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도 TV쇼를 통해 시청자와 만나고 있는 美 방송인 바버라 월터스. 1970년대부터 콧대 높은 배우들은 물론 사다트 전 이집트 대통령, 쿠바 지도자 카스트로 등 도저히 미국 방송 카메라 앞에 설 것 같지 않은 이들과도 장시간 인터뷰할 정도로 ‘저돌적인’ 그녀는 실상 평생 불안에 떨었다고 고백한다. 언제라도 모두 잃을 수 있다는 불안감이 오늘도 그녀를 달리게 만든다.
선진 각국에서 능력 있는 고령세대가 활약하는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미국의 웹진 ‘슬레이트’에서는 매년 ‘가장 힘 있는 80세 이상’ 80명을 선정해 공개하는데, 10월20일 올해 명단이 나왔다. 이 중 방송인 바버라 월터스(Barbara Walters)가 올해 80세 막내(?)로 이름을 올렸다. 방송작가로 시작해 1970년대 저녁 뉴스쇼 첫 여성 앵커로 발탁된 이래 지금까지 방송·출판에서 종횡무진 활약하고 있는 그녀는 미국 경제 격주간지 ‘포브스’가 선정한 올해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3위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그녀가 자서전 ‘내 인생의 오디션’(이기동 번역)을 펴냈다. ‘인터뷰와 말하기의 달인’으로 불리며 전·현직 세계 지도자와 영화배우, 희대의 살인마 등을 만나온 그녀도 인터뷰이(interviewee·인터뷰 대상)들 앞에서는 매번 수험생처럼 긴장했다고 털어놓는다. 자신을 이끈 것은 자신감이 아니라 ‘실패하면 어쩌나 하는 불안’이었다고 고백하면서 말이다.
책에는 심한 정신지체 장애를 가진 언니로 인해 받은 성장기의 심적 부담과, 결혼 후 아이를 갖지 못해 입양한 딸이 마약, 외박 등을 일삼아 노심초사한 것 등 그동안 말 못했던 개인사가 솔직하게 담겨있다. 평생 일과 가정의 양립이라는 화두를 붙잡고 줄타기해왔다고 고백한 이 여성의 삶으로 들어가보자.
부침(浮沈) 많은 가족사
뉴욕 맨해튼에는 ‘루 월터스 웨이’라는 길이 있다. 바로 바버라 월터스의 아버지 이름을 딴 길이다. 루 월터스는 미국에서 브로드웨이 쇼를 초창기에 정립시킨 제법 신화적인 인물이다. 그렇지만 쇼 비즈니스라는 게 겉보기엔 화려해도 부침이 많은 업종 아닌가. 루 월터스 역시 때로 큰 성공을 거둬 가정부와 요리사까지 두고 큰 저택에서 살았지만, 나락으로 떨어진 적도 많았다. 바버라는 “거지에서 부자, 부자에서 거지로 왔다갔다하는 생활이었다”고 회고한다. 부자로 살 때보다 가난하게 살 때가 그녀를 단련시켰다면서 말이다.
‘내가 낙타 오줌보를 갖게 된 것(소변을 잘 참는다는 뜻)은 화장실이 하나밖에 없는 집에 살았던 일 때문이다. 그런데 나중에 카메라 앞에서 몇 시간씩 생방송을 할 때 그게 엄청난 자산이 되었다. 뜨거운 여름날 냉방이 잘 되지 않는 곳에서 살았던 것도 어떻게 보면 다행이었다. 스튜디오 조명이 아무리 뜨거워도 사우디 사막 같은 곳에서 몇 시간씩 방송을 해도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으니 말이다.’ (‘내 인생의 오디션’ 중)
아버지 루 월터스는 카드놀이를 즐기는 도박사에다 몽상가였고, 어머니는 걱정이 많은 전업주부였다. 바버라는 언젠가 쇼걸과 바람이 난 아버지를 앞에 두고 어두컴컴한 나이트클럽 안에서 “제발 우리를 버리지 말라”고 울부짖던 엄마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바버라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바버라는 훗날 “인터뷰의 비결이 무엇이냐”고 묻는 기자들에게 “인터뷰 상대에게 주눅 들지 않는 것”이라고 답했다. 이러한 대답은 아마도 유명인의 삶에 신비감이나 호기심을 갖지 않은 바버라의 독특한 성장과정과 연관이 있어 보인다. 쇼 비즈니스를 하는 아버지 덕분에 어릴 적부터 극장과 무대에 익숙한 생활을 해온 그녀는 ‘쇼’라는 판타지에 가려진 사람들의 모습이란 게 겉은 화려하지만 실제로는 각종 세금영수증과 부양가족에 시달리는 평범한 사람들과 다르지 않음을 일찌감치 터득했다고 볼 수 있다.
아버지 외에 그녀 삶에 또 다른 영향을 미친 사람이 있으니 바로 친언니 재키다. 재키는 심각한 정신지체 장애자였다. 바버라는 철이 들 무렵 남과 다른 언니에 대한 연민, 그리고 여동생인 자신이 언니에 비해 가진 게 너무 많다는 죄책감으로 힘든 적이 많았다.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 시절 장애를 가진 언니는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창피한 존재였지만, 훗날 ‘말 잘하는 법은 바로 잘 듣는 것’임을 터득하도록 이끈 스승이기도 했다고 회고한다. 이 같은 가족사는 회고록을 통해 처음 털어놓은 것이라고 한다.
내성적인 성격으로 평범한 여고 시절을 보낸 바버라는 역시 평범한 여자대학인 세라 로렌스에 입학한다. 본래는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이 나온 명문 웰슬리 대학에 가고 싶었지만 그만한 성적이 안 돼 떨어졌다. 그녀가 대학 4년 내내 몰두한 것은 ‘연극’이었다. 자라면서 줄곧 쇼 비즈니스 세계만 보아왔기 때문에 배우는 물론 무대 뒤쪽에 있는 스태프들과 어울리는 데 익숙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업을 갖는다면 자신이 있을 곳은 극장이나 무대와 관련한 일을 할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대학시절 단구(單球)세포증가증이라는 희귀병을 앓아 결석을 자주 하면서 학교에 애착이 줄자 자퇴와 재입학을 반복했다. 꿈이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시키는 대로 무슨 일이든”
1970년대 저녁 뉴스쇼 첫 앵커로 발탁된 이래 팔순이 된 지금까지 방송·출판계에서 활약중인 월터스.
마침 그때 미국 방송국 NBC 자회사 WNBT(뉴욕 소재·1960년에 WNBC로 이름이 바뀐다)에서 일하고 있는 친구로부터 홍보실에 빈자리가 있으니 지원해보라는 연락이 왔다. 미국 내 방송국이라곤 ABC, NBC, CBS, 얼마 후 없어진 DuMont 등 4개에 불과하던 시절이었다. 그녀가 맡은 일은 보도자료 작성. 당시 텔레비전은 지금과 달리 사람들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은 오락거리였다. 신문에 TV 프로그램 소개란 같은 것이 없던 시절이다보니 아무리 보도 자료를 써 보내도 기자들 휴지통으로 들어가기 일쑤였다. 바버라는 기자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제목이나 내용을 이리저리 바꾸며 아이디어를 짜냈다. 이때의 경험이 나중에 방송 일을 할 때 큰 도움이 되었다. 첫머리에 깜짝 놀랄 사실이나 도발적인 사례를 소개해 인터뷰 대상자의 관심을 끄는 상상력을 키워준 것이다. 보도자료를 안 쓸 때는 신문 칼럼니스트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어 방송국 출연진과 관련한 기삿거리를 알려주었다. 덕분에 그녀가 속한 WNBT 프로그램들은 다른 방송국 프로그램에 비해 신문에 많이 소개되었다고 한다.
세 번의 결혼, 세 번의 이혼
하지만 그 일도 오래가지 못했다. 이번에도 남자문제였다. 문제의 심각성은 더 컸다. 열 살도 더 많은, 게다가 이혼소송 중에 있는 유부남이자 직장 상사인 방송국 사장과 바람이 난 것이다.(바버라는 평생 세 번의 결혼과 이혼을 반복하는데 ‘지금이나 그때나 똑똑하고 힘 있는 남자에게 마음이 끌린다’고 한다. 힘 있고 성공한 어떤 사람이 대신 나를 돌봐주었으면 하는 무의식의 발로라나.) 당시 바버라는 방송국 사장과 만나면서 또 다른 젊은 총각과 이른바 ‘더블데이트’를 즐기고 있었다. 이 사실을 안 사장이 바버라를 스토커처럼 따라다니다 집 앞에서 자신의 연적(戀敵)이라 할 수 있는 젊은 총각과 몸싸움을 벌였다. 소문은 삽시간에 방송국 안으로 번졌고 결국 바버라는 방송국을 나와야 했다.
다행히 새 일을 구했다. 뉴욕의 다른 지역방송국 WPIX로 옮겨가 엘로이즈 메켈흔이 진행하는 쇼의 PD가 되었다. PD라고는 하지만 대본 작성, 섭외, 커피 타는 일까지 해야 했다. 진행자가 초대 손님에게 물을 질문지 작성은 물론 시청자들의 편지에 일일이 답장을 쓰는 것까지 모두 그녀의 몫이었다. 각종 그래픽영상이며 음악도 손수 골랐다. 그야말로 프로그램 진행을 위한 온갖 허드렛일을 닥치는 대로 했다.
바버라는 훗날 “TV 일을 시작하려면 어떻게 해야 좋은가”라고 묻는 젊은이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지방 텔레비전 방송국으로 가서 시키는 대로 무슨 일이든 해라, 아니 시키기 전에 알아서 자발적으로 해라. 그래서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배워라. (스튜디오 내) 위기상황은 끊임없이 일어난다. PD가 나타나지 않고 초청 인사가 나타나지 않고 대본은 분실된다. 그럴 때 제자리를 지키고 있어라. 그리고 (일단 기회가 왔으면) 실수를 하지마라. 방송은 하기 어려운 일이다. 거기서 성공하려면 어느 정도 집요하게 달라붙어야 한다. 단, 사회생활이나 연애생활은 엉망이 된다는 것을 명심하라.”
그녀 말대로 그녀의 사생활 역시 평탄하지 않았다. 걸핏하면 이 나라 저 나라로 출장을 다니고 매일 새벽에 집을 나서야 하는 커리어우먼이 한 남자와 평범한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돌보기란 예나 지금이나 결코 쉽지 않다. 첫 남편은 성공한 사업가였다. 1960년대 미국 여성들도 대학 졸업 후 직장생활을 하다 결혼하면 일을 떠나는 게 일반적인 공식이었다. 바버라 역시 결혼과 함께 일을 놓았지만 이내 다시 시작한다. 남편과의 건조한 시간이 이어지면서 결혼생활이 불행해진 것도 한 이유였다.
지적이지도 않고, 글래머도 아니고
바버라는 CBS의 아침방송인 ‘더 모닝쇼’ 작가를 맡았다. 한번 일을 잡았다 하면 남다른 집중력과 애착을 보이는 그녀는 시청률을 높이기 위해 갖은 애를 썼다. 예를 들면 그전에는 시도해보지 않았던 만화적인 작업을 동원한다든지 젊은 여성을 유리 탱크 안에 집어넣은 뒤 일기예보를 전하는 식이다. 그러다 그녀가 앞서 말한 대로 위기상황이 벌어져 직접 출연하는 일까지 생겼다. 이탈리아 호화여객선과 스웨덴 선박이 해상 충돌해 51명이 죽는 사고가 났는데, 기자가 안 나오는 바람에 그녀가 한밤중에 부두로 나가 생존자들을 인터뷰해 내보낸 것이다. 하지만 ‘더 모닝 쇼’는 곧 폐지됐다. 이후 바버라가 새로 맡은 시리즈물도 결방되면서 어렵사리 잡은 일자리도 놓치고 만다.
바바라 월터스는 미모나 학력이 아닌 투지와 근성으로 성공에 이르렀다.
그러던 중 호시탐탐 방송국에 재취업할 기회를 탐색했다. 마침내 다시 기회가 찾아왔다. 예전에 함께 일했던 CBS 방송국 PD로부터 “작가가 필요하다”는 연락이 온 것이다. 안정된 일자리가 아니고(비정규직) 연봉도 홍보회사보다 낮았지만, 바버라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수락했다. 그렇게 해서 ‘투데이 쇼’의 작가가 되었다. 이 프로그램 여덟 명 작가 중 유일한 여자였다. 새벽 4시에 출근해 인터뷰할 사람을 섭외하고 질문지를 썼다.
어느 날 방송이 너무 남성 위주이니 여성 취향 보도를 해보자는 기획안이 나오면서 바버라가 직접 출연하게 된다. 맨해튼 센트럴파크에서 자전거 타기를 소재로 한 코너를 진행하는 짧은 데뷔였다. 이후 불규칙적으로 방송에 나가지만 고정적으로 출연할 상황은 아니었다. 당시 미국 방송업계에는 ‘여자가 카메라 앞에 서려면 똑똑해서는 절대 안 되며 글래머여야 한다’는 불문율이 있었다. 바버라는 지적이지 않았고, 미인도 글래머도 아니었다. CBS 내 유명 PD로부터 “당신은 텔레비전에 나올 용모가 아니다. 거기다 R 발음을 못한다. 카메라 앞에 설 생각은 아예 하지 않는 게 좋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
‘자리를 지켜야 한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투데이 쇼’ 시청률이 계속 떨어졌다. 뉴스 위주의 심각한 프로그램이다보니 시청자가 하루를 시작하는 시간에 보고 싶어할 만한 방송 콘셉트가 아니라는 게 주 이유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바버라는 작가로 열심히 일했다. 두 번째 결혼한 남편과의 사이에서 두 번이나 임신을 하지만 모두 유산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기회는 뜻밖의 일로 찾아왔다. 술고래인 여자 보조앵커가 전날 과음 때문에 아침 방송을 놓친 것이었다. 급한 김에 바버라가 대신 마이크를 잡았다. 데뷔는 성공적이었고 이후 몇 주 만에 한 번씩 고정출연하게 된다. 얼마 후 술을 좋아하던 여성 보조앵커는 해고됐다. 후임으로 유명 여배우가 섭외됐지만 진행이 엉망이었다. 경영진은 여배우를 해고하고 또 다른 여배우를 염두에 두었지만 섭외가 쉽지 않았다. 매일 고약한 시간(새벽 4시)에 일어나 어려운 요령을 배워가며 일해야 하는 자리였다. 웬만한 사람들조차 요구하는 출연료가 너무 비쌌다. 바버라가 적역이었다.
마침내 1964년 10월 바버라는 고정 앵커가 된다. 거창한 팡파르도 없었고 인사발령이나 공식발표도 없는 초라한 시작이었다. 바버라의 고정 앵커 캐스팅을 알리는 방송국의 별도 광고도 없었으니 시청자의 대단한 기대도 없었다. 그러나 바버라는 얼마 안 가 유명인사 인터뷰를 하고 패션쇼 소개를 하는 등 여성 관련 특집을 도맡아 하며 승승장구한다. 평소엔 말이 없는 내성적인 성격이지만 카메라 앞에만 서면 태연해지고 자신감에 넘쳐 모두를 놀라게 했다.
바버라는 당초 13주 계약을 했지만 무려 13년을 일하게 된다. 그 사이 미국 내 여성운동이 거세졌지만, 바버라는 오랜 기간 남자 동료들보다 훨씬 적은 돈을 받았고 그들의 무시와 질투에 마음고생도 많았다. 그럼에도 분노하기보다 오로지 ‘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으로 버텼다. 그녀의 별명은 ‘푸시 쿠키’(저돌적인 여자)였다.
1968년 베트남전쟁으로 미국이 둘로 갈라졌다. 케네디 대통령과 존슨 대통령 밑에서 베트남전쟁을 완강하게 밀어붙인 것으로 알려진 국무장관 딘 러스크는 공직을 떠나서도 인터뷰를 하지 않았다. 바버라는 한 공식파티에서 우연히 그를 만나 간단한 안부 편지를 주고받는 사이가 된 뒤 집요하게 인터뷰를 요청했지만 정중하게 거절당했다. 그러다 기적이 일어났다. 딘 러스크가 퇴임 후 첫 단독 인터뷰어로 바버라를 지목한 것이다. 딘 러스크 장관은 장장 4시간 동안 재임시절 미국 행정부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소상히 밝혔다. 그리고 베트남전쟁을 치르면서 겪은 마음고생, 권력과 성공이라는 겉치장이 사라진 뒤의 (쓸쓸한) 내면도 솔직하게 밝혔다. 인터뷰는 대성공이었다.
카스트로의 매력
바버라는 지금까지 단독 인터뷰를 숱하게 진행했다. 이스라엘의 첫 여성총리 골다 메이어, 과격 흑인들을 이끈 블랙팬더당 대변인 캐슬린 닐 클리버,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의 남편 필립공, 닉슨 대통령의 국가안보 보좌관 헨리 키신저 등과의 인터뷰가 그녀를 바야흐로 명사 전문 인터뷰어로 자리매김하게 했다.
‘우리(인터뷰어와 인터뷰이)는 서로를 이용했다. 내가 여러 해에 걸쳐 인터뷰한 많은 초청 인사는 다 그런 식이었다. 사람들은 자신을 과시하고 싶어서 텔레비전에 나온다. 무엇이 되었건 남에게 보일 자리가 필요해서 나오는 것이다. 나도 필요한 게 있었다. 바로 인터뷰였다.’
그녀에게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인터뷰이는 누구일까? 바버라는 이집트 사다트 대통령과 쿠바 지도자 카스트로를 꼽는다. 바버라는 주미 이집트대사를 끈질기게 설득해 미국 언론과 일절 인터뷰를 하지 않았던 사다트를 끌어냈다. 그녀는 “이집트에 오는 것은 환영하지만 인터뷰를 약속할 수 없다”는 애매한 이야기만 듣고 카이로로 날아갔다. 호텔방에서 전화벨이 울리기만 며칠 기다리다 대통령 보좌관 한 명이 만나자고 해 나갔다. 일단 영부인 지한 사다트와 면접 비슷한 것을 하고 그녀의 주선으로 마침내 사다트를 만났다. 인터뷰 장소에 사다트는 경호원이나 비서를 대동하지 않고 혼자 왔다.
‘나는 사다트한테 무서운 구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다정하고 솔직하면서도 카리스마가 넘치는 사람이었다. …그는 통찰력과 용기, 카리스마를 가진 사람이었다. 호리호리하고 작은 체구를 가졌지만 마음은 거인이었다.’ (‘내 인생의 오디션’ 중)
카스트로와의 인터뷰는 2년여 노력의 결실이었다. 바버라는 1975년 유엔 주재 쿠바공관과 워싱턴 주재 체코대사관 쿠바대표부에 수없이 많은 편지를 보냈지만 1977년 5월까지 한 통의 답장도 받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카스트로 측으로부터 갑자기 인터뷰를 하겠다는 연락이 왔다. 베일에 싸인 이 쿠바 지도자는 그때까지만 해도 쿠바 안팎에서 단 한 번도 텔레비전 인터뷰를 한 적이 없었다.
바버라는 쿠바의 수도 아바나 집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인터뷰는 무려 5시간에 걸쳐 진행되었고 자정에야 끝났다. 카스트로는 쿠바산(産) 시가를 계속 피워대면서 바버라에게 자신의 걱정과 두려움을 털어놓았다. 그는 당시 인터뷰에서 자신이 공산주의자임을 분명히 했다.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어린 시절부터 공산주의자였고 무슨 일이 있어도 바뀌지 않을 것이며 CIA가 20년 넘게 자신의 목숨을 노린 것도 그 때문이라고 했다. 쿠바 감옥에 수감되어 있는 정치범 수에 대해서도 2000명 내지 3000명이라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바버라가 “쿠바는 국가가 언론을 통제하는 나라”라고 지적하자 그는 대뜸 이렇게 말했다. “바버라, 우리가 생각하는 언론자유는 당신들(미국) 것과는 달라요. 만약 당신이 이곳에서 사회주의에 반대하는 신문이 만들어질 수 있느냐고 물으면 내 대답은 노(No)요. 당과 정부, 국민들이 용납하지 않아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에게 미국인들이 누리는 언론자유는 없어요. 그리고 우리는 그런 현실에 불만이 없습니다.”
인터뷰 후 녹초가 된 바버라와 스태프에게 카스트로는 부엌으로 가 직접 치즈를 녹여 샌드위치를 만들어주었다. 바버라는 그때까지 자신이 먹어본 샌드위치 중에서 가장 맛있었다고 회고록에 밝혔다. 이튿날 카스트로는 과거 자신과 함께 혁명에 나섰던 전우 두 명을 태우고 직접 운전을 하며 관광 가이드까지 해주었다.
‘피델 카스트로가 말하다’라는 제목의 이 인터뷰는 1977년 6월9일 방영되었고, 바버라가 방송을 진행한 이래 가장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고 한다. 바버라는 “세계 지도자들 가운데 저널리스트들에게 그토록 많은 시간을 할애해주고 솔직하게 대해준 사람은 거의 없었다”고 밝혔다. 하지만 실제 방송에서는 카스트로의 매력적인 면모를 보여주면서도 그가 공산국가의 절대적인 독재자로 반체제를 허용하지 않고 수많은 정적(政敵)을 투옥했으며 철저한 민주주의 반대자라는 점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그녀가 전한 마지막 대사는 이랬다. “우리가 가장 심각하게 의견이 갈린 것은 자유의 의미였습니다. 그게 바로 우리를 갈라놓고 있는 것입니다.”
바버라는 회고록을 쓰는 동안 카스트로의 투병사실을 전해 듣는다. 바로 쿠바 외무장관에게 e메일을 보내 조속한 쾌유를 바란다고 했다. 물론 순수한 인정에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회복되면 곧바로 인터뷰를 해달라는 요청도 함께 적었다.
가슴으로 낳은 딸의 가르침
유산을 거듭하며 많은 호르몬과 열정을 허비한 바버라는 입양을 결정한다. ‘나는 사람이 모든 걸 다 가질 수는 없다는 말을 자주 한다. 멋진 결혼생활, 성공적인 직업, 잘 자란 아이들, 모두를 한꺼번에 가질 수는 없다. 지금은 유연한 생각을 가진 고용주들이 (여자들이) 파트타임으로 일할 수 있도록 해주고 스마트폰인 블랙베리 덕분에 언제 어느 때나 일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요즘 아빠들은 아기 기저귀도 잘 갈아준다. 하지만 지금도 (일하는 여자들의 일상은) 외줄타기처럼 아슬아슬하기는 마찬가지이고 어쩌면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다.’
바바라 월터스는 최근 펴낸 책에 아픈 개인사를 털어놓았다.
이번에는 딸을 청소년감호소로 보냈다. 더 엄격한 규율을 지켜야 하는 곳이었는데 딸은 여기서 LSD 같은 마약에도 손을 댔다. 결국 딸은 18세, 법적으로 성인이 되어서야 그곳을 나왔다. 다행히 딸은 나중에 철이 들어 자신과 같이 방황하는 10대를 위한 아동심리치료사가 되어 시설을 설립하고 운영하면서 성공적인 인생을 살고 있다고 한다. 바버라는 딸 때문에 숱한 마음고생을 했지만 결국 딸이 자신을 많이 가르쳤다고 위안한다. ‘나는 말로 다할 수 없을 만큼 딸이 자랑스럽다. 내 딸은 예쁘고 유쾌하고 재미있다. 내 딸은 자기 스스로 치는 북소리에 맞춰서 행진하는 사람이다. 내가 연주하는 음악이 아니지만 하기야 나도 어느 의미에서는 내 북소리에 맞춰 행진해온 사람이다. … 딸은 생모(生母)가 누군지 알고 싶다는 이야기를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내가 생모 이야기를 꺼내면 오히려 “왜 찾아야 해요? 엄마께 드린 고통도 모자라서요?”라고 묻는다.’
철저히 준비하고, 잘 들어라
인터뷰는 흥미롭고 유명한 사람들에 대해 알 수 있는 기회다. 또한 인터뷰를 한다는 것은 이들에게 실생활에서 던져보지 못할 질문들을 해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바버라는 자신이 인터뷰의 달인이 된 비결을 이렇게 털어놓는다.
첫 번째 조언은 질문에 너무 얽매이지 말라는 것이다. 간혹 앵커가 남이 써준 질문지대로 인터뷰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러면 엉망이 되고 만다는 게 그녀의 생각이다. 바버라는 인터뷰를 준비할 때 손바닥 안에 들어가는 카드 여러 장에 예상 질문을 가능한 한 많이 적어놓고 우편배달부이건 미용사건 붙잡고 “당신이라면 어떤 질문을 하겠느냐”고 물으면서 나머지 질문들을 지워나간다고 한다. 닉슨 대통령과의 인터뷰를 앞두고는 6시간은 족히 채울 만큼 질문 100개를 만든 다음 줄여갔다고 한다.
두 번째 조언은 상대 말을 잘 들으라는 것이다. 말을 가로채려고 해서는 절대 안 된다고 강조한다. 그녀 역시 초기에는 상대의 말을 가로막기도 했는데, 그게 가장 큰 실책이었다면서 말이다.
세 번째 조언은 인터뷰 전에 철저히 준비하라는 것이다. 특히 연예인들을 인터뷰할 때 더 힘들고 시간이 많이 걸린다고 한다. 언뜻 바버라 같은 명사가 인터뷰를 하자고 하면 마이클 더글러스나 줄리아 로버츠라도 곧장 달려올 것 같지만, 실상 그렇지 않다고 한다. 모든 유명인사, 심지어 살인자조차 변호사와 언론담당 에이전트를 두고 자신들에게 가장 유리한 방송시간과 질문을 따져보고, 인터뷰로 인한 흥행효과가 어느 정도 보장되는지까지 철저하게 계산하는 세상이다. 바버라 말대로 “인터뷰를 하기 위해 기자가 오디션을 받아야 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인터뷰 한 건 성사시키는 데 몇 달씩 걸리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래도 어떻든 인터뷰 날짜가 잡히면 기사를 모조리 찾아서 읽고 어린 시절 이야기도 파헤치고 영화도 찾아봐야 한다. 한번은 줄리아 로버츠에게 “시도 쓰시데요” 했더니 “어떻게 그걸 알았느냐”며 깜짝 놀랐다고 한다. 2002년부터 2004년 사이 바버라는 ‘20/20’이란 프로그램에서 약 100명을 인터뷰했다.
‘대어(大魚)’를 낚겠다는 욕심과 내가 처음으로 (그와 혹은 그녀와) 인터뷰를 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없었다면 이 모든 일을 감당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뉴스를 만들고 스캔들을 만드는 사람이면 누구든, 새 영화에 출연하는 사람이면 누구든, 그리고 부모나 아내 연인을 살해한 용의자면 누구든 막론하고 만나기 위해 나는 필사적으로 뛰었다.’
누군가를 인터뷰할 수 있다는 것은 참 멋진 일이다. 요즘은 기사가 너무 많은 곳에서 생산되어 기자란 직업의 가치도 하향 평준화되고 있지만 그럴수록 오랜 전통을 가진 전문적인 매체에서 전문적인 트레이닝을 받으며 성장한 프로페셔널 인터뷰어에 대한 사회적 갈증이 커지고 있다.
오디션의 연속
미디어는 매력적인 만큼 거칠고 힘들다. 예측불가능한 일들의 연속이고 피를 말리는 순간도 많다. 프로페셔널을 지향하는 미디어 종사자들에겐 그런 순간들을 이겨내는 힘이 필요하다. 바버라 월터스에게 그 힘은 ‘불안’이었다.
‘나는 시키는 일은 무엇이든 잘해서 그저 내 일자리를 지키고 싶었다. 이후 20년, 30년 어쩌면 40년까지도 같은 생각이었다. 아무리 내 이름이 알려지고 아무리 많은 상을 받고 아무리 많은 돈을 벌어도 나는 그 모든 것을 어느 날 다 빼앗길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안고 살았다. 로켓과학자처럼 명석한 사람이 아니라도 나의 이러한 불안감이 아버지의 롤러코스터 같은 인생역정이나 엄마가 가졌던 끊임없는 불안감, (장애) 언니를 돌봐주어야 한다는 부담감과 연관지어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 나는 항상 오디션을 본다는 생각을 하며 살았다. 그것은 새로 일자리를 얻는 데 필요한 오디션 같은 것일 수도 있고, 내가 지금 하는 일을 남보다 더 잘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여야 하는 오디션일 수도 있다. 그게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나는 일생 동안 다양한 종류의 불안감을 안고 살았지만 그렇다고 삶에 대한 생각을 바꾼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나는 열심히 다른 사람보다 더 열심히 일했다. 맡은 일은 무엇이든 다 하고 일을 집에 가져갔고 스스로를 끊임없이 채찍질했다. 이게 성공의 나쁜 공식은 아니다.’
일하는 여성들이여, 불안을 즐겨라! 이게 바버라 월터스의 조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