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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남 전태일을 생각하니 부끄러웠다”

“처남 전태일을 생각하니 부끄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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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흐를수록 ‘이것이 아닌데, 내가 왜 이러나…’ ‘옳지 않은 길이라면 빨리 바른 길을 선택해야 한다’는 내심의 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너무도 사랑하는 몇몇 정치신인들이 공천 정보를 얻으려고 실세 비서들과 친해지려 애쓰거나 유력자들을 찾아다니는 모습을 보며 안타까움을 느낀 나는 그 속에서 다름 아닌 ‘나 자신’을 보았다. 나는 자신에 대해 좀더 솔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나는 과연 개혁세력답게 정치를 하고 있는가.”

“이렇게 위를 보는 정치를 한다면 기성 정치인들과 달라질 게 있을까?”

스스로를 돌아볼 때 깊은 회의가 생겼다. 어느새 기성 정치가의 관행을 따르는 나를 발견하고 놀란 것이다. 내가 정치에 뛰어든 목표는 당초 공천권을 얻어 국회의원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민주화를 위해 목숨까지도 바치겠다고 결심했던 청년시절의 심정으로, 허위로 둘러싼 껍질을 깨고 참 민주주의자로 다시 태어나리라 다짐했다.



당내 민주주의를 위해 정치신인 몇 사람과 이 문제를 함께 고민하고 해결방안을 찾으려 했으나 잘 풀리지 않았다. ‘젊은 피’로 불리는 분들도 경선이라는 민주적 제도의 정착보다는 ‘인물 교체’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자칫 경선이 인물교체 분위기를 제약하는 요소가 될 수 있다는 견해도 있었다. 나도 그런 의견에 부분적으로 공감했으나 민주주의의 기본원칙에 충실한다면 결론은 달라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경선제도가 정착되지 않고 밀실공천이 계속되는 한 현재의 잘못된 정치구조는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이며, 결국 ‘새 인물’도 기성정치가가 되고 말것이다. 이런 악순환을 깨지 않는 한 한국정치의 미래는 없다는 생각이다.

다가오는 불법 타락선거의 유혹

오염된 과거 선거판의 잔영은 나에게도 예외없이 다가왔다. 나를 진심으로 도우려는 분들조차 때로는 결정적인 실수를 저지르곤 했다. 가장 당황스러운 것은 식당에 사람들을 모을 테니 와서 저녁을 사라는 것. 이미 다 모아놓고 연락이 왔을 때 그 황당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단호하게 거부하는 나와 승강이가 오가기도 했다.

“다 그렇게 하는데 혼자 이렇게 선거를 해서 어쩌자는 거야. 뭘 몰라도 한참 몰라서 …”

“저는 선거가 끝날 때까지 단 10원의 식사비도 지급하지 않을 겁니다. 대신에 사무실에서 점심을 해서 먹을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10표를 못 얻어도 좋으니 밥 사는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내가 직접 하지도 않은 약속이지만 펑크를 냈다는 비난을 감수해야 했다.

사랑방 좌담회의 유혹도 많았다.

밥값을 지급하기 시작하면 선거 때까지 그 돈만 4억~5억원이 든다는 얘기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조직활동에 탄력이 붙으면 활동하는 사람이 최소 100명은 될 것이다. 100명이 활동하면서 커피값과 밥값을 쓰기 시작하면 정상적으로 활동하는 사람의 최소 경비는 하루 10만원 이상이다. 10만원도 쓰지 않는 활동원이라면 그 활동에 문제가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단순계산으로 한달에 3억원이라는 경비가 나온다. 10만원×100명×30일=3억원. 여기에 가속도가 붙는다면 그 비용은 눈덩이처럼 불어날 것이다. 언론에 정치 신인들이 이미 몇억을 썼다는 얘기가 나오는데 그 기사들은 결코 틀린 게 아니다.

그래서 나는 아예 “활동비, 식대, 교통비를 일절 지급하지 않겠습니다. 이것은 원칙입니다”라고 선언했다.

지난 15대 선거경험을 바탕으로 방송인 서유석 선배가 들려준 충고도 이런 결정에 큰 도움이 됐다. “절대로 돈 쓰지 말라. 다 쓸데없는 일이니까. 임형의 원칙을 굳건히 지켜라.”

정치신인들의 활동을 완벽하게 차단하고 있는 현행 선거법의 문제점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현행 선거법은 기존 정치인들이 신인들을 들어오지 못하도록 통제하는 장벽 노릇을 하고 있다. 솔직히 그분들이 ‘의회민주주의자’인지 묻고 싶다.

정치신인의 어려움

무엇보다도 심각한 것은 명함 문제다. 현행 제도는 ‘현재의 직책’만 쓰도록 하고 있다. 내 경우 ‘녹색교통운동 사무총장’ ‘대통령 민정비서실 국장’의 약력을 넣어야 하는데 이것은 불법이란다. 결국 내 명함은 언뜻 보기에도 정치사기꾼 냄새를 풍기며 전혀 신뢰감이 없어 보인다.

신문 인터뷰 기사 몇 개를 복사해 사무실에 비치했다가 ‘선거법 위반’이라는 지적을 받았다.

구민회관에서 행사를 하려 해도 현역 의원은 되고, 신인은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 지역 현역 의원의 ‘의정보고서’에는 어째서 출신중학교까지 소개돼야 하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 의정보고에 왜 약력이 필요한 것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그 내용이란 의정보고와 거의 상관없는 ‘사실상의 선거용 홍보물’이다.

이렇게 말도 안되는 선거법을 그대로 두고 선거를 치르자는 의원님들의 인격 수준에 놀랄 뿐이다.

선진국에 비해 정치가 30년 뒤졌다느니, 40년 뒤졌다느니 하는 말도 있지만 미국에서도 예비선거제도가 정착할 때 나름대로 부작용이 있었고 그에 대한 반대의견도 많았다. 하지만 ‘보스 지배체제 종식’ ‘당내 민주주의 실현’이라는 더욱 중요한 대의가 중시되었다. 현재 우리의 공천제도는 미국에서 이미 100년 전에 폐기된 전근대적·비민주적 제도다.

나는 이제 ‘내가 공천을 받는 것이 이 나라의 정치개혁’이라는 생각을 버렸다. 오히려 ‘멋지고 공정한 예비선거를 통한 후보자의 결정(후보자 사이의 선의의 경쟁) 쮒 후보자를 중심으로 일치 단결하여 선거를 치름(패배자는 승리자를 도움) 쮒 선거 후에는 지역사회에서 정치인들의 성의 있는 활동 쮒 다음 예비선거’ 방식으로 정당활동이 정상화돼야 한다고 믿는다. 시간이 없다고들 한다. 문제점이 예상된다고도 한다. 하지만 시간이 없다고 옳지 않은 길을 갈 수는 없다. 구더기 무섭다고 장을 담그지 말자는 것은 교묘한 왜곡 아닌가.

출마의사를 밝힌 사람이 ‘타당한 절차나 과정’ 없이 당내 선거 등 최소한의 절차도 거치지 않고 위에서 결정한 공천자를 무조건 도우라고 하는 것은 ‘제도화된 폭력’이다. 그래서 탈당이나 무소속 출마가 나오고 이른바 철새 정치인이 양산되는 ‘정당정치의 왜곡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하향식 공천제도는 민주주의의 학교가 되어야 할 정당을 비민주적인 곳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향후 정치개혁의 핵심 고리는 ‘경선의 정착과 당내 민주주의의 실현’이라고 확신한다.

신동아 2000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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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삼진 전 청와대 민정비서실 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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