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를 키운 건 8할이 가난과 외로움
- 수제비만 먹던 시절…친구들이 문제집 풀 때는 책만 읽어
- “세상의 벽을 만날 때마다 담쟁이 떠올리자”
- ‘접시꽃 당신’은 죽어가는 아내에게 건네는 마지막 말
- “독약이 독이듯, 악법은 악”…교육운동 투신
- “백석처럼 정신 못 차리고 헤매는 그런 사랑 해봤으면”
그의 어머니는 멸치장사를 했지만, 벌이가 시원찮아 그의 가족은 수제비만 끓여 먹어야 했다. 학생 때는 문제집이나 참고서를 살 돈이 없어 도서관에 혼자 앉아 책만 읽어야 했고,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면 아무도 없는 빈집에서 외로워했다. 지금에는 ‘나를 키운 건 8할(割)이 가난과 외로움’이라며 쓴웃음을 지을 뿐이다.
100만 부가 넘게 팔린 그의 히트 시집 ‘접시꽃 당신’은 시골집 담벼락에 줄지어 핀 하얀 접시꽃을 보고 암으로 투병하는 아내를 떠올리며 울면서 쓴 시다. ‘대중성에 영합한 저급한 문학’ ‘슬픔을 팔아서 장사를 하는 시인’이라는 크고 작은 비난에 시달렸지만 그는 “시는 스스로에게 다가온 슬픔을 내다파는 일이 아니라 슬픔을 함께 나누는 일”이라고 단언했다.
최근 에세이집 ‘꽃은 젖어도 향기는 젖지 않는다’를 펴낸 도 시인을 12월2일 서울 혜화동에서 만났다.
꽃은 젖어도 향기는 젖지 않는다
▼ ‘꽃은 젖어도 향기는 젖지 않는다’를 펼치면 자서전을 읽는 것 같아요. 무엇을 말하고 싶었나요?
“서정주 시인은 ‘나를 키운 건 8할이 바람’이라고 했어요. 저를 키운 건 ‘8할이 가난과 외로움’이었습니다. 책에는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모든 삶, 가난과 외로움, 그리고 그 삶에 따른 시가 담겨 있어요. 화가가 되고 싶었지만, 돈이 많이 드는 미술대학에 갈 수 없어 국가에서 등록금 전액을 대주는 국립사범대 국어교육과에 들어갔고, 1980년 광주에서는 군인으로서 시민군과 대치했고, 아내가 암으로 세상을 떠난 뒤 울면서 시를 썼고,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활동을 하다 감옥에 갔고, 대학 겸임교수직을 버리고 시골 중학교 교사로 갔고, 병든 몸 때문에 모든 걸 버리고 산에 들어갔고…. 살면서 수많은 벽을 만났지만 그때마다 벽에 붙어사는 담쟁이를 떠올리며 ‘담쟁이처럼 그 벽을 오르자’고 마음먹었죠. 내 문학도 가난과 외로움, 좌절과 방황, 소외와 고난, 눈물과 고통, 두려움에서 시작됩니다. 그런 날들이 없었다면 나는 시인이 되지 못했을 거예요. 비가 오면 꽃은 젖겠지만 그 향기까지 적시지는 못하잖아요? 아픔이 없다면 문학이 우러나지 않아요.”
▼ ‘접시꽃 당신’으로 유명 시인이 되었는데요. 아내를 비유한 ‘접시꽃 당신’이란 시를 쓸 때는 어떤 심정이었나요?
“아내가 토혈(吐血)을 하기 시작한 건 첫아이를 낳은 이듬해 봄이었어요. 그때 병원에서는 처음 십이지장궤양이라고 했어요. 의사도 크게 걱정할 일이 아니라고 해서 ‘별 탈 없겠지’ 생각했죠. 그해 가을걷이를 할 때 아내가 또 토사(吐瀉)를 했어요. 의사는 ‘천공에 피가 맺혀 피가 고였다 넘어오는 것 같으니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어요. 그때 아내 배 속에는 아이가 있었어요. 의사는 수술을 하려면 아이를 지워야 한다고 했죠. 나는 그때 아내도 살리고 아이도 살리고 싶어 의사와 상의한 뒤 아내에게 약물치료를 받게 했어요. 그해 겨울이 지나고 아내는 딸아이를 무사히 낳았죠. 그런데 의사가 ‘이상하다’며 소견서를 써줄 테니 서울에 있는 큰 병원으로 가보라고 하더군요.”
▼ 그렇군요.
“부랴부랴 암 전문병원에 가서 검사를 해보니 암이라 했어요. 의사는 길어야 6개월, 짧으면 두 달이라고 하더군요.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죠. 그래도 희망을 버릴 수는 없었어요. 아내는 그때부터 항암치료를 받으며 모진 고통을 감수해야 했죠. 어떻게든 아내를 살려보려고 암을 이긴 사람들이 썼다는 약 이야기를 들으면 전국 어디든 쫓아다녔어요. 의사는 그때 아내에게 병명을 알려주는 것이 좋겠다고 하더라고요. 고민하던 중 우연찮게 시골집 담벼락에 줄지어 핀 하얀 접시꽃이 눈에 들어왔어요. 그 하얀 접시꽃이 계속 피가 빠져나가 창백한 아내 얼굴처럼 보였어요. 그렇게 아내에게 마지막으로 해줄 말을 쓴 게 ‘접시꽃 당신’이었죠. 나는 이 시를 울면서 썼습니다. ‘내가 울면서 쓰지 않은 시는 남도 울면서 읽어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접시꽃 당신’을 내고 난 뒤에서야 알았어요.”
옥수수잎에 빗방울이 나립니다
오늘도 또 하루를 살았습니다
낙엽이 지고 찬바람이 부는 때까지
우리에게 남아 있는 날들은
참으로 짧습니다
마지막 성한 몸뚱어리 어느 곳 있다면
그것조차 끼워 넣어야 살아갈 수 있는 사람에게
뿌듯이 주고 갑시다
기꺼이 살의 어느 부분도 떼어주고 가는 삶을
나도 살다가 가고 싶습니다
-‘접시꽃 당신’ 중
▼ ‘접시꽃 당신’은 당시 초대형 베스트셀러가 되었는데요. 힘든 점도 있었죠?
“저는 슬픔을 팔아서 장사를 하려고 했던 게 아니었어요. 시는 스스로에게 다가온 슬픔을 내다파는 일이 아니라 슬픔을 함께 나누는 일이라 생각해요. 사랑도 마찬가지죠. 사랑의 아픔을 떠들어대는 것이 아니라 그 아픔을 사랑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시집이 나오자마자 전혀 생각지도 않게 매스컴에서 떠들어댔고, 독자 반응도 뜨거워 갑자기 베스트셀러 시인이 되고 말았어요. 그때 시골학교 선생인 내가 감당하기엔 어려운 일이었죠. 게다가 일부 문학평론가들이 내 시집을 대중성에 영합한 저급한 문학으로 평가절하하기도 했어요. 개인적으로 가장 힘들었을 때는 1991년 사별한 뒤 6년째 되던 그해 겨울, 재혼했을 때였어요. 그때 여러 언론과 잡지에서 ‘접시꽃 당신 시인이 재혼했다더라’ ‘여교수와 결혼했다더라’는 기사가 나왔고, 잘 팔리던 내 시집이 헌책방으로 흘러갔죠. 어떤 이는 내게 전화를 걸어 ‘시집을 불태웠다’고 말하더군요. 강연을 가면 ‘어떻게 다시 결혼할 수 있느냐’ ‘강연을 들으러 온 게 아니라 실망했다는 말을 전하러 왔다’는 비난이 마구 쏟아졌어요. 나는 그때 비난과 욕을 다 듣고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태어나서 ‘엄마’라는 말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아이에게 ‘엄마’라고 부르며 달려올 수 있게 하는 일이 더 중요하니까요.”
▼ 앞서 1987년 11월 창립한 충북교사협의회에서 창립준비위원장을 맡아 교육운동을 하셨죠?
“나는 그때 아이들이 목숨을 끊으며 견딜 수 없어 하는 잘못된 교육구조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법으로 보장된 교사들의 단체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구치소에 갔을 때는 푸른 옷으로 갈아입기 위해 옷을 벗어야 했는데, 교도관이 다른 죄수들과 함께 알몸인 채로 ‘앉았다 일어서기’를 시켰어요. 하루는 조사를 받기 위해 포승줄에 꽁꽁 묶이고 손에는 수갑이 채워진 채 검사 앞에 앉았는데, 검사가 내 이름을 보더니 ‘접시꽃 당신 (시인) 아니냐’하고 물었어요. 내가 머뭇거리자, 그 검사는 아니꼽다는 듯 얼굴을 옆으로 돌리며 ‘피’하고 웃었어요. 감옥생활을 하면서 장이 안 좋아 고생을 많이 했어요. 배탈과 설사가 멈추지 않았지만 치료를 받을 곳이 없어 몸이 쇠약해지고 기력이 많이 떨어졌죠. 가장 답답한 것은 터질 것 같은 그 심정을 어디에 글로 써놓고 싶은데 구치소에서는 볼펜 한 자루, 종이 한 장도 주지 않았어요. 교도소 교무과장을 면담하면서 집필 허가를 내달라고도 했지만 미결수라 내줄 수 없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만년노트를 활용했죠.”
“이게 편지야? 시야?”
▼ 만년노트?
“만년노트는 두꺼운 종이에 기름을 먹이고 그 위에 비닐을 덮은 노트였는데, 연필 모양의 뾰쪽한 플라스틱 물건으로 눌러 쓰면 글씨가 써지고 비닐을 들면 글씨가 날아가도록 되어 있어요. 어쩔 수 없이 취침나팔이 울리고 나면 그 만년노트에 긴 시를 한 편 썼어요. 그 다음날 봉함엽서를 신청해 교도관이 보는 앞에서 만년노트에 쓴 시를 편지 형식으로 옮겨 적었죠. 그때 교도관이 ‘이게 편지야? 시야?’라고 물었어요. 나는 ‘시인이 편지를 시처럼 쓴 것’이라 대답했고, 그 봉함엽서는 여러 번 검열을 거쳐 마침내 전교조 충북지부 사무실에 배달되었어요. 나중에 그 시가 명동성당 단식농성장에 대자보로 붙고, 신문에도 실려 구치소 안에서 한바탕 난리가 나기도 했어요. 이후에는 우연찮게 이쑤시개보다 약간 작은 볼펜심을 지인으로부터 얻어 몰래 숨어서 시를 썼어요. 종이가 없어 비누를 싼 속포장지에도 시를 쓰고, 화장지 겉을 싼 종이 안쪽에도 시를 썼어요. 그렇게 쓴 시를 모은 시집이 ‘지금 비록 너희 곁을 떠나지만’이죠. 참 힘든 시절이었어요.”
▼ 잘못된 교육구조가 문제라고 했는데, 도 시인이 바라보는 한국교육은 어떤가요?
“내가 교사로 재직할 때 하루는 교감이 상담실로 나를 불렀어요. 교감은 ‘대학동창회보’에 실린 내 시를 보여주면서 ‘이 시에 나오는 진달래가 북한의 국화가 맞죠?’라고 물었어요. ‘그리고 이 시에 나오는 식민지가 우리가 미국의 식민지라는 뜻이죠?’라고 추궁했어요. 그 시가 ‘접시꽃 당신’에 실려 있는 ‘앉은뱅이 민들레’라는 시였어요.”
나 죽은 뒤
이 나라 땅이 식민의 너울을 벗었거든
내 무덤가에 와서 놀아라
-‘앉은뱅이 민들레’ 중
“그 시는 독립운동가 단재 신채호 선생의 묘소에서 쓴 시였어요. 그때 나는 ‘진달래꽃이 문제가 된다면 저보다 먼저 김소월을 잡아넣어야 하는 게 아니에요?’라고 당당하게 말했더니 교감이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오른 듯 손바닥으로 책상을 치고 나가버렸어요. 우리 교육 현장이 이렇게 왜곡되어 있어요. 그때 교육계 현실은 4·19혁명과 3·15부정선거에 대해 이야기를 해도 징계를 받는 시대였어요. 통일교육을 하면 좌경 의식화교육을 한다고 의심했죠. 사람들은 대부분 법이 바뀌기 전까지는 악법도 법이니 지켜야 한다고 말해요.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어요. ‘독약은 약이 아니라 독이듯이, 악법은 법이 아니라 악이다’라고요. 나는 옳은 것을 바르게 행하지 않는 것 또한 죄라고 생각해요. 고장 난 신호등을 고칠 생각을 않고 ‘고장이 나기는 했지만 신호등이니 계속 기다려야 한다’고 한다면 되겠어요? 그때 나와 길을 함께 걸었던 교사들은 잘못된 법과 제도를 고치는 싸움에 몸을 던졌어요. 그 일이 곧 우리 아이들과 이 나라 교육의 미래라고 지금도 믿고 있어요.”
▼ 지금 한국 정치는 바야흐로 선거 시즌에 돌입하는데요.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시대의 열망과 절망 등을 바라보면서, 시인으로서 우리 민족에 대한 배려를 어떻게 해야 좋은 지를 고민하고 있어요. 내년 총선과 대선은 늘 반복되는 그런 선거가 아니라 새로운 시스템을 엮어나갈 수 있는 선거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산업화, 민주화를 거친 우리나라는 이제 선진화로 가야 합니다. 이명박 정부에서 종종 했던 ‘선진화’란 말은 참 좋아요. 하지만 자본제일주의, 경쟁제일주의 사회에서 아무리 선진화를 외쳐도 의미가 없어요. 국가경쟁력 1위인 핀란드를 보세요. 국민소득 4만달러에 행복지수 1위, 지속발전가능지수 1위 국가가 아닙니까. 자살률과 불행지수가 높은 우리나라를 행복지수가 가장 높은 나라로 만들어 다른 나라에서 배워가도록 하는 그런 대통령이 나왔으면 좋겠어요.”
“대통령은 행복지수 높은 나라로 만들어야”
▼ 2011년 11월에는 제13회 백석문학상을 받았는데요, 백석 시인의 시 세계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나요?
“백석 시인은 지금 활동하는 문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문인으로 꼽히지요. 시인 신경림, 안도현 등도 백석 시인의 영향을 많이 받았죠. 저도 백석 시인을 참 좋아해요. 백석 시인은 우리 토속어로 시를 많이 쓴 시인이었죠. 우리 삶과 문화, 풍습을 시로 가장 맛깔스럽게 잘 쓰는 시인이었어요. 그걸 배우고 싶어요. 특히 백석은 사람을 너무 좋아하는 시인이었어요. 그는 좋은 사람이 나타나면 정신을 못 차렸죠. 오죽했으면 어느 결혼식장에 갔다가 우연찮게 만난 여학생에게 포옥 빠져 그 여학생이 사는 곳까지 찾아다니며 시까지 썼겠어요. 나도 백석처럼 정신을 못 차리고 여기저기 헤매는 그런 사랑을 한 번쯤 해봤으면 좋겠어요(웃음).”
▼ 사랑도 그렇지만, 화가도 해보고 싶지 않았나요?
“그럼요. 초등학교 때는 크레용으로 신문지에 무언가를 그리는 걸 좋아했어요. 중학교 때는 만화를 즐겨 그렸죠. 그때 내가 그린 만화는 친구들에게 인기가 좋았어요. 동네 아이들이 5원 혹은 10원씩 주고 살 정도였어요. 미술시간에는 크리스마스카드를 그렸고 불우이웃돕기 전시회도 했어요. 그때 다른 친구들 카드는 500원에 팔렸는데, 내가 그린 카드는 2000~3000원에 팔리곤 했어요.”
▼ 당시에는 어떤 책을 읽었나요?
“많이 읽었죠. 종례가 끝나면 도서실로 달려가 책을 읽었어요. 내가 다니던 청주중학교는 그때 충북도 내에서 가장 크고 좋은 도서실을 갖추고 있었어요. 나는 그 도서실에 들어가 문학전집과 공상과학소설, 학생잡지, 과학잡지까지 닥치는 대로 읽었어요. 친구들이 문제집을 풀고 있을 때 나는 도서실에서 책을 읽었어요. 그때 우리 집은 소풍을 갈 때도 도시락을 싸들고 가지 못할 정도로 가난했기 때문에 참고서나 문제집을 살 돈이 없었어요. 중학생 때 읽은 ‘레미제라블’은 지금도 기억나요. 나는 그 책을 통해 인간의 다양한 삶을 알게 되었죠. 대학을 다닐 때는 헤르만 헤세가 쓴 ‘싯달타’를 가장 감명 깊게 읽었어요. 인생의 길에는 참선, 수행의 길도 있고, 술도 마시고, 장사도 하고, 도박도 하는 여러 갈래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죠. 그 세속 경험이 하나가 되어 만나는 인생의 길이 있다는 걸 그 때 알았죠. 모든 것은 제자리로 돌아온다는 거죠. 결국 하나의 강으로 만난다는 사실. 이 책은 내 문학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어요.”
운명의 책, 헤르만 헤세의 ‘싯달타’
▼ 도 시인의 시 중 가장 좋아하는 시는 어떤 시인가요?
“‘담쟁이’란 시예요. 나는 이 시를 처음에는 썩 좋아하지 않았어요. 내가 쓴 여러 편의 시 가운데 한 편 정도로 여겼어요. 2009년 7월30일 한 일간지에서 직장인 100만명을 대상으로 ‘내 인생의 시’를 묻는 질문에서 ‘담쟁이’란 시가 1위를 했다고 나왔어요. 이 시는 교과서에도 실려 있는데, 이렇다보니 나도 덩달아 좋아지는 것 같아요.”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담쟁이’ 모두
“저는 ‘꽃은 젖어도 향기는 젖지 않는다’처럼 살면서 가난도 많이 겪었고 실패도 많았어요. 그래도 내 정신과 문학적 향기만은 지니고 살려고 노력했고 지금도 노력하고 있어요. 이 세상은 시련과 아픔이 너무 많아 나 혼자 힘든 건 아니에요. 이 세상 사람들 누구나 용기와 희망을 가지고 살았으면 좋겠어요. 꽃은 젖어도 향기는 젖지 않는 것처럼.”
▼ 요즘 건강은 어떠신가요? 음식은 잘 드시죠?
“좋아요. 음식은 우리나라 음식이라면 거의 다 잘 먹어요. 아, 딱 하나 빼고요. 수제비는 싫어졌어요. 어머니께서 멸치장사를 하셔서 그런지, 쌀을 살 돈이 없어 그랬는지 몰라도 어릴 때부터 수제비는 엄청 먹었어요. 고등학생 때에는 집에 아무도 없어 직접 밀가루 반죽을 해서 큰 덩어리를 툭툭 떨어뜨려 수제비를 만들어 먹었어요. 양념도 별로 하지 않고 수제비를 만들었으니 맛이 있을 수 없죠. 수제비만 떠올리면 힘들고 가난했던 그 시절이 떠올라요. 그래서 수제비가 싫어요.”
둔내장으로 멸치를 팔러 간
어머니는 오지 않았다
미루나무 잎들은 사정없이 흔들리고
얇은 냄비에선 곤두박질치며
물이 끓었다
......
경기도 어딘가로 떠난 아버지는 소식 끊기고
이름 지을 수 없는 까마득함들을
뚝뚝 떼어 넣으며 수제비를 끓였다
어둠이 하늘 끝자락 길게 끌어
허기처럼 몸을 덮으며 내려오고 있었다
국물이 말갛게 우러나던 우리들의 기다림
-‘수제비’ 몇 토막
시인 도종환은 1954년 충북 청주에서 태어나 충북대 국어교육과를 졸업하고 충남대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교직에 몸담고 있을 때, 동인지 ‘분단시대’에 ‘고두미 마을에서’ 등 시 5편을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1996년에 낸 ‘접시꽃 당신’은 100만 부가 넘게 팔렸고, 1988년 박철수 감독, 이덕화 이보희 주연의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교직생활과 시 창작을 함께 하던 시인은 1989년 전교조 활동으로 해직된 뒤 전교조 충북지부장을 맡으며 교육운동을 하다가 해직 10년 만인 1998년 진천 덕산중학교로 복직했다. 2003년에는 심신 허약으로 쉽게 피로가 찾아오고 질병 치료가 더딘 ‘자율신경 실조증’으로 휴직계를 내고 집에서 요양하다가 2004년 2월 사직서를 내고 교직을 떠났다.
시집으로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지금 비록 너희 곁을 떠나지만’ ‘당신은 누구십니까’ ‘사람의 마을에 꽃이 진다’ ‘부드러운 직선’ 등이 있으며, 산문집으로는 ‘지금은 묻어둔 그리움’ ‘그때 그 도마뱀은 무슨 표정을 지었을까’ ‘모과’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