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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秦)의 통일과 멸망이 남긴 교훈

일 벌이지 않고 쉬는 게 난세 수습 첫걸음

진(秦)의 통일과 멸망이 남긴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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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은 통일과 동시에 법과 규칙, 화폐와 도량형을 통일했고, 특히 문자 표기의 통일을 이룩했다. 오늘날로 말한다면 국어의 맞춤법을 통일하고 로마자 표기에서 나타나는 혼란을 정리해 후대 교육에 기여하는 것과 같았다.

공(功)이 더 큰 ‘희대의 폭군’

진의 통일은 한(漢)민족의 생활영역을 확대하고 국가의 경계선을 명백하게 했다. 이로 인해 백성에게선 ‘우리는 하나’라는 민족의식이 생겨났다. 외적을 막기 위한 국방관념도 정착됐다. 전국시대에 산발적으로 축조하다 중지된 만리장성을 보수하고 연결해 비록 토성이기는 했으나 제대로 면모를 갖춘 것도 바로 이즈음. 만리장성은 그후 명(明) 왕조 때 벽돌 등으로 개축됐다.

진시황은 산업과 경제의 중앙집권화에도 특별한 관심을 표명했다. 경제력을 수도권으로 집중시켜 일부 야심가들의 지방할거를 예방한 것. 지방의 부호들은 자신들의 수공업 시설을 정리해 서울로 이사를 와야 했다. 또한 각지의 목축업자와 광산 개발자 등 신흥재벌을 중앙으로 초청해 상여(賞與)를 베풀면서 조정의 의식이나 회의 등에 참석케 했다. 사회간접자본을 확충해 물자유통을 원활하게 한 지방 관료에겐 이를 그의 치적으로 인정했다. 변방의 이민을 장려하고, 이주민에 대한 보호에도 노력했다. 오늘날의 광둥성과 랴오닝성 지역에 농부들을 처음 이주시키고 농토를 개간케 한 주인공이 바로 진시황이다.

예나 지금이나 중국에 대한 호칭이 ‘차이나’ 또는 ‘시나’로 표기되는 것은, 역사상 처음으로 진(秦=Qin 또는 Chin)이 중국을 대표해 그 존재를 세계에 부각시켰기 때문이다. 중국 역사에서 진시황의 위대성은 그만큼 크다. 특히 마오쩌둥 이후 현대 중국에선 진시황의 역사적 역할을 유난히 높게 평가한다.



사실 마오쩌둥 이전의 중국과 조선 왕조는 진시황을 형편없이 폄하했다. 그는 항상 ‘희대의 폭군’으로 묘사됐으며, 그의 학정은 중국의 발전을 지연 또는 추락시킨 것으로 비난받았다. 그러한 ‘격하작전’에는 유학자들이 선두를 섰으며 관계(官界)의 위선적 왕도(王道) 정치론자들이 합세했다.

객관적으로 볼 때 진시황의 통일 정치에는 분명 공(功)과 과(過) 양면이 있다. 하지만 공이 더 컸다는 게 현대 중국인의 시각이다.

진시황의 삶은 순탄치 못했다. 그는 어려운 환경을 매번 노력으로 돌파한 난세의 정복자였다. 그런 까닭에 그는 자기를 박해했거나 반대한 자들은 모조리 죄인으로 단정했고, 결코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또 그는 혼란과 난맥 속의 시대 환경에서 기강을 확립하고 질서를 정립하려면 어쩔 수 없이 강권을 발동해야 한다고 믿었다.

결국 진시황의 통일제국은 15년을 넘기지 못했다. 짧은 정권수명은 독재와 강권, 그리고 정보정치의 공통적 말로이지만, 진제국의 멸망은 진시황의 개인적 실정(失政)에서 연유한 바가 컸다.

계속되는 난세에 지치면서 살아남은 한국인은 흔히 ‘어디를 바라봐도 제대로 되어 나가는 것이 없다’고 개탄해왔다. 피로곤비(疲勞困憊)한 그들에게는 새로운 동원보다 제자리를 찾아가기 위한 마음의 여유가 필요했다.

춘추전국 말기의 중국인 또한 그러했다. 옥스퍼드대가 펴낸 사전 해설에 의하면 ‘난세(turbulent days)’란 ‘정신 차릴 수 없는 돌연한 변화와 혼란의 연속, 그리고 국론 분열에다 드물지 않게 터지는 폭력사태가 거듭되는 세월’이라고 씌어 있다. 간명하고도 빈틈없는 설명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분열된 상태에 시달려온 사람들에게 태평성세의 안거낙업(安居樂業)을 보장하려면 새로운 ‘건설’에 앞서 우선 ‘휴식’부터 부여해야 한다.

독일 통일의 경우가 그러했다. ‘서독 헌법 체제로의 흡수’라는 형식으로 격동 없는 휴식을 우선 선택한 것. 한마디로 독일의 통일정치는 ‘보살핌의 정치’였다. 그것은 흡수 통일의 중심인 서독이 시장경제, 자유민주주의, 사회복지가 결합된 사회국가(Der Sozial staat)였기에 가능했다.

그런데 진시황의 천하통일은 선군(先軍) 정치의 전국적 확대를 의미했다. 곳곳에서 거대한 토목공사를 벌였으며 천정부지의 세금부담 증대, 징수와 징발의 남발, 무자비한 징용과 징병의 강행 등 서민들로서는 도무지 감내할 수 없는 부담을 계속 강요했던 것이다.

천하통일 15년 만에 ‘천하대란’

막다른 절망은 최후의 용기를 부르는 법. 드디어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진시황이 죽고 아들 호해(胡亥)가 2세 황제로 즉위하자(기원전 210년), 천하대란의 여명은 새롭게 밝아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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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운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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