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3월호

“유전무죄 무전유죄? 지금도 그렇죠, 장발장처럼…”

‘지강헌 인질사건’ 마지막 생존자 강영일

  • 강지남 기자 | layra@donga.com

    입력2013-02-22 10:4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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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년 복역 후 만기출소…“그땐 잡히느니 죽는 게 낫다고 생각”
    • “‘조건부 변호사’ 고용하면 형기 줄어드는 세태에 분노”
    • “비행청소년, 장기수 자녀 도우며 사회에 기여하고 싶다”
    • 2월 말 채널A 회상다큐 ‘그때 그 사람’ 강 씨 스토리 방영
    “유전무죄 무전유죄? 지금도 그렇죠, 장발장처럼…”
    ‘지강헌’이란 이름 석 자를 기억하는 이가 많을 것이다. 서울올림픽의 여흥이 채 가시지 않은 1988년 10월, 지강헌을 포함한 12명의 미결수가 호송 중 탈주해 서울시내 가정집을 돌며 인질극을 벌이는 전대미문의 사건이 발생했다. 마지막 남은 4명의 탈주범은 북가좌동 가정집에서 경찰과 대치하다 2명은 자살하고 지강헌은 경찰이 쏜 총에 맞아 사망했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이가 강영일(46) 씨다. 19년형을 마치고 6년 전 출소한 그를 만났다.

    “우선 커피나 한잔 하자”는 말에 그는 “우유 되나요?”라고 물었다. 그 순간 26년 전 그날이 떠올랐다. TV를 통해 전국에 생방송된 사건 현장에서 그는 동생이 사온 빙그레우유를 벌컥벌컥 마시며 고함을 질러댔다. 술에 취했는지 눈빛은 흐렸고, 불안과 초조함이 스물 한 살의 청년을 짓누르던 모습. 4시간의 인터뷰 후 우유를 좋아하느냐고 물었더니 “제가 징역만 오래 살아서 귀가 얇은데, 책에서 보니 우유가 완전식품이라서요”라며 수줍게 웃었다.

    종합편성방송 채널A가 대한민국 과거 그 시절과 사람을 재조명하는 회상다큐멘터리 ‘그때 그 사람’을 선보인다. 2월 말로 예정된 첫 방송에서 ‘지강헌 인질사건’과 강영일 씨를 다룰 예정이다. 제작진에 따르면 출소 후 6년간 두문불출하던 강 씨를 설득하는 데 두어 달이 걸렸다고 한다.

    ▼ 출소 후 어떻게 지냈습니까.

    “신학대 다니면서 아르바이트를 했어요. 노가다도 하고 식당 일도 하고. 냉온수기 소독, 안경알 배달 일도 했고 인사동에서 액세서리를 판 적도 있어요. 겨울엔 군고구마, 여름엔 아이스크림 장사도 했고요. 근데 아르바이트로는 형편이 나아지지 않아서 3학년 때 학교 그만두고 돈을 벌려고 했는데 허리가 아프기 시작했어요. 퇴행성 디스크라고….”



    ▼ 직장을 가지려고 한 적은 없나요.

    “제가 미싱 기술이 있거든요. 봉제공장에 취직하려고 했어요. 굳이 전과 숨기기 싫어서 오픈하면 ‘다음에 연락드리겠습니다’ 하더라고요. 근데 다음에 연락 주는 일은 없잖아요. 뭐 그렇죠. 아직은.”

    ▼ 다큐 출연을 결심한 계기는.

    “출소한 지 얼마 안 돼 인터뷰한 적이 있는데, 범법자가 떳떳한 것 같은 뉘앙스로 기사가 나갔어요. 이후엔 인터뷰를 일절 안 했어요. 그리고 신학대도 포기한 상태라 내세울 게 없어 망설였어요. 하지만 순열이 형이 계속 골방 노인처럼 지내지 말고 뭔가 반전할 기회로 삼으라고 조언해줬어요. 고민 끝에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한번 해보자’ 했습니다.”

    순열이 형은 이순열 현진시네마 대표다. 그는 2006년 지강헌 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 ‘홀리데이’를 제작했다. 그 인연으로 둘은 형 동생 사이로 지낸다고 한다.

    다시 찾은 북가좌동

    탈주 8일째인 1988년 10월 15일 밤, 지강헌 강영일 한의철 안광술은 서울 서대문구 북가좌동 고모 씨의 가정집을 침입, 다섯 번째 은신처로 삼는다. 하지만 다음날 새벽 고 씨가 몰래 빠져나가 신고함으로써 경찰의 포위망에 둘러싸였다. 집 안에는 고 씨 부인과 4명의 딸, 막내아들이 남은 상황. 정오 무렵 일당은 고 씨 부인과 막내아들을 풀어주며 도주를 위한 봉고차를 요구했고, 봉고차를 구하러 강영일이 셋째 딸을 데리고 밖으로 나간 사이 한의철 안광술은 지강헌에게서 총을 빼앗아 자살한다. 이어 지강헌이 경찰이 쏜 총에 맞음으로써 9일에 걸친 도주는 끝이 났다.

    북가좌동 집은 사건 이듬해인 1989년 2월 재단법인 교정협회에 매매됐다. 아무도 이 집에 살려고 하지 않아 교정협회가 인수한 뒤 현재까지 지방 교도관 자녀들의 기숙사로 활용하고 있다고 한다. 강 씨는 얼마 전 제작진과 함께 이 북가좌동 집에 다녀왔다. 그는 “고 씨네 집과 그 건너 수사본부가 차려졌던 집 두 개만 기억나더라”고 했다.

    ▼ 다시 가보니 어떻던가요.

    “그간 가보고 싶어도 맘 아플까봐 못 갔어요. 나 혼자 살아남았다는 거, 친구들한테 너무 미안해서…. 제가 ‘실패하면 무조건 죽는 거다’라고 철이와 광술이를 세뇌시킨 건지도 몰라요. 지금은 40, 50대도 한창때지만 그땐 마흔 넘으면 할아버지라고 생각했어요. 도주죄까지 형을 살고 나오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여겼어요.”

    ▼ 인질로 딸들을 잡고 있었죠.

    “특히 둘째와 넷째 딸에게 미안해서…. 철이와 광술이가 그 아이들 앞에서 자살했거든요. 저도 한동안 선잠만 들어도 애들이 꿈에 나와 ‘야, 뭐해? 빨리 와, 가자’ 그랬거든요. 근데 죽는 걸 봤으니 그 트라우마가 얼마나 컸을까 싶어요.

    큰딸은 여걸이었어요. 그날 직장에서 회식이 있어 늦게 들어왔는데, 대뜸 우리한테 한 말이 ‘잘 왔어요’였어요. 회식하면서 ‘탈주범들이 왜 우리 집엔 안 올까’ 농담했대요. 아버지가 신고한 후에도 ‘정말 죄송하다. 하루이틀 편하게 있다 가시면 좋았는데,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고요. 우릴 자극하지 않으려고 그랬던 것 같아요. 상황 판단도 빨랐고 대처도 잘 했어요.”

    “유전무죄 무전유죄? 지금도 그렇죠, 장발장처럼…”

    1988년 10월 16일, 서울 북가좌동의 가정집에서 인질극을 벌이고 있는 지강헌.

    북가좌동 고 씨 큰딸을 비롯해 인질범으로 잡혔던 피해자 중 몇몇은 이후 법정에 탄원서를 제출하고 증인으로 나서는 등 강 씨 편에 서줬다. 강 씨는 “인질과 인질범 모두 서로를 자극하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상해나 강간 등 죄를 저지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고 했다. 인질범과 인질은 서로를 ‘오빠’ ‘누나’ ‘아가씨’ 등으로 호칭했고, 한 여중생은 인질로 붙잡혀 있으면서 고입 시험을 보러 학교에 다녀오기도 했다. 첫 번째 은신처였던 성북구 안암동의 피해자는 탄원서에 ‘죄송하다고 몇 차례 말했고, 식구들에게 구타하거나 욕설하지 않았으며 처녀인 나를 절대 안정시키려 했다’며 ‘가장 안쓰럽게 느꼈던 것은 아버지와 술을 들면서 후회의 빛을 보이며 울었던 것이었다’고 썼다. 두 번째 은신처인 성동구 행당동 피해자가 쓴 탄원서의 일부는 이랬다.

    자기네가 떠나면 곧 신고하라고 하였으며 저의 남동생한테 공부 열심히 하고 자기네처럼 되지 말라는 말도 빼놓지 않고, 아울러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발길을 돌리었습니다. 이들이 가고 난 후 솔직히 우리 네 식구 모두 울었습니다. 죄는 미웠지만 사람은 미워할 수가 없었습니다.

    -1988년 12월 탄원인 박○○

    ▼ 피해자들의 증언이 도움이 됐나요.

    “검사가 탈주죄에 대해 15년을 구형했는데 7년이 선고됐어요. 행당동 아주머니가 증인으로 나와 증언이라기보다는 변론을 해줬어요. ‘강영일 저 친구 자수하려고 했는데 지강헌이 윽박질렀다’고 하도 얘기하니까 재판장이 중간에 끊으면서 ‘증인, 위증하면 처벌받는 거 아시죠?’ 했어요. 그러자 대뜸 ‘저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하셨어요. 그 말이 제겐 ‘저는 예수 믿는 사람이라 선한 거짓말을 하고 싶습니다’라고 들렸어요. 정말 고마웠어요.”

    ▼ 자수하려 했던 게 아니었나요.

    “아니죠. 그저 실패하면 죽는 거라고만 각오했지, 자수는 생각조차 안 했어요.”

    유전무죄 무전유죄

    강 씨의 회고에 따르면 1988년 당시 2심을 앞둔 미결수들을 모아놓은 영등포교도소에는 장기수가 많았다고 한다. 대부분 20대 초반의 젊은이들이었다. 공사장 하루 일당이 8000원이던 그때, 젊은이들은 유흥비를 벌 목적으로 절도나 강도짓을 했고, 그렇게 붙잡혀 와 10~15년형에서 많게는 무기형을 받았다. 전두환에서 노태우로 정권이 넘어가던 시기, 온 사회가 민주화 열기로 들끓던 때라 정부는 불법집회와 범법행위를 엄단하겠다고 천명한 상황이었다. 강 씨는 “운동시간에 모이기만 하면 ‘청춘을 이 안에서 보내야 하다니…’ 하며 교도소 담만 쳐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자연스럽게 ‘야, 우리 도망 안 갈래?’ 하는 얘기가 나왔다”고 했다.

    강 씨는 7건의 강도를 저지른 혐의로 1심에서 15년형, 2심에서 12년형을 선고받았다. 한의철, 안광술은 친구이자 공범이었고, 그보다 14살 위인 지강헌은 구치소에서 안광술로부터 소개받았다. 강 씨는 “구치소에서 교도관들 이발해주러 나가곤 했는데, 그때마다 강헌이 형이 ‘어이 아우, 꼬바리(담배꽁초를 뜻하는 은어) 좀 갖다줘’하고 부탁하곤 했다”고 회상했다.

    ▼ 형기에 불만이 있었다고요.

    “구치소에서 잠실 살던 형과 같이 있었는데, 2000만 원을 주고 변호사를 사서 집행유예로 풀려나는 걸 봤어요. 1심에서 무기형을 받고도 짱짱한 변호사를 써서 형기가 5~7년으로 줄어드는 것도 봤고요. 당시엔 약속한 만큼 형기를 줄여주면 돈을 더 받는 ‘조건부 변호사’가 있었어요. 주로 검사, 판사 그만두고 개업한 지 얼마 안 된 변호사들이었죠. 그런 걸 보고 울화가 치밀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비겁한 변명이지만….”

    지강헌이 경찰과 대치 중에 ‘유전무죄 무전유죄(有錢無罪 無錢有罪)’를 외쳤다고 알려졌지만, 사실 이 말은 이들 일당의 슬로건 같은 것이었다.

    “구치소에 같이 있던 어떤 형이 돈 있고 빽 있는 자들에게 기우는 사회 풍조에 대해 열을 올리며 얘기하곤 했어요. 그러면서 ‘유전무죄 무전유죄다’라고 하는데, 바로 이거다 싶었어요. 저도 정말 ×같다며 불만이 많았는데, 간단하게 8글자로 압축해주니까 마음에 깊게 와닿았어요.”

    이 표현은 그가 탈주 중에 동생에게 보낸 편지에도 나온다. 그는 ‘나는 법에 대해 큰 불만을 품고 있단다. 무식해서 한자는 잘 모르지만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우리나라 법에 큰 불만을 품고 있단다. ○○야, 방송에서 떠드는 만큼 우리는 흉악범이 아니란다…’라고 썼다. 7~15년에 걸쳐 있던 이들 일당의 형량은 당시 수십억 원 횡령 혐의로 7년형을 받은, 전두환 전 대통령의 동생인 전경환 새마을운동 중앙본부회장과 자주 비교되곤 했다. 지강헌도 마지막 순간에 “돈 없고 권력 없이 못 사는 게 이 사회다. 전경환 형량이 나보다 적은 것은 말이 안 된다. 이제 살기에 지쳤다”고 외쳤다.

    ▼ 전경환 씨와 비교해 억울한 마음이 있었나요.

    “북가좌동에서 경찰과 대치할 때 기자들이 경찰 몰래 담 너머에 숨어 이거저거 물어봤어요. 제가 ‘나는 칼을 들었을 뿐이고 그는 권력을 들었을 뿐인데 뭐가 차이냐’고 했더니 기자들이 ‘그래도 강도가 더 나쁜 거 아니냐’고 하더라고요. 내가 아마 ‘꺼져!’ 하고 욕했을 거예요.”(웃음)

    ▼ 사람을 해친 적은 없다고요.

    “책을 봤는데, 사람을 찔러 피를 보면 확 돈다고 해요. 찔린 사람은 살려고 소리 지르고, 찌른 사람은 조용히 하라고 계속 찌르고…. 그래서 죄를 저지를 때도, 도망 다닐 때도 항상 친구들에게 ‘칼을 왼손에 들고 오른손으로 때려라. 절대 칼을 쓰지 말라’고 했어요.”

    소년원에서 배운 게 어때서?

    “유전무죄 무전유죄? 지금도 그렇죠, 장발장처럼…”

    26년 전 사건 현장이었던 서울 서대문구 북가좌동의 가정집. 지금은 지방 교도관 자녀들의 기숙사로 활용되고 있다.

    강 씨는 19년 긴 세월 동안 공책 3권 분량의 수기를 썼다. 탈주사건에서부터 유년시절까지 기억나는 대로 상세하게 기술했다. 수기를 쓰게 된 동기에 대해 그는 “1988년 검거된 뒤 서울구치소 독방에 갇혔는데, 거기서 독방 동기로 만난 출판사 푸른숲 사장(현 강태형 문학동네 대표)이 써보라고 권했다”고 했다.

    “그분이 ‘글재주 없어도 대화한 건 대화대로, 생각한 건 생각대로 쓰라’고 하셨어요. 두어 페이지 써서 그분 방으로 올려 보냈더니 좋다고, 이 정도면 된다고 해서 쓰게 됐습니다.”

    수기에 따르면 강 씨는 서울 안암동에서 4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가 10세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가세는 더욱 기울었다. 어머니는 포장마차를 하며 자식들 뒷바라지를 했고, 강 씨는 중학교 1학년 때 자퇴하고 양말공장에 들어갔다. 학교 다닐 땐 어머니가 쥐여준 50원으로 하루를 버텨야 했다. 빵 하나 살 돈으로 배부를 리 없었다. 시장에서 사과나 배를 한두 알씩 훔쳐 먹었고, 그러다 걸리면 꿀밤을 맞았다. 그는 “못된 짓이란 건 알았지만 범죄란 생각은 못했다”며 “그렇게 살다보니 나도 모르게 범죄에 내성을 갖게 된 게 아닐까 싶다”고 했다.

    친구들과 패싸움한 일로 법원에서 계속 출두하라는 고지서를 보내왔지만, 어머니는 포장마차 때문에 벌금 내라는 고지서와 함께 찢어버리곤 했다. 어느 날 끌려간 경찰서에서 ‘그간 잘못한 일을 다 쓰라’는 형사의 윽박지름에 과일 훔친 일, 공중전화 동전을 턴 일 등을 써냈다. 거기에 법원 출두 기피 건이 나와 처음 구속됐다. 14세 때다. 가정법원에 가위탁돼 있다가 4개월 후 나왔다. 더는 양말공장에서 일할 수 없었다. 이후 절도와 강도로 소년원과 교도소에 한 번씩 다녀왔다.

    ▼ 제대로 직장을 다녀본 적 있나요.

    “1987년 8월에 8·15 특사로 가석방되고 장안동 퇴폐이발소에 취직했어요. 인천소년교도소에서 이용기술을 배웠거든요. ‘오토코’라고, 일본 헤어패션지 보면서 연습해서 포마드 기름 바르는 각진 머리도 할 줄 알았고, 기름 없이 손 드라이도 할 줄 알았어요. 일당을 1만8000원 받기로 했어요. 근데 거기서 일하는 아가씨가 인천 어디에 있었냐고 꼬치꼬치 캐묻길래 ‘징역에서 배웠다’고 말해버렸어요. 다음 날 주인이 일당을 1만2000원으로 깎자고 하더라고요. 기술을 어디서 배웠는지가 중요합니까? 어릴 때니까 빈정 상해서 그만두겠다고 했어요. 그 뒤론 직장 구하기가 꺼려지더라고요. 전과자라고 얘기해야 하나? 그럼 돈 적게 받을 텐데? 성질도 나고 고민도 되고…. 그러다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진 무렵 친구들이 한 건 하자고. ‘1인당 1000만 원 떨어진다’는 말에 흔들렸습니다.”

    첫 강도에선 30만 원, 두 번째엔 70만 원씩 벌며(?) 유흥비도 쓰고 어머니에게 일해서 벌었다고 속이며 돈도 갖다드렸다. 돈 떨어지면 다시 칼을 들고 가정집을 털었다. 그러다 친구들과 함께 검거됐다. 총 7건, 피해액은 1000만 원가량이었다고 한다.

    “한번은 수유리 집을 터는데 통장에 200여만 원밖에 없었어요. ‘집이 이렇게 좋은데 돈이 이거밖에 없어요?’ 하니까 아주머니가 ‘이 돈 모으려면 얼마나 걸리는 줄 아세요? 5년 모은 거예요’ 그러더라고요. 가만 생각해보니 그 말이 맞아요. 당시 보통 월급이 30만 원이니까 생활비 쓰고 매달 5만~10만 원씩 저금한다면 그 정도 모이는 거죠.”

    이재오 의원과의 인연

    “유전무죄 무전유죄? 지금도 그렇죠, 장발장처럼…”

    지강헌 일당 탈주사건이 종료된 다음 날인 1988년 10월 17일자 동아일보 지면.

    강 씨는 탈주 후 붙잡혀 서울구치소에 수감됐을 때 이재오 새누리당 의원을 만나게 됐고, 허인회 전 열린우리당 청년위원회 위원장 등 운동권 학생들과 인연을 맺기도 했다.

    “구치소에 데모하다 잡혀온 운동권 학생이 많았어요. 이들이 저를 보고 놀라는 거예요. 우리 사건이 국가가 작업한 가짜로 알았대요. 당시 신문에 5공 비리가 1면에 뜨다가 이게 뒤로 가고 우리 사건이 1면을 차지하니까 운동권에선 국가 공작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 이재오 의원이 옆방에 있었다고요.

    “제가 수갑을 채워 허리에 묶어두는 혁수갑을 차고 있었어요. 1주일에 한 번 목욕할 때만 열어줘서 변 누고 닦는 것도 힘들고, 등이 가려우면 바닥에 누워 뭉개댔어요. 학생들과 친해지다보니 저한테 인권변호사 붙여주겠다고 했어요. 3개월 후에야 일반 수갑보다 무거운 자석수갑을 차게 됐어요. 제가 이걸 풀어달라고 난동을 부려서 교도소에서 기물파손으로 추가 송치하려고 할 때 이재오 선생이 중재에 나서 징벌만 받게끔 해주셨어요. 저한테 상당히 고마운 분이세요.”

    ▼ 19년 동안 어떻게 지냈습니까.

    “서울구치소를 시작으로 순천, 광주, 대전, 대구, 안양교도소를 거쳤어요. 순천교도소선 검정고시를 보려면 광주교도소로 가야 하는데, 탈주 전력이 있는 저를 보내줄 수 없다고 해서 광주교도소로 옮긴 뒤에야 검정고시로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마쳤어요. 2006년 영화 ‘홀리데이’가 개봉되고 좀 힘들었죠. 교도소를 너무 비하해서 그 영향이 있었거든요. 모범수라 교도관 입회 없이 30분씩 면회할 수 있었던 것도 취소되고 직계가족 이외에는 면회가 금지됐어요. 그러다 2007년 6월에 출소했어요.

    종교생활 하며 마음 편해지는 장기수들을 보고 기독교 예배에 참석하기 시작했어요. 그러다 어느 목사님과 인연이 되어 그 부부가 저의 수양부모님이 되어주셨어요. 자주 면회 오시고, 영치금도 넣어주시고, 편지 보내주시고…. 많이 신경 써주셨어요. 그분들 덕분에 내가 선한 사람까진 아니더라도 인성을 갖춰야겠다고 다짐했죠. 젊을 땐 욕쟁이였는데 서른 되면서 욕을 안 쓰는 거 같아요. 어릴 적 친구들 만나면 ‘이 자식 저 자식’ 하는 정도죠(웃음).”

    ▼ 얼마 전 한일직업전문학교에서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특강을 했습니다.

    “솔직히 그런 자리에 나올 자격은 없지만, 잘못된 길을 걸은 사람이 ‘이렇게 되지 말라’고 하면 특히 비행청소년들에겐 도움 되지 않을까 싶어요. 앞으로도 기회가 된다면 문제 청소년들을 상대로 조언해주고 싶어요.”

    그는 이와 함께 장기수나 사형수에게 편지를 쓰고 그들의 자녀를 돌봐주는 일을 하고 싶다고 했다.

    “서울구치소 있을 때 친한 사형수가 있었어요. 그분의 형 집행이 있던 날, 교도관이 ‘죽겠다’고 하더라고요. 할머니 손잡고 온 일고여덟 살쯤 된 여자애가 검은색 옷을 입은 사람마다 붙잡고는 ‘우리 아빠 살려달라’고 발을 동동거리며 매달렸대요. 그 얘기 들으니까 미치겠더라고요. 사형수나 무기수의 자녀들은 자기가 죄 지은 것도 아닌데 엄청난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요. 이 친구들이 탈선하기가 정말 쉽거든요. 가난이 대물림되듯 범죄도 대물림되지 말란 법이 없잖아요. 이들이 올바른 사회인으로 살아갈 수 있게 도와주고 싶어요.”

    ▼ 얼마 전 대통령 특별사면이 있었죠.

    “과거와 별반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인간적으로 보자면 자신과 가까운 사람들이니 제가 권력을 갖고 있다면 저 또한 그럴 수 있겠지요. 하지만 그 외의 사람들도 생각해줬으면 해요. 생활사범들도 사면해준다든지, 장기수형자 중에서 갱생한 사람들에게는 기회를 줘야 하는 거 아닌가….

    제가 스크랩해놓은 기사가 있는데, 미국 어떤 주에서는 대기업이 교도소에 투자했대요. 자기 돈으로 교화 프로그램을 운영해서 재범률이 낮아지면 이득을 가져가고, 그렇지 않으면 투자금을 회수하지 못한대요. 김대중 전 대통령도 자기가 그 안에 있어보니까 10년 이상 가둬놓는 건 무의미하다고 하셨거든요. 교화 프로그램에 대해 너무 신경 안 쓰는 거 아닌가, 전과자에 대한 배려가 너무 없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요. 유전무죄 무전유죄는 지금도 마찬가지죠. 없는 사람은 한번 낙오하면 다시 일어서기 힘들어요. 장발장처럼. 갱생 의지가 있는 이들이 자활할 수 있게 도와줬으면 좋겠어요.”

    평범한 삶에 대한 동경

    지강헌은 봉고차를 구하러 나갔다가 다시 집 안으로 들어오려는 강 씨를 향해 총을 한 발 쏘았다. 그 때문에 그는 안에 들어가지 못했고 이렇게 살아남았다. 강 씨는 “충분히 맞힐 수 있을 정도로 매우 가까운 거리였다”며 “나중에 강헌이 형이 ‘너는 살아라’고 했다고 전해 들었다”고 회상했다.

    ▼ 어떤 때 살아 있음에 감사하나요.

    “명절 때 고향에 내려간 저를 가족친지들이 따뜻하게 반겨줄 때, 우와 이게 바로 가족이구나,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나를 흉악범이라 해도 가족은 이런 거구나, 싶을 때요. 그런 거 느껴본 적 있어요? 따뜻한 바람이 후욱 불어와서 마음이 부웅 뜨는 것 같은 기분. 그런 거 있잖아요. 가슴이 두근두근하면서 마음이 진짜 훈훈해지는…. 전에는 죽지 못한 걸 원망했어요. 죽을 방법을 찾으려고도 했어요. 지금은 친구들에게 미안한 게 제일 커요. 50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할 수 있는 게 많고, 즐길 수도 있고, 봉사할 기회도 있는데, 그때는 어려서 몰랐어요. 많이 아쉽고 후회스러워요.”

    인생시계를 돌릴 수 있다면 언제로 되돌아가고 싶으냐고 물었다. 그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아…진짜요?”라며 회한이 담긴 듯한 쓴웃음을 지었다.

    “학창 시절이 너무 힘들어서 다시 가기 싫은데…. 그때를 빼놓으면 교도소만 왔다갔다 했네요(웃음). 초등학교 때로 다시 돌아가고 싶죠. 애들 때리고 놀러 다니는 거 말고, 공부 좀 해서 평범하게 사는 거…. 평범한 분들은 자기 생활이 힘들다고 해요. 결혼하셨어요? 아이 키우면서 직장 다니는 거 힘들죠? 근데 안에 있는 사람들은요, 그 평범한 삶, 짜증내고 싸우고 다시 웃고 하는 사람들을 가장 동경해요. 잘살아서 삐까번쩍 흥청망청하는 사람보다 훨씬 부러워요. 그게 가장 행복한 삶인 거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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