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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끝 기사회생 ‘JP 정치’의 괴력

벼랑끝 기사회생 ‘JP 정치’의 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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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같은 JP의 상황인식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JP 측근들은 한결같이 94년 말부터 95년 초까지, 즉 JP가 민자당 대표직에서 사실상 ‘용도폐기’돼 탈당하고 자민련을 창당하던 시절을 연상시킨다. 요즘의 수상한 나날은 최형우(崔炯佑) 의원을 중심으로 한 민주계 인사들이 ‘당의 세계화’라는 명목 아래 JP를 축출하려던 당시 상황과 공교롭게도 맞아떨어지는 대목이 한두가지가 아니라는 것이다.

당시의 JP는 마치 시나리오에 의해 움직이는 듯한 민주계의 집요한 ‘목죄임’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면서도 무려 2개월여 동안 ‘분노’와 ‘침묵’을 번갈아 연출하다 결국 신당 창당을 결행했다. 평소 “어찌 연작(燕雀·제비와 참새)이 홍곡(鴻鵠·큰 기러기와 고니)의 큰 뜻을 알겠느냐”며 김영삼(金泳三) 대통령을 깎듯이 모셨던 JP지만 일단 자신의 정치적 생존 문제가 걸리자 과감하게 ‘저항’으로 살 길을 찾아냈다.

‘순응의 정치인’ ‘굴신의 정객’이었던 JP가 분연히 YS를 맹공격하면서 충청권을 기반으로 한 자민련을 만들어낸 것이다. 불과 5명의 현역의원으로 자민련을 창당한 JP는 95년 6·27 지방선거에서 충청권 3곳과 강원 등 모두 4곳의 광역자치단체장을 얻어냈고 96년 4·11총선에서는 충청권 석권에다 영남권 교두보 확보로 당당히 50석을 확보한 명실공히 ‘JP당’을 만들어냈다.

지금까지의 상황만을 보면 JP는 5년 전에 걸었던 길 그대로 답습하는 듯한 느낌이다. JP는 요즘 사석에서 측근들에게 “거기(청와대) 들어가서 몇 년 되면 다 그러는 모양이다”며 DJ를 YS와 같은 선상에서 비교한다고 한다.

그러나 JP는 2여관계의 본질적인 변화, 즉 공조 파기 여부에 대해선 애써 직접적인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 ‘2여공조는 끝났다’는 선언 없이 “두 당 사이에 상당한 괴리(乖離)가 생겼다”는 식의 어정쩡한 어법일 뿐이고, 시종 한걸음 뒤에 물러서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다만 ‘여차하면 가만있지 않겠다’는 태도로 이한동 총재와 김현욱(金顯煜) 사무총장 등 당의 전사(戰士)들에게 싸움을 맡기고 있다.



절대 앞에 나서지 않고 ‘2선’의 위치를 고수하고 있는 JP. 막후에서 전투를 독려하면서도 절대 앞으로 나서지 않으려는 JP의 태도. 이 때문에 민주당이나 청와대측은 2여공조가 사실상 붕괴됐음에도 “자민련의 ‘음모론’ 등 일련의 대응은 JP의 철저한 ‘총선전략’이며 JP는 절대 DJ와 갈라서지 않을 것”이라고 분석한다.

여권 관계자의 시각은 이렇다. “JP 입에서 무슨 음모니 커넥션이니 하는 얘기가 있었느냐면 그건 아니다. 또 JP가 공조 파기를 선언했느냐 하면 이것도 아니다. JP는 언제일지 모르지만 ‘U턴’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는 것이며 절대 그 가능성을 봉쇄할 사람도 아니다. JP의 U턴은 빠르면 총선 과정에서, 늦어진다면 총선 이후에 반드시 있을 것이다.”

DJP와 ‘이인제 딜레마’

이같은 분석은 꽤 설득력을 지닌다. DJP의 관계나 JP가 품고 있을 향후 정치적 계산을 냉정하게 고려해보면 더욱 그렇다. JP는 3김 중 한 사람이다. 그러나 마지막 남은 한 사람이다. 정치적 야심을 아직 실현해보지 못한…. 그러나 대통령은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충청도라는, 인구가 적은 지역 태생이라는 한계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택한 것이 내각제다. 그러나 내각제는 절대 다수라고 해서 일방적으로 되지 않는다. 여러 정파들 간의 합의 또는 최소한의 묵인이 이뤄져야 한다.

아무리 DJ에 대해 배신의 감정을 느낀다 할지라도 DJ가 약속 파기선언을 하지 않는 이상 JP로선 DJ를 계속 ‘과거의 약속’에 묶어둬야 한다. 계속 DJ쪽에 압력을 행사하면서도 절대 파경에는 이르지 않도록 ‘줄다리기’를 하는 것이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내각제 실현을 위해 중요한 것은 문서상의 약속이 아니라 정치지도자의 결단이라는 점을 누구보다 잘 아는 JP다. 이미 DJ는 내각제 개헌을 약속했고 지금껏 유효하다고 말해왔다. 또한 DJ 역시 임기말엔 내각제로 개헌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는 게 아직까지 JP쪽의 판단이다.

DJ 역시 마찬가지로 보인다. DJ가 내각제를 신당의 강령에서 배제했지만 이는 선거를 앞두고 표를 의식한 것일 뿐이며 약속은 분명하게 승계된다는 사실을 JP쪽에 확실히 전달하고 있다. 그동안 ‘거짓말쟁이’라는 평가에 시달려온 DJ다. 그는 “약속은 분명히 지킨다. 또 거짓말했다는 소리를 듣고 정치를 끝내고 싶지 않다”고 얘기해왔다. 더욱이 JP 없이는 버텨내기 힘든 ‘마이너리티 정권’이라는 점도 DJ의 어깨를 누르고 있는 어쩔 수 없는 정치적 현실이다.

이처럼 내각제 문제를 둘러싼 DJP 사이의 이해관계는 이번 총선을 계기로 충돌했다 총선 이후엔 다시 접점을 찾아나갈 가능성이 높다는 게 정치권의 일반적인 분석이다. 그러나 문제는 당장 총선이다. 총선에서 DJP가 충돌하는 지점에는 이른바 ‘이인제(李仁濟) 딜레마’ 등 수많은 문제들이 놓여 있다. 우선 민주당 이인제 선대위원장은 지난 대통령선거에서 500만표를 얻은 위력 이외에도 당내 차세대주자라는 상징성 자체가 보유한 득표력이 DJ에겐 포기하기 힘든 카드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JP에겐 충청권 출신인데다 내각제를 극력 반대하면서 대권만을 노리는 ‘아기호랑이’인 이위원장이 눈엣가시와도 같은 존재다.

이위원장에겐 DJ나 JP나 넘어서야 할 존재이고 먼저 상대해야 할 인물은 물론 JP라는 인식이다. 따라서 당장 이인제로 인한 양당의 파열음은 그치지 않을 것이고 이미 그 전조가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위원장의 논산 금산 출마선언은 당장 자민련에겐 전면전 선포로 들려 거센 반격에 나서고 있는 게 양당에 놓인 피할 수 없는 현실인 것이다.

행동보다 말로, 말보다 침묵으로

이번 총선은 DJ나 JP 모두에게 ‘마지막 도박’이다. 두 사람 모두 너무도 절실하게 느끼고 있고 서로의 처지를 이심전심으로 잘 알고 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너무 잘 알기에 총선 과정에서는 이런 상황을 내심 즐기면서 갈라서지도, 그렇다고 다시 가까워지지도 않는 적정한 긴장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물론 상황전개에 따라 두 사람은 완전히 갈라설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을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총선은 JP에겐 매우 중요한 ‘연기력의 시험대’일지 모른다. DJ의 집요한 구애를 때론 미소로, 때론 냉소로 적절하게 이끌어가면서 충청권에선 “JP가 변심했다”는 소리가 안나오게, 또다른 일각에선 “그래도 다시 한번…”이라는 소리가 나오도록 적절히 밀고당기는 정교한 ‘줄타기’ 수완을 발휘할 때인 것이다.

JP는 40년 정치역정에서 누구보다 끈질긴 생명력을 유지해왔다. 5·16의 ‘기획자’로서 화려하게 정치에 입문한 이래 JP는 잇딴 ‘자의반(自意半) 타의반(他意半) 외유’부터 두 차례의 정계은퇴, 87년 신민주공화당 창당, 3당 합당과 탈당,그리고 자민련 창당에 이르기까지 넘어지고 꼬꾸라진 뒤엔 반드시 더욱 강력한 기세로 재기하는 ‘부도옹(不倒翁)’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왔다.

이 과정에서 그의 탁월한 연기력은 큰 역할을 했다. 외부에 비치는 JP는 항상 운치있고 상황에 맞는 절묘한 말을 가려서 하는 ‘정치언어의 마술사’다. 직설법이라곤 절대 없다. 항상 누구를 겨냥한 것인지, 비난인지 비아냥인지 칭찬인지 알듯 모를 듯한 말을 하곤 입을 닫아버린다. 그러나 그의 몇마디에 함축된 의미를 찾기 위해 기자들과 정치권 호사가들은 이리저리 온갖 소설들을 다 만들어내곤 했다.

이런 절제된 언어미학은 JP의 천부적 재주인 듯하다. JP는 95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이른바 ‘핫바지’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핫바지라는 게 앞뒤가 없는 그런 바지를 말하는데 누군가 충청도를 두고 핫바지라고 했답디다. 충청도가 핫바지입니까? 그런 얘길 듣고 참을 수 있습니까.” 이처럼 JP는 당시 민자당 김윤환(金潤煥) 의원의 말이 왜곡돼서 지방지에 보도된 ‘핫바지’ 발언을 그대로 선거에 이용하는 탁월한 재주를 발휘했고 그 선거를 대단한 승리로 이끌었다.

그러나 가까이서 JP를 모시는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JP만큼 직설적이고 감정의 기복이 많은 사람도 없다고 한다. 70대 노인네라면 누구나 그렇겠지만 JP만큼 ‘변덕이 죽 끓듯’ 하는 사람도 드물다는 게 측근들의 얘기다. 워낙 즉흥적인 구석이 많아서 아침 기상과 저녁 기상이 수시로 바뀐다고도 한다. 하지만 대외적으론 항상 필요한 말 이외엔 나가선 안된다는 게 JP를 보필하는 측근들의 철칙이다. JP의 공보담당이 항상 아침마다 면박을 당하는 이유도 간혹 측근들이 흘린 자신의 말이 신문에 보도됐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보면 ‘행동보다는 말로, 말보다는 침묵으로 정치하는 JP 스타일’을 그대로 엿볼 수 있다.

모호하고 불투명한 ‘여백의 정치’

얼마전 JP는 충청권 의원들과 만찬을 함께 한 자리에서 DJ의 ‘진사(陳謝) 사절’로 청구동 자택을 찾은 한광옥(韓光玉) 대통령 비서실장에게 해줬다는 말을 그대로 전달한 적이 있다. 당시 참석자들은 JP가 “공동정부라면 6대4 정도는 돼야 하는데 8을 갖고 2도 안주려고 한다. 그러고도 공동정부라 할 수 있는가”라고 했다는 것. 이 말은 당시 현안이 되고 있던 2여 간의 수도권 연합공천 얘기로 들렸고 이 자리에서 강창희(姜昌熙) 의원은 JP가 못미더워 “2여공조는 끝났다고 아예 선언을 하십시오”라고 건의까지 했다고 한다.

이같은 대화 내용이 이튿날 일부 언론보도에 ‘JP, 연합공천 지분보장 40% 요구’라는 타이틀로 나갔다. 이에 대한 JP의 반응은 “그런 소린 나오지도 않았는데 어떤 놈이 그런 걸 썼어”라는 역정이었다. 아예 딱 잡아 떼버리면 그만인 것이다. 이렇게 자신이 구상한 정치행보에서 벗어나는, 즉 ‘연기 이외의 숨기고 싶은 진면모’를 JP는 쉽게 가려버린다. JP는 기자간담회를 해도 항상 “절대 해석같은 것 붙이지 말라. 말 한대로만 써달라”는 말이 입에 붙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해석을 증폭시키고 그걸 즐기는 인상이다.

JP의 진면모야 어떻든 외부로 드러나는 JP의 언사엔 항상 어떤 ‘마력’같은 것이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JP의 침묵과 여유는 ‘여백의 정치’ ‘기다림의 정치’로 미화되기도 한다. JP는 이처럼 모호하고 불투명한 정치에 익숙해 있다. 이는 물론 평생을 권력 주변에서 ‘만년 2인자’로서 살아온 JP의 길들여진 처신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60년대 말 정도의 일인 듯하다. 한때 JP와 가까웠던 한 언론계 출신 정치인이 전하는 일화의 한 대목이다. 당시 JP는 이른바 ‘반(反)김 라인’ 사람들의 견제를 받았고 청구동에 처박혀 그림만 그리는 시늉을 했다고 한다. 어느날 청구동엘 들러 JP와 한참 환담을 나누고 있는데, 누군가 손님이 온 기색을 보이자 JP는 갑자기 물감이 덕지덕지 묻은 옷을 꺼내 입고 손에도 물감을 묻히더니 응접실에 나가더라는 것이다. 그런 JP의 태도가 어찌나 자연스러우면서 천연덕스러운지 JP를 잘 안다는 그 사람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는 것이다.

어쨌든 JP는 4·13 총선을 향해 힘찬 진군을 시작했다. 출발점을 몰라 방황하던 JP에게 시민단체가 그 출발점을 정확하게 짚어주는 격이 됐고 JP 주변과 자민련은 정계은퇴 권고라는 사망선고를 받고도 오히려 포도당 주사라도 맞은 것처럼 활기에 차있는 느낌이다.

물론 JP는 분노와 우울을 가장한 ‘순교자’같은 표정을 풀지 않고 있지만…. 총선을 코앞에 두고 JP의 또다른 도약의 몸짓이 어떤 모습으로 나올지 자못 기대된다.

신동아 2000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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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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