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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 ‘정치독점’ 붕괴시킨 시민의 힘

50년 ‘정치독점’ 붕괴시킨 시민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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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공천반대운동 과정에 시민운동과 시민사회의 광범한 시민들이 결합하는 것을 이해하려면 절차적 민주주의와 실질적 민주주의 간의 다이내믹스를 보는 눈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이번 운동은, 부패하지 않고 민주적 법규와 규범을 실천하고 준수하느냐 하는 민주주의의 절차적 규범에 초점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절차적 민주주의의 문제를 중심으로 한 것이다.

즉, 시민들이 생각하는 민주주의의 규범과 국민의 대표들이 실제로 실천하는 민주주의의 규범을 어떻게 일치시킬 수 있는가, 그리고 어떻게 공정한 경쟁이 가능한 정치시장을 형성함으로써 시민사회에 대한 정치사회의 대표성을 확대할 것인가, 또한 어떻게 시민들의 정치참여를 확대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중심이었으므로, 민주주의의 절차성 문제를 핵심과제로 제기한 것이다.

역사적으로 한국민의 도덕성에 대한 의식은 주로 절차적 정의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이 도덕성에 대한 예민함은 한국 정치문화의 핵심 요소를 이룬다. 4·19, 그리고 6월항쟁과 같이 한국사의 중요한 대사건과 민주화운동은 모두 이러한 절차적 민주주의를 핵심으로 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 문제가 중심이슈로 등장할 때는 시민사회에서 광범한 호응을 얻기가 쉬웠다. 정치문화와 시민의 정치의식에 있어서 절차적 민주주의는 움직일 수 없는 규범으로서 확실히 정립되어 있는 것이다.

다른 한편, 공천반대운동은 기본적으로 절차적 규범을 중심으로 한 것이지만, 동시에 구조적이고 실질적인 측면을 포괄하고 있다. 무엇보다 운동의 핵심을 이루는 것은 사회전반에 대한 개혁적 요구다. 그것은 민주주의를 위한 절차적 개혁뿐만 아니라, 정치개혁, 재벌개혁, 행정개혁, 금융개혁, 노동개혁, 복지개혁 그리고 환경, 교육, 문화 모든 부문에서 민주화, 탈냉전, 세계화에 대응할 수 있는 정치적, 사회적 개혁의 요구인 것이다.

따라서 운동이 요구하는 대상은 단지 정치사회의 정당과 정치엘리트를 향한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개혁을 추진하여 실질적 민주주의를 진전할 책임을 위임받은 정부를 향한 것이기도 하다. 요컨대 이는 한국사회의 기득권 엘리트층에 반하는 도전이며 요구라고 하겠다.



표면적으로 공천반대운동은 과거에 볼 수 있었던 정치적인 운동이며 전형적인 민주화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이번 운동은 과거의 시민운동과는 질적으로 상이한 요소를 포함하면서 이를 뛰어넘는 새로운 시민운동의 시발로 이해할 수 있다.

앞에서 공천반대운동의 중심 지지층이 민주화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지지하였던 젊은 세대라고 말한 바 있다. 이들 세대는 계급, 부문, 전문직업 등의 기능적 이익범주 집단이 아니라 민주화운동의 역사적 경험을 공유하는 집단이다. 이들은 교육을 통해 머리로만 민주적 가치와 규범을 배운 것이 아니라 체험 속에서 민주주의를 내면화한 집단이다.

하지만 그들의 사회생활은 다양한 직업 속에서 원자화, 다원화되었고 그들의 삶의 양식은 세계화 시대의 삶의 양식으로 변모되었다. 이런 조건에서 누가 어떤 메커니즘을 통하여 이들을 공통의 정치적 대의와 가치로 묶을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인터넷을 통한 사이버 공간이다. 정치사회는 정당과 정치엘리트집단에게, 그리고 지배적 담론을 생산하고 전파하는 거대 언론매체에게 선점되어 있으며, 시민사회 역시 기득권층에 의해 정치적 표출이 매우 어려운 조건이라 할 때, 사이버 공간은 그에 진입하는 어떠한 문턱도 존재하지 않는, 따라서 어떠한 헤게모니적인 담론도 지배적 영향을 끼치기 어려운 자유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사이버 공간과 ‘문화이동’

더욱이 사이버 공간은 담론의 생산과 정보의 습득이 일국의 국경 내에 한정된 협애한 것이 아니라 공간적으로 국경을 뛰어넘는 실로 광역의 존재인 것이다. 세계화는 경쟁적 세계시장의 효율성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신자유주의의 확산으로 상징되어 왔으며, 이로 인해 시민사회와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세계화는 민주주의의 원리와 충돌하는 부정적인 것으로 인식되는 경향이 있었다. 그것은 실제로 사실이라 하겠다.

그러나 통신기술의 발전을 수반하는 세계화는 그것이 가져오는 비민주적 또는 반민주적 요소에 대응할 수 있는 새로운 요소를 포함하기도 한다.

세계화는 두 가지 점에서 민주주의의 가치와 규범과 친화성을 갖는다. 하나는 수단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내용적인 것이다. 수단적인 것은 새로운 방식으로 민주주의를 위한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사이버 공간을 제공하며, 내용적인 것은 세계적으로 보편적인 민주주의의 가치와 규범이 이들 세대들이 갖고 있는 민주화운동의 한국적 경험과 친화성을 갖는다는 것이다.

요컨대 공천반대운동은 세계화의 충격을 양면으로 흡인한, 즉 인터넷이라고 하는 통신기술상의 혁명과 민주주의 가치의 보편성을 흡인한, 80년대에 민주화를 경험한 한국의 젊은 세대들에 의해 만들어진 매우 새로운 형태의 시민운동이라는 성격을 갖는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공천반대운동의 중심세력이 80년대에 민주화운동을 주도한 세대라고 할 때 이들이 새로운 기성세대로 자리잡으면서 우리 사회에는 일종의 ‘문화이동’이 진행되고 있다. 젊은 세대, 특히 80년대 민주화를 경험한 세대들은 앞선 세대들과는 엄청나게 다른 삶의 경험을 갖고 있다. 더욱이 이념적 스펙트럼 위에서 상이한 변화의 경로를 제시할 채널이 존재하지 않는 한국적 조건에서 세대의 중요성은 더욱 크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들 세대가 개혁적, 진보적 정당이 수행해야 할 일을 대리수행해야 할 경우가 많다. 그들은 분명 민주화를 중심에서 경험한 세대들로 위계적 질서와 권위주의를 생래적으로 수용할 수 없으며, 세계화와 과학기술에 능동적으로 적응하며, 이데올로기적으로 열린 세대이다.

이들이 주도하는 공천반대운동이 집권당에 비해 자민련과 야당에 더 비판적이라는 사실이, 시민운동에 대한 비판자들이 말하듯이 시민운동과 현 정권 사이에 어떤 ‘음모적인’ 거래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진 않는다.

현 집권세력이 권위주의하에서 장기간 권력으로부터 소외되었던 호남지역에 기반을 두면서 군부 권위주의세력과 투쟁했던 사실로 인하여 정치사회의 기득권층보다 덜 부패하고 개혁적일 수 있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현 정부와 민주화세력은 상대적인 친화성을 가질 수 있었던 게 사실이다.

사실 이들 젊은 민주화 세대의 강렬한 변화에 대한 욕구가 97년 현정부의 집권을 가져온 정권교체를 가능하게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 양자의 친화성이나 시민사회 민주화세력의 정부에 대한 지지는 정부가 개혁적이라는 조건 아래서 유지될 수 있을 뿐이다. 그들은, 정치엘리트가 그들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함은 물론 현정부 역시 그들의 요구를 충분히 대변해 주지 못한고 믿기 때문에 시민운동에 지지를 보내주고 있는 것이다.

시민운동의 민주개혁과정에 대한 개입은, 민주개혁의 지체라는 한국적 상황의 산물 못지않게, 민주주의라는 정치체제에 내장된 한계와 모순 때문에 필요하다는 점에도 주목해야 한다.

현대 민주주의는, 주권자인 국민이 스스로를 대표하지 못하고 선거에 의해 선출된 대리인을 통하여 자신을 대표할 수밖에 없는 대의제 민주주의라는 사실은 두루 아는 바다. 이러한 주인-대리인 관계는 자칫 현실 정치에서 주인-대리인 역할의 전도라는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 즉, 개인으로서의 정치가, 조직으로서의 정당이 주권자인 시민을 대표하고 공적 기능을 수행하는 민주적 헌법기관으로서의 역할보다는 정치사회에서 또 다른 사적 기관, 또는 스스로를 대표하는 정치계급으로 나타나는 현상이 그것이다.

이러한 역할전도현상이 심화될 경우 대의제 민주주의는 형해화할 수밖에 없다. 정치사회가 제 구실을 다하지 못할 때, 주권자로서의 시민사회는 대표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 정치엘리트에게 그 책임을 요구, 추궁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점에서 대의제 민주주의에 내재한 딜레마와 우리 사회에서 대표의 실패가 가져온 민주정치의 위기상황을 타개하는 데 시민사회의 기여는 크다고 하겠다.

‘결사체적 민주주의’라는 대안

나아가 이번 공천반대운동은 민주주의의 공고화 과정에서 미진한 국가의 개혁적 역할을 보완하는 의미를 지닌다. 한국의 민주화는 일차적으로 아래로부터 시민사회의 힘을 통하여 이행의 실마리를 열고 추동되었지만 위로부터의 민주화를 통하여 제도화되었다. 이는 사회의 여러 부문에서 구체제와의 연속성을 크게 유지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정치사회와 마찬가지로 국가기구 또한 구체제와 커다란 연속성을 갖는다. 민주화 이후 두 민선정부인 김영삼 정부와 김대중 정부는 공통의 문제점을 안고 있다. 한편으로 그들은 보수세력과 연합하지 않는 한 안정적 정부를 구성할 수 없었던 외적 제약을 가지며, 다른 한편으로는 인적 자원과 국정운영의 노하우를 갖지 못함으로써 개혁추진에 한계를 드러내는 내적 제약을 안고 있는 것이다. 총선시민연대의 운동 대상이 된 정치개혁은 일차적으로 정부의 개혁의제 위에 있었다. 정치개혁의 실패는 정부의 정치 개혁의 실패와 정치사회의 개혁거부의 결합이 빚어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번 총선시민연대의 운동은 정부가 할 수 없었고, 또 하지 않았던 개혁실패에 대한 책임을 묻고 이를 대신 수행하는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정부가 홀로 민주개혁을 성취하기 어려운 구조적 제약이 존재한다. 민주화는 국가부문과 정치사회부문뿐만 아니라 전사회적 과정이며, 다층적 과정이기 때문이다. 헌법, 대의제도, 그리고 주요 정책을 민주적으로 전환하고 사람을 바꾸는 것만으로 민주주의가 공고화하는 것은 아니다. 공적 기구를 위임받은 사람들의 가치, 태도, 행태가 민주적으로 바뀌어야 하고, 또한 사적 부문과 대중들의 가치정향과 행위규범 역시 민주적으로 바뀌지 않으면 안 된다.

이와 같이 제도, 사람, 의식 등에 걸친 광범한 개혁과제를 국가만이 할 수는 없다. 민주화는 사회 전체의 분자적 과정이므로 시민사회가 이 과정에 참여하지 않는 한 민주화는 불가능하다. 이는, 한국 사회가 시민사회가 되지 않는 한 우리 사회에서 민주주의를 실현하기는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

총선시민연대 운동의 가장 큰 의미는, 시민 스스로 민주주의의 가치를 실천하고 정치의식을 가지며 정치참여의 중요성을 인식하도록 일깨우고, 이를 통해 한국사회를 시민사회화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사실상 민주주의를 공고화하고 민주주의의 질을 향상하는 데 시민사회의 역할은 결정적이다.

앞에서도 민주주의의 딜레마를 말했지만, 국가-정치사회는 시민사회로부터 일정한 자율성을 획득하면서 엘리트 카르텔을 형성하고 스스로의 제도적 이익을 추구하기 쉽다. 그러므로 이들 구조 내에서 행위하는 엘리트들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외부로부터 주인-대리인 문제를 해소할 힘이 작용하지 않으면 안 되며, 그 힘은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 있어서 시민사회로부터 나오지 않으면 안 된다.

필자는 여기에서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시민운동의 역할정립을 위한 한 가지 방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그것은 ‘결사체적 민주주의(associative demo-cracy)’를 발전시키는 일이다. 이를 위해서는 계층, 부문, 전문직종 등의 각 범주에서 활동하는 사적 특수이익집단에 공익적 역할을 부여하는 일이 필요하다.

하나의 사적 이익결사체는 비(非)국가 조직이지만 조직 가맹원들의 이익을 독점적으로 대변하고 그들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재화와 서비스 또는 지위를 제공함으로써 조직원들의 행위에 영향을 끼치고 이를 통제할 수 있다. 이 구조하에서 국가는 이러한 조직행위를 인가하거나 보조금을 주는 유인책을 사용함으로써 사적 결사체들에게 어떤 공적 기준을 부과하며 공익적 기능과 책임을 행하도록 유도할 수 있다. 즉 자율규제기능을 갖는 결사체에 국가의 공익적 기능과 역할을 이양함으로써 국가에 집중되는 공적 이익과 관련된 역할과 책임의 하중을 줄여 이를 하향분산하는 일이 가능한 것이다.

제2의 시민

필립 슈미터와 같은 정치학자는 사적 이익결사체가 사적 이익을 추구하되 스스로를 규율하면서 공적 기능을 갖도록 한다는 의미에서 이를 ‘사적 이익정부’라고 정의하기도 한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그가 제시하는 한 가지 구체적인 방안은 ‘제2의 시민(secondary citizens 또는 organizational citizens)’ 개념과 이로부터 이끌어내는 결사체 육성을 위한 ‘바우처(voucher)’제도다.

이는 국가가 국민의 세금으로 정당의 건전운영과 발전을 위해 보조금을 지급하는 원리를 이익집단의 발전을 위해 적용하는 것이다. 먼저, 이익집단발전법 같은 것을 통해 국민들이 약간의 세금을 내도록 하여 발전기금을 설립하고, 시민 개개인에게는 일정한 기간동안 사적 결사체를 지원할 수 있도록 일정수의 바우처를 발급한다. 그리고 시민들은 그들의 대의에 일치하거나 이익을 대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운동단체나 이익단체를 선정해서 바우처를 기부하며, 정부는 그들 단체에게 바우처 수에 따라 기금을 배분하는 것이다.

반면, 단체들은 이러한 공적 기금을 받는 대가로 정부(법)가 부여하는 제한들, 즉 단체장의 민주적 선정, 재정의 투명성, 비영리행위 등과 같은 요구조건을 수용해야 한다. 이러한 제약을 원치 않는 단체는 기금을 받지 않으면 된다.

제1의 시민이라는 말은 없지만, 시민 개개인에게 부여되는 투표권은 제1의 시민권을 뜻할 것이다. 투표권의 확대와 더불어 국가나 정치사회의 수준에서 민주주의가 발전해왔듯이, 시민사회의 수준에서 개개시민이 그들의 이익, 요구, 대의를 대변할 수 있는 자율적 집단을 조직하거나 지원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는 것은 시민권의 확대라고 할 수 있으며, 우리는 그 주체를 일컬어 제2의 시민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 공적 기능을 갖는 사적 이익집단은 시민의식과 민주교육의 산 교육장이 될 것이다.

그 동안 개혁을 말할 때 그것은 주로 선거법, 정당, 국회기능, 행정개혁과 같은 구체적인 정치제도나 국가기구를 그 대상으로 하거나 재벌, 금융제도, 공공부문 개혁과 같은 시장원리에 기반한 경제개혁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사적 결사체가 민주발전에 기여할 수 있도록 틀을 마련하는 일은 미래의 정치적, 사회적 개혁의 중심 주제가 될 것이다.

신동아 2000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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