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생에 천축국 스님이 어째서 엉뚱한 옷을 입고 찾아왔는고?”
- 달라이 라마와 첫 대면…온몸이 활짝 열리는 느낌
- 달라이 라마 권유로 양고기 즐겨
- ‘제자는 스승 밑에 있을 때 가장 빨리 깨닫는다’
- 한국 방문한 티베트 스님 80∼90% ‘돈맛’들여 환속
- 절대 자유, 해탈에 이르게 하는 256가지 계율
1987년부터 지금까지 히말라야 고산지대인 북인도 다람살라에서 달라이 라마를 보좌하고 있다는 청전 스님은 이력도 독특하다. 교육대학에 다니던 중 유신반대시위를 하다 자퇴했는가 하면, 신학대학에서 가톨릭 사제 수업을 받다 갑자기 불교에 귀의했다. 또한 혈혈단신 한국을 떠나 인도 히말라야 설산(雪山)으로 들어갔다. 청전 스님에 대한 호기심에 출판사로 전화를 걸었다.
대개 책을 출간하면 저자가 사인회도 하고 언론 인터뷰도 하면서 책 홍보에 나서는 게 요즘 상식이건만, 이 스님은 히말라야 오지에서 도통 한국에 올 생각을 안 한단다. 스님이 한국에 오면 연락을 달라는 메모를 남긴 지 몇 달 후 출판사에서 전화가 왔다. 지난 10월 말, 스님이 한국에 들어오긴 했는데 몸이 안 좋아 쉬고 싶다는 뜻을 전해왔다는 것이다. 원기 회복하기를 기다렸다가 스님이 머무는 전남 순천 송광사를 찾았다.
아침 7시, 서울을 출발할 때부터 잔뜩 찌푸린 하늘이더니 오후 2시경 송광사 입구에 들어서자 겨울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스님은 175cm 정도의 키에 마른 체구였다. 몸무게가 최근 4kg 늘어 60kg이라고 했다. 20년 전에 유행했을 법한 크고 둥근 뿔테 안경을 썼는데 알이 무척 두꺼운 게 전형적인 교학승 스타일이었다. 그의 처소엔 이불 한 채와 앉은뱅이 책상, 그 위에 놓인 불서(佛書) 몇 권이 전부였다. 무소유의 삶을 엿볼 수 있었다.
“보통 3∼4년에 한 번씩 한국에 옵니다. 책 출간 때문에 2005년에 왔으니까, 이번엔 1년여 만에 다시 온 셈이네요.”
스님은 2005년에 티베트 불교의 최고 논서로 평가받는 ‘람림’을 완역해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란 제목으로 펴냈다. 람림은 16세기 티베트 불교의 태두(泰斗)인 총카파가 지은 수행서다. 문수보살의 화신으로 불리는 총카파는 좌탈입망(앉은 채로 열반)한 후 등신불이 됐는데, 중국 문화혁명 때 파괴됐다. 지금 티베트 망명정부에 몸의 일부가 남아 있다. 발심(發心)에서부터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을 단계적으로 소개하는 ‘람림’은 미국에선 15명의 학자가 15년간 매달린 끝에 완역본이 나왔는데, 스님은 컴퓨터도 사용하지 않고 혼자 5년 만에 번역을 마쳤다. 달라이 라마가 자주 법문을 하던 내용이어서 번역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고 한다.
스님은 이번 방한이 별다른 목적 없이 쉬기 위해서라고 했지만 그를 만나려는 사람과 그를 부르는 곳이 줄을 이었다. 법회 요청도 끊이지 않았다. 그래서 꼭 가야 할 곳만 몇 군데 방문하고는 이내 이곳 송광사로 몸을 숨겼다. 송광사는 그가 머리를 깎은 곳이다.
부자 성직자와 가난한 신도
▼ 몇 년에 한 번씩 귀국하다보면 한국의 빠른 변화를 실감하실 것 같습니다.
“물질적으로 발전하고 있음을 확연히 느낍니다. 올 때마다 거리 풍경이 달라져 길을 잃을 때가 많아요. 지하철은 언제 타도 적응이 안 되고요. 하지만 무엇보다 절실하게 느끼는 건 사람들이 점점 거칠어간다는 겁니다. 다들 찌들어 있어 편안한 얼굴을 보기 힘들어요. 걸어가는 모습을 보면 마치 전장에 나가는 병사들 같아요. 인도나 티베트 사람들에게서 느껴지는 훈훈한 마음, 평화로운 얼굴이 드물어요. 인도에는 시민들에게 맑은 하늘의 별똥별을 보라며 델리 시(市) 전체의 전기를 잠시 꺼버릴 정도로 여유가 있어요.”
티베트 최고 경전 ‘람림’을 번역하기도 한 청전 스님은 불교의 법을 지키는 게 자신의 숙명이라고 말한다.
“한국은 뭐든 돈으로 결정되는 사회니까요. 돈은 부처님이 계시던 시대에도 있었습니다. 경전에 보면 어떻게 돈을 벌고 써야 하는지 나와 있어요. 부처님께서는 ‘욕망을 성취하는 그대는 불행하다’고 하셨어요. 욕망을 성취한 뒤에는 더 큰 욕망이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부처님은 소욕지족(少慾知足), 적은 것에 만족하라고 하셨어요.
유엔에서 5년에 한 번씩 세계 각국의 행복지수를 조사하는데 2000년엔 GNP가 가장 낮은 방글라데시가 1위였고 2006년엔 인도가 1등이었어요. 한국은 어떤가요? 아파트 값이 2억원 올랐다고 해서 더 행복해졌나요? 행복하기는커녕 더 올라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지 않나요? 나만 부자가 되자, 나만 성공하자, 이러면 안 돼요. 나도 좋고 남도 좋은, 함께 행복할 수 있는 방향으로 가야 합니다.”
▼ 이기심이 만연한 것은 종교가 제 기능을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한국의 종교는 신도수가 얼마다, 사찰(혹은 교회) 크기가 얼마다 하는 숫자놀음에 빠져 있어요. 세계에서 우리나라만큼 신도가 많은 곳도 없어요. 이들이 일요일이면 모두 종교 활동을 하는데도 사회는 점점 더 나빠지고 있어요. 저는 그 원인이 한국의 수행자들이 너무 풍요롭게 사는 데 있다고 봅니다. 종교는 가난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성직자들은 누구보다 많이 가지고 있어요. 민중보다 더 많이 가진 성직자가 어떻게 민중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심지어 일부 종교에서는 헌금을 많이 하는 게 구원받는 길이라고 합니다. 달마도나 만다라를 집에 걸어놓으면 재물이 들어온다고 현혹합니다. 종교를 상품화한 거죠. 종교의 임무는 자비의 실천, 사랑의 실천입니다. 부처님이나 예수님은 절대 당신 앞에 재물을 가져오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어요. 늘 자기가 있는 자리에서 어려운 사람, 굶주리고 소외받는 사람에게 자비와 사랑을 베풀면 그게 곧 당신에게 하는 것이라고 분명히 하셨어요.”
“고기가 아주 맛있던데요”
▼ 한국 스님들과 인도 스님들의 수행에 차이점이 있나요?
“한국은 뭐든 빨리빨리 끝내려고 해요. 불자의 수행도 마찬가지예요. 공부도 빨리 끝내고, 득도(得道)도 빨리 하려 해요. 수행은 끝이 없는 건데 말이죠. 또 우리 스님들은 대개 물질적으로 여유가 있어요. 그래서 주위 분들이 종종 ‘맛있는 거 사줄 테니 나가자’고 하는데, 제가 사양해요. 절밥이 편하지, 외식을 하면 속이 편하지 않더라고요. 저는 늘 나답게 사는 것에 대해 생각하고 그걸 벗어나지 않으려고 합니다.”
▼ 스님들은 외식을 하면 어디로 갑니까.
“갈 곳이 별로 없죠. 일반 식당의 음식은 마늘 향이 진해요. 또한 언제부턴가 모든 식단에 고기가 빠지지 않아요. 옛날엔 제사나 명절 때나 고기 먹을 기회가 있었는데 지금은 매일 먹는 것 같더라고요. 전 사람들의 심성이 거칠어진 게 고기를 많이 먹어서라고 생각합니다.”
▼ 스님에겐 육식이 금기사항 아닌가요? 요즘은 그런 계율로부터 자유로운 모양입니다.
“한국 불교는 자비의 실천이 모토입니다. 고기를 먹는 게 죄냐 아니냐를 떠나서 생명을 죽이는 게 고통이잖습니까. 고기를 삼가는 것도 덕이 돼요. 그래서 채식을 하는 거죠. 하지만 현대사회에 살면서 채식만 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합니다. 공해도 심한 데다 워낙 복잡한 사회여서 에너지가 많이 소모되거든요. 건강 때문에 몸이 고기를 필요로 하면 먹어도 괜찮다고 봅니다. 단, 고기 먹는 것 자체를 즐기는 것은 수행을 위해 삼가야겠죠.”
▼ 스님께서도 고기를 드세요?
“달라이 라마께서 고기를 먹으라고 강권하셨는데, 처음엔 이유를 몰랐다가 나중에야 알았어요. 다람살라는 고산지대여서 채식만으로는 건강을 지키기 힘듭니다. 그곳에 간 지 3년 정도 지나면서 제 몸을 지키는 방편으로 조금씩 먹었습니다. 물론 닭, 돼지, 물고기 같은 거친 음식이 아니라 양고기를 먹습니다. 양고기와 쇠고기를 토육(土肉)이라고 하는데, 누구나 먹어도 큰 탈이 없어요. 흙은 만물의 근원이니까요.
육식과 관련해 재미있는 일이 있었어요. 어느 날 달라이 라마께서 ‘요즘은 고기를 먹느냐’고 묻기에 ‘예, 아주 맛있던데요’ 했더니 함께 있던 스님들이 박장대소를 해요. 비구는 고기를 먹을 때 맛있다고 하면 안 된다면서. 수행을 하기 위해 건강을 지키는 차원에서 먹는 거지 맛으로 먹는 게 아니라는 거죠. 그래서 저는 ‘그래도 맛있는 것을 맛있다고 하지 뭐라고 하냐’고 했죠(웃음).”
▼ 출가하기 전부터 채식주의였나요?
“그렇지는 않아요. 시골에서 자랐지만 고기를 자주 먹었던 기억이 있어요. 아버지께서 엽총을 가지고 다니며 노루, 산토끼, 꿩 같은 걸 많이 잡았어요. 아버지께서 동물을 죽인 허물을 제가 대신 참회하기 위해 출가하지 않았나 싶어요(웃음). 고기를 먹지 말아야겠다고 처음 생각한 게 초등학교 4학년 때였어요. 슈바이처 전기를 보고 충격을 받았어요. 슈바이처와 싸우다 진 동네 아이가 울면서 ‘나도 너처럼 일주일에 두 번씩 고기를 먹었다면 내가 이겼을 것’이라고 했고, 그 말을 들은 슈바이처가 그 후 평생 고기를 안 먹었잖아요.”
▼ 가톨릭 신부가 되려다 스님이 되셨는데요.
“처음엔 교사가 되려고 사범대에 들어갔어요. 72학번인데, 그해에 10월유신이 터졌어요. 저는 막연하게 그건 올바른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혼자 유신반대 유인물을 만들어 학교에 뿌렸어요. 학교가 발칵 뒤집혔죠. ‘간첩이 나타났다’며 중앙정보부 수사관들까지 나섰으니까요. 그 일로 근신 처분을 받았는데, 그 과정에서 학생을 보호하기보다는 자기 책임을 모면하려는 교수들의 행태를 보며 실망했어요. 저런 사람들에게 배워봤자 좋은 선생이 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자퇴했어요. 그러고는 신부가 되려고 신학대에 들어갔죠.”
신학생에서 스님으로
▼ 신부가 되려다 갑자기 불교에 귀의한 계기가 궁금합니다.
“3학년 때 우연히 ‘선가귀감’이라는 책을 봤어요. 불교로 말하면 인연이고, 기독교로 말하면 하나님의 뜻이었죠(웃음). 선승(禪僧)들의 어록을 모아놓은 것인데, ‘생이란 한 조각 구름이고, 죽음은 한 조각 구름이 없어지는 것이다’라는 서산대사의 말이 가슴에 확 와 닿았어요. 그 책을 읽고 불교에 대해 더 알고 싶어 어찌어찌 하다 순천 송광사까지 오게 됐는데, 당시 송광사 방장이던 구산 스님이 저를 딱 보시더니 ‘전생에 천축국 스님이 어째서 엉뚱한 옷을 입고 찾아왔는고’ 하시는 거예요. 그날 이후 고민하다 결국 송광사에서 머리를 깎았습니다. 그게 1977년이죠.”
▼ 가톨릭과 불교를 다 공부하셨는데, 두 종교의 공통점과 차이점은 무엇인가요.
“공통점이 많죠. 둘 다 사랑의 실천을 강조해요. 그런데 가톨릭이 인간을 위한 사랑에 멈추는 데 비해, 불교는 모든 생명체를 사랑하니까 더 넓죠. 개인적으로 제가 기독교에서 풀 수 없던 의문이 불교를 통해서 풀린 게 많아요.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처음부터 부자고, 어떤 사람은 처음부터 장애를 안고 태어나는 게 하나님의 뜻이라는 설명만으로는 납득이 안 됐는데, 불교의 연기법(緣起法)으로 풀리더라고요.”
▼ 우문(愚問)이지만 전생을 믿습니까.
“달라이 라마에게도 ‘제 전생이 뭡니까’ 하고 물은 적이 있어요. ‘너 스스로 알아내야 하는 것이지 내가 어떻게 아느냐’고 하셨지만 가끔 언질을 주십니다. 제가 한 생에선 당나라로부터 법문을 가져온 신라 고승이었다고요. 또 다른 생에서는 중국과 인도의 스님인 적도 있다고 하셨습니다. 개인적인 체험을 이야기하면, 한국과 중국이 수교한 후 문득 중국의 어느 산사에 있는 사리탑에 간절히 가고 싶어졌어요. 그래서 참배를 했는데, 그 후에 또 가고 싶더라고요. 거기는 교통이 너무 불편해서 웬만큼 용기를 내지 않으면 가기 힘든 곳이었는데도. 그래도 또 다녀왔더니 그게 제 한 생의 사리탑이었다고 하시더군요.
1988년 달라이 라마께서 제게 법명을 지어주셨는데 ‘톈진 최깝’이에요. 법을 지킨다, 법을 구한다는 뜻인데, 지금까지 같은 법명을 가진 스님을 보지 못했어요. 처음엔 ‘이름이 뭐 이래’ 싶었는데 전생을 알고 나니 고개가 끄덕여져요. 이렇게 전생과 현세는 연이 닿아있는 거예요.”
달라이 라마는 게으르다?
▼ 스님은 공부하는 교학승과 도를 닦는 선승으로 나뉘는데, 어느 쪽이었나요.
“스님이 되기 위해선 당연히 공부를 해야 하고, 그 위에 수행관(觀)이 서면 수행을 하는 겁니다. 교와 선을 함께 하는 것이죠. 그런데 저는 선가에 바로 들어간 게 실수였어요. 수행관이 서지 않은 상태에서 수행을 하려니까 10년을 정진해도 발전이 없었어요. 마음에 품고 있던 의문들을 풀지 못하겠더라고요. 게다가 법상에서 늘 생사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것처럼 말하던 선가의 큰스님들이 정작 열반할 때는 두세 달씩 정신을 못 차리기도 하는 것을 보며 회의가 밀려왔어요. 이런 수행으로는 평생을 정진해도 안 된다는 생각이 들면서 외국의 고승들은 어떻게 수행하는지 궁금해졌어요. 그래서 성지순례라는 이름으로 태국, 버마, 스리랑카, 인도 등을 돌아다녔어요.”
▼ 달라이 라마도 그때 만난 건가요.
“1987년 8월경에 뵈었는데, 1시간30분 정도 이야기를 나누면서 소탈하고 솔직한 심성에 감동을 받았어요. 큰스님을 여럿 뵈었지만 그런 느낌은 처음이었죠.”
▼ 어떤 이야기를 나눴습니까.
“평소 궁금했던 것들을 질문했습니다. 예를 들어 ‘저는 간혹 여자에 대한 유혹을 견디기 어려워 잠 못 이루는 때가 있는데, 존자님(달라이 라마)께서도 그런 유혹에 힘든 때가 있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나 또한 당신과 같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을 따르는 비구이기 때문에 부처님에게 빌고, 그의 말씀을 따르며 그런 유혹을 이겨나가는 것입니다’라고 하셨어요. 달라이 라마는 실제적인 힘과 영감, 자비로운 면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진실함이 저를 그분 곁에 오래 있게 한 게 아닌가 싶어요.”
▼ 명성에서 오는 압도감 때문은 아닐까요.
“그런 건 없었어요. 그날 다른 두 명의 스님과 함께 알현했는데, 나오면서 그분들께 뭘 느꼈냐고 하니까 ‘뭘?’ 하더라고요. 저는 정말 존자님을 뵈면서 머리에서 발바닥까지 활짝 열리는 느낌이었거든요. 그런 비슷한 느낌을 받은 분이 달라이 라마 외에 딱 두 분이 계세요. 티베트에서 만난 고승 한 분과 마더 테레사 수녀예요.”
▼ 달라이 라마의 유일한 한국인 제자라고 소개되어 있던데, 그분의 제자라는 어떤 공식적인 기준 같은 것이 있습니까.
“그런 건 없어요. 저 스스로 그분을 스승으로 모시고 제자로 사는 거죠. 달라이 라마께서도 저를 제자로 생각한다는 걸 느껴요. 제가 이제 그만 떠나야겠다고 생각하고 말씀드린 적이 있어요. 그러자 ‘제자는 스승 밑에 있을 때 가장 빨리 깨닫는다’며 허락하지 않으셨어요. 몇 년 전에도 다시 ‘정말 떠나고 싶다’고 했더니 ‘여름을 중심으로 자유롭게 살지만 겨울에는 내 곁에 있으라’고 하시더군요.”
▼ 오랫동안 곁에서 모셨으니 흥미로운 일화도 많을 것 같습니다.
“유머가 많은 분입니다. 수행을 하다 보면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는데, 가장 큰 어려움이 게으름이에요. 누군가 게으름에 대해 물으니까 ‘나는 그것에 대해 말할 수가 없어요. 내가 게으르니까’ 하시고는 저를 향해 ‘당신도 게으르지?’ 하시는 거예요. 어찌나 부끄럽던지…. 재작년인가는 유럽순방을 하면서 성모 마리아가 출현한다는 성지에 가신 적이 있어요. 그런데 참배를 마치고 나오시면서 ‘이제 개종을 해야 하나봐. 성모 마리아가 웃으며 나를 보더라고’ 하셔서 사람들이 다 웃었죠.”
▼ ‘역시 달라이 라마구나’ 하고 감동을 받을 때는 언제인가요.
“통역할 때 많이 느껴요. 일반적인 이야기는 웃으면서 하시지만 진리, 법 등에 관한 말씀을 하실 때에는 눈빛이 달라집니다. 그래서 통역하면서 긴장하죠. 더 놀라운 것은 한국말을 모르는데도 이따금 ‘잘못 이야기 했어, 다시 해’ 하실 때가 있다는 겁니다. 그럴 땐 정말 깜짝 놀라죠.
또한 기억력이 대단해요. 1990년대 초에 모 방송국에서 인터뷰를 하러 오면서 통역을 한 사람 데리고 왔어요. 달라이 라마께서 통역과 악수하다가 ‘당신, 5년 전에 대학에서 나한테 진리가 뭐냐고 물었지?’라고 해서 통역이 화들짝 놀란 적이 있어요. 그 대학에서 특강을 하고 난 뒤 수백 명의 학생과 일일이 악수를 했는데 그 사람을 정확하게 기억하셨어요.”
달라이 라마는 본래 티베트 불교의 최고 지도자를 일컫는 호칭이다. 현 달라이 라마는 법명이 톈진 갸초로, 6세 때인 1940년 제14대 달라이 라마에 올랐다. 티베트 독립운동에 대한 중국 정부의 탄압이 거세지자 1959년 인도로 피신, 망명정부를 세웠다. 그 후 세계를 돌며 평화와 화해를 설파해온 그는 1989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으며, 세계의 정신적 지도자로 추앙받고 있다.
달라이 라마의 한국사랑
만화 스님(오른쪽)이 사경(寫經)한 것을 달라이 라마에게 설명하는 청전 스님.
“아무래도 연세가 있으니 많이 쇠약해지셨어요. 예전엔 법문을 하면 하루 8시간씩 일주일에서 보름까지 쉬지 않고 하셨어요. 그것도 1년에 몇 차례씩 하셨는데, 몇 년 전부터 시간과 횟수를 대폭 줄였어요. 또 ‘칼라차크라’라는 10만명이 모이는 대규모 법회가 있어요. 늘 당신께서 주관하는데, 올해부터는 일정을 잡지 않으세요.”
▼ 달라이 라마는 불이익을 당할 때도 분노를 다스리고 마음을 선과 진리 쪽으로 길들이라며 ‘평정심’을 강조합니다. 좋은 이야기이긴 하지만, 가해자는 반성하지 않는데 피해자에게만 평정심을 가지라고 하는 게 정의인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평정심은 어느 정도 인격이 갖춰졌을 때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달라이 라마께서도 젊은 시절 화를 많이 냈다고 합니다. 하지만 화의 원인과 조건의 실체를 알면 화낼 일이 없다고 하십니다. 평정심은 단순한 비폭력이 아니라 남에게 피해를 주지 마라, 가능하면 도움을 주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중국인은 티베트를 불행하게 만들었지만, 그들도 우리처럼 똑같이 행복을 원하고 불행은 원치 않기 때문에 그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물리적 가해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몇 년 전에도 어떤 사람이 달라이 라마에게 제안을 했습니다. 자기는 명예도 있고 경제력도 있으니 티베트가 독립하는 데 도움을 주겠다, 그런 일을 할 수 있도록 임명장만 한 장 써 달라고요. 그러자 달라이 라마는 ‘내 소원은 독립이 아닙니다. 내 소원은 법을 지키고 이 세상을 바로 펴는 것입니다’라고 하셨어요.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로 한정하지 않아요. ‘나’ ‘우리’를 초월해 전 인류의 행복과 평화를 바랍니다.”
▼ 달라이 라마는 아직 고향 티베트 땅을 밟지 못한 것으로 압니다.
“못 가셨어요. 중국에도 못 가셨고요. 2005년까지만 해도 중국 정부는 달라이 라마가 중국을 방문하면 베이징에만 머물러야 한다는 조건을 붙였는데, 지난해부터는 티베트 라싸에 가도 좋다고 했습니다. 라싸가 완전한 중국 땅이 되었다는 자신감에서죠. 거기까지 칭짱철도가 개설되어 지난해에 제가 가봤는데 몰라보게 변했어요. 그곳엔 티베트도, 라싸도 없어요. 티베트 사람이 티베트 말을 모르고 중국말을 써요.”
▼ 2008년 베이징올림픽을 전후해 달라이 라마가 중국을 방문한다는 이야기가 있는데요.
“언제라도 가겠다는 의사는 있는데 정식으로 코멘트를 하신 적은 없어요.”
▼ 몇 차례 기회가 있었지만 한국 방문도 이뤄지지 못했죠.
“얼마 전 달라이 라마의 비자를 신청했더니, 정부는 중국과의 관계를 고려해 비자를 발급할 수 없다고 하더군요. 달라이 라마는 어느 나라를 가든지 종교활동을 할 뿐 정치활동을 한 적이 없어요. 우리 정부가 지나치게 중국 눈치를 보는 것은 아닌가 싶어요. 달라이 라마는 한국에 애정이 많아요. 티베트가 세계 유일의 망명국가고, 한국은 유일한 분단국가니까요. 1992년 한중수교를 맺을 때도 저보다 먼저 아셨을 정도예요. 꼭 한국을 방문하실 수 있도록 종교계가 나서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다람살라와 탄트라 실습장
▼ 20년 동안 다람살라에 계셨으니 티베트 불교에 대해 정통하실 텐데요. 한국 불교와의 차이점이라면 어떤 게 있을까요.
“법복, 예식 같은 껍데기만 달라요. 똑같은 부처님 말씀을 토대로 발전해왔으니 알맹이는 같죠. 한국과 티베트는 보리심과 공성(空性)의 터득을 중심으로 하는 대승불교예요. 한국과 티베트 불교에 차이가 없다는 것은 ‘고려사기’에도 나와 있어요. 왕이 친히 문두루(文豆婁)법에 따라 행차했다고 나오는데, 이게 만다라 예식이거든요. 또한 티베트 밀교의 경전이 고려대장경에 거의 다 들어 있습니다.”
▼ 종종 티베트 스님들을 초청해 불자들에게 마정수기(摩頂授記)를 해주는 법회가 열립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의식인데요.
“마정수기는 원래 부처나 보살이 ‘그대는 미래에 뭐가 되리라’고 예언하면서 제자의 정수리를 어루만진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티베트에는 큰스님들이 제자나 신도들의 머리를 만져주는 의식이 있어요. 이것은 마정수기가 아니라 일상생활 속의 축복의식일 뿐입니다. 이게 한국에서 마정수기로 둔갑한 겁니다. 티베트 스님들은 영문을 모르고 한국의 초청자가 시키는 대로 하는데, 초청자들은 이를 돈벌이 수단으로 삼는 거죠. 티베트 망명정부에서도 이것이 문제가 돼 해당 스님들에게 출국금지령을 내린 적이 있습니다.”
▼ 티베트 불교에서도 폐단이 나타나는 것 같군요.
“제가 처음 갔을 때와는 많이 달라졌어요. 가령 달라이 라마뿐 아니라 큰스님이 법문을 하면 다람살라 주민들은 100% 와서 경청했는데 지금은 안 그래요. 달라이 라마가 법회를 한다 해도 장사를 하려 해요. 돈이 그들의 법이 되어버렸어요. 스님들도 세속화했습니다. 특히 한국을 다녀간 스님들은 80∼90%가 돈 때문에 환속합니다. 지금 티베트 불교는 과도기에 있다고 봅니다.”
달라이 라마가 거주하는 다람살라는 북부 인도 히말라야 설산자락에 있다. 해발 1800m의 고산지대인 이곳에 달라이 라마궁(宮)을 비롯해 티베트 절, 연구소 등이 있는데, 예전엔 작은 마을이었지만 지금은 달라이 라마를 보려는 사람들로 북적이면서 작은 도시를 이루고 있다.
▼ 다람살라가 관광지처럼 되면서 가게도 많이 들어섰죠?
“지금도 계속 생겨나고 있습니다. 여관도 무수히 늘었고, 옛날엔 없던 극장이 지금은 4개나 있어요. ‘때 묻은 종이보다는 하얀 백지를 물들이가 쉽다’는 말이 맞아요.”
▼ 탄트라 실습장도 있다고 하던데요.
“탄트라라는 게 으슥한 곳에서 남녀가 할 짓 다하며 수행하는 게 아닙니다. 의식이 씨줄과 날줄처럼 끊임없이 이어져 깨어있는 것이 바로 탄트라입니다. 옛날 힌두교 수행 계파의 하나였는데, 티베트 불교에 유입됐죠. 그걸 라즈니쉬가 서양에 알렸는데, 그들이 좋아할 만한 것이었나 봅니다. 막말로 남녀가 음습한 곳에서 프리섹스를 하는 게 수행이라니 얼마나 멋있어 보였겠어요. 탄트라 수행의 본질이 왜곡되면서 장삿속으로 탄트라 실습장이란 것까지 생겼더라고요. 종교가 완전히 퇴폐상품화한 거죠.”
▼ 다람살라에서의 생활은 어떤가요.
“보통 여름엔 라다크로 갑니다. 그곳 오지 사람들에게 약품 보청기 돋보기 등 그분들에게 필요한 것을 보시하고 옵니다. 겨울은 길고 추워서 절에 있고요.”
티베트식 전체투지 108拜
▼ 다람살라에 있을 때는 보통 일과를 어떻게 보냅니까.
“새벽 4시면 기상해 밤 10시에 잠자리에 듭니다. 일어나면 간단하게 예불을 드린 뒤 불단에 차를 올리고 저도 한 잔 마시고는 한 시간 정도 정좌를 합니다. 그리고 촛불을 켜고 향을 사른 뒤 티베트식 전체투지(全體投地)로 108배를 합니다. 그 후 불경을 읽고 우리나라의 미숫가루 비슷한 짬빠로 아침 공양을 합니다. 아침 시간엔 명상을 하거나 산책을 하고요. 자기 시간을 갖기 위해 외출하거나 사람을 만나는 시간은 오후 2시 이후로 미룹니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다시 한 번 전체투지로 108배를 드리고요.
하루를 사는 게 복잡한 것 같지만 노는 것과 마찬가지죠. 저는 부처님 제자니까 노는 데 세 가지 원칙이 있어요. 인간이 살다보면 책이나 돈, 물건 같은 게 자꾸 생기잖아요. 그걸 모두 필요한 사람에게 줘버리는 거예요. 보시하면서 노는 거죠. 또한 부처님 제자로서 어긋난 일을 하면 안 되니까 계율을 지키면서 놀죠. 그리고 마지막으로 선정(禪定)을 지키며 놀아요.”
▼ 엄격한 계율이 오히려 수행을 방해할 수도 있지 않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계율만큼 사람을 자유롭게 해주는 것도 없어요. 비구계에 계율이 256개 있는데 중국에선 ‘별해탈계(別解脫戒·낱낱이 자유롭게 해주는 계율)’이라고 합니다. 최고의 절대 자유가 해탈이에요. 부처님 제자는 256개의 계율 안에서 자유로운 것이죠. 256개의 계율 외에도 제가 스스로 세운 계율이 있습니다. 한 끼 식단은 3찬을 넘지 않는다, 이유 없는 외식은 하지 않는다, 목적 없이 나가지 않는다 등인데, 그걸 지키는 것도 삶의 기쁨이에요. 또한 식사나 청소, 빨래 등은 스스로 해결합니다. 돈만 주면 대신 해줄 사람을 살 수도 있지만 전 비구예요. 비구는 사람을 부리는 것은 물론 애완동물도 키우면 안 됩니다. 아무것도 소유하면 안 되니까요. 그런데 한국 불교는 흔히 공부가 되면 계행을 놓아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원래 공부가 되면 될 수록, 수행이 되면 될수록 계행이 더 철저해지는 법입니다.”
▼ 언제까지 달라이 라마 옆에 머물 계획인가요.
“이젠 라다크 방문 횟수를 줄일 생각입니다. 제가 직접 보시하러 가지 않고 그곳 사람들을 불러 필요한 의약품 등을 가져가게 하면 되니까요. 다람살라에 머무는 시간도 줄이고, 대신 명상시간을 더 많이 가지고 싶어요. 그리고 수행을 더 한 뒤에 그동안의 수행기를 글로 남기고 싶습니다.”
인터뷰를 마칠 즈음 비가 그쳤다. ‘달라이 라마와 함께 지낸 20년’을 출간한 출판사 사장에게 판매부수를 묻자 “5000부쯤 나갔다”고 솔직하게 대답했다. 기대처럼 많이 팔리지는 않은 것 같다. 책 출간 시점을 스님이 한국에 온 지금으로 늦췄으면 판매가 조금은 더 늘었을 것 같다고 하자 사정이 있었다고 한다.
“원래 지난해 6월에 달라이 라마가 방한할 계획이었어요. 거기에 맞춰 책을 준비했는데 정부에서 허가를 내주지 않더라고요. 결국 책만 덩그러니 나왔죠. 그래도 책에는 달라이 라마의 신성과 인품이 청전 스님의 눈과 마음을 통해 고스란히 담겨 있어요.”
고백하건대, 기자도 이 책을 읽고 난 뒤 꼭 한 번 다람살라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