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월호

‘나눔 경영’ 실천하는 (주)삼구 박종구 회장

맨해튼 7번가 ‘실크 박’의 ‘비단결’ 봉사 인생

  • 글: 성기영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ky3203@donga.com

    입력2004-12-27 10:5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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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학교발전기금 120억원을 단번에 기증한 선배. 현금 50억원을 선뜻 출연해 만든 복지재단 이사장.
    • 한때 ‘홈쇼핑업계의 신화’로 불리던 박종구 회장의 요즘 삶은 이렇다. ‘욕심을 버리면 세상이 다르게
    • 보인다’는 그의 ‘상생 철학’ 이야기.
    ‘나눔 경영’ 실천하는 (주)삼구 박종구 회장
    “사업을 하다 보면 늘 돈이 모자라게 돼 있어요. 외식 사업을 시작하면 프랜차이즈를 통째로 갖고 싶고, 카센터라도 하나 있으면 자동차 부품업체도 갖고 싶은 거예요. 그게 다 돈인데…. 그러니 돈은 언제나 모자라는 거죠. 그걸 다 하려고 욕심을 부리면 끝도 없지….”

    (주)삼구의 박종구(朴鍾久·73) 회장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시각을 다투며 현장을 뛰는 기업인이라기보다는 40년 사업 경험에서 우러나온 인생 이야기를 들려주는 도덕 선생님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한때 ‘홈쇼핑업계의 신화’로 불렸던 삼구쇼핑을 성공적으로 대기업에 매각한 뒤 현재는 용산 알짜배기 땅에 초고층 주상복합 아파트를 짓고 있는 박 회장은 탄탄한 재력가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고희(古稀)를 훌쩍 넘긴 박종구 회장이 최근 들어 후배 기업인들에게 해주는 이야기는 대부분 ‘어떻게 돈을 쓸까’에 관한 것들이다. 반면 ‘어떻게 돈을 벌까’에 관한 이야기는 별로 없다. 박 회장의 이런 스타일을 좀더 알기 위해선 최근 들어 그가 사회에 내놓은 기부금 내역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박 회장이 모교 후배들을 위해 발전기금으로 내놓은 돈은 무려 120억원이다. 복지재단에 출연한 돈도 70억원이나 되니 3~4년 사이에 사회에 환원한 돈만 200억원에 이르는 셈이다. 대한민국 모든 기업들이 너도나도 ‘최악의 불황’이라면서 투자는커녕 그동안 벌어들인 돈을 금고 속에 쌓아두고 있는 현실을 감안하면 박 회장의 잇따른 ‘선행’은 군계일학(群鷄一鶴)이라는 소리를 들을 법도 하다.



    박 회장이 지난 2000년 설립해 지금까지 70억원을 출연한 삼구복지재단은 소년소녀가장이나 독거노인을 위해 생활비를 지급한다. 2004년에도 3억원 가까운 돈이 이들 불우한 이웃들에게 전달됐다.

    이 같은 기부와 선행의 내막을 들여다보려면 박종구 회장의 40년 가까운 사업인생을 찬찬히 뜯어볼 필요가 있다. 박종구 회장이 대학 졸업 후 3년 남짓한 직장생활을 청산하고 처음 손댄 사업은 미군부대로부터 불하받은 고철을 수출하는 것이었다. 1960년대 초 ‘신호사(新湖社)’를 창업했는데, 회사 이름은 박 회장의 고향인 경남 밀양의 신호리(新湖里)라는 마을 이름에서 따왔다.

    미군 고철 수출로 사업 시작

    “당시는 ‘미군 잉여물자불하처(USP-DSO)’가 주관해 미군이 폐기처분하는 각종 고철을 국제경쟁입찰을 통해 불하하던 시기였어요. 한번 입찰에 들어가면 대형 트럭부터 스리쿼터(4분의 3t 트럭), 비행기 날개나 포탄 등 별의별 것들이 다 나옵니다. 입찰을 통해 이런 고철을 불하받으면 보세지역 안에서 절단한 뒤 바로 수출하는 방식으로 5~6년 정도 재미를 봤지요.”

    그러나 주한미군에서 흘러나오는 고철이 화수분처럼 무궁무진할 리도 없으니 고철 수출 사업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고철 수출을 접고 섬유 기계 수입을 시작했다. 오퍼업체를 운영한 경험을 살려 승승장구하면서 회사규모를 점점 키워갔으나 우여곡절끝에 1970년 결국 이 업체도 정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되팔아버린 이탈리아제 냉장고

    수입업체를 운영하다 보니 웃지 못할 일도 적지 않았다.

    “정부에서 냉장고를 수입할 수 있는 쿼터를 마지막으로 줄 때였어요. 부유층을 상대로 팔려고 꽤 비싼 이탈리아제 냉장고를 수입했는데 도무지 팔리지를 않는 거예요. 이유를 알아보니 당시만 해도 냉장고를 ‘전시용’으로 거실에 비치해놓던 시절이어서 폭이 넓은 일제 히타치(HITACHI) 냉장고는 잘 팔리는데, 용량은 크지만 폭이 좁은 이탈리아제 냉장고는 부자들이 거들떠보지도 않는다는 거예요. 폼이 안 난다는 거죠. 당시 동아일보 조선일보에 광고도 내보내는 등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해봤지만 결국 안 팔려서 전부 청산해버렸습니다. 대략 2000대쯤 됐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 후 박 회장의 사업인생에서는 ‘실크’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1975년 ‘삼구통상(森久通商)’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해 오늘날의 (주)삼구를 이루게 된 것이 실크사업을 통해서였기 때문. 당시 서울 북창동의 한 건물에 10평 남짓한 사무실을 얻어 직원 몇 명을 두고 사업을 시작한 후 처음 손댄 것이 실크제품을 들고 미국 시장을 개척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의욕만 앞섰을 뿐 미국 시장을 뚫는다는 것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당시 미국 사람들은 일본항공(JAL)조차도 ‘위험하다’면서 이용하기를 꺼릴 때였어요. 전쟁에서 패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나라가 운영하는 노선인데 믿을 수 있겠냐는 거죠. 오죽하면 미국의 유명 영화배우가 일본 전통의상을 입고 JAL 비행기를 이용하는 광고를 만들어 미국 시청자들에게 보여줬겠습니까.”

    한국에서 건너간 박종구 회장 역시 미국 진출 초창기에는 온갖 고생을 다 겪었다. 우선 ‘한국 제품을 믿을 수 없다’는 미국인들의 고정관념을 깨는 것이 급선무였다. 무조건 실크 제품을 들고 태평양을 건너 대한무역진흥공사(KOTRA의 전신)의 힘을 빌려 미국 실크업계 관계자들을 만났다.

    그러나 번번이 고개를 흔드는 사람들뿐이었다. 다행히도 미국 진출을 포기하기 직전 마지막으로 만난 국제실크협회(ISA) 관계자와의 상담이 순조롭게 이뤄져 4만달러의 수출 계약을 맺을 수 있었다. 겨우 미국 시장 진출의 교두보를 확보한 것이다.

    하지만 고급 취향을 가진 미국 소비자들의 주머니를 어떻게 공략하느냐가 문제였다. 고민 끝에 무조건 뉴욕 맨해튼 7번가의 고급 패션 스토어를 누비며 한국산 실크 제품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때로는 유명 여배우를 동원해 미국인들에게 실크의 아름다움을 알렸고 때로는 ‘보그(VOGUE)’ 같은 패션 전문지에 기사를 싣기 위해 잡지사 관계자들을 찾아다니기도 했다.

    박 회장의 이런 영업전략이 현지 관계자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심어줬는지 당시 맨해튼 패션가에서는 ‘실크 박’이라는 그의 별명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러한 전략은 서서히 효과를 보기 시작했다. 미국의 고급 소비자층을 중심으로 여기저기서 주문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또 원단보다는 완제품 요구가 늘면서 경기도 시흥 공장을 새로 인수해 여성용 실크 블라우스와 드레스를 본격적으로 생산하기 시작했다. 미국 수출을 시작한 첫 해인 1975년에 200만달러 수출을 기록한 것을 시작으로 이듬해인 1976년 400만달러, 1977년 700만달러로 수출액이 급신장하면서 그 해 대통령 표창을 수상하는 영광까지 누리게 됐다.

    ‘7번가의 기적’

    특히 실크는 자연섬유라서 미국 수출 쿼터의 적용을 받지 않아 대규모 수출의 길을 열 수가 있었다. 당시 실크사업의 성공은 아직까지도 (주)삼구의 기반을 다진 초석이 되고 있다. 오죽하면 지난 2001년 그의 고희(古稀)를 맞아 주변의 지인들이 펴낸 수상집(隨想集) 제목이 ‘실크로드로 가는 길’이었을까.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소비자들이 ‘삼구’라는 이름을 확실히 알게 된 것은 1994년 홈쇼핑 프로그램 사업자로 선정되면서부터였다. 쟁쟁한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삼구쇼핑’이라는 생소한 이름의 중소기업이 주도하는 컨소시엄이 자본금 300억원 규모의 홈쇼핑 사업자로 선정되자 업계의 관심이 집중되기 시작했다. 특히 ‘삼구’라는 회사 이름과 똑같은 39번 채널을 확보함으로써 소비자들의 머릿속에 강한 인상을 남겼다. 그렇다고 39번 채널을 갖기 위해 일부러 로비를 벌인 것도 아니었다.

    “케이블TV 사업자 선정 당시 홈쇼핑 사업자가 맨 마지막에 선정되었기 때문에 좋은 번호는 사실 다른 채널들이 모두 확보해 간 뒤였어요. 우리 회사 이름이 ‘삼구’니까 그냥 ‘혹시 남아있는 번호 중에 39번 있으면 그것으로 달라’고 했을 뿐이죠, 뭐.”

    ‘삼구(森久)’라는 사명(社名)은 당시 유명한 한의사가 지은 것이라고 한다. 70년대 중반, 허리 통증 때문에 침을 맞으러 다니던 박 회장은 새로운 회사를 창업하겠다고 결심하고 당시 동양철학에 정통했던 담당 한의사에게 새로 출범할 회사의 작명(作名)을 부탁했다. 이 한의사가 내놓은 회사명이 바로 ‘삼구(森久)’였다. ‘삼(森)’자는 ‘나무 빽빽할 삼’, 즉 ‘많고 성(盛)함’을 뜻하는 것이고 ‘구(久)’자는 박 회장의 이름 끝자와 똑같은 ‘오래 구’자이니 ‘오래도록 번성하라’는 소박하기 이를 데 없는 이름이었다.

    그러나 승승장구하던 박 회장의 홈쇼핑 사업이 오히려 인생의 전환점이 될 줄 누가 알았으랴. 홈쇼핑 진출 초기부터 박 회장을 대신해 사업을 진두지휘하던 외아들 경홍씨가 1998년, 나이 마흔도 안 돼 유명을 달리했다. 삼구쇼핑을 시작으로 드라마 채널 인수, 텔레마케팅 회사 설립 등으로 사업 영역을 계속 넓혀가고 있을 무렵이었다.

    당시 박경홍 사장은 삼구쇼핑의 경영을 총괄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미국 ‘포춘(Fortune)’지에 ‘한국을 대표하는 21세기 경영자’로 소개될 정도로 앞날이 기대되는 젊은 경영자였다. 아들의 사고 소식은 박 회장에게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일이었다. 그때 박 회장의 나이는 일흔을 바라보고 있었다.

    박 회장은 삼구쇼핑 이사에서 대표이사로 자리를 옮겨 아들을 대신해 다시 경영 일선에 나섰다. 그러나 박 회장은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얼마전 회고록에서 밝혔듯이 “첨단 정보통신기업을 이끌고 가는 것이 벅찼던 것이 사실”이었다.

    “아니, 말도 못 꺼내나?”

    사업가라면, 그것도 박 회장 표현대로 ‘쇠장사에서부터 소금장사까지’ 안 해본 것이 없는 사업가라면 매사에 과감하고 저돌적인 스타일일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미군부대에서 고철을 주워다 팔면서 사업을 시작했던 정주영 현대 회장이 그랬던 것처럼. 그러나 밑바닥에서 시작해 갖은 고생 끝에 성공한 입지전적 인물답지 않게 박 회장은 저돌적이기보다 온유한 스타일이고 자신의 주장을 고집하기보다는 주변의 이야기를 더 많이 듣는 편이다.

    박 회장이 회사에서 내놓은 아이디어는 가끔씩 직원들의 반발에 부딪히는 경우도 있었다. 때로는 최고경영자의 아이디어가 직원들보다 서너 걸음씩 앞서가다 보니 직원들이 불만을 가진 경우도 있고 때로는 박 회장의 아이디어가 지나치게 이상론에 치우친 것들도 있었다. 이런 경우 박 회장은 고집을 피우지 않고 한 걸음 물러나는 것으로 직원들을 다독거린다. 박 회장이 슬쩍 물러나며 던지는 말은 간단했다. “아니, 말도 못 꺼내나?”

    ‘나눔 경영’ 실천하는 (주)삼구 박종구 회장

    회원 수 22만명의 고려대 교우회장을 맡고 있는 박종구 회장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바쁜 동창회장’으로 꼽힌다. 박 회장이 재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수여한 뒤 건배를 제의하고 있다.

    이렇게 박 회장이 사업을 벌이는 방식을 보면 손자(孫子)가 병서(兵書)에서 언급한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무엇인지를 짐작하게 한다. 손자는 ‘백 번 싸워 백 번 승리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 아니고 싸우지 않고도 적을 굴복시키는 것이 최선의 방법(百戰百勝, 非善之善者, 不戰而屈人之兵, 善之善者也)’이라고 했다. 박 회장은 어쩌면 40년 사업 인생을 ‘싸우지 않고 이겨온’ 사람처럼 보인다.

    2000년을 기점으로 더 이상 사업을 늘리지 않고 있는 박 회장은 요즘 복지재단 사업과 사회공헌 활동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 특히 박 회장이 역점을 두고 있는 것은 모교인 고려대 교우회장 활동이다. 박 회장은 고려대 정치학과 51학번으로 한국전쟁 중 고려대가 대구 임시교사(校舍)로 옮겨갔던 시절 입학했다. 그 시절 정치학과 지망생들 대부분이 그랬듯이 정치에 관심이 있을 법도 한데 박 회장은 일찌감치 정치와는 거리를 두고 사업의 길을 택했다.

    총장과 교우회장의 ‘찰떡 궁합’

    삼구쇼핑이 한참 잘나가던 시절 이름만 대면 알 수 있을 만한 케이블 보도채널이나 모 종교방송 등이 IMF 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박 회장측에 인수 의사를 타진했을 때도 박 회장은 손을 절레절레 내저었다. 자신은 적임자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정치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었다면 보도기능까지 가진 방송사 최고경영자들이 찾아와서 인수를 제의할 때 마다할 수 있었겠는가.

    정치와 거리를 두고 사업에만 전념했던 박 회장의 이런 태도가 회원수 22만명이나 되는 고려대 교우회를 이끌 적임자로 평가받은 요인인지도 모르겠다. 지난 2003년 고려대 교우회장에 취임한 박 회장은 그 후 2년 가까이 회사 경영에 쏟아부을 시간을 쪼개가며 적지 않은 일을 해냈다.

    특히 ‘글로벌 고대’를 앞세우며 민족적 이미지가 강했던 고려대를 국제무대로 끌어내는 데 주력하고 있는 어윤대 총장과 함께 전국, 나아가 세계를 누비며 인재를 확보하고 동창들을 상대로 기부금 모금을 호소하느라 여념이 없다. 주변에서는 박종구 회장과 어윤대 총장 모두 사업 마인드와 국제감각이 뛰어나다는 점을 들어 두 사람에게 ‘찰떡 궁합’이니 ‘황금 콤비’니 하는 별명을 붙이기도 했다.

    박종구 회장이 중고등학교, 대학교 동창회를 막론하고 ‘대한민국에서 가장 바쁜 동창회장’이라고 불리는 것도 그 때문이다. 동창회장이라는 자리를 감투나 쓰고 돈 몇 푼 내면 그만인 것으로 생각하는 풍토에서 박 회장처럼 총장과 손을 잡고 미국으로 일본으로, 그리고 각 지방으로 돌아다니면서 기부금을 모으고 후학들을 격려하는 동창회장을 보기는 쉽지 않다. 고려대 교우회 관계자는 “박 회장이 과거의 교우회장에 비하면 5배나 많은 일정을 소화하고 있다”고 귀띔하기도 했다.

    지난 2000년 고려대 개교 100주년 기념사업 출범 당시 박 회장이 학교 발전기금으로 기부했던 120억원은 대학에 희사한 기부금 역사상 전무후무한 기록으로 꼽힌다. 당시 박 회장은 고려대 교양관 건물을 짓는 데 드는 비용 전액을 기부금으로 내놓아 화제를 모았다.

    박 회장은 120억원이라는 거액을 내놓으면서도 아무런 조건을 붙이지 않았다. 단 ‘고려대를 상징하는 석조건물의 디자인을 살려 튼튼하게 건물을 지어달라’는 당부뿐이었다고 한다.

    “모교 발전이 최대의 영광”

    게다가 박 회장은 100억원이 넘는 모교 발전기금을 내놓은 것에 그치지 않고 ‘발로 뛰는 교우회장’ 역할을 자임하고 있다. 특히 그는 요즘 선후배를 막론하고 고려대 교우들을 만날때마다 “모교의 발전이 교우들에게는 최대의 영광”이라며 학교 발전에 힘을 모아줄 것을 호소한다고 한다.

    솔직히 말해 재계 순위를 다투는 그룹 회장이라면 주변의 시선 때문에라도 학교건 복지시설이건 기부 행렬에 동참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기부금 액수를 놓고 ‘A그룹은 어떻고 B그룹은 어떻고’ 하는 식의 입방아를 찧는 사람들을 의식하지 않을 수도 없다. 게다가 재벌급 기업들의 이런 기부와 선행, 즉 사회공헌활동은 그 자체로 하나의 마케팅 수단이 되기도 한다.

    그뿐인가. 대한민국에서 손꼽히는 어느 재벌 회장은 경영 실패에 책임을 지고 사재를 출연한다면서도 결국 주식을 내놓는 바람에 이 주식의 가치를 놓고 벌써 몇 년째 갑론을박하는 희한한 광경도 벌어지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삼구의 경우는 사정이 다르다. 이미지를 관리해야 하는 소비재 생산 기업도 아니고 수십 개의 계열사를 거느린 재벌급 기업은 더더욱 아니다. 그런데도 박종구 회장은 50억원 규모의 복지재단을 만들면서 주식이나 유가증권이 아닌 현금을 내놓아 주변을 깜짝 놀라게 했다.

    요즘 기업들이 투자에 나서질 않는다고 아우성치는 것도 박 회장이 보기에는 딱할 따름이다. 사업을 해온 40년동안 고비가 찾아올 때마다 쓴맛과 단맛을 모두 경험한 그는 요즘 후배 기업인들이 너무 안이한 생각에 빠져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에 답답해질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모든 비즈니스의 성공 가능성은 50대50입니다. 모험을 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이룰 수가 없어요. 성공 가능성이 있는 사업만 하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박종구 회장에게 이렇게 물어보는 것은 어떨까. 평생 사업을 통해 벌어온 부(富)를 사회에 환원하고 있는 그의 ‘기부 시리즈’는 당신에게 ‘성공이 보장된 또 다른 사업’이 아니냐고. 후학들의 성장을 뒷받침하고 그늘진 이웃의 웃음을 찾아주는 일이야말로 ‘성공이 보장된 진정한 사업’이 아니냐고.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 보이던 그의 답변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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