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8월호

첫 소설집 ‘카스테라’ 펴낸 문단의 아웃사이더

“진짜 인생은 잘 나가다 빠진 삼천포에 있어요”

  • 이지은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miley@donga.com/사진 김성남 기자

    입력2005-07-29 14: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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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설 속 주인공 같은 기발하고 유쾌한 입담은커녕 농담 한마디 듣지 못했다. 기자가 건넨 우스갯소리에도 웃지 않았다. 그런데 그가 웃겼다. 꼴찌를 도맡아 하던 학창시절, 가난과 아내에 대한 미안한 마음에 소설 쓰기를 그만두려 했던 기억, 자신을 ‘아저씨’라 부르는 치매 어머니 이야기를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털어놓는다. 박민규의 소설이 ‘쿨’하다고? 아니, 누구의 작품보다 ‘핫’하다.
    첫 소설집 ‘카스테라’ 펴낸 문단의 아웃사이더
    소설가 박민규(朴玟奎·37)씨와 처음 이야기를 나눈 건 지난해 이맘때쯤이었다. ‘1970년대생 문화인들’을 취재하면서였다. 민족에 대한 부채의식이 없고 1990년대의 다양하고 풍요로운 문화적 토양을 누린 1970년대생 문화인들이 그들만의 감성으로 2000년대 문화계의 중심축으로 우뚝 섰다는 기사였다.

    2003년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과 ‘지구영웅전설’이란 두 편의 소설을 선보이며 화려하게 등장한 박민규씨는 1968년생이지만 등단시기 및 작품 성향에서 1970년대생 작가의 특성을 고스란히 갖고 있다. 경쾌한 문장과 독특한 발상으로 미국의 제국주의와 자본주의 권력을 통렬히 비판해 ‘80년대적 감성을 90년대적 표현기법으로 풀어냈다’는 평을 받았다.

    박씨에게 전화를 걸어 이런 이야기를 건넸더니 그의 대답은 “그렇대요?”라는 한마디 ‘질문’이었다.

    “전 잘 모르겠어요. 80년대 학번이지만 학생운동을 제대로 한 것도 아니고, 회사를 다니던 1990년대에는 소설 한 편 못 읽었어요. 정말 바빴거든요. 어쨌든 사람들은 규정하기를 참 좋아해요. 하긴 그래야 나중에 시험문제도 내고 그러겠죠. 이 단락의 주제가 무엇인가, 뭐 그런 식의.”

    유머 속에 숨겨진 날카로운 비수 같은, 딱 그의 소설다운 대답이었다.



    2003년, 소설가 박민규는 35세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긴 머리를 휘날리며 말 그대로 혜성처럼 나타났다. 장편소설 ‘지구영웅전설’과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이하 ‘삼미’) 단 두 작품으로 문학동네 작가상과 한겨레 문학상을 거머쥔 것. 슈퍼맨, 원더우먼, 배트맨, 아쿠아맨 등 아메리칸 히어로들과 슈퍼맨의 ‘맥도널드’ 심부름, 원더우먼의 ‘탐폰’ 심부름을 하며 지구를 지키는 데 일조한 한국인 영웅 ‘바나나맨’의 활약상을 보여주고, 프로야구 원년 15승65패를 기록한 삼미 슈퍼스타즈를 통해 “치기 힘든 공은 치지 말고, 잡기 힘든 공을 잡지 않는다” 또는 “1할2푼5리의 승률로 살아가라”는 ‘불온한’ 인생관을 전파하는 그에게 독자는 열광했다.

    엉뚱한 상상력, 마치 만화책을 읽는 듯한 능수능란하고 기발하며 경쾌한 입심, 웃음이 피식피식 나오게 하는 유머 감각…. “대한민국 문학사를 통틀어 가장 신선하고 충격적인 사건 하나를 지목하라면 ‘박민규’라는 작가의 출현을 들겠다”고 한 소설가 이외수의 말처럼 그의 등장은 문학계는 물론 일반 독자에게도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의 소설뿐 아니라 록 가수나 도인을 연상시키는 특유의 외모, ‘삼미’ 출간 후 인천 야구팬들의 영웅이 됐어도 “사실 삼미팬이 아니었다. (당시 1등이던) OB팬이었다”고 털어놓는 솔직함, 선배 문인들의 권위서린 ‘조언’에 “좆까라 마이싱이다!”고 외칠 수 있는 용기, 그리고 각종 매체를 통해 외치는 거침없는 ‘말발’도 화제가 됐다.

    “아내말고 다른 사람 감정엔 관심 없어”

    첫 소설집 ‘카스테라’ 펴낸 문단의 아웃사이더

    그는 ‘카스테라’의 표제화를 직접 그렸다. “손재주는 타고난 것 같다”고 하자 그는 “조기 축구회 수준”이라고 했다.

    지난 6월 중순, 그는 첫 소설집 ‘카스테라’(문학동네)를 펴냈다. 2003년 여름부터 2005년 봄까지 그가 각종 문예지에 발표한 단편 10편이 실린 이 소설집 역시 독특한 상황과 인물, B급 영화적 상상력, 감각적인 문체, 황당무계한 사건 등을 선보이며 기존의 소설 이론을 깡그리 무시한다.

    비틀즈의 링고 스타와 함께하는 버스 우주여행, 전생에 영국의 훌리건이었던 냉장고, 대왕오징어의 습격을 받는 현대인, 하늘에서 오리배를 타고 나타난 세계의 난민들, 출퇴근 시간에 지하철에 사람들을 구겨 넣는 ‘푸시맨’…. 도대체 이 작가의 머릿속은 어떻게 생겼기에 냉장고에서 훌리건을, 유원지 오리배에서 ‘세계시민연합’을 떠올리는 걸까.

    이 소설집은 기발하지만 읽고 난 후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삼미’를 읽을 때의 청량음료 같은 맛도 줄어 있었다. 오히려 가슴이 갑갑해졌다. 주인공은 백수, 알바, 인턴, 실직자, 난민 등 하나같이 사회의 아웃사이더이자 유예된 신분의 사람들이다.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의 주인공 고교생은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알바’로 지하철 푸시맨을 하다가 출근하는 아버지마저 구겨 넣는다. ‘갑을고시원 체류기’는 소리날까봐 방귀마저 뀌지 못할 정도로 열악한 고시원에 사는 대학생의 이야기다. ‘아, 하세요 펠리컨’의 주인공은 전문대 졸업 후 일흔세 군데에 이력서를 넣었어도 취직을 못하고 결국 한적한 유원지에서 오리배를 관리한다. ‘고마워, 과연 너구리야’엔 취업을 위해 직장 상사의 성 노리개도 감수하는 인턴사원이 등장한다.

    세계의 냉혹성과 주인공이 처한 열악한 상황이 교차되는 지점에서 이야기는 갑자기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실종된 아버지는 기린이 되어 나타나고(‘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 유에프오와 대왕오징어의 습격을 받는다(‘코리언 스텐더즈’ ‘대왕오징어의 기습’). 지구는 원래 눈을 끔벅이는 거대한 ‘개복치’였고(‘몰라 몰라 개복치라니’), 전생이 훌리건인 냉장고는 부모는 물론 중국과 미국까지 먹어버린다(‘카스테라’). 도대체 작가가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인터뷰를 위해 그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역시나 조용하고 자분자분하게 받았다. 처음 통화했을 때도 그에게서 소설 속 주인공처럼 기발하고 유쾌한 입담을 듣길 원했었다. 하지만 달변은 고사하고 농담 한마디 듣지 못했다. 심지어 기자가 건넨 농담에도 웃지 않았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웃겼다. 이런 솔직함으로 말이다.

    “언제든 상관없어요. 저, 정말 하는 일이 없거든요.”

    나무늘보처럼 집에서 글만 쓴다더니 정말 그런 것 같다.

    결국 기자가 인터뷰 시간을 정했다. 7월5일 예술의전당 앞에서 그를 만났다. 긴 머리를 짧게 자르고 노랗게 물들인 펑키 스타일에 반바지, 히피풍의 안경에 피에로가 그려진 초록색 시계를 차고 나타났다.

    -머리는 왜 잘랐어요?

    “그냥 혼자 즐기는 거예요. 이번 소설집은 어릴 때부터 좋아하던 기타리스트 지미 핸드릭스 데뷔 앨범과 같이 가려고 했거든요. 단편 10편을 수록한 것도 그의 데뷔 앨범에 10곡이 실렸기 때문이고요. 지미 핸드릭스 사진을 들고 동네 미용실에 가서 ‘이렇게 해달라’고 했죠. 그다지 비슷한 것 같지는 않지만 ‘지미 형님’에게 헌정하는 기분도 들고. 좋아요.”

    첫 소설집 ‘카스테라’ 펴낸 문단의 아웃사이더
    -주변의 반응은 어때요?

    “아내는 제가 하면 다 좋다고 말해줘요. 아내말고 다른 사람의 감정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어요.”

    -분위기가 확 달라졌어요.

    “6년 전만 해도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맨 평범한 회사원이었는걸요. 전혀 다른 사람이었죠. ‘나라는 놈이 어떤 놈이다’ 정해지지 않는 게 편해요.”

    놀라울 만큼 솔직하다. 이 인터뷰, 생각보다 훨씬 재밌겠다 싶었다.

    문예지 읽으면 수업 받는 것 같아

    -아웃사이더에게 관심이 많은 것 같아요. 이번 소설집도 그렇고, 예전 두 장편소설에서도 그랬고요.

    “성공했든 패배했든, 돈이 있고 없고를 떠나 한국인은 다 불쌍해요. 성공한 사람도 그 위치에 오르려면 얼마나 더러운 꼴을 많이 봤겠어요? 사람 사는 게 아니죠. 다들 아웃사이더예요. 그래서 글로 한국인 모두를 위로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이번 소설집은 그 위로가 탁 와 닿지 않아요. 엉뚱하고 독특한 상상은 좋은데,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이해가 안 돼요.

    “사람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해해야지만, 또 작가의 의도가 무엇인지 깨달아야만 소설을 제대로 읽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평론가, 기자, 일반 독자 모두 그래요. ‘문교부’에서 만든 국가 교육을 받고 자라서 그런가봐요. 하지만 작가는 뭐라 딱히 말하기 힘들 때가 많아요. 이를테면 기타 연주자가 애드리브로 연주할 때가 있잖아요. 그때 손가락이 몇 번 프레스로 움직였는데 그 의도가 무엇인지 물으면 정말 난감하죠. 그냥 그때의 기분대로 한 건데.

    제 소설 역시 그래요. 평론가들이 아무리 뭐라 규정해도 실제 작품과는 거의 상관없을 거예요. 그래서 전 문예지를 읽지 않아요. 정기구독도 다른 사람에게 돌려주고요. 너무 두껍고, 또 어쩌다 저에 대한 평론이 있어 읽어보면 마치 교실에서 선생님한테 수업을 받는 느낌이거든요. 그냥 나와는 다른 세계구나 생각해요.

    이 소설들을 통해서 하나의 정서를 던지고 싶었어요. 독자가 느끼는 그 기분과 해석이 맞을 거예요. 작가를 떠난 작품은 더는 작가에게 귀속되지 않거든요.”

    -발상이 참 기발해요. 냉장고의 전생을 훌리건으로 본 것도 그렇고, 갑자기 기린이 등장한 것도, 대왕오징어나 외계인의 습격을 받는 상황도 그렇고요.

    “그런 생각은 그냥 그렇게 떠올라요(웃음). 아마 제가 소설 수업이라는 것을 받은 적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사실 장편을 먼저 쓴 것도 그런 이유였어요. 갑자기 소설이 너무 쓰고 싶은데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그런데 소설이라고 하면 두꺼운 책이 떠오르잖아요. 그래서 ‘삼미’를 비롯해 두어 편을 계속 썼죠. 그러다가 소설을 전공한 선배를 만났는데, ‘그러는 게 아니다. 단편부터 차근차근 습작을 하다가 장편을 쓰는 거다. 물어보기라도 하지 그랬냐’며 난감해해요. 마치 제가 일을 다 망친 듯한 표정이더라고요. 그래서 부랴부랴 단편을 쓴 겁니다.

    그렇게 2년 동안 30편 정도 썼어요. 이번 소설집은 그 중에서 10편을 추린 거고요. 그런데 써놓고 나니 왜 단편부터 써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무슨 차이가 있나 싶고. 그래서 다시 장편을 쓰기 시작했죠.

    어쨌든 소설 수업을 받은 사람들은 ‘앞에서 기린이 한 마리도 나오지 않았으니 뒤에 기린이 나오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하지만 전 ‘소설은 이렇게 쓰는 것’이라는 개념이 없기 때문에 생각나는 대로 막 쓰죠. 또 제가 2년 동안 단편 30편을 썼다고 하니 ‘정말 많이 썼다’며 다들 놀라더라고요. 그러면서 날림으로 쓴 게 아니냐는 눈초리를 보내는데, 그렇진 않거든요. 아마 배운 분들은 배운 게 있으니 ‘여기선 복선을 깔아야 하는데, 이렇게 진행하면 안 되는데’ 하고 고민하는 것 같아요. 하지만 전 그런 고민을 하지 않으니 진도가 빨리 나가는 거죠.”

    -개인적으로 ‘헤드락’을 보면서 깊이 공감했어요. 헐크 호건의 헤드락을 당해 죽을 뻔한 ‘내’가 몸을 키운 후 ‘나’보다 약한 다수에게 헤드락을 걸어 그들이 ‘살려달라’며 애원하는 모습을 보면서 오르가슴을 느낀다는 내용이죠. 실제로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정말 도끼로 내려찍고 싶고, 헤드락을 걸어 내 앞에 무릎 꿇게 했으면 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잖아요.

    “공감과 간접적인 카타르시스를 주는 거죠. 하지만 사실 당하는 쪽은 아니었어요(웃음). 하고 싶으면 그렇게 하고 살았죠. 저는 참고 또 참는 착한 사람이 더 싫어요. 세상이 변하지 않는 이유는 착한 사람이 많아서예요. 도끼로 찍고 싶으면 찍어보세요. 생각처럼 큰일이 일어나진 않아요. 여자의 힘으론 아무리 세게 찍어도 잘 안 죽어요. 그러면 자신이 착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걸 새삼 깨닫게 되고 반성 좀 하다보면 이래저래 다 덮이죠.”

    도대체 그의 솔직함의 끝은 어디일까. 화제를 돌렸다. 표지화에 실린 대왕오징어, 기린, 너구리, 펠리컨, 개복치는 그가 직접 그린 그림이다. “음악(기타리스트)에서 미술까지 손재주를 타고난 것 같다”고 하자 그는 “조기 축구회 수준”이라고 말한다.

    평균 떨어뜨리는 15등급 인생

    아무래도 박민규라는 이름 석자를 또렷이 새긴 작품은 처녀작인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이다. 인터뷰 전 시점까지 무려 16쇄를 찍었다.

    -돈 좀 벌었겠네요.

    “다들 제가 많이 벌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별로 그렇지 않아요. 선(先)인세로 상금 3000만원을 받았고, 이후 1000여 만원 더 받았죠. 물론 등단하기 전에 비하면 엄청나게 부자가 된 거지만.”

    ‘삼미’는 프로야구 초기 갖가지 패배의 기록을 남기며 3년 반 동안 활동하다가 사라진 삼미 슈퍼스타즈와 그 열혈팬이던 주인공의 삶을 통해 ‘성공’에 대한 의문을 던지는 소설이다. 소설 속 주인공들은 삼미 슈퍼스타즈가 위대한 이유를 ‘프로의 세계에서 승부에 집착하지 않고 꼴찌를 감수했기 때문’이란다. ‘치기 힘든 공은 치지 말고, 잡기 힘든 공은 굳이 잡지 않는’, 즐기는 야구를 했기에 졌던 것이다. 삼미 역시 연습도 할 만큼 했고, 안타도 칠 만큼 쳤다. 가끔 홈런도 쳤고, 삼진도 잡았다. 지지리도 못하는 야구를 한 것이 아니라 그저 평범한 야구를 했을 뿐이다. 하지만 프로의 세계에서는 평범한 야구는 곧 지지리도 못하는 야구와 다름없었다. 프로의 세계에서 평범한 삶은 곧 뒤처지는 삶이다.

    삼미에 열광하다가 꼴찌의 설움을 뼈저리게 느낀 주인공 역시 이후 일류대 입학, 대기업 입사, 부잣집 딸과의 결혼 등을 이루며 이른바 ‘성공한 어른’이 된다. 그러나 신혼여행 가방에도 ‘가정을 버려야 직장에서 살아남는다’는 책을 넣어다닐 정도로 열심히 일했지만, 이내 구조조정 대상자가 되고 아내한테도 이혼을 당한다. 그보다 더 ‘프로’ 급인 주류에 밀려난 것. 우리 또한 더 많은 일을 시키기 위해 자본주의가 만들어놓은 허상인 ‘프로’, 그리고 ‘성공’을 이루기 위해 하루하루 몸부림치고 있지 않은가. 진짜 인생은 주인공의 말처럼 ‘잘 나가다가 빠진 삼천포’에 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저 역시 꼴찌가 아닌 삶을 살아본 적이 없어요. 고등학교 때는 항상 15등급이었어요. 담임선생님이 전체 평균을 떨어뜨린다며 다른 반으로 옮기라고 했을 정도죠. 체육 특기생이던 친구가 ‘너 덕분에 꼴찌는 면했다’며 고마워했어요. 대학도 커닝해서 들어갔어요. 앞에 앉은 친구에게 보여달라고 했죠. 그렇다고 대단한 점수가 나온 것은 아니고, 그냥 대학 갈 만한 점수가 나왔죠.”

    ‘패배’ 하면 떠오르던 ‘삼미’

    중앙대 문예창작과에 들어갔다. 무언가 예술을 하고 싶은데, 문예창작이 유일하게 레슨비가 들어가지 않는 분야였다. 대학에서는 시를 전공했다. 딱히 시가 좋아서라기보다 소설보다 과제 분량이 적었기 때문이다. 대학시절 그는 ‘자폐증’이라는 말을 들을 만큼 조용한 학생이었다. 졸업할 때까지 서로 말 한마디 하지 않은 동기도 꽤 많았다. 졸업 후에는 문학보다 먹고 사는 게 중요했다. 광화문에 있는 한 해운회사에서 영업사원으로 일했다. 책 한 권 읽지 못하고 바쁘게 열심히 일했지만 그에게 돌아오는 시선은 ‘쟤, 아직도 안 짤렸니?’였다. 상사에게 재떨이로 맞은 적도 부지기수다.

    밤마다 이어지는 접대로 간이 망가진 후 그는 광고회사에서 카피라이터로 3년간 일했다. 대표작은 ‘왕입니다요’다. 그러고는 모 잡지사에서 사진기자로 일했다. 내친김에 편집장까지 했다. 말이 편집장이지, 혼자 취재와 사진 촬영까지 다 맡았다. 그때 소설이라는 것도 처음 써봤다. 필자 한 명이 갑자기 펑크를 냈는데, 마감까지 남은 두어 시간에 얼렁뚱땅 소설 비슷한 것을 썼다. 의외로 반응이 좋았고 1회성이 아닌 연재로 이어졌다. 그렇게 8년여 직장생활을 하던 어느 날, 그는 미칠 것처럼 소설이 쓰고 싶었다.

    “1998년 다들 IMF로 힘들어하던 때였죠. 저랑 전철에서 부대끼며 열심히 살던 사람들이 실패자로 낙인 찍혀서 밀려나오는 모습, 가난으로 가정이 붕괴되는 모습을 보면서 그들을 위한 연가(戀歌)를 불러주고 싶었어요. 그 무렵 ‘잘 나가다가 삼천포로 빠졌군’이란 말을 많이 했죠. 그때 진짜 인생은 삼천포에 있지 않을까 싶었어요. 그러면서 패배에 대한 아이템을 찾았는데,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바로 ‘삼미’였어요.”

    꼴찌에게 인색한 세상

    1999년 회사를 그만두고 전업 소설가의 길에 들어섰다. 그리고 6개월 동안 ‘삼미’에 대한 자료를 모았다. 하지만 세상은 꼴찌에 대한 기록을 남기는 데 참 인색했다. 삼미의 후신인 현대 유니콘스에 연락해도 ‘왜 부끄러운 과거를 들추어내느냐’는 ‘쿠사리’를 들어야 했고, 한국야구위원회(KBO)에도 당시 1등 OB에 대한 기록은 있지만 삼미 것은 없었다. 옛 신문을 복사하고 극소수의 야구광을 만나 모은 자료가 대략 박스로 3∼4개 정도 됐다. 그리고 홀연히 진짜 삼천포(사천시)로 건너가 한 달여 칩거하며 이 작품을 완성했다.

    -처녀작인데 술술 써지던가요?

    “이 작품은 해피엔드죠. 삼천포에 빠진 후 ‘진짜’ 인생을 살아가게 되잖아요. 하지만 처음에는 비극으로 끝냈어요. 모두 낙오자가 되고마는 아주 우울하고 슬픈 이야기였죠. 하지만 읽어본 사람들, 특히 IMF 때 실직한 친구들이 아주 싫어하더라고요. 아마 평론가들이 초고를 봤다면 리얼리티가 있다며 더 좋게 봤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그런 일을 당해보지 않은 사람이나 비극을 그대로 쓰면 대단하다고 하지, 진짜 당해본 사람은 힘들어해요. 그래서 방향을 완전히 틀었죠. 리얼리티보다는 희망을 주고 싶었어요.”

    -작품이 나온 후 실제 삼미 슈퍼스타즈 출신 선수들을 만나봤을 듯한데요. 그들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사실 그분들껜 무척 죄송한 마음이에요. ‘치기 힘든 공은 치지 말고, 잡기 힘든 공을 잡지 않는다’는 말이 특히 죄송해요. 실제 삼미 선수들은 그렇게 야구를 한 게 아니었어요. 정말 최선을 다했는데, 제 소설의 주제에 맞게 맘대로 고쳐버렸으니 본의 아니게 모욕을 주지 않았나 싶어요. 그래서 소설이 나온 후 몇몇 분을 직접 만나 죄송하다고 전했죠. 그런데 만약 쓰기 전에 선수 분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면 훨씬 재미있는 소설을 썼을 것 같아요. 비하인드 스토리가 무궁무진했거든요. 예를 들어 18연패를 했을 때 감독이 부산에서 유명한 목사를 모셔왔다고 해요. 선수들 모두 호텔방에 모여 불을 모조리 끄고 안수기도를 받았대요. 체구는 곰 같은 사람들이 깜깜한 호텔방에 틀어박혀 안수기도를 받았으니, 정말 소설 같잖아요(웃음).”

    삼국지 읽을 이유가 없다

    -두 번째 소설인 ‘지구영웅전설’은 ‘삼미’에 가려 빛을 못본 것 같아요.

    “원래 800매 분량으로 쓴 작품이에요. ‘문학동네’ 공모 요강엔 원고매수 500매 안팎으로 나왔는데 제가 착각한 거죠. 제 성격이 병적일 정도로 낙천적이거든요. ‘빼면 되지’ 하고 200매를 그냥 빼버렸어요. 출판도 그대로 됐고요. 구성도 엉성하고 내용도 풍부하지 못했지만 그냥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었죠. ‘문학동네’에 이야기했으면 좀더 보충해서 낼 수도 있었을 텐데, 아쉽고 작품한테 미안하죠.”

    -주인공인 ‘바나나맨’이 갖는 상징성이 참 좋아요. 겉은 노랗지만 속이 하얀 바나나는 백인이 되고픈 황인종, 그리고 미국의 만화 주인공들을 흠모하고 할리우드 스타들을 추종하며 맥도널드 햄버거에 환장하는 우리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거든요. 이 소설을 쓰게 된 계기가 있나요.

    “어릴 때 소설의 캐릭터이기도 한 ‘슈퍼특공대’ 만화가 인기를 끌었어요. 주제가가 있었는데, 가사를 성적인 내용으로 바꿔 부르곤 했죠. 그 노래를 크게 소리쳐 부르는데, 그걸 들은 경찰 아저씨가 막 혼내면서 파출소로 따라오라고 했어요. 수갑을 보여주면서 감옥에 집어넣는다고 했는데, 그 말이 너무 무서워 바들바들 떨면서 울었죠. 나이 들어 생각해보니 아저씨는 우리를 놀리는 게 재미있었던 거죠. 그렇게 억울할 수가 없더라고요.

    그런데 왠지 우리 정부가, 또 미국이라는 나라가 그 경찰 아저씨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 모두 얼마나 겁먹으면서 방공교육을 받았어요? 땅굴 소식에 놀라고 평화의 댐 소식에 두려워했죠. 그런 추억을 떠올리면서 이 소설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사실 그냥 만들어지는 영웅은 없어요. 걸프전 때 배트맨이, 이라크전 때는 스파이더맨과 헐크가 만들어졌죠. 미국의 패권주의를 옹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만화영화 캐릭터들이 은연중에 우리를 전부 ‘바나나맨’으로 키웠는지도 모르죠.”

    -앞서 낸 두 편의 장편소설이 큰 인기를 끌었고, 이번에 나온 소설집도 독자의 관심이 큰 것 같아요. 작품이 왜 주목받는다고 생각합니까.

    “‘웃긴다’며 환호하는 거죠. 과거의 젊은이들은 순박했지만 요즘의 젊은이들은 영악하잖아요. 감격이라는 걸 하지 않아요. 웃기고 재미있으면 환호할 줄만 알지. 문학에 서사가 없어졌다고 하는데, 서사를 써봤자 이젠 독자가 믿지 않아요. 오늘날 젊은이들은 더는 ‘태백산맥’을 읽으며 감격하지 않죠. 아마 그 책을 읽고 눈물 흘리는 건 저희 세대가 마지막이지 않을까 싶어요. 하지만 저 역시 ‘민족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눈물이 납니다’ 식의 말에는 위화감을 느껴요. 하물며 저보다 어린 친구들이야 어쩌겠어요. 이 세대에 맞는 작법(作法)은 따로 있다고 봐요. 또 그들을 감격시킬 순 없어도 어떤 정서를 만들어줄 순 있다고 생각해요. 그게 작가가 해야 할 일이죠.

    왜 젊은이들이 본격문학을 외면할까 생각해봤어요. 그런데 작가들이 젊은 세대에 대해 너무 모르는 것 같아요. 예를 들면 아버지가 빨치산이라 연좌제로 피해를 당한 기성세대의 슬픔 못지않게, 머리를 물들이고 힙합 스타일을 하고 아무런 부족함 없이 살아온 젊은 세대한테도 슬픔이란 게 있어요. 윗세대처럼 전쟁을 겪지 않았고 억하심정 같은 한도 없지만, 그렇다고 마냥 행복하지만도 않잖아요? 제가 볼 때는 둘 사이 슬픔의 정도나 양은 비슷해요.

    하지만 경륜 있는 작가 분들은 두 슬픔의 성질이 비슷하고 양이 같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해요. 젊은 세대의 슬픔을 하찮은 것으로 여기죠. 이게 곧 단절인 거예요. 또 왜들 그렇게 삼국지를 좋아하는지 모르겠어요. 지금 직장생활하며 살아가는 어지간한 젊은이들의 전투력이나 지략은 제갈공명이나 조조보다 수준이 높아요. 삼국지를 읽을 이유도, 읽어서 얻을 감흥도 없죠.”

    다소 무거워진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성격은 어떠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집에서는 아내를 무척 사랑한다”는 ‘생뚱맞은’ 대답이 나왔다. 이어 그보다 한 살 어린 아내에 대한 ‘박민규표 사랑 노래’가 흘러나왔다. 듣고보니 그는 문단의 펑키족이라기보다 로맨티스트라 불러야 할 것 같다. 두 사람은 같은 직장에서 만나 결혼한 지 8년째이고, 일곱 살 난 아들이 있다.

    “천사를 만난 것 같아요”

    첫 소설집 ‘카스테라’ 펴낸 문단의 아웃사이더

    그는 “아내에 대한 사랑이 글을 쓰게 하는 가장 큰 에너지”라고 말한다.

    “글을 쓰는 이유도 아내에게 멋진 남자로 보이기 위해서예요. 아내한테 작품을 보여줄 때 가슴이 엄청나게 두근거려요. 좋아해주면 너무 기쁘고요. 그렇게 잘 보이려는 에너지로 글을 쓰는 것 같아요. 지금도 가끔 밤에 아내의 등을 만져봐요. 혹시 날개가 있는 게 아닐까. 정말 천사를 만난 것 같아요. 소설을 쓰겠다며 직장을 그만둘 때도 가장 큰 힘이 되어준 건 아내였어요. 아내가 ‘당분간 생활비는 내가 벌 테니 아무 걱정하지 말고 쓰라’고 했을 때 용기가 확 솟더군요.”

    그는 이번 소설집의 표제작이기도 한 ‘카스테라’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고 했다. 그 이유 역시 아내였다.

    “‘삼미’를 쓰고 단편들을 쓰면서 여기저기 공모전에 내기 시작할 때였어요. 아내가 다니던 회사 사정이 어려워져서 7개월이나 월급을 받지 못했죠. 하지만 글 쓰는 데 방해될까봐 제게 단 한번도 어렵다는 말을 한 적이 없어요. 하지만 ‘더는 놀면 안되겠다’ 싶을 정도로 상황이 심각했어요. 밤새 잠자는 아내를 바라보면서 다음날 아침 아내에게 ‘소설을 써볼 만큼 써봤으니 이젠 돈을 벌겠다. 그만 고생해라’고 말하기로 결심했죠. 그리고 담배를 피우는데 갑자기 스토리가 막 떠오르는 거예요. 가난이나 아내와는 전혀 상관없는 내용이었지만요. 그렇게 하룻밤 만에 다 썼어요. 그리고 다음날 아내에게 ‘돈을 벌겠다’는 말 대신 제가 쓴 글을 보여줬죠. 그런데 아내가 ‘카스테라’를 참 좋아하더라고요. 그때 제가 좋은 작가가 되겠구나 하는 확신이 들었다고 해요. 서로 아무 말 않고 웃기만 했죠.

    그리고 다음해 등단을 했고, 이젠 글만 써도 돈벌이를 할 수 있게 됐어요. 지금은 아내나 저나 둘 다 집에 있어요. 아내 역시 직장을 구할 수 있지만 이젠 ‘회사라는 데를 다니지 말자’로 가치관이 바뀌었거든요. 오늘처럼 비 오는 날에는 따끈한 아랫목에 이불을 펴놓고 찐 감자를 먹으며 만화책을 읽어야 행복하지 않겠어요? 아무 일도 안하고 말이죠.”

    그는 특별한 이벤트를 준비하기보다는 음식물 쓰레기는 꼭 자신이 치우고 아프면 더욱 신경을 써주는 등 평상시에 아내를 위해 노력한다고 했다. 또 종종 초상화도 그려주고, 생일이면 직접 축하곡을 만들어 기타를 치면서 불러준다. 밴드를 만들어 기타를 칠 정도로 재주가 있지만 아내 앞에서는 긴장해서 음정, 박자 다 틀린다고 한다. 그는 “아내에 대한 사랑이 내가 가진 가장 큰 에너지”라며 환하게 웃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연애소설도 잘 쓸 것 같아요. 가슴 저린 사랑이야기를 쓸 생각은 없나요.

    “사실 지금 연재하는 것말고(‘창작과 비평’에 ‘핑퐁’을 연재하고 있다) 쓰고 있는 장편이 바로 연애소설이에요. 처음 써보는 거라 좀 힘들지만 재미있어요. 특히 아내한테 처음 보여줄 순간만을 기다리며 열심히 쓰고 있죠.”

    -내년이면 학부형이 되겠네요. 어떤 아빠인가요.

    “아이가 학교에 다니기 싫다면 보내지 않을 수 있는 아빠죠. 저 역시 필요 없이 많이 배워야 하고 심하게 경쟁해야 하는 학교에서 암울한 학창시절을 보냈는데, 아이에게 그대로 답습시키고 싶지 않아요. 세상 살아가는 데는 재주 하나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해요. 저 역시 15등급이었지만 글 쓰는 재주 하나로 살고 있잖아요. 아들한테도 그런 재주 하나쯤 있겠죠.”

    쿨함 속 핫한 진정성

    -문단의 아웃사이더였다가 이젠 주류가 됐어요. 회사를 다니지 않고 글만 써도 웬만큼 돈벌이가 될 정도로 말이죠. 요즘 행복한가요.

    “저 사실 그거 되게 불만인데요. 저는 아웃사이더인 적도 없어요. 머리 기르고 옷차림이 튀면 아웃사이더인가요? 그리고 지금도 주류는 아니고요. 저는 가만히 있는데, 사람들이 제 주변에 줄을 그어놓은 기분이에요. 어쨌든 요즘은 참 행복해요. 신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글을 쓸 수 있게 해준 것에 대해 감사드리죠. 사람들을 따뜻하게 해주고 싶어요. 다들 사는 게 너무 힘드니까요.”

    -앞으로의 계획이라면.

    “이렇게 글만 쓸 거예요. 그리고 환갑이 되면 딱 중단할 예정입니다. 그때부터는 소설가라는 직함을 반납하고 음악만 하려고요. 사실 글 쓰는 것보다 기타 치는 것을 더 좋아했어요. 하지만 뮤지션을 할 정도의 재능은 없더라고요. 또 정말 좋아하는 것은 취미로 할 때 행복하다고 해요. 일이 되면 너무 힘드니까요. 그래서 여생은 노인들과 실버 밴드를 만들어 그동안 제 책을 읽어준 독자들 앞에서 공연하며 살고 싶어요.”

    문단에서는 그를 은둔형 작가로 부른다. 동갑내기인 소설가 김영하씨와 가끔 어울리는 게 유일한 교류다. 그 이유를 묻자 해만 지면 더 우울해하는 치매 어머니를 모셔야 하기 때문이란다. 자신의 얼굴도 알아보지 못하는 어머니. 이번에 머리를 짧게 자르고 파마에 염색까지 하고 들어갔더니 어머니가 자신을 쳐다보며 한참을 웃으시더란다. “이 아저씨 머리가 너무 웃긴다”면서. “어쨌든 어머니에게 즐거움을 줬으니 효도한 게 아니냐”며 그는 허허 웃었다.

    슬픈 이야기를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참 ‘쿨’하게 한다. 소설가 박민규의 작품에 독자가 열광하는 이유가 바로 쿨함 속에 감춰진 핫한 진정성에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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