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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창과의 결별

이회창과의 결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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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일곱 가지 사항을 제안하자, 노대표의 반응은 긍정적이었다.

“잘 알았습니다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수용하도록 방안을 세우지요. 또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흔히 본인이 정권을 탐내고 정권욕에 사로잡혀 있다는 얘기를 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본인이 생각하기로는 본인을 대통령 후보로 선출시켜준 민정당 160만 당원의 뜻은 본인이 몸을 헌신짝처럼 내던져 이 난국을 풀어 나가라는 소명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현재 각계 각층의 여론과 민심을 낱낱이 수렴하고 있으니, 내일 의총을 통해 종합하여 내주 초쯤 민정당의 시국 수습 방안을 밝힐 것입니다.”

이날 1시간10분에 걸쳐 진행된 회담에서 우리는 세 가지 원칙에 합의했다.

“첫째, 오늘의 불행한 사태는 정치력에 의한 평화적인 방법으로 극복해야 한다. 둘째, 여하한 일이 있더라도 폭력적인 방법이나 공권력에 의해 비상조치가 초래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셋째, 이를 위해 여야 정치 세력은 끝까지 인내와 자제로 대화와 타협을 통해 난국을 수습한다.”

그리고 마지막에 대외적으로 발표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정치 선배로서 노태우 대표에게 인간적인 충고를 하기도 했다.



“처음에 이순신 장군의 말씀을 인용한 것처럼, 사람이 비굴하게 살면 영원히 죽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이 만일 장충체육관에서 선거인단의 박수로 어거지로 대통령이 되면 당신은 영원히 죽을 것이며, 자손만대로 오점을 남기는 게 됩니다. 그러나 죽는 한이 있더라도 떳떳하게 국민의 심판을 직접 받는다면 누가 대통령이 되든 당신은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내 충고에 노대표는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받아들이는 자세를 보였다. 아무튼 그날 이후로 여권 내부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불과 이틀 뒤인 22일, 노대표로부터 플라자호텔에서 점심을 함께하자는 제의를 받았다.

그날 오전에는 전국의 30여개 대학 교수 70여명이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를 발족했으며, 저녁부터는 새문안교회에서 ‘나라를 위한 기도회’를 마친 뒤 성직자와 신도 1500여명이 철야 기도회를 갖기로 돼 있는 등 사회는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점심을 하는 자리에서 노대표는 자신이 최종 결심을 하기 전에 내게 재차 물어 왔다. 나는 솔직하게 다시 강조했다.

“여하한 일이 있더라도 장충체육관에서 엉터리로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 난국을 수습하기 위해서는 묶여 있는 김대중씨도 풀고 민주화 조치도 취해서, 정정당당하게 직선제로 승부를 거는 것이 나라가 사는 길이오.”

“직선제, 노대표부터 결심하시오”

내 말을 심각하게 듣고 있던 노대표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내가 아무리 직선제를 한다고 해도 전대통령이 결심하지 않으면 안될 텐데요.”

“전대통령은 내가 만나서 설득을 할 테니까 노대표부터 먼저 결심하시지오.”

나는 재차 강조했다.

그날 이후 정국은 막바지로 치닫고 있었다. 노대표는 각계의 여론을 듣느라 분주했고, 전두환 대통령도 각계 원로들을 청와대로 초치해 정국 타개에 관한 의견을 들었다. 그리고 급기야 24일 야당 당수들과도 만나게 됐다.

이날 회담은 오전 10시에는 민주당 김영삼 총재와, 그리고 12시에는 신민당의 이민우 총재와, 그리고 2시40분에는 나와 만나기로 돼 있었다.

2시40분, 나는 청와대로 들어갔다. 마주 앉은 전두환 대통령은 다소 피곤해 보였다. 아침부터 야당 당수 2명을 만났으니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더구나 그날 회담은 예전과는 달리 노태우 대표가 배석하지 않은 채 대통령과 야당 당수의 단독 회담이었기에 더욱 그랬을 것이다.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저는 딴 사람처럼 대통령 할 욕심을 가진 사람이 아니니, 내가 하는 이야기는 믿고 진심으로 들어주십시오.”

“이총재께서도 기탄없이 이야기해 주십시오.”

전대통령도 그날따라 유난히 진지한 표정이었다.

“백척간두에 서 있는 오늘의 이 난국을 맞아 취할 수 있는 길은 오로지 한 길밖에 없을 줄 압니다. 그것은 떳떳하게 대통령 직선제로 개헌을 하는 것이며, 강경파의 주장대로 계엄령과 같은 비상조치는 절대로 선포해서도 안 되고 선포할 수도 없는 일 아닙니까? 먼저 그것부터 분명히 밝혀주십시오.”

“비상조치는 절대로 선포하지 않습니다.”

“비상조치를 하지 않는다면, 남아 있는 길은 대통령 직선제밖에 없질 않습니까?”

내 말에 대통령은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오전의 김영삼 총재와 이민우 총재와의 회담에서는 어떤 말이 나왔는지 궁금했다. 내가 물었다.

“오전에 김영삼 총재는 뭐라고 했습니까?”

“예. 김총재는 우선 선택적 국민투표를 해야 한다는 말을 합디다. 이민우 총재 역시 마찬가지고요.”

그래서 나는 다시 그를 설득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것도 한 방법이겠지만 굳이 선택적 국민투표로 국력을 낭비할 필요없이, 바로 깨끗하게 대통령 직선을 받아들이는 게 좋겠습니다.”

나는 이 밖에도 ‘6·10사태 및 시국 관련 구속자의 전원 석방’ ‘인권 보장 및 언론 자유 등 민주화 조치’ ‘김대중씨와 정치규제자들에 대한 사면복권 단행’ ‘정국 수습을 위한 비상수습 내각’ 등도 거론했다. 회담 말미에는 인간적인 설득도 병행했다.

“저는 대구 사람으로 한 당의 총재까지 하고 있으니 개인적으로 더 바랄 게 없지요. 또 대통령께서도 대통령이 되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니, 여한이 없으리라고 봅니다. 주저하실 게 뭐 있겠습니까?”

전대통령은 내 말을 심각하게 듣고 있었다. 한동안 말이 없던 대통령은 담배에 불을 붙이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 얘기를 노대표에게도 한 적이 있습니까?”

“물론 노대표에게도 충분히 얘기했습니다. 대통령께서 결심만 하시면, 제가 노대표를 다시 만나 마음을 굳히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이때 전대통령이 직선제 개헌을 받아들일 의향이 있음을 강하게 느낄 수 있었다. 다만 의리를 앞세우는 그가 자신은 선거인단에 의한 간접선거로 쉽게 대통령이 된 반면, 후임인 노대표에게는 위험한 도박인 어려운 직선제의 길을 가라고 하기가 인간적으로 미안한 생각에서 망설이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날 회담 이후 나는 곧 정부·여당이 직선제를 받아들일 것이라고 확신하게 됐다.

아니나다를까. 불과 5일 뒤인 29일에 역사적인 ‘6·29선언’이 나온 것이다.

YS의 경선 출마선언, 노대통령 격노

92년 3월24일 14대 총선에서 나는 다시 전국구 국회의원이 되었다. 그러나 민자당은 과반수 확보에 실패했다.

총선 3일 뒤인 3월27일 노태우 대통령과 김영삼 대표는 회동을 갖고, 5월 전당대회를 통해 대통령 후보를 선출키로 합의했다.

이젠 민자당의 대통령 후보는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안개 속에 빠져버렸다. 이종찬씨와 박태준씨도 대통령 후보에 대해 미련을 갖고 있고 노대통령은 확실한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우왕좌왕하던 상태였다. 이러한 와중인 4월8일 노대통령은 극비리에 나를 청와대로 불렀다.

노대통령이 나를 급히 부른 것은 대통령 후보 문제로 고민하던 끝에 나의 의견을 듣기 위해서였다. 당시 3·24총선에서 패배한 민자당 내부는 실타래처럼 얽혀 있었다. 민정계는 총선에서 과반수 의석 확보에 실패한 책임을 김영삼 대표가 져야 한다는 주장이었고 이번 기회에 김대표를 제거하려는 움직임까지 일고 있었다. 또한 김종필 최고위원도 선거 결과에 대한 불만으로 청구동 자택에서 칩거에 들어간 상태였다.

아무튼 이런 상황을 눈치챈 김영삼 대표는 며칠 뒤인 28일 오전 대통령 후보 경선에 출마할 것을 전격 선언, 국면 전환을 모색했다. 그러나 노대통령은 이에 대로했다.

“당신 마음대로 출마를 선언했으니 마음대로 해보시오. 나는 절대 경선에 개입지 않겠소.”

바로 그날 오찬을 겸해 가진 노대통령과 김영삼 대표의 회동에서 노대통령이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노대통령의 심기를 간파한 박태준씨와 이종찬 의원도 김대표와 경선을 벌이기로 마음먹고 있었다. 여권의 핵심부 일각에서도 김대표를 제거하기 위한 움직임이 일었다. 김영삼 대표로서는 극히 불리한 처지였다.

이런 가운데 92년 4월8일과 9일 노대통령은 김영삼 대표와 김종필 최고위원, 그리고 나와 연쇄 접촉을 가졌다. 4월8일 청와대 집무실. 그날 노대통령은 의자에 앉자마자, 김영삼 대표에 대해 불편한 심기부터 드러냈다.

“이거 읽어보셨습니까” 노대통령이 책상위에 내민 것은 모일간지에 실린 칼럼이었다. “아직 못 봤습니다” “이거 한번 읽어보시죠”

나는 그냥 “나중에 가서 읽어보죠”라고 했다. 그날 칼럼은 ‘김영삼 대표의 자질이 회의적’이라는 내용이었다. 날보고 그 자리에서 일독을 권할 만큼 노대통령은 김영삼 후보를 민자당의 대통령 후보로 내세우는 데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노 대통령이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김영삼 당시 민자당 대표 최고위원이 자신에게는 한마디 상의도 없이 출마 선언을 한 점. 둘째, 언론 편집인 회견에서 전당대회 결과에 승복하겠느냐는 어느 기자의 질문에 정확한 답변은 하지 않은 채, “나에게는 오직 승리만이 있을 뿐”이라고 말한 점. 셋째, 여당이 패배했던 14대 총선 결과에 대해서, “그 책임은 전적으로 행정부에 있다”라고 한 점.

당시 노 대통령의 감정은 김영삼 대표최고위원은 안 된다는 거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대안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약 두 시간의 만남 끝에 노대통령의 마음이 김영삼 대표최고위원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처럼 노심이 김영삼 대표 쪽으로 기울어진 뒤 우여곡절 끝에 92년 5월19일 전당대회가 열려 66%의 득표율로 김대표가 대통령후보로 확정됐다. 그리곤 그날부터 정국은 바야흐로 대선 정국으로 돌입했다. 결국 12월18일 14대 선거는 김영삼씨의 승리였다.

의장 취임 일성 “날치기를 없애겠다”

93년 4월1일 나는 새 국회의장으로 지명됐다. 의장 내정 소식은 청와대 주례 회동을 마친 김종필 당대표가 청와대를 나오면서 내게 전화를 해줘 알게 됐다.

“대통령께서 의장으로 수고해 달라고 하셨고, 나는 지금 당에 가서 발표할 예정입니다.”

“오랜 정치 생활을 하면서 우리 국회가 꼭 고쳐야 할 점이 있다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어느 기자가 물어왔다.

“여당도 해보고 야당도 해보았으니, 양쪽을 다 잘 안다. 솔직히 말해 꼭 없애야겠다고 생각해온 것은 바로 국회의 날치기 문제입니다.”

내 입에서 ‘날치기를 없애겠다’는 말이 나온 것이다.

이는 나로서는 뼈에 사무쳤기에 나온 말이었다. 31세부터 그때까지 국회의원 생활을 하면서 ‘날치기’는 바로 우리 국회와 정치의 어두운 표상이었다.

아니 더 앞서 기자 시절부터 나는 도덕성 없는 정부가 국민을 무시하며 날치기 하는 것을 숱하게 보아왔다. 그러니 ‘날치기’는, 40여년간 봐온 나로서는 반드시 고쳐야 할 일이었던 것이다. 때문에 ‘날치기 없는 국회, 대화를 통한 정치’는 비단 나뿐만 아니라 우리 정치의 비원이기도 했다. ‘날치기를 없애겠다’는 내 결의 때문인지, 향후 14개월간의 국회의장 생활은 가시밭길이었다. 그러나 ‘날치기를 없애는 것은 국회가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진정한 입법부로 독립하기 위해선 필수불가결한 일이었다. 과거의 국회는 청와대에서 명령만 내리면 일사불란하게 악법도 만들고, 사람도 가두고, 야당 총재까지도 날치기로 제명시킨 바 있다. 그리고 그때 국회의장이란 ‘국민의 국회의장’이 아닌 ‘여당의 국회의장’으로서, 정부의 충실한 ‘통법부의 수장’일 뿐이었다.

이렇듯 그간 굴절된 국회의장상을 공정하고 중립적인 국회의장으로 바꾼 첫 번째 사건은 93년 7월3일의 본회의 사회를 보던 때였다.

당시 제161회 임시국회 대정부 질문에 앞서 의사 진행발언을 신청한 민주당의 박계동 의원은 황인성 당시 총리에게 12·12사태의 역사적 해석에 대한 답변을 요구했다.

황총리는 그해 5월13일 국회 행정위에서 야당 의원들로부터 똑같은 질문을 받은 바 있었다. 그리고 그때 황총리의 답변은 이러했다.

“국가적인 위기 상황에 빚어진 군사 행위였지만, 위법 사항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문제는 황총리의 답변이 있은 며칠 후 김대통령이 다소 다른 해석을 내린 것이다.

“12·12는 쿠데타적인 사건이었다.”

따라서 박계동 의원으로서는 황총리와 김대통령의 정의가 다르니, 황총리의 생각이 아직도 당시와 같은가 하는 의미에서 던진 질문이었다.

이때 나는 의장으로서 원만한 의사 진행을 위해서는 황총리의 답변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왜냐하면 그건 대통령이 이미 정의를 내린 상태였기 때문에, 총리 역시 간단하게 ‘대통령의 생각과 같다’고 한마디만 하면 되는 사안이었다. 때문에 나는 총리에게 말했다.

“어차피 대정부 질문에서도 나올 테니 총리는 박의원의 의사진행 발언에 대해 답변을 하시오.”

그러나 문제가 발생했다. 황총리 역시 내 말에 따라 답변을 하기 위해 발언대로 나서려고 하는데, 갑자기 여당 쪽에서 거세게 항의하는 게 하닌가.

“총리는 의사진행 발언에 답변할 필요가 없으니 하지 마시오.”

국회의 장(長)은 어디까지나 의장이다. 때문에 외국의 국가 원수도, 심지어 우리나라 대통령도 국회에서 연설을 할 때면 사회자인 국회의장 자리보다 아래에서 연설을 한다. 또한 사회자의 말에 따라 움직인다.

국가 원수도 국회 내에서는 국회의장의 말을 듣는 게 순리인데, 아무리 여당 의원들이 지지(?)하고 있다 해도 총리가 의장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은 잘못된 일이었다. 분명히 정부·여당이 마음대로 좌지우지하던 옛날 국회의 폐습에 젖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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