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기를 기회로…. 정보통신연구진흥원이 정보화촉진기금 비리의 오명을 떨치고 전문성과 공정성을 겸비한 IT산업 지원자로서 재기의 날개를 펴고 있다. 개혁을 이끄는 김태현 정보통신연구진흥원장이 조직 쇄신 의지와 함께 IT산업 발전에 대한 비전과 소신을 밝혔다.
IITA는 말 그대로 한국 IT(정보기술)산업 발전의 기반이 되는 연구개발을 진흥하고 촉진하기 위해 설립된 정부출연기관. 정보통신 분야 연구개발에 대한 기획, 평가 및 관리업무를 수행하고, 정부의 위임을 받아 중소·벤처 기업을 지원하는 정보화촉진기금을 관리한다. 한국 IT산업의 미래를 주도하는 곳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직 개혁의 선봉에 선 김태현(金泰賢·56) 정보통신연구진흥원장은 정보화촉진기금 비리와 관련한 오명을 떨치고 한국 IT산업의 경쟁력 강화를 이끄는 기관으로 탈바꿈하겠다는 각오다. 비리로 얼룩진 정보화촉진기금이 ‘정보통신진흥기금’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비리를 신고하는 온라인 신고센터(www.iita.re.kr)가 설치된 것에서 개혁 의지가 엿보인다.
2003년 4월 정통부 차관에서 IITA 원장으로 자리를 옮긴 그는 정보화촉진기금 비리를 척결하는 해결사 노릇을 자임했다. 그는 “정보화촉진기금 비리가 개혁의 단초로 작용했지만, 사실 어떤 형태로든 조직 변혁은 필요한 상황이었다. IT 신성장 동력사업 지원과 IT 분야의 통계기획 기능강화에 개혁의 역점을 둘 것”이라며 강한 의지를 내비쳤다.
투명성 높일 평가관리팀
-정보화촉진기금 비리를 초래한 구조적인 문제가 무엇이라고 봅니까.
“먼저 기금 비리로 물의를 일으킨 것에 대해 국민 앞에 고개 숙여 사과드립니다. 기금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2001~02년 IMT 2000 사업자 일시출연금이 한꺼번에 들어오면서 큰 돈을 짧은 기간에 집행하다보니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기금을 어떻게 운용할 것인지에 대한 계획이 정밀하지 못했고, 사후관리도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습니다.”
정보화촉진기금은 1993년 정통부가 IT산업 연구개발을 지원하기 위해 만들었다. 1996년부터 10조2000억원 정도를 조성, 매년 2조원 가량을 선정 업체에 지원하고 있다. 기금은 통신업체들이 신규사업에 진출할 때 내는 일시출연금 등으로 충당된다. 그런데 일부 관료들이 기금 지원업체 선정에 부당하게 개입하면서 비리가 불거졌다.
김태현 원장은 IT 발전에 공헌하고 나름의 성과를 낸 이 기금이 비리사건으로 평가절하된 데 대해 안타까워했다. 2004년 10월말 민주노총 산하 전국 IT산업노동조합연맹은 정보화촉진기금 폐지를 강력하게 촉구한 바 있다. 이에 대해 김 원장은 “한국의 정보화를 촉진하고 연구개발을 지원한 정보화촉진기금이 있어 오늘 한국이 세계 최고 수준의 정보통신 인프라를 갖춘 IT강국으로 발돋움한 것”이라며 반박했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IITA의 공정성과 전문성을 강화했다고 들었습니다.
“평가관리팀, 정보조사통계팀을 신설했습니다. 평가관리팀은 기금 관리의 공정성을 담보하는 핵심이지요. 과거엔 사업담당 부서가 평가를 포함한 모든 연구관리 업무를 수행해 비리 발생의 틈이 있었지만, 이제 별도의 평가관리팀이 정확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신규 사업자를 선정할 겁니다. 사업부서의 권한을 분산해 사업부서와 평가부서가 상호 견제할 수 있게 됐죠.”
김 원장은 또 하나의 혁신 카드를 뽑아들었다. 조직 쇄신을 위해 원장 직속의 ‘혁신전략실’을 신설한 것이다. 또 구성원의 자정의지 강화를 위해 지난 12월15일 ‘혁신출범대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그는 조직 혁신 로드맵을 발표하고, 연구 수행에 앞서 ‘클린 선언’을 하도록 독려했다.
아울러 기술기획본부를 신설해 전문성을 가진 우수인력을 배치했다. 경제가 어려울 때 대기업보다 훨씬 큰 부담을 떠안는 중소기업을 집중 지원하도록 중소기업지원단도 신설했다.
상용화 기술은 세계 최고
비리 척결과 투명성 확보는 IITA가 당장 해결해야 할 과제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한국 IT산업을 어떻게 발전시켜나갈 것인가 하는 숙제를 풀어야 한다.
-한국의 IT기술이 세계적으로 어느 수준에 있는지 궁금합니다. 한국이 비교우위를 갖는 기술은 무엇입니까.
“미국의 경제전문지 ‘포춘’은 ‘앞으로 펼쳐질 디지털 세계에서 한국은 세계 최강 미국을 제치고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다’라고 보도했습니다. 우리 IT산업의 기술수준은 지난 20년간 비약적으로 발전해 메모리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제조 기술에서 높은 경쟁력을 갖고 있어요. 한국산 휴대전화는 세계시장의 25%를 점유하고 있고요. 특히 인터넷 가입자 3000만명, 이동전화 가입자 3600만명을 돌파한 정보통신 인프라는 세계 최고 수준입니다. 상용화 기술은 선진국들을 단연 앞서지요.”
-한국을 IT 강국으로 거듭나게 한 가장 큰 원동력은 무엇일까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제일 중요한 건 국민적 컨센서스가 있었다는 겁니다.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 사회에서는 주도권을 쥐겠다는. 정보화를 통해 선진국 진입을 앞당기겠다는 국민적 열망이 표출된 것이죠.
우리 국민이 지닌 디지털 마인드도 중요한 원동력 중 하나입니다. 신기술에 대한 수용 속도가 매우 빠르고 요구 수준도 높으니까요. 한국산 휴대전화 단말기가 카메라폰, MP3폰, 동영상폰으로 급성장할 수 있었던 건 우리 국민의 기술 적응력에 힘입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나 한국의 전체적인 IT 기술 수준은 선진국에 3~4년 뒤처져 있다는데….
“한국 IT산업의 가장 큰 약점은 핵심원천기술이 부족하다는 거죠. 한 예로 CDMA 단말기는 한국이 잘 만들지만, CDMA 원천기술은 미국의 퀄컴사가 독점 보유하고 있어요. 장기적으로 볼 때 원천기술을 보유하는 것이 훨씬 더 높은 부가가치를 창출하겠죠.”
-원천기술을 강화할 전략이 있습니까.
“문제는 연구비입니다. 한국의 기술 연구비는 미국의 20분의 1, 일본의 10분의 1에 불과하니까요. 결국 ‘선택과 집중’을 얼마나 잘하느냐에 한국 IT산업의 성패가 달린 겁니다. 현재 정보통신 기술개발사업의 19.5%에 달하는 기초연구 과제 비중을 점진적으로 확대하고 연구개발 전 과정에서 특허정보를 대폭 활용하도록 유도할 계획입니다. 그렇다고 필요한 원천기술을 모두 국내에서 확보할 순 없겠죠. 국내로 유치한 프라운호퍼, IBM, Intel 연구소 등 글로벌 R&D센터나 해외 유명 연구소와의 국제공동연구 등을 통해 부족한 원천기술력을 조기에 확보할 수 있도록 국제 협력을 강화할 것입니다.”
2020년까지는 IT가 한국 먹여살릴 것
-IT산업에서 중국이 한국을 맹추격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한국에선 ‘IT산업 거품론’도 있습니다. 한국 IT산업의 미래를 낙관할 수 있을지요.
“거대 시장을 거느린 중국이 IT산업을 국가의 주요 성장동력으로 삼고 집중 육성하는 게 사실이에요. 이 추세라면 2006~07년에는 한국을 추월할 것이라는 예측도 나오고 있습니다. 게다가 삼성의 PDP는 일본 기업과, LG필립스LCD는 대만 기업과 기술특허분쟁을 벌이는 등 선진국의 견제를 받고 있고요. 수세에 몰린 상황이죠.
그러나 IT산업 발전은 당위입니다. 위기를 극복하려면 IT산업의 특성을 고려해 한국이 비교우위에 선 산업군에 집중 투자해야겠죠. 정부는 현재 한국이 강점을 갖는 IT분야의 9대 전략품목을 ‘신성장 동력’으로 선정해 핵심기술 개발에 중점 투자하고 있습니다.”
김 원장은 9대 신성장 동력의 중요성을 수차례 강조했다. 9대 신성장 동력이란 차세대 이동통신, 디지털TV 방송, 홈 네트워크 등 향후 경제 성장을 이끌어갈 9개 사업분야를 일컫는다. 김 원장에 따르면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중 IT산업의 비율은 15.6%에 이른다. 이는 제조업 생산 비율이 GDP의 26~27%라는 현실을 감안할 때 대단히 높은 수치다. 그는 “IT산업 이후에는 나노 기술이나 바이오 기술이 부상하겠지만, 적어도 2020년까지는 IT산업이 우리를 먹여살릴 것”이라며, 신성장 동력 사업을 포함한 정통부의 IT839 전략에 힘을 실어줄 것을 당부했다.
-‘IT839 전략’은 어떤 것입니까.
“IT산업 가치사슬의 각 단계인 서비스, 인프라, 기기, 소프트웨어 및 콘텐츠를 유기적으로 연계시키는 국가발전전략이에요. 8, 3, 9란 3개의 숫자는 각각 다른 의미를 담고 있어요. 8은 8가지 정보통신 서비스를 도입하거나 활성화시킨다는 뜻이고, 3은 새로운 IT서비스 활성화의 기반이 되는 광대역 통합망, u-센서 네트워크 및 IPv6(차세대 인터넷 주소체계) 등 3가지 첨단 인프라를 구축하겠다는 의미입니다. 9는 9대 신성장 동력을 가리키죠. IT839 전략이 성공한다면 국민소득 2만달러 달성도 문제없을 겁니다.”
-IITA는 IT839 전략과 관련해 어떤 임무를 맡게 됩니까.
“IT839 전략에 대한 실행계획의 수립과 사업 관리를 총괄합니다. 2003년에는 9대 신성장 동력과 인프라 등을 중심으로 한 ‘IT839 전략 기술개발’을 수립했고, 이를 바탕으로 기술개발 사업을 추진하고 있지요. 특히 시장의 요구를 반영해 세계적 IT기술의 트렌드를 전망하고, 거기에 걸맞은 사업을 찾아 지원하는 것이 업무의 핵심이죠.
아울러 핵심 원천기술을 개발할 만한 전문인력 양성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이공계 기피현상이 문제인데…. 우수 인재를 유치하기 위한 ‘인센티브’ 제도 도입도 고려하고 있어요.”
IT839 전략을 효율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IITA는 앞으로도 상당한 액수의 기금을 관리하게 된다. 정통부의 기금조성 및 운용계획에 따르면, 향후 5년간 IT839 전략에 투입할 2조5772억원 중 2조4000억원이 정보통신진흥기금으로 투입될 예정이다. 정통부는 이 기금의 신규재원 확보를 위해 IT R&D 수혜업체에 기금 출연금을 부과하고 휴대인터넷(와이브로) 등 신규 주파수 매각 등에 따른 재원을 적극 발굴하기로 했다. 거대 자금을 투명하고 공정하게 관리해야 할 IITA의 어깨는 여전히 무겁다.
30년 공직생활의 교훈
김 원장은 행정고시 13회 출신으로, 30년 동안 공직에 몸담아왔다. 재정경제부, 청와대, 정당, 기획예산처를 거쳐 정통부 차관을 지낸 다양한 경력의 소유자다. 이러한 경력은 IT산업을 보다 균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데는 도움이 되겠지만, 상대적으로 전문성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하지만 김 원장의 생각은 좀 다르다.
“청와대, 재경부, 기획예산처 그리고 정통부. 이 네 가지 경력은 전혀 다른 성격을 가진 것처럼 보이지만 속내를 살펴보면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어요. 기획예산처 경제예산국장 시절엔 정보화예산을 편성하면서 우리나라 정보통신의 발전과정을 목도했지요. 리더의 역할은 실무를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기관이 나아갈 방향을 잡고 전체 흐름을 결정하는 겁니다. 젊은이들처럼 다양한 신기술을 빠르게 습득하는 얼리 어댑터는 아니지만, IT산업의 발전방향에 대해서는 확고한 비전을 갖고 있어요.”
그의 경영철학은 ‘박이정(博而精)’이다. 30년간 공직생활을 하며 얻은 깨달음이다. 부서의 최고 책임자는 대부분 자기 업무만 챙기다 보니 한 가지밖에 모르는 오류를 범하기 쉽다는 것. ‘넓은 시각으로 세상을 관조하고, 중요한 업무는 전략적으로 깊이 챙기겠다’는 게 그의 업무원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