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살. 옆집 아이는 옹알이도 못 한다는데 우리 아이는 문장을 말한다. 세 살. 어젯밤 스치듯 본 영화 대사를 토씨 하나 안 틀리고 그대로 읊는다. 하는 행동마다 범상치 않다. 아무래도 우리 아이는 뭔가 다르다. 이쯤 되면 행복한 의심이 슬그머니 고개를 쳐든다. 혹시 내 아이가 영재? 아이 키우면서 한번쯤 겪는 일이지만 정작 영재에 대한 지식은 부족하다. 영재는 타고나는 것인지 길러지는 것인지, 영재성은 어떤 기준으로 판단해야 하는지…. 영재교육 분야의 세계적 석학인 조지프 렌줄리 교수를 만나봤다.
지난 2월12일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와 대성그룹은 한국교총영재교육원(ITEK·Institute for Talented Education of KFTA)을 개원했다. ITEK은 렌줄리 교수의 자문을 받아 올해부터 전국 초·중·고교 교사들을 대상으로 영재교육 교사양성 프로그램을 운영할 계획. ITEK 개원기념 학술세미나에 참석하기 위해 내한한 렌줄리 교수를 서울 남대문로 대한상공회의소 ITEK 연구실에서 안선영(교육학 박사) 연구위원의 도움으로 인터뷰했다.
“영재성, 언제든 나타날 수 있다”
▼ 영재성은 어느 시기부터 어느 시기까지 나타납니까.
“아주 어릴 때부터 나타날 수 있습니다. 빨리 걸음을 떼거나 말을 하고 물체에 대해 빠른 속도로 반응하는 것 등을 통해 영재성이 있는지 없는지 판단해볼 수 있지요. 그러나 영재성이 나타나는 특정한 시기를 꼭 집어 말하긴 어렵습니다. 영재성은 30대 이후나 노년기에도 발현될 수 있습니다. 시기는 영역별로 차이가 있는데 수학자나 시인은 20대, 소설가는 30~40대, 희곡작가는 40~50대에 특별한 능력이 갑자기 나타나기도 합니다.”
▼ 영재성을 키우는 데 있어 유전적 요인과 후천적 환경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요.
“두 가지가 상호 작용해서 영재를 만들지요. 유전적으로 영재성을 타고난다 해도 자유롭고 창의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환경이 갖춰져야 합니다. 이 둘 중 어느 한 부분이 모자라면 영재성이 제대로 나타나기 어려워요.”
렌줄리 교수는 1970년대에 ‘영재성의 세 고리’라는 개념을 발표해 주목을 받았다. 그때까지 영재를 판단하던 기준은 ‘평균 이상의 지능’ 하나였지만, 그는 ‘과제 집착력’과 ‘창의성’이라는 두 가지 기준을 함께 제시했다. 지능, 과제 집착력, 창의성. 이 세 가지 영역에서 상위 15% 안에 들고 이 가운데 한 가지 분야에서 상위 2% 안에 들어야 영재’라는 그의 이론은 현재 학계에서 가장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진다.
“영재는 성취적 영재와 창의·생산적 영재 두 부류로 나뉩니다. 과제 집착력과 창의성이 뛰어난 창의·생산적 영재는 반드시 똑똑한 것은 아니지만 세상을 변화시키죠. 인공심장을 발명한 로버트 자빅 박사는 고교 성적과 미국대학수학능력시험(SAT) 성적이 좋지 않아 미국 대학을 가지 못하고 이탈리아에 있는 의대로 진학했습니다. 지금 그를 합격시키지 않은 미국 대학들은 후회하고 있을 겁니다. 역사적으로 탁월한 업적을 남긴 사람들은 대개 성취적 영재보다는 창의·생산적 영재입니다.”
▼ 영재성을 조기에 발견하는 것이 왜 중요한가요.
“잘못된 교육은 영재성을 사장시킬 수 있습니다. 다양한 교육기회를 주지 않으면 아이들은 지루함을 느끼게 되고, 지적 자극이나 도전욕구도 서서히 잃어버리게 됩니다. 틀에 박힌 교육은 무서운 결과를 가져올 수 있어요. 모든 아이가 영재성을 갖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현재 논의되는 비율(상위 10% 안팎)보다는 많이 존재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영재성을 발휘하도록 기회를 줘야 해요.”
목표 강요하지 말아야
자격루의 원리를 이용한 물시계로 ‘영재교육 창의적 산출물 발표대회’에서 대상을 받은 학생들.
“의도적인 교육은 오히려 영재성을 죽일 수 있으므로 주의해야 합니다. 아이가 불편함과 압박감을 갖게 될 만큼 특정한 교육을 강요하면 자연스러운 호기심이나 창의성 발달을 저해할 수 있습니다.”
▼ 그렇다면 어떤 식으로 영재성을 키워줘야 합니까.
“책을 자연스럽게 접하게 하고 스스로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줘야 합니다. 창의성은 정확한 답이나 목표가 없는 활동에서 나옵니다. 강요된 목표 없이 마음대로 책을 읽게 하고, 모양과 맛 등을 스스로 생각해 과자를 만들어본다든지 레고 블록으로 다양한 모형을 만들어 보게 하는 것이 창의성 발달에 도움이 됩니다. 연극관람과 여행 등 다양한 경험을 하게 하는 것도 여러 분야에 관심을 갖고 분석적 능력을 키우는 데 좋습니다.
저는 제 아이들을 키울 때 손가락 인형(손가락에 끼워서 움직일 수 있는 인형)으로 다양한 감정을 표현하는 놀이를 자주 하게 했습니다. 스스로 이야기를 꾸며 인형극을 만들거나 다양한 상황에 따른 표현 등을 고민하도록 했어요.”
▼ 다양한 분야의 영재성을 판별하는 것도 어려운 문제입니다.
“지적 능력이나 학업 성적도 영재를 판별하는 데 있어 중요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과제 집착력과 창의성은 프로젝트와 같은 장기적이고 복잡한 과제를 주고 이를 추진해나가는 방식을 다양한 관점에서 지켜보며 평가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해온 지필고사식의 간단한 영재판단시험은 지양해야 해요. 이 때문에 초·중학교 교사, 학부모의 평가가 중요합니다.”
▼ 학교에서는 어떤 방법으로 영재성을 키워줄 수 있을까요.
“정규수업 시간 중에 영재교육수업을 제공하는 방식을 권장합니다. 특정 영역에 영재성과 흥미를 가진 학생을 모아서 수준별 수업을 운영하면 따로 시간을 투자하지 않고도 심화 교육이 가능합니다.”
영재교육 핵심은 교수법
1969년 미국 존스홉킨스대에 13세 학생이 입학했다. 1970년엔 고교 1학년생이 합격했다. 이 대학의 줄리안 스탠리 교수는 몇몇 영재를 조기 발굴해 앞선 단계의 교과과정을 미리 배우는 속진교육을 시켰고, 이 실험은 성공했다. 스탠리 교수가 만든 존스홉킨스대 영재센터 모형은 미국 19개주로 확산됐다. 그의 이론에 따라 고교과정에 대학학점 선이수제도(AP·Advanced Placement)가 도입됐다.
이 제도에 반기를 들고 나선 이가 렌줄리 교수다. 그는 “빨리 배운 영재들이 세상을 얼마나 바꿨는가?”라는 의문을 제기하며 속진교육 일변도의 영재교육을 비판했다. 그는 수석합격자나 최연소 합격자 같은 성취적 영재가 아닌 창의·생산적 영재들이 세상을 바꿔나간다고 거듭 강조했다.
“심화교육과 속진교육 모두 중요합니다. 그러나 무슨 내용을 가르치느냐보다 어떻게 가르치느냐가 더 중요하죠. 핵심은 교수법입니다. 심화교육이나 속진교육의 틀에 얽매여 정해진 내용만 가르치고 창의적 사고력과 문제해결능력 등을 강조하지 않는다면 창의·생산적 영재를 키울 수 없어요. 탐구적 교수법을 통해 심화교육이나 속진교육을 해야 합니다.”
그가 운영하는 코네티컷대 영재교육센터의 콘프라튜트(Confratute·Conference and an Institute with a Good Deal of Fraternity) 프로그램은 1978년부터 전세계 1만8000여 명의 교사에게 영재성을 계발하는 교수법을 가르쳐 왔다. ITEK은 이 프로그램을 받아들여 초·중·고교 교사들에게 영재교육을 위한 교수법을 강의할 계획이다.
“콘프라튜트에서는 아이들에게 지식축적이나 단순암기보다 학습에 대한 탐구적 접근태도를 길러주는 교수법을 가장 중요시합니다. 또 아이들이 정보를 어떻게 수집하고 활용할 것인지, 주위 사람들과 어떻게 협력할 것인지 등을 가르칠 수 있도록 교육합니다. 아이들이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양의 학습을 하도록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아요.
우선적으로 영재교육 연수가 필요한 것은 초등교육이지만, 모든 교사가 영재들을 어떻게 다뤄야 하며 이들의 필요를 어떻게 충족시킬 것인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과목의 내용은 초·중·고교가 각기 다를 수밖에 없지만, 올바른 교수법은 학교급별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귀납적·탐구적 교수법을 배워야 합니다.”
▼ 한국에선 영재교육을 일류대학에 가기 위한 발판으로 생각하고 이를 위해 어릴 때부터 학원을 보내는 사례가 많은데요.
중학 영재교육은 정규과정에서
“산업화 사회와 업적주의 사회에서 부모가 자녀를 좋은 대학에 보내고자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그런 문화적 맥락을 억지로 바꾸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탁월한 역사적 업적을 이루기 위해선 지적능력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따라서 시험성적만 따지는 현행 대학입시는 진정한 인재를 찾는 데 적절하지 않습니다. 최근 미국의 여러 유명 대학은 입학생을 선발함에 있어 창의성과 동기 등 성적 이외의 요소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한국 대학들도 여기서 교훈을 얻지 못하면 진정한 인재를 발굴하기 어렵습니다.
지나친 사교육은 아이들의 호기심이나 창의성 개발을 저해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너무 많은 시간을 시험준비에 사용하게 되면 창의·생산적 영재성을 길러줄 여유가 없습니다. 좋은 성적이 반드시 사회에서 좋은 업적으로 이어지진 않아요.”
▼ 미국에선 일리노이 수학·과학 영재학교(IMSA·Illinois Mathematics and Science Academy)와 토머스제퍼슨 과학고 등 다양한 특수목적고가 운영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에선 평준화교육을 가로막는다는 논란 때문에 외국어고와 과학고, 과학영재학교 등을 설립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특수목적고는 꼭 필요합니다. 고등학교에 갈 나이쯤 되면 미술이나 과학 등 자신이 어떤 진로를 선택할 것인지에 대해 분명한 의견을 가진 학생들이 있습니다. 이 아이들에게 보다 깊이 탐구할 기회를 제공해야 합니다. 외국어고와 과학고 외에도 기술 문학 인문학 사회과학 등 전통적인 학문 분류상의 종류별로 특목고가 세워지는 게 좋습니다. 다만 고교 미만 아이들에겐 특정 영역에 편중된 영재학교가 바람직하지 않아요. 다시 말해 초·중학교 단계에선 정규 교과과정 속에서 수준별 심화교육을 시키고, 고교 단계에선 다양한 학교를 만들어 그 속에서 체계적인 심화교육 기회를 만들어줘야 합니다.
영재교육의 필요성은 교육기회의 평등 문제와 미묘하게 부딪치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30년, 50년 뒤 국가 장래를 생각하면 결코 영재교육을 소홀히 해선 안 됩니다.”
▼ 주제별 영재교육과 통합형 영재교육 가운데 어느 것이 더 바람직한가요.
“과학에 재능이 있는 학생들에겐 집중적인 과학교육을 하되 인문학과 사회과학 등 다른 영역도 접하게 해야 합니다. 단, 다른 영역은 기본적인 소양을 길러주는 정도가 좋죠. 통합형 영재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할 수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흥미와 적성이 같은 학생들을 한곳에 모으는 게 좋다고 봐요. 초·중·고교 모든 수준에서 같은 흥미를 가진 학생들이 상호 보완하며 ‘연구와 실험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줘야 합니다.”
美, 영재교육 지원 열풍
▼ 백악관 영재양성특별팀의 자문위원을 맡고 계신데, 미국에선 국가 차원의 영재교육 방향을 어떻게 세워놓고 있습니까.
“지금까지 미국의 교육정책은 소외계층과 약자, 다양한 인종을 배려하는 데 초점을 맞춰왔습니다. 그러나 최근 인재개발과 영재교육, 수월성 교육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지금 미국에선 옛 소련이 스푸트니크 1호를 발사했을 때처럼 국가경쟁력에 대한 심각한 위기감이 감돌고 있어요. 이에 따라 영재교육을 전폭적으로 지원해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가 형성되고 있습니다.
2년 전에는 교육경쟁법(America Competes Law)이 의회에서 통과됐습니다. 이 법안은 초·중·고교 단위에서 과학 기술 수학 공학 관련 영재교육을 강화하고 정부가 이를 지원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관련 분야 학교 설립, 영재교육 교사 양성, 영재교육 담당교사 자격증제도 마련 등 다양한 방안이 논의되고 있습니다. 또한 각 대학에서 우등생 프로그램을 운영해 영재들을 양성하고 있고, 소외계층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던 방과 후 학교에서도 영재를 위한 교육 프로그램을 도입하고 있습니다.”
▼ 영재교육의 목표와 가치는 무엇입니까.
“영재의 개인적인 만족감을 향상시키는 동시에 미래의 문제 해결자, 새로운 아이디어 창출자를 길러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믿습니다. 예를 들어 온실효과나 질병 등 경제적, 정치적, 종교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을 양성하는 것이 영재교육의 가장 큰 목적입니다. 영재의 가장 모범적인 사례로 ‘침묵의 봄’을 써 살충제에 의한 생태계 파괴를 고발한 레이철 카슨을 들 수 있습니다. 그는 개인의 이익보다 사회를 위해 자신의 영재성을 사용했지요. 또 페니실린을 개발한 알렉산더 플레밍, 인공심장을 개발한 로버트 자빅, 음악으로 세상을 풍요롭게 한 모차르트 등을 위대한 업적을 남긴 영재로 볼 수 있습니다.
현재 미국에서 영재교육을 둘러싼 가장 큰 쟁점은 소외계층 영재를 어떻게 판별하고 교육할 것인가입니다. 이들 가운데는 탁월한 영재성을 가졌음에도 이를 개발할 기회를 얻지 못해 재능을 꽃피우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아이들을 조기에 발견해 기회를 주는 것이 국가와 공동체를 위한 일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