통적 사고가 소중하다고 생각합니다. 제 맘에도 맞고요. 새를 보더라도 서양은 ‘새가 노래한다’고 하지만 우리는 ‘새가 슬피 운다’고 하잖아요. 전 사랑과 이별의 발라드를 계속 부를 겁니다.”
-하지만 발라드가 일정한 틀 속에 있는 음악이기 때문에 창작에 상당한 어려움이 있을 줄 압니다. 그 안에서 신승훈만의 스타일을 지켜야 하는 고통이 만만치 않을 텐데, 신보를 구상하는 데 고민은 없습니까.
“자세히 보면 아시겠지만 저도 적잖이 실험을 해왔어요. 하지만 틀을 지키면서 지속적으로 새로운 발라드를 만들어내는 게 힘든 것은 사실이에요. 어떤 때는 진정 내가 원하는 스타일이 무엇인지 모를 정도로 고민에 휩싸이기도 합니다. 악상이 막히면 장비를 모두 챙겨 조그만 별장이 있는 안면도에 내려가 곡을 쓰기도 하고요. 어떤 스타일의 곡을 쓸까 구상하는 데만 6개월이 걸릴 때도 있죠. 변화를 꾀하려고 노력하지만 참 어렵습니다. (크게 웃으며) 주변 사람들은 결혼을 하면 저절로 음악이 달라질 거라고 하더군요.”
-말이 나와서 말인데요, 왜 아직도 결혼을 하지 않았나요. 너무 늦었다고 설마 포기한 것은 아니겠죠(1968년생으로 알려진 신승훈의 실제 나이는 올해 서른 일곱이다).
“포기는 아니에요. 인륜대사를 저버리지는 않을 겁니다. 음악 때문에 한 해 두 해 미루다가 이렇게 된 것뿐이죠. 옛날에는 음악과 여자의 비중이 9대1이었다면 요즘은 6대4 정도로 달라졌어요. 그런데 막상 그런 마음이 생기고 나니까 여성들이 지레 부담감을 갖고 절 바라봅니다. 절대 그렇지 않은데…. 제 마음은 열려 있는데 저에 대한 여성들의 마음은 열려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신승훈은 결혼문제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듯 했다. 아마도 완벽하게 맘에 드는 신곡이 잘 나오지 않아 다른 생각할 겨를이 없는 탓인지 음악적 변화에 대한 생각에만 골몰했고 그에 관한 얘기에 집중했다. 사실 마땅한 스캔들을 떠올릴 수 없을 만큼 그의 옆에 설 ‘짝’의 이름은 마땅치 않아 보인다.
대신 신승훈 하면 동시대의 라이벌이었던 서태지와 김건모의 이름이 동시에 떠오른다. 1990년대 음악계에서 세 가수는 한 덩어리로 묶여 논해지고 평가됐고, 그리하여 본인들 의지와 전혀 상관없이 치열한 경쟁관계를 그려냈다. 적어도 그들 각자의 팬들은 살벌한 배타적 신경전을 벌였다. 이제는 라이벌전의 흥분이 많이 가셨지만 과연 신승훈은 당시의 삼각관계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지를 듣고 싶었다.
-‘보이지 않는 사랑’이 1992년 신년 벽두를 강타한 뒤 바로 서태지와 아이들의 ‘난 알아요’가 나왔습니다. 그 순간에는 신승훈씨가 마치 피하기라도 한 듯 보이지 않았었죠. 독주할 것 같은 신승훈씨의 행진을 막은 셈인데, 서태지의 등장이 두렵지는 않았습니까.
“피하기는요. 그때 ‘가을빛 추억’이란 노래로 열심히 활동하고 있었는걸요. 서태지와 아이들 선풍이 두렵지는 않았어요. 다만 ‘괜찮은 신인이 나왔구나. 물건이 나타났다!’고 감탄했지요. 그런 음악을 한다는 사실이나 그가 갖고 있는 카리스마에 충격을 받았고, 더욱이 서태지 또한 싱어송라이터라는 데 더욱 놀랐습니다.
사람들은 우릴 경쟁자로 여겼지만 실제로는 굉장히 친한 사이예요. 음악적 교류도 했고요. 서태지가 지난번 비밀리에 한국에 들어왔을 때는 같이 술도 한 잔 했는데요, 뭘. 그를 두고 신비전략 운운하지만 그렇게 몰아붙이지 말고 음악적 측면으로 평가했으면 합니다.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아무나 신비스러워지나요? 서태지는 그 자체로 자연스럽게 신비감이 풍겨나옵니다. 솔직히 그가 부러울 때도 많았어요.”
-너무 평가가 좋은데요. 행여 서태지 팬들의 반응을 의식한 발언은 아닙니까.
“(고개를 저으며)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정도는 되지 않나요? 실제로 관계가 좋아요. 물론 예전에 팬들 사이에는 공격적인 태도와 신경전이 있었지만, 깨끗이 정리가 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얼마 전 한 서태지 팬이 제게 ‘그때 악의적으로 대했던 것은 솔직히 신승훈의 존재가 강해서 그랬다. 미안하게 생각한다’고 하더군요. 지금은 무슨 사안이 생기면 팬들끼리 연대하는 관계라고 들었습니다.”
-김건모씨는 같은 소속사로서 한솥밥을 먹었는데,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한마디로 ‘정말 노래를 잘하는 가수’로 꼽고 싶습니다. 소속사 라인음향의 프로듀서이자 우리의 음악 사부이기도 한 김창환씨가 ‘핑계’를 만들었을 때 저는 대번에 ‘이것은 김건모가 불러야 된다!’고 생각했어요. 만약 제가 불렀다면 그 곡이 그렇게 떴을까요? 그는 뭘 불러도 자기 컬러를 만들어냅니다. 최근의 ‘미안해요’나 ‘청첩장’을 보면 김건모만의 발라드도 찾은 것 같아요. 나이를 고려해 잘 대처한 것으로 봅니다.”
답변이 너무 싱거운(?) 듯해서 서태지나 김건모에 대해 좀더 냉정한 평가를 해달라고 추궁하듯 주문했더니 그는 “다만 과연 누가 오래 갈 것인가 하는 생각은 했다”며 더 이상 명쾌한 언급을 하지 않았다. 이 대목에서 신승훈 자신의 현재 위상에 대한 소감을 물어보려는 순간, 그는 질문을 앞질러가며 길게 말을 이어갔다.
“이미 8집을 냈고 올해 말 9집을 낼 계획인데요, 만약 잘 안 되면 사람들은 ‘신승훈이 이제는 갔다!’고 하겠지만 그건 잘못입니다. 계속된 승전보로 재단하기보다는 지금까지 이 정도 해온 것을 인정하는 풍토가 우선돼야 하지 않을까요. 하루가 멀다 하고 유행이 바뀌는 판에 10년 이상 해왔다는 점을 인정해줄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그런 가수가 우리에게 얼마나 있나요?
만약 화려한 무대로 유명한 일본의 공연 가수들이 개방시점을 맞아 들어오면 그 엄청난 스케일에 모두들 놀라고 위축될 겁니다. 그때 우리도 잘 대응해야 하는데 국내 가수 중에 그런 ‘방패막이’가 얼마나 있습니까. 서태지나 김건모나 모두 10년을 넘겼는데, 그런 점에서도 우린 같이 가야 합니다.”
인터뷰에 임하는 신승훈의 자세는 솔직하고도 철저했다. 그는 필자와의 인터뷰를 위해 그간 ‘신동아’에 연재된 시리즈를 모두 읽었다고 한다.
대학을 다니던 중 아르바이트로 통기타를 연주하면서 음악활동을 시작해 대전지역에서는 꽤 알아주는 통기타가수가 됐다. 그가 곡을 쓰게 된 건 ‘업소에서 남의 노래만 부르는 데 질려서’였다. 작곡가 겸 가수의 역량을 갖춘 그가 중앙무대를 꿈꾼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바라던 앨범 발표의 기회는 바로 찾아오지 않았다.
1989년 서울로 올라와 가리봉동 지역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기회를 노렸지만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루 종일 라면으로 끼니를 잇다가 그만 영양실조로 장염에 걸리고 말았다. 결국 대전으로 돌아오게 되었고 사람들 사이에선 ‘실패해서 내려왔다’는 수군거림이 대단했다.
-데뷔 앨범을 만드는 기회는 어떻게 마련됐습니까.
“대전에 내려와서도 침통한 기분이었지만 곡을 쓰고 노래 부르는 것으로 자세를 가다듬었어요. ‘미소 속에 비친 그대’를 만든 것도 그때였지요. 하지만 잘 쓴 곡이라곤 전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도 한동안 ‘내가 만든 곡은 타이틀곡이 될 수 없다’고 여겼을 정도니까요.
그런데 하루는 이 곡을 열심히 부르고 있는데, 3층 옷가게 주인이 내려와 ‘지금 부른 거 누구 노래냐’고 묻더군요. 그때 자신감을 얻었어요. 곧 데모테이프를 만들어 서울의 여섯 군데 기획사에 돌렸습니다. 마침 작사가 신재각씨가 그것을 들었고 라인음향의 김창환씨에게 소개해줘서 기회가 마련되었던 거죠.”
-김창환씨는 과거나 지금이나 만드는 앨범마다 성공을 거듭한 말 그대로 ‘마이더스 터치’의 존재입니다. 신승훈씨도 그렇고 라인음향 소속 스타가수들이었던 노이즈 박미경 김건모 등은 ‘김창환 사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곡을 쓰는 신승훈씨 입장에서 그와 음악적 갈등은 없었는지 궁금합니다.
“라인음향은 김창환씨 주도 하에 댄스음악에 집중했고 발라드를 부르는 가수는 저밖에 없었죠. 조금은 외로웠습니다. 김창환씨와 더러 음악적 시각차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갈등이라고 할 만한 것은 없었어요. 음악 사부로서 그는 늘 놀라운 통찰력을 보여주었습니다. 첫 앨범을 만들 때도 풋내기인 제가 만든 ‘미소 속에 비친 그대’를 타이틀로 정하더라고요. 일과 가정밖에 모르는 분이에요. 음악은 반드시 끝을 봅니다. 지금도 주변에서 이런저런 이유로 김창환씨를 비난하는 말이 들리면 전 ‘그 분을 알기 전에 함부로 얘기하지 말라’고 얘기합니다.”
-대표작이라 할 ‘보이지 않는 사랑’은 클래식을 도입부에 사용해 화제를 모았습니다. 이 곡은 어떤 상황에서 만들어졌습니까.
“데뷔 앨범이 성공한 후 1991년 7평짜리 오피스텔에서 살게 됐는데 어느 날 안성기 이미숙씨가 주연한 ‘겨울나그네’를 비디오로 봤습니다. 거기에 삽입된 ‘보리수’를 듣고 강한 인상을 받았고, 다음 앨범에는 성악을 활용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래서 구상한 곡이었지요. ‘내 곡도 된다’는 생각과 싱어송라이터로서의 자신감을 가져다준 곡이라서 잊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까지 앨범 판매고가 1000만장을 넘어선 것으로 아는데, 조금 자세히 말해줄 수 있나요.
“6집에서 이미 1000만장을 넘겼어요. 데뷔 앨범이 110만장, 2집 ‘보이지 않는 사랑’이 135만장 팔렸죠. 가장 많이 나간 건 189만장이 판매된 5집입니다. ‘나보다 조금 더 높은 곳에 니가 있을 뿐’과 ‘내 방식대로의 사랑’이 수록된 앨범이죠. 소속사에서 우스갯소리로 ‘너무 많이 나가서 줄여야겠다’는 말이 나왔으니까요. 판매량은 제가 매달 받은 인세 서류가 있기 때문에 절대로 속일 수 없습니다. 제 앨범은 발라드지만 판매기간이 4개월에 이르곤 합니다. 다른 가수에 비하면 배 정도 길지요. 타이틀곡으로 끝나지 않고 다른 수록곡이 잇달아 히트해서 그랬던 것 같아요.”
“데뷔 이후 외모는 계속 젊어지는 것 같다”는 신승훈 본인의 말은 데뷔 초기(왼쪽 위), 1995년(왼쪽 아래), 요즘 모습(오른쪽)을 비교해보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곤혹스런 표정으로) 그건 또 달라요. 남들이 생각하는 만큼의 큰돈은 벌지 못했습니다. 앨범 낼 때마다 100원씩 인세를 늘린 정도였으니 많은 액수는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사랑’ 후 남은 돈이 3800만원이었으니까요. 제가 음반이나 공연 외에 다른 것을 안 하잖아요. 지금도 스튜디오는 초라하고 그나마 월세입니다. 어찌 보면 요즘 누구 말대로 ‘실패한 인생’이지요.
앨범 판매 1000만장이 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못 믿으시겠지만, 돈이 생기면 집에 생활비 보내고 악기 사고 음반을 사들였습니다. 제가 음반엔 욕심이 많아서 그간 1만장 가량 모았습니다. (파안대소하며) 지금 제 재산은 현금이 아니라 음반이죠. 돈에 관한 한 참 바보처럼 살아왔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활동으로 충당할 마음도 있었을 텐데, 신승훈씨는 방송이나 일반 행사도 많이 안 했지만 돈벌이가 되는 CF는 전혀 하지 않았더군요.
“아주 마음이 없었던 건 아닙니다. 그런데 CF는 제 이미지와 동떨어진 동작과 말을 해야 되잖아요. 내 음악 이미지와 맞지 않아 팬들 눈에 ‘이중적’으로 보일 수 있다고 판단해서 처음부터 인연을 끊었어요. 늘 ‘고 김현식 유재하 선배 같으면 과연 어떻게 했을까’ 하고 머리 속에 되뇌었어요. 가수로서의 긴 생명력을 고려한 게 굳이 계산이라면 계산이겠지요.”
-얘기 꺼내기가 좀 미안합니다만 1998년 탈세사건은 어떻게 된 겁니까. 그때는 신승훈씨 이미지에 치명타가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 뉴스를 우리 집에서 김건모씨와 같이 봤어요. ‘어, 우리가 뉴스에 나오네!’ 했죠. 단적으로 말해 기획사가 산업적 경영체계를 갖추기 전의 주먹구구식 풍토로 인해 발생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제 인생에서 가장 힘든 일이었죠. 6개월 후 무혐의 판정이 나기 전까지 전국이 감옥이었습니다.
영수증까지 일일이 챙기면서, 세금문제를 신경 쓰면서 가수가 음악을 할 수 있겠느냐는 생각도 들었어요. 억울하긴 하지만 그건 분명히 제 잘못입니다. 하지만 탈세사건 이후 제 가치관이 많이 변했습니다. 세상이 무서워졌어요. 늘 아름답게만 봤는데.”
-주류 가수 가운데 신승훈씨는 공인 ‘라이브의 왕자’입니다. 라이브 콘서트를 지금까지 얼마나 했는지, 음반보다 라이브에 역점을 두게 된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음반으로 보면 저는 지금 주류가 아니에요. 오히려 비주류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달라지는 건 없습니다. 저한테는 라이브가 있다는 믿음 때문이에요. 공연에 관한 한 전 주류지요. 이 부문만은 많이 노력해온 결과라고 자부합니다.
‘보이지 않는 사랑’이 히트하던 무렵인 1992년 3월 잠실 체조경기장에서 열렸던 ‘뉴 키즈 온 더 블록’ 공연을 보고 나서 굉장한 충격을 받았어요. 비록 불행한 결과를 낳았지만, 그들이 국내 가수들은 꿈도 꾸지 못했던 체조경기장에서 공연하는 걸 보고 너무나 부러웠습니다. 그때 속으로 ‘반드시 체조경기장을 뚫는다!’고 다짐했었죠. 나중에 결국은 해냈고요.
그 이후 ‘널 사랑하니까’와 ‘로미오와 줄리엣’이 들어 있는 3집은, 평가는 안 좋았지만 아예 공연장에서 할 수 있는 레퍼토리로 꾸몄던 앨범이에요. 이 시기에 ‘눈을 여의도(방송국)에서 잠실(공연장)로 돌리자’는 원칙을 세웠어요. 공연 횟수는 지금까지 약 300회쯤 될 겁니다. 참, 제가 작곡자상을 받았으니까 이제 남은 목표가 뭔 줄 아세요? 공연상을 받는 겁니다. 음악적으로 마지막 소원은 ‘사상 최고의 공연’을 만드는 거고요.”
솔직히 ‘국민가수’는 부담스러워
-1996년 한 연예주간지에서 신승훈씨에게 ‘국민가수’라는 영예로운 수식어를 최초로 붙여줬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후로 조금만 인기 있는 가수가 나오면 국민가수 운운하는데, 그 말을 들으면 기분이 어떻습니까.
“정확히 기억하시네요. 저도 그 잡지가 붙인 제목에 깜짝 놀랐어요. 영광스럽지만 말이 안 되지요. 진정한 국민가수라 할 조용필 선배도 언젠가 ‘나도 국민가수 되려면 아직 멀었다’고 말했어요. 조용필 선배가 그러는데 제가 감히 어떻게 국민가수란 말을 듣겠습니까. 그리고 국민가수라는 말은 제게 닳고 닳은 이미지로 느껴져서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하지만 신승훈에게 국민가수란 칭호는 제법 잘 어울린다. 그의 팬 층이 다른 가수들에 비해 넓을 뿐 아니라 ‘가수도 인정하는 가창력’이란 점에서도 무리 없게 들린다. 그의 공연장에 가면 늘 객석에서 동료 가수들을 목격할 수 있다. 신승훈의 광적인 팬이라는 성시경은 언젠가 콘서트를 보고 나서 “승훈이 형이 잘 하는 줄 알았지만 막상 이 정도인지는 몰랐다”며 혀를 내둘렀다. 사실 신승훈의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음(音)과, ‘보이지 않는 사랑’이 말해주듯 살아 꿈틀대는 감정표현력은 가히 1990년대 최고봉이다.
타고났다고밖에 할 수 없는 그의 노래솜씨는 부모에게서 물려받았다. 건축업을 하다가 지금은 은퇴한 부친 신중철(72)씨와 모친 김월현(64)씨는 모두 주위에서 노래 잘하기로 알아줬다고 한다. 하모니카를 잘 불었던 아버지와 노래자랑 콩쿠르에서 입상한 경력이 있는 어머니는, ‘보이지 않는 사랑’ 음반의 출시를 앞두고 처음 들어보는 자리에서 100만장 대박을 ‘예언’하기도 했다고. 형제들(신승훈은 2남3녀 중 장남)이 모두 음악적 역량이 뛰어나 신승훈은 “여차하면 ‘작은별가족’이 될 뻔했다”고 웃어 보였다.
-막상 직업가수가 되겠다고 했을 때 집안의 반대는 없었습니까.
“물론 아버지는 반대하셨어요. 제가 중학교 2학년 때 가족 모두 스케이트장에 간 적이 있는데 그날따라 얼음이 다 녹아버려 실망이 컸어요. 어린 마음에 떼를 썼더니 아버지가 통기타를 선물해주셨지요. 아버지의 반대에 부딪쳤을 때 어머니가 항변하시더군요. ‘아니, 당신이 기타까지 선물해주고 나선 이제 와서 뭘 반대하느냐’고요.”
이제는 매너리즘이 가장 무섭다
-지금까지 여덟 장의 독집 앨범을 발표했습니다. 그 중 어떤 앨범이 만족스럽습니까. 그리고 ‘내 인생의 한 곡’으로 꼽을 수 있는 건 뭔가요.
“‘그 후로도 오랫동안’과 ‘오랜 이별 뒤에’가 수록된 4집입니다. 이 앨범으로 새로 생긴 팬들이 많아서 기억에 남아요. 조금 쑥스러운 말인데, ‘그 후로도 오랫동안’은 콘서트에서 부르면서도 스스로 잘 만든 곡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내 인생의 한 곡이라면 아까 말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 사랑’이죠. ‘미소 속에 비친 그대’가 소가 뒷걸음질치다 잡은 곡이라면 ‘보이지 않는 사랑’은 ‘내가 제대로 곡을 쓸 수 있는 사람’이라는 용기를 준 곡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사랑을 많이 받았다는 것도 중요하고요.”
13년 정상의 인기를 누린 그는 이제 부인할 수 없는 중견가수가 됐다. 후배 가수들에게 한마디 할 수 있는 위치다. 하지만 “나 자신 추스르기도 벅찬 처지에 무슨 할 말이 있겠느냐”며 극구 사양했다. 그래도 꼭 한마디 부탁한다고 재촉했더니 마지못해 “가수도 ‘이 노래 어디서 들어봤는데’ 하고 작곡가에게 제시할 정도는 돼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음악을 많이 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신승훈의 음악이 무엇을 의미했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지금까지 인터뷰한 가수들이 곰곰이 생각한 끝에 말문을 연 것과 달리 신승훈의 입에서는 뜻밖에도 즉각 답이 나왔다.
“제 음악은 한마디로 팬레터에 대한 ‘답장’이었습니다. 세 번째 앨범은 팬들에게 보내는 세 번째 답장이었고 8집은 여덟 번째 답장이었지요. 제 팬들은 대단합니다. 약간만 음악적 변화를 시도해도 바로 알거든요. 일반 대중은 잘 몰라도요. 제 음악은 바로 그들에게 쓴 답장이었어요. 새로운 팬들을 만들어내기보다 이제까지 함께해온 그들을 실망시켜서는 안 된다는 생각입니다. 내 생각과 같이 가는 팬들, 청소년 시절부터 저를 추억 속에 자리잡아놓은 그들을 배신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저는 성실하게 음악 답장을 보내고 있습니다.”
신승훈은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는 것이 당장의 목표라고 했다. 그러기 위해 주변인들에게 “예스맨이 되지 말아달라”고 신신당부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인터뷰를 마치고 일어서면서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그러나 앞으로는 답장이 아니라 제가 편지를 쓰려고 합니다. 이제 팬들이 답장을 해줄 차례지요. 적어도 제 팬들은 제 편지를 읽어줄 거예요.”
그 말은 팬들에 대한 굳건한 신뢰를 바탕으로 한 변화에 대한 시사였다. 그 변화의 폭은 작을 것 같지 않았다. 신승훈의 새 ‘음악편지’가 과연 어떤 내용이 될지 그 순간부터 궁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