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은 한나라당과 보수의 위기
- 개인 인기에 의지해도 안 돼
- 작은 실수 막아야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
- 문화계, 더 이상 이념 갈등 없게 하겠다
- 17개 해외 한국문화원 복합문화공간으로
부드러운 봄바람이 겨드랑이를 간질이고, 목련 꽃을 피우던 4월1일 서울 종로구 와룡동 문화부 집무실에서 만난 정 장관은 호주 시드니 출장 준비로 무척 바빠 보였다. 이날 저녁 7시 비행기를 탈 예정인데, 현안 보고받느라 여장을 채 꾸리지도 못했다고 했다. 정 장관은 취임 뒤 “답은 현장에 있다”며 부지런히 현장을 방문하고 있다. 이번 시드니 방문도 시드니 한국문화원 개소식에 참가하는 것뿐 아니라 현장에서 한국문화원의 방향을 다시 점검하려는 게 목적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국문화원은 선진국 중심 행정을 폈습니다. 그러나 선진국에서 우리 문화를 전파하는 것은 사실 파급효과가 별로 크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보다 상대적으로 문화가 열악한 나라에 우리 문화원이 나가 있으면 선진문명을 받아들이려는 그들의 욕구를 채워주고, 그것을 통해 국가 간 교류도 확대할 수 있을 겁니다. 그로 인해 우리의 국가 브랜드 가치도 향상될 수 있고요. 산업적 측면에서도 시너지 효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까지 공관 개념이 강했던 한국문화원을 복합 문화시설로 탈바꿈시키고자 합니다. 단순히 행정뿐 아니라 전시관, 도서관, 전용극장, 전통 음식점, 액세서리 가게, 오디오 가게 등을 마련해서 현지 시민들도 문화원을 더 가까이 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파격적인 생각이 아닐 수 없다. 취임한 지 갓 두 달이 지났지만 그는 이처럼 베테랑 장관의 면모를 보인다. 2000년 의원 배지를 달자마자 국회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회(이하 문방위)를 지원했고, 11년 동안 같은 상임위를 고수했던 덕분이다. 그는 실제로 문화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열정을 갖췄다. 서울과 시드니에서 여러 차례 한 이번 인터뷰에서도 그는 문화부 현안과 정국에 대해 거침없이 소신을 밝혔다. 특히 현재 한나라당의 위상과 관련한 질문에서 그는 “한나라당이 개혁하지 않으면 재집권은 어렵다”며 강도 높게 비판했다. ‘신동아’는 문화부 장관으로서의 그와 정치인(그는 여전히 경기 양평·가평 지역구 국회의원이다)으로서의 그를 나눠서 들여다봤다.
이번 인터뷰는 취임 뒤 잡지매체와 하는 첫 공식 인터뷰다. 올해 11월호로 창간 80주년을 맞이하는 ‘신동아’에 대해 그는 “대단하다”는 말을 아끼지 않았다. 잡지에 대한 그의 관심은 특별하다. 1차 인터뷰에서 잡지진흥정책에 대해 설명할 때 그는 일주일 뒤 발표할 내용을 기자에게 미리 브리핑했다.
잡지 진흥 5개년 계획 마련
“잡지가 위기를 맞이했고, 사양산업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위기는 기회일 수도 있어요. 기술이 급격하게 발달하면서 매체환경이 빅뱅이라고 할 정도로 크게 바뀌고 있습니다. 그렇다 보니 잡지뿐 아니라 종이신문도 아주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부문이 없어진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특히 잡지와 관련해서는 저희가 상당히 긴 시간 동안 관계자와 전문가들로부터 의견을 수렴해 잡지산업 진흥 5개년 계획을 마련했습니다.”
4대 과제 16대 세부사업으로 구성된 이번 계획에 따라 문화부는 5년간 ‘잡지산업 진흥 인프라 구축’에 44억원, ‘잡지 콘텐츠 품질 제고 및 디지털화 지원’에 240억원, ‘유통구조 개선 및 독자 저변확대’에 77억원, ‘글로벌 경쟁력 강화’에 71억원의 사업비를 지원할 계획이다.
▼ 공연장에 자주 가는 것으로 아는데, 특별히 좋아하는 장르가 있는지요?
“공연이라면 다 좋아합니다. 또 그게 일이기도 하고요. 특히 연극을 좋아하지만, 연극 영화 뮤지컬 콘서트 등 장르를 막론하고 현장에 가는 것을 즐깁니다. 전람회에 가는 것도 즐겨서 일주일에 한 번은 꼭 시간을 내지요. 외국 출장을 가면 그 지역의 박물관도 빼놓지 않고 들른답니다.”
정병국 장관(앞줄 오른쪽에서 네 번째)이 4월4일 호주 시드니 타운홀에서 열린 한국문화원 개원 축하공연에 참가했다.
“문화예술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어릴 때의 경험 때문입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경기 양평의 시골 마을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5학년 때 서울로 전학했는데, 그때 문화적 충격을 크게 받았습니다. 월요일에 학교에 가면 학급에서 한두 명은 꼭 음악회나 영화를 본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런 경험이 없었던 저는 상대적 박탈감을 느꼈지요. 그러다 중 2학년 때 학교에서 단체로 명동 국립극장으로 배우 전양자씨 주연의 연극 ‘무녀도’를 보러 갔습니다. 그 연극으로 상당한 감동과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후 의도적으로 연극을 보러 다녔고 문화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했지요. 사실 우리 사회가 산업화와 민주화를 거쳐 선진화로 가는 과정에서 발판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이 바로 문화입니다. 그래서 저는 초선 국회의원이 되었을 때 좌고우면하지 않고 문방위를 지원했고, 여기(장관 자리)까지 오게 된 겁니다.”
▼ 인사청문회 때 가장 인상적인 문화장관으로 박지원 전 장관을 꼽았는데요. 실제로 그런 장관이 되고 싶은 것인지, 아니면 국내외에 롤모델(role model: 모범이 되는 사람)로 여기는 이가 있는지요?
박지원 전 장관, 롤모델은 아니다
“박지원 전 장관을 롤모델로 생각하고 그런 얘기를 한 것은 아닙니다. 제가 경험한 그 많은 장관 가운데서도 그래도 의미 있는 일을 하신 분이 박지원 전 장관이라는 겁니다. 박 전 장관은 당시 처음으로 국가 예산 가운데 문화부 예산을 1% 넘게 확보했습니다. 그것은 상당히 의미 있는 업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저는 초대 장관이었던 이어령 전 장관이 상당히 창의적이고 문화의 틀을 크게 정립했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이 따라가기 힘들 정도로 새로운 아이디어를 무궁무진하게 냈고, 변화하는 기술의 메커니즘을 정확하게 꿰뚫어보면서 접목하는 것을 보고 상당히 훌륭하신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 취임한 지 이제 두 달을 갓 넘겨서 좀 이른 질문이 될 수 있겠지만, 어떤 장관으로 기억되고 싶은지요?
“무엇을 하기보다는 문화, 뭐라고 해야 될까….”
정 장관은 엄지와 중지를 딱딱 튕기면서, 적합한 단어를 찾는다.
“우선 문화의 힘, 예술의 힘을 제자리에 찾아주는 장관이라는 소리를 듣고 싶어요.”
▼ 제자리를 찾아준다는 뜻이 무엇인지요?
“지난 10여 년간 문화계 관련 활동을 하면서 예술은 참 강하다는 것을 절감했습니다. 그 강한 힘은 나라와 언어 종교 문화가 다른 사람들을 하나로 소통시킵니다. 그래서 예술의 힘이 사회적 통합을 이루는 데 큰 힘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됐습니다. 그러나 이게 또 잘못 이용되면 사회를 분열하고 갈등을 유발하는 요인이 됩니다. 언제부턴가 우리나라가 그런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그래서 그 부분을 제자리로 가게 하겠다는 겁니다. 창작하는 사람들이 마음 놓고 이쪽저쪽 눈치 보지 않고 창작에 전념해서 소비자인 국민이 그것을 만끽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드는 게 제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진보 성향 단체장들과 법적 화해
▼ 갈등이란 이념적인 대립을 말하는가요?
“창작하는 분들이 이념을 갖는 건 자유이겠죠. 또 그들의 작품을 선택하고 보는 것도 국민의 자유입니다. 그런데 그동안 그것을 정치인들이 이용하고, 그렇게 해서 예술인들을 분열시켜왔습니다. 예술작품이 분열의 기제가 된 측면이 있습니다. 그것은 국민에게나 국가에나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예술의 사회통합적 기능은 근본적으로 지금까지 이 정부나 과거 정부가 해온 기조와 상당히 다를 겁니다. 그동안 반복되면서 골이 깊어진 것을 회복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창작하는 이들은 예술성만으로 평가받을 수 있도록 하고, 그가 어디에 속해 있고 누구와 친하다는 것 때문에 예술인의 부침이 결정되는 것을 없애고 싶어요.”
▼ 그런 사례로, 유인촌 전 장관 때 해임됐던 진보 성향의 산하기관 단체장들과 법적 화해를 준비하는 건가요?
“3월 말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김정헌 전 위원장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대법원 상고를 취하했습니다. 거의 다 끝났습니다. 더 이상 이런 갈등국면은 만들지 않는 게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예술은 예술로 승부를 거는 그런 문화계, 그런 세상을 만들겠다는 게 저의 생각입니다.”
▼ 한동안 공석이었던 영화진흥위원회 위원장으로 김의석 감독이 선임됐는데요. 선임 배경도 그런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나요?
“갈등과 분열이 가장 두드러졌던 분야가 영화계입니다. 그래서 이번 인선 때 어떻게 하면 그런 갈등을 통합하고 하나로 만들 수 있을까를 고민했습니다. 그래서 인사 청문 과정에서 영화계 신구, 좌우 인사들을 고루 만나서 그들의 의견을 들었습니다. 영화계를 통합 조정할 수 있고, 세계적으로 경쟁력 있는 영화를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으며, 영화계 현실에 정통한 사람을 찾았는데, 최선은 아니지만 응모자 가운데 최적의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예술영화 전용관 강하게 유도
▼ 영화계의 또 다른 현안은 무엇인지요?
“영화는 예술이자 산업이기도 합니다. 영화계가 산업적 차원에서 글로벌 경쟁력을 갖추려면 예술적 기반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독립영화나 예술영화 제작 시스템을 효율적으로 지원하고, 그것이 산업으로 연결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나라 영화 시장의 한계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고민하는데요. 공동제작 지원센터를 만들어 지원하는 방안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영화 제작을 위해 일하는 스태프의 노동조건은 한계에 봉착했습니다. 그분들의 근무환경이나 여건을 개선하지 않고는 영화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고 봅니다. 대기업은 영화 기반을 닦기 위해 재투자에도 나서면 좋겠습니다. 독립영화나 예술영화를 만들어도 상영관을 찾을 수 없으니 멀티플렉스에서 전용관을 하나씩 만드는 것도 적극 주선하려고 합니다.”
▼ 좀 강하게 유도하겠다?
“강하게 하려고 그래요, 하하. 강하게 협조를 구하려고 합니다.”
▼ 제도화하겠다는 건가요?
“그것을 제도화할 부분은 아니고요. 몇몇 관계자와 만나 의견을 나누니 기꺼이 전용관을 마련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더군요. 공생하겠다고….”
정 장관은 호주 일정을 마무리하고 런던 스포츠어코드(Sport Accord)에 참가해 2018 동계올림픽 유치 활동을 폈다. 스포츠어코드는 국제경기연맹총연합(GAISF)·하계올림픽국제경기연맹연합(ASOIF)·동계올림픽경기연맹연합(AIOWF) 등 3개 세계스포츠연합기구가 공동으로 주최하고 국제올림픽위원회(IOC)가 후원하는 행사다. 동계올림픽과 관련해서는 앞으로 5월에 있을 후보도시 브리핑, 7월 IOC 총회에서 열린 후보도시 프레젠테이션 등의 과제가 남았다.
▼ 7월6일 2018 동계올림픽 개최지가 결정되는데, 국내 유치를 위한 관건은 무엇인지요?
“우선 우리가 실수하지 않아야 합니다. 후보도시들 간에 경쟁이 치열하기 때문에 결국 작은 실수가 유치 작업을 어렵게 할 수가 있습니다. 110명 IOC 위원의 마음을 사야 하는데, 혹 실수로 한두 사람의 마음을 거스르면 그게 발단이 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잘 해왔습니다만 끝까지 철저하게 대비해야 하겠습니다. 그동안 동계올림픽의 역사에서 1972년 삿포로와 1998년 나가노 두 차례를 빼고 나면 아시아에선 동계올림픽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평창 유치는 유럽 중심의 동계 스포츠를 아시아 지역으로 확산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는 점에서 강력한 명분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종편과 지상파 구도
연말 종합편성채널(이하 종편) 출범에 맞춰 문화부는 콘텐츠 진흥을 위한 시설과 제도를 구축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대전의 HD드라마센터(885억원, 2014년), 일산의 디지털방송콘텐츠지원센터(2276억원, 2012년), 드라마펀드(600억원), 글로벌 프로젝트 펀드(800억원), 우수 방송콘텐츠 제작지원(55억원), 융합형 방송콘텐츠 제작지원(90억원) 등이 대표적이다.
▼ 종편의 등장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요?
“종편은 지상파 방송의 매너리즘과 독과점을 해소하고 방송콘텐츠의 수요를 높여 ‘스마트 미디어’ 시대를 이끄는 중요한 구실을 할 것으로 기대됩니다. 물론 우리나라 방송 및 광고시장의 규모, 매체간 경쟁 심화 등으로 연착륙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우려도 있습니다. 지상파는 이미 많은 콘텐츠를 구축하고 있으므로 종편이 어떻게 차별화된 콘텐츠를 만들어내느냐가 종편의 성공 여부를 판가름할 겁니다. 다행스럽게도 이번 종편 사업자들이 다 신문사를 갖고 있으므로 신문이 가진 장점을 어떻게 영상으로 연결해내느냐 하는 연구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지상파를 능가하는 킬러 콘텐츠를 하나씩만이라도 만들어낼 수 있다면 종편에 대한 국민의 인식이 바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차별화된 콘텐츠를 만드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텐데요.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지상파든 종편이든 방송도 이젠 하나의 구시대적 매체입니다. 지금은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 시대로 전환되고 있습니다. 방송이 이것을 어떻게 연계해낼 것인가 하는 점이 중요합니다. SNS를 통해 무궁무진하게 생산되는 콘텐츠를 어떻게 안방으로, 영상으로 구현해내느냐 하는 부분이 하나의 바로미터가 될 거라고 봅니다. 방송국에서 기자들이 취재할 수 있는 부분은 제한돼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스마트폰, 태블릿 PC 등의 등장으로 누구든 취재할 수 있는 시대입니다. 중동의 재스민 혁명 때, 일본 대지진이 났을 때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가 큰 몫을 담당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활용하느냐가 참으로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정병국 장관이 여전히 국회의원을 겸직하고 있기 때문에 1년만 장관을 하고 내년 총선에 출마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있는 게 사실이다. 그를 정치인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치인 정병국 의원을 짚어보려면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는 성균관대에서 사회학을 전공했고 연세대학교에서 행정학 석사학위, 성균관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대학에서 학생운동하다 강제징집 대상이 돼 군대에 끌려갈 상황이 되자 그는 해병대에 지원했다.
“해병대에서 호되게 담금질을 당했지요. 그러면서 세상을 다시 배우는 계기가 됐습니다. 그러나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은 변하지 않아서 복학 후에도 학생운동을 계속하다가 구속됐고 그때 YS 측과 연결됐습니다.”
▼ 감옥까지 갔다 온 학생운동권 출신인데 보수정당인 한나라당 소속이어서 언뜻 이해가 잘 안됩니다.
“무슨 소리입니까. 보수주의자들이라고 학생운동과 민주화운동을 안 했습니까? 뭔가 오해하시는 것 같은데 저는 본래부터 보수였습니다. 보수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 반(反)군사독재투쟁을 한 겁니다. 부당하게 정권을 탈취한 군사독재와 정경유착 등으로 대한민국 정치와 경제를 농단한 부도덕한 집단과 맞섰던 겁니다. 그리고 군사독재와 첨예하게 맞섰던 통일민주당과 YS도 보수 아닙니까? 그뿐만 아니라 한나라당 소속인 이재오, 박계동, 김문수 등의 정치인들은 그 누구보다 민주화투쟁의 선봉에 섰던 분들입니다.”
차분하게 얘기하던 정 장관 목소리 톤이 갑자기 높아졌다. 보수와 진보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서 오랫동안 얘기했고, 그 과정에서 보수개념의 왜곡 때문에 한나라당이 크게 손해 본다는 얘기도 덧붙였다. 그는 작심한 듯 대한민국의 보수와 한나라당 비판도 서슴지 않았다.
“3당(민주정의당,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 합당 때문에 지금도 보수와 한나라당이 이미지 측면에서 크게 손해를 보는 겁니다. 5공 세력인 민정당 출신들과 함께하다 보니 이미지의 왜곡이 생겼습니다. 실제로 지금 한나라당은 무척 건강해졌는데 이미지의 덫에 갇혀서 헤어나지 못하는 거지요.”
민주당의 정체성
▼ 3당 합당이 보수대연합이었다면 평화민주당으로 시작해서 정권을 창출한 국민회의와 열린우리당, 현재 제1야당인 민주당을 진보로 보시는 겁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민주화 이후에 보수와 진보로 나뉘기는 했지만, 과거 국민회의나 현 민주당을 진보정당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다수의 보수와 소수의 진보가 혼재돼 있을 뿐입니다. 다만 노무현 전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이 진보적인 성향을 띠었지만 지금은 떨어져 나가서 국민참여당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유시민 전 장관을 인정하느냐 마느냐를 놓고 논란이 일어나는 것 아닙니까. 돌이켜보면 진정한 의미의 진보정당 출현은 17대 국회에 민주노동당이 비례대표로 국회에 진출한 역사적 사건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자 민주당이 스탠스를 잡기가 힘들어서 보수도 진보도 아닌 제3의 형태로 어정쩡하게 서 있는 거지요.”
정병국 장관이 4월4일 시드니에서 문화홍보관 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사태 후에 치러진 선거에서 민주당(당시의 열린우리당)이 압승을 거두었습니다. 당시 민주당이 보수라고 할 것인지, 진보라고 할 것인지를 놓게 크게 고민했습니다. 진보라고 하면 민주노동당처럼 될 것 같으니까, 설악산에 들어가서 워크숍을 하고 나오면서 ‘우리는 실용주의다’라고 발표했습니다. 이념의 가치를 지향하는 정당에서 그게 말이나 됩니까? 실용주의는 보수성이 강한 노선인데, 민주당은 지금도 그런 상황의 연장선상에 놓였다고 봅니다. 무엇보다 민주당 손학규 대표를 진보로 분류할 수 없잖아요.”
▼ 민주당의 정체성을 상당히 비판적으로 보시는 것 같습니다.
“정체성의 혼란이 대한민국 정치발전을 저해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당선 위주로 그때그때 당적을 달리하고 지역도 여기저기 옮겨 다니면 국민이 용납하겠습니까. 유권자들이 이념과 가치를 명확하게 실현할 수 있도록 정치풍토를 바꿔야 합니다.”
▼ 민정당 이미지 때문에 한나라당이 큰 손해를 본다는 주장을 여러 번 했습니다.
“그게 사실입니다. 지금 민정당 출신의 한나라당 의원은 한 명도 없습니다. 직간접으로 연결된 분들이 있기는 하지만(이 대목에서 강재섭 의원 이름이 거론됐다) 그분들한테 물어보면 당시에는 국회의원이 아니었다고 말합니다. 그게 사실이고요. 또한 민정당 시절에 재직했던 판검사나 고위 공직자들은 뭐가 됩니까. 다만 3당 합당하면서 내려온 역사성 때문에 민정당의 이미지가 지워지지 않는 겁니다. 일종의 착시현상이지요.”
한나라당의 이미지 오염
▼ 그게 그토록 억울합니까? 현재 한나라당은 아주 깨끗하다는 주장으로 들리는데요.
“억울하지요. 현대정치에서 이미지 전달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더욱이 한나라당은 보수를 대변하는 정당이기 때문에 보수 전반에 대한 왜곡의 책임도 져야 합니다. 실제로 2011년 현재 한나라당은 민주당보다 훨씬 깨끗합니다. 다만 한나라당이 과거에 축적된 부정적 이미지로 인해 실제보다 덜 깨끗하게 보일 뿐입니다. 이미지 차원에서 바이러스에 오염됐다는 뜻입니다.”
▼ 한나라당을 대한민국 보수의 전체인 것처럼 정리하는 것은 조금 무리인 것 같은데요.
“동의합니다. 자본주의와 시장경제를 옹호하고 지향하는 대기업도 보수의 한 부분이고, 한나라당을 지지하지 않지만 보수적 가치를 높게 평가하는 국민도 많이 있으니까요. 그런 측면에서 한나라당은 그분들에게 빚을 지고 있습니다. 한나라당의 역사가 과거 군사독재에 맥이 닿아 있어서 보수는 나쁜 것이라는 인식이 심어졌으니까요. 그러나 호주를 포함한 정치선진국에서 보수주의자와 보수정당이 그런 식으로 매도당하지는 않습니다.”
▼ 한나라당이 민주당보다 깨끗하다는 주장에 무슨 객관적인 근거가 있습니까?
“한나라당은 당헌당규에 전과자를 공천할 수 없도록 제한했습니다. 전과자를 공천한 사례도 없고요. 그러나 최근에 전과자 공천금지가 헌법재판소에서 위헌 판결을 받았기 때문에 앞으로도 그 기준이 지켜질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민주당을 보세요. 당선됐다가 물러나는 정치인도 있고 전과가 있어도 얼마든지 공천되잖아요. 그런 것들이 객관적인 근거입니다. 사실 한나라당은 깨끗한 정당으로 거듭나기 위해서 눈물겨운 노력을 계속했습니다.”
▼ 언제, 누가 그런 노력을 했다는 겁니까?
“쑥스럽지만 저도 그런 이들 가운데 한 명이었습니다. 한나라당 개혁파의 노력은 보수라는 특성 때문에 상대적으로 더 높게 평가받아야 한다고 봅니다. 예를 들면 남·원·정(남경필·원희룡·정병국)으로 불렸던 소장파, 혹은 개혁파들은 가시밭길을 걸어왔습니다. 제가 초선의원 때는 한 선배의원이 ‘저놈들은 한나라당을 가장한 빨갱이들’이라는 얘기도 했습니다. 감히 말씀드리자면 그런 노력이 없었다면 한나라당이 더 깨끗하다는 주장을 할 수 없겠지요.”
▼ 남·원·정 개혁파는 지금도 존속되고 있습니까?
“당시와 비교하면 지금은 세 사람 모두 머리가 너무 커졌습니다. 남경필 의원은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회 위원장이고, 원희룡 의원은 한나라당 사무총장이며, 저는 장관입니다. 그러다보니 당시에 지향하던 공동의 목표가 줄어들었고 각자 지향하는 바가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한목소리로 당의 개혁을 강하게 주장할 입장은 못 됩니다. 그러나 당을 혁신해야 한다는 기본적인 생각은 똑같습니다. 보수 전체가 위기를 맞고 있는 지금, 한나라당 안에서 그런 젊은 목소리를 자주 들을 수 없어서 안타깝습니다.”
‘SNS가 진보 확산’
▼ 보수의 위기를 유난히 강조하시는데 어떤 측면에서 위기로 진단하시는 겁니까?
“요즘 젊은이들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해보면, 자기가 진보를 지향한다는 답변이 70% 이상입니다. 보수를 지향한다는 답변은 20%가 채 안되고요. 그러나 이념의 가치기준으로 테스트해보면 60% 정도가 보수 성향으로 나옵니다. 엄연한 왜곡이고 정체성의 혼란이지요. 인간의 심리가 변화보다는 안정을 희구하기 때문인데요. 그것 못지않은 또 하나의 이유는 보수정당을 자임하는 한나라당의 메신저 이미지가 오염됐기 때문입니다.”
▼ 그게 전부일까요? 보수와 한나라당의 위기가 이미지 왜곡 때문이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다른 이유는 없을까요?
“많이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도덕성의 위기로 평가받는 게 너무 아픕니다. 보수가 지녀야 할 가장 중요한 가치가 도덕성인데, 국민의 입장에서 보면 도덕적이지 않은 보수를 보존할 필요성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엄청난 위기가 닥쳐오고 있는데 위기감을 느끼지 못하는 한나라당 의원이 많다는 겁니다. 더욱이 얼마 전까지는 40대까지 보수 지지층에 포함시킬 수 있었는데, 지금은 40대 이하의 신주류층이 보수에서 빠르게 이탈하고 있습니다. 그 원인을 알아보니까 SNS 시대에 접어들면서 40대 연령층까지 20~30대와 연대하는 현상이 나타난 겁니다. 진보의 확산인 셈이지요.”
▼ SNS가 진보를 확산시킨다는 주장은 논리의 비약으로 들리는데요.
“국민이 정치인보다 한 발짝 앞서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20~30대는 진보 성향이 강할 수밖에 없고요. 게다가 40대 연령층이 SNS의 영향으로 진보 쪽으로 이동하는 겁니다. SNS 시대를 따라가지 못하는 정치인이 한나라당에 많습니다. 그래서 보수의 위기라고 진단하는 겁니다.”
▼ 아까 대표적인 보수를 거론하면서 시장경제를 옹호하는 대기업을 포함시켰는데 SNS는 대기업에서 보급하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대기업을 포함한 보수 성향의 기업에서 SNS 기기들과 운용 시스템 및 콘텐츠를 생산하고 보급합니다. 그런데 그런 기기와 콘텐츠가 사회의 진보를 강화하고 있습니다. 결국 보수가 생산한 것을 활용해서 사회는 진보로 변하는 아이러니(irony·역설)를 낳는 겁니다.”
한나라당의 불편한 진실
▼ 그것을 보수와 한나라당이 인식하지 못한다고 판단하시나요?
“그렇습니다. 이런 상태가 계속되면 한나라당의 재집권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한나라당 입장에서 보면 ‘불편한 진실’이지요.”
▼ 이대로라면 정말 한나라당이 재집권하는 게 어렵다고 봅니까?
“어렵다고 봅니다. 이렇게 가면 안 됩니다. 사회 환경이 크게 변했는데 한나라당은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앞날에 대한 대비도 아주 미흡합니다. 보수의 위기를 방치하고 한 사람의 인기로 재집권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일대 혁신 없이는 백전백패입니다.”
6·25전쟁 참전용사, 미망인들과 함께한 정병국 장관.
▼ 개인의 인기에 의지하면 안 된다고 했는데 혹시 박근혜 전 대표를 의식한 발언입니까?
“그건 아니고, 우리나라 정치 지형을 잘 봐야 한다는 뜻입니다. 정치구조학적으로 분석해보면 개인의 인기로 선거에서 이기기가 어렵습니다. 최종주자가 결정되면 지지 세력의 양분현상이 나타나고, 결국 중간지대의 5%를 어느 쪽에서 가져가느냐에 따라서 승패가 갈리는 거지요. 개인의 인기로 결판이 난다면 한나라당이 이기는 것은 명약관화하지 않겠습니까(4월 중순 현재 각 언론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차기 예비 대선후보들 가운데 박근혜 전 대표가 부동의 1위를 달리고 있다). 결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걸 알기 때문에 불안한 거고요.”
과거 남·원·정이 활발하게 개혁을 추진하면서‘친박계’와 많이 부딪쳤기 때문에 던진 질문이었는데 정 장관이 직답을 피했다.
▼ 현역 3선 의원이고 장관인데 그 다음 목표는 무엇인지요?
“지금까지 무엇이 되겠다고 생각해서 이 자리까지 오지 않았습니다. 촌놈이 장관까지 됐는데 무얼 더 바라겠습니까. 매 순간 저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국회의원으로 최선을 다하다보니 장관이 됐고, 장관으로 최선을 다하다보면 또 다른 역할을 맡을 수도 있겠지요.”
호주 가평대대가 준 감동
▼ 시드니에 도착해서 6·25전쟁 참전용사와 전쟁미망인들을 만났는데요.
“저는 기회 있을 때마다 참전용사들의 은공에 감사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특히 작년이 6·25 발발 60주년이어서 많은 분을 초청해서 위로하고 한국의 발전상을 보여주었습니다. 참전용사 스파이서씨가 그러더군요. 언제부턴가 한국전쟁이 ‘잊혀진 전쟁(Forgotten War)’이 됐는데 한국인들이 잊지 않는다는 걸 늘 고맙게 생각한다고요. 그리고 한국의 발전상을 지켜보면서 자신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았다는 걸 확인한다면서 한국이 정말 고맙다고 말해서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 호주에 있는‘가평대대’를 방문한 소감이 어떠한지요?
“사실 저는 호주에 ‘가평대대’가 있는 줄 몰랐습니다. ‘신동아’에서 보내온 서면질의서에 ‘가평대대’내용이 있어서 알아보았는데, 경기도 가평 일대에서 큰 공을 세운 부대가 한글 이름을 붙이고 있어서 놀랐습니다. 시드니에서 1시간 거리에 있는 부대를 방문했더니 태극기가 게양돼 있고 병사들이 도열해서 저를 맞이했습니다. 참전용사들과 전쟁미망인들을 만나고 ‘가평대대’를 방문하면서 호주에 깊은 연대감을 느꼈습니다.”
정 장관은 시드니에서도 돋보이는 동양인이었다. 멋을 아는, 옷 입는 센스가 아주 뛰어난 멋쟁이였다. 그가 2010년에 베스트 드레서(정치인 부문)로 뽑힌 게 우연이 아니었던 듯하다.
“이 옷이 25만원짜리입니다. 대학동기가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신사복업체를 운영하는데요, 그 친구가 학교 다닐 때는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지만 사회에 나가서 정말 열심히 살았습니다. 더욱이 장애인에게 남다른 배려를 해주고 있어서 큰 감명을 받고 있습니다. 그 친구도 만날 겸 그 회사에 몇 번 가봤더니 자폐아 장애인을 30% 이상 고용하고 있더군요. 아마 내 옷이 좋게 보인다면 그런 사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정치인도 대중한테 좋은 이미지를 심어주어야 하기 때문에 단정하게 보이려고 노력합니다.”
이 대목에서 남을 배려할 줄 알고 실용성을 추구하는 정치인, 그리고 예술적이고 관념적인 아우라가 묻어나는 문화부 장관의 이미지가 겹친다. 정 장관이 아름다운 보수 이미지를 줄곧 유지할지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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