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희생이 따르게 마련인 개혁의 참된 보람은 무엇인가. 개혁을 단행한 후에도 안전하려면 정권 장악까지 고집해야 하는가.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어디까지 가려는 개혁인가. ‘첩의 아들’이란 불리한 출생환경을 지닌 상앙.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원칙만 강조한 그는 결국 반대세력에 의해 파멸로 내몰렸다.
상앙은 고대 중원의 개화되고 교통도 편리했던 약소국 위(衛)나라에서 기원전 390년 태어났다. 아버지는 공자(公子)였다지만, 상앙은 첩의 아들이었다. 그런 비정상적인 출생신분으로 말미암아 형성된 특이한 성격은 그의 개인적 운명을 좌우했다. 나아가 그가 활약한 진(秦)나라의 역사에도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 원래 동북아문화권(유교문화권)에서는 ‘첩의 아들’이라면 덮어놓고 백안시하고 소외하는 편견이 있었다. 능력과 사람됨은 무시한 채 멸시와 학대를 퍼부었던 것이다.
사회가 자기를 편견으로 대하고 차별대우하면, 억울하게 당하는 쪽은 어떻게 될까. 어려서부터 반항심이 자라게 마련이다. 또 그런 반감에 어울리게끔 사회의 부조리하고 어두운 측면만 더욱 눈에 띄게 되고, 지배계층과 추종세력의 부패와 무능, 무지와 우매만 돋보인다. 그에 대한 결과는 저항 혹은 탈출이다. 이 경우 정서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 것이 편향된 각박함이다. 이웃에 대한 보살핌과 따뜻한 사랑의 정신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그리되면 새로운 저항이 심화되다 유사시엔 그에 대한 보복과 제재가 뒤따르면서 극한 상황을 빚고 만다.
상앙의 생애가 그러했다. 총명한 소년 상앙은 차별대우 속에서도 억세게 자라났다. 어려서부터 독서를 즐겼는데, 공자의 윤리철학보다는 법가(法家)의 현실정치론을 탐독했다. 청년기에 고향을 떠났는데, 행선지는 그때만 해도 열강 중 하나로 꼽히던 위(魏)나라였다.
상앙이 책 봇짐을 내려놓은 곳은 당시 위나라의 최고 벼슬인 상국(相國) 자리에 앉은 공숙좌(公叔座)의 집이었다. 공숙좌는 상앙이 비록 서자(庶子)이지만 공자(公子)의 아들이고, 지능이 뛰어나며 학식도 풍부하다고 판단해 그를 높이 샀다. 공숙좌 자신이 학식 있는 인격자였다. 그는 조국 위나라에서 등용하지 못한 인재들의 다음 행선지가 경쟁국인 진(秦)나라일 것이라고 전망하고 걱정스러워했다.
진(秦)나라에서 등용되다
그 공숙좌가 병석에 누워 중태에 빠졌다. 위나라 혜왕(惠王)이 문병차 찾아가 그 위독함을 알고는 걱정스레 물었다.
“만약 병석에서 오랫동안 치료를 받으셔야 한다면, 그 시기에 국정을 대신 맡아볼 인재로는 누가 좋을까요?”
“제 문하생으로 상앙이란 인재가 있습니다. 청년이지만 지능과 학식이 탁월할 뿐 아니라 구상과 통찰력, 통솔력과 정치력을 아울러 갖췄습니다.”
공숙좌가 진언한 뒤 혜왕의 표정을 읽으니, 듣고 흘려버리는 무관심이었다. 아마도 실적이 없고 경험도 태무(殆無)한 백면의 청년을 중용한다면 그렇게도 인재가 없느냐고 천하가 비웃을 거라고 생각한 것 같았다. 공숙좌는 좌우 측근들을 물러나게 하고는 다시 진언했다.
“만약 군왕께서 상앙을 등용하시지 않는다면 차라리 그를 없애야 합니다. 우리나라의 안전을 위해 외국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혜왕은 “알아듣겠다”고 하고는 궁으로 돌아갔다. 그러고는 측근에게 말했다.
“상국이 연로하여 병석에 눕더니, 그 진언에 노망기가 짙은 것 같다.”
혜왕은 아무런 과오가 없는 상앙을 죽인다면 천하의 조소와 비난을 면치 못하리라고 우려했던 모양이다.
한편 공숙좌는 국왕이 자기의 두 번째 진언에는 동의한 줄 믿고 있었다. 맡고 있는 직책과 국가 이익을 고려해 부득이 진언했지만, 다시금 생각하니 상앙이 자못 측은했다. 그는 인간적인 고민에 빠졌다가 급히 상앙을 불러 말했다.
“국왕께서 내가 죽으면 상국 후임자로 재상에 임명할 인재가 누구냐고 물으셨다. 나는 그대를 추천했으나, 전하의 안색을 보니 응낙하신 것 같지 않았다. 나는 상국 된 처지에서 국왕의 이익을 우선해야 하고, 신하에 대한 배려는 다음으로 돌려야만 했다. 따라서 전하께서 상앙을 등용하지 않겠다면 국가 안보상 걱정되니 없애버려야 한다는 말씀을 드렸고, 전하께서는 응낙하셨다. 이제 그대는 서둘러 이곳을 떠나야 한다. 그대로 있다간 체포될 것이다.”
상앙이 대답했다.
“혜왕께서는 상국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신을 임용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한 발상이라면 상국님께서 저를 없애버려야 한다고 하신 두 번째 진언도 실행에 옮기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고는 침착하고도 용의주도하게 출국을 준비했다. 상앙은 이미 서쪽 강대국인 진(秦)나라 효공(孝公)이 전국에 포고문을 내리고 현명한 인재를 찾아 등용하려는 포부를 밝힌 바 있음을 듣고 있었다. 효공은 선대인 목공(穆公)의 뜻을 이어받아 동쪽의 실지(失地)를 되찾고자 열망하던 영명한 군주였다. 상앙의 행선지는 당연히 진나라로 내정됐다. 그러나 무턱대고 거지꼴로 찾아가서 냉대 받기는 싫었다. 사전 연락과 거기에 상응한 소개장 등 격식을 차릴 필요가 있었다.
공숙좌가 죽은 후 마침내 진나라로 들어간 상앙은 효공이 신임하는 측근의 실력자 경감(景監)을 연줄로 삼아 접견을 신청할 수 있었다.
효공이 직접 상앙을 만나 대화했다. 상앙은 효공의 당면 수요가 무엇인가를 간파했다. 그러고는 우원(迂遠)한 덕치론(德治論)이나 까마득한 제왕술(帝王術) 대신 현실 조건을 감안한 실지 회복과 부강대국론을 폈다. 효공은 기뻐하며 그를 중용하기로 결심했다. 특히 위(魏)나라에 빼앗긴 하서(河西) 지방의 회복 작전 구상이 마음에 들었다.
하서 지방은 20세기에 마오쩌둥(毛澤東)이 근거지로 삼은 옌안(延安)이 위치한 지방이다. 봉건관료식 덕치론자인 장제스(蔣介石)가 후쭝난(胡宗南) 장군에게 명하여 대군을 이끌고 우매한 정면공격을 시도하다 실패한, 바로 그 일대다.
개혁 구상과 찬반 논의
상앙이 진나라에 입국한 것은 기원전 361년의 일인데, 실정 파악에 이어 개혁 구상을 정식으로 제출한 것은 기원전 359년이라고 한다. 청사진 작성에 2년이 걸린 셈이다. 개혁 구상의 대강이 알려지자 찬반 논의가 치열했는데 당초엔 반대쪽이 다수였다.
하기야 동서고금을 통해 다수파의 ‘여론’에 힘입어 보람 있는 개혁을 성취한 사례는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영재는 언제나 극소수이게 마련이고, 나중에 그 성과를 즐길 사람은 국민 대다수다. 물론 부패하고 무능한 일부 당파의 이른바 ‘개혁’ 시도는 만화 같은 실패작에 그치고 만다.
국론이 분열되자 효공은 개혁안 채택 결정에 앞서 어전 회의를 소집하고 자유토론을 펴게 했다. 기득권층 귀족들이 반대파를 대표했는데, 종래의 법률·제도를 지켜야만 관리들이 사무에 익숙하고 백성이 생활에 안주하며, 국세(國勢)의 약화와 사회 혼란을 막을 수 있다고 했다. 상앙이 일어나서 일깨웠다.
“첫째, 지금 위군의 침범으로 하서의 실지가 수복되지 않고 있습니다. 당면한 현실은 국세 약화를 예방하는 것보다도 국방의 강화를 요청합니다. 또 매일처럼 도처에서 소요와 항의, 충돌이 일어나니 혼란을 예방하기보다 사태를 수습하기 위한 새 질서가 필요합니다.
둘째, 사물 현상은 부단한 변화의 과정에 있습니다. 그 변화에 대응해 적응하려면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는 개혁을 제때에 단행해야 합니다.
셋째, 역사에서 얻은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夏)나라 걸왕(桀王)과 은(殷)나라 주왕(紂王)은 지난날에 제정된 구법을 고수하다 멸망했습니다. 그들과 달리 상(商)나라 탕왕(湯王)과 주(周)나라 무왕(武王)은 구법에 구애하지 않고 개혁을 단행해 부강대국을 이룩했습니다.”
상앙의 주장은 적잖은 찬동 세력을 확보했다. 특히 효공은 경험적인 역사 교훈 인용에 큰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개혁의 결정은 내려졌다. 판단력 다음으로는 의지력이 중요한 법이다.
상앙이 주도한 개혁은 두 차례의 법 개정을 포함해 21년간 계속됐는데, 그 효과가 지대했다. 진나라의 국력이 유례없이 증강됐고, 국민은 안거낙업(安居樂業)했다고 한다.
획기적인 개혁 내용
상앙의 개혁은, 요컨대 시대의 요청에 부응하면서 낡은 사회의 낡은 제도 아래에서 침체됐던 국민의 ‘자각적 적극성’을 드높이는 데 있었다. 그러자면 새로운 기회를 늘리고 낡은 특권을 타파해야 했다.
우선 군공(軍功) 진급의 원칙을 제정했다. 다른 한편 관록(官祿) 세습제를 폐지했다. 군공을 20급으로 나누고 각 등급에 따라 작위와 관직, 주택, 처첩, 복장 등에 차등을 뒀다. 노예라도 전투에서 용감하면 평민이 됨은 물론이고 작위도 높여줬다. 반면 왕실 사람이나 귀족이라 해도 군공이 없으면 작위를 주지 않았고 부동산 소유를 금했다. 농업에서 생산량을 늘렸든지 새로운 땅을 개척한 경우에도 부역을 면제하고 우대했다.
이러한 새 조치는 즉효를 보여 진나라의 군사력과 생산력이 증강됐다. 토지의 자유매매를 허가해 귀족이건 농민이건 세금 부담을 평등케 했다.
또한 국왕 중심의 중앙집권제를 수립하면서 노예를 소유한 영주들의 지방할거를 원칙적으로 제한했다. 관리를 중앙에서 임명해 지방으로 파견하고, 국왕에게 직속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조직적 동원력을 신속화하고 효율화한 것이다.
연좌제도 강행했는데, 5개 호구를 ‘오(伍)’, 10개 호구를 ‘십(什)’이라 부르면서 상호감시토록 하고 자유 이전을 금지했다. 범죄를 고발하지 않거나 범인을 숨겨주면 같은 죄로 다루어 엄벌에 용서가 없었다. 이 냉혹한 제도는 현대의 일부 공산국가도 모방하고 있다.
토지소유제 개혁에서 특기할 것은 노예사회적인 토지 국유제를 폐지하고, 봉건적 토지 사유제를 도입한 점이다. 이는 세법 개정과 더불어 소농(小農)경제 발전에 이바지했으니 진보적 의의가 크다고 평가되는 모양이다.
하여튼 진나라의 사회 기풍은, 평상시엔 농업생산을 즐기다 유사시엔 앞다퉈 전투에 뛰어드는 획기적 전환을 보였다. 국력 증대와 함께 천하무적의 군사강국이 출현한 것이다.
하서 수복 위한 배신적 기습
상앙은 정치가이면서 군사가와 외교가를 겸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의 현존 저서 ‘상군서(商君書)’ 중 3편이 군사관계에 관한 것이다.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군사력만으로 부족하고, 정치력이 우선돼야 하며, 경제력도 중요하다는 사상이다.
기원전 344년에는 직접 진나라 특사로 위나라를 방문해 혜왕을 만났다. 과거사에 관한 회포를 풀면서 후대를 받기도 했다. 이는 외교전략상 혜왕에게 호의를 보이면서, 만약에 위나라와 제(齊)나라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면 진나라는 중립을 지키겠다는 약속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위나라의 예봉을 제나라로 돌리면서 개혁에 필요한 시간을 벌고자 했던 것이다.
그 3년 후에는 상앙이 진나라 대군을 통솔해 직접 위나라를 치고 하서의 실지를 완전 수복코자 했다. 이를 막으려 위나라는 공자앙(公子콾)을 사령관으로 하는 수비군을 급파했다. 일찍이 청년기의 상앙이 위나라에 체류했을 때 친분이 있던 사람이다.
상앙은 공자앙에게 인편으로 정중한 친서를 보냈다. 그 내용은 ‘지금 불행하게 대치 중이나 옛정을 생각해서 전혀 싸울 생각이 없다. 그러니 쌍방이 각기 주력을 후퇴시키고 중간의 안전지대에서 만나 회포를 풀면서 영토 분규의 평화적 해결책을 의논함이 어떻겠는가. 회견 장소로는 옥천산(玉泉山)이 좋겠다. 회신이 있으면 즉각 안전조치를 취하겠다’는 것이었다.
순진한 공자앙은 기뻐서 이에 동의하고 옥천산에서 만나기로 했다. 회견 직전 정찰대를 시켜 알아본즉슨 부근의 진군은 전부 후퇴했다는 것이다. 약속 당일에 위군 측에서는 공자앙이 측근 약간명과 연회 석상에서 여흥을 도울 오락인원만 대동하고 지정 장소로 갔다. 상앙은 산기슭까지 마중 나와 있었다. 공자앙은 상앙이 미리 진군의 무장부대를 분산시켜 부근 일대에 매복시켰으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연회 도중 상앙이 잠깐 자리를 뜨겠다고 했다. 그러자 매복했던 진군은 일제히 연회장으로 달려들어 공자앙을 결박했다. 그는 후방으로 압송됐고, 진군은 손쉽게 하서의 모든 요충지를 점령, 장악했다. 진군은 계속 동진해서 위나라의 옛서울 안읍(安邑)까지 포위했다.
공자앙은 후회막급으로 혀를 깨물고 싶어했다. 위나라 혜왕은 대경실색 어찌할 바를 몰라 평화를 구걸할 뿐이었다. 상앙이 제시한 조건은 하나뿐으로 우선은 관대한 듯했다. 하서를 수복할 따름이지, 위나라의 다른 영토에는 한치도 손대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진나라는 상앙의 공로를 높이 평가하면서 어(於)와 상(商)에 영토를 갖게 하고, 이례적으로 후대했다. 또한 상앙을 상군(商君)으로 호칭했다.
한편 각국은 그 소식을 접하고 상앙의 비인간적 배신행위를 맹렬히 비난했다.
상앙은 정치개혁을 성공적으로 주도했을 뿐 아니라, 군사적으로도 대군을 통솔해 큰 싸움에서 5전5승했다.
비참한 말로
고대 중국의 인재 상앙은 마키아벨리(사진)가 ‘군주론’에서 말한 ‘사자의 기질’은 갖췄지만 ‘여우의 지혜’가 모자라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그러한 상황에서 정치개혁의 본궤도에 진입해 약간 대담해진 상앙은 중대한 실책을 저지른다.
한번은 태자가 개혁법령을 위반했다. 상앙이 말했다.
“법이 준수되지 않는 원인은 상류계층이 이를 무시하고도 무사하여 법 자체가 경시되는 데 있다.”
상앙은 태자를 처벌하고 싶었으나 군주의 후계자를 손댈 수는 없었다. 대신 그 측근인 공자건을 처형했고, 또 사부인 공손가를 문신(먹실 넣기)으로 벌했다. 소문이 퍼지자 뭇사람들은 공포심 때문에 개혁법령을 준수했다. 그러나 태자는 치솟는 분노와 원한을 가까스로 달래고는 집권 후에 보복키로 작심했다.
그 사건이 있은 지 5개월 뒤 효공이 사망했다. 태자가 즉위해 혜공(惠公)이라 칭했다. 그는 상앙에 대한 보복 기회를 노리고 있었는데, 때마침 공자건 일당이 상앙이 반란을 획책하고 있다고 밀고했다. 상앙은 체포 직전 도주해 국경 부근에 이르렀다. 여관에 투숙하려 했으나, 상앙 자신이 제정한 법령에 따라 여권을 소지하지 않았다고 해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상앙은 정처없이 방황하면서 정신착란을 일으켰던지 판단력과 통찰력이 흐려져 허둥거리다 위(魏)나라로 들어갔다. 위나라 사람 또한 그를 환영하지 않았다. 공자앙을 속이고 위군을 격파한 원한의 기억이 뚜렷했던 것이다. 부득이 다른 나라로 가려 했으나, 이번엔 위나라 사람들이 딴 생각을 품었다. 진나라로 상앙을 정식 송환해야지, 모호하게 방치하면 양국 관계가 악화될 우려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송환 절차가 시작되자 상앙의 머릿속에 번뜩이는 것이 있었다. 요즘의 치매증을 봐도 알 수 있듯, 정신이 오락가락하더라도 자존심은 살아 있고, 때로는 새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한다. 송환 절차 도중 상앙은 탈주했다. 그의 나이 50세였다.
자신의 봉지인 상(商)읍으로 숨어들어 친척과 시민을 규합해 부대를 편성하고는 정(鄭)나라로 출격했다. 혜왕은 정규군으로 이를 토벌하고 상앙을 사살했다. 그의 시체를 다시 수도로 끌고 가서는 본보기를 보인다며 포고문을 발표하고 거열형(車裂刑)으로 처리했다. 족멸(族滅)의 극형이 잇따랐다. 처참한 보복이었다.
역사가 사마천(司馬遷)도 상앙의 전기를 쓰면서 오기(吳起)의 경우와 달리, 전혀 동정하지 않았다. 인간미가 결여된 잔인하고 무정한 성품이라고 규탄했던 것이다.
원칙을 지키는 것은 좋으나, 인간은 이성적 동물인 동시에 정서적 존재다. 원칙 위에 자리한 ‘무엇 때문에, 누구를 위하여’도 감안해야 하는 것이다.
마키아벨리의 이론과 사생관
서구의 법가(法家)로 볼 수 있는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 쓰기를, 통치자가 조국의 자주독립을 수호하고 부강대국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여하한 수단 방법을 선택하건 별로 구애할 바 없다고 했다. 그러니 여우의 지혜와 사자의 기질을 고루 배우라고 했다.
그에 따르면 ‘본시 인간은 사악하여 당신에 대한 신의를 충실히 지키지 않기 때문에 당신도 그들에 대한 신의를 존중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자비롭다든지, 신의를 지킨다든지, 인정에 따뜻하다든지, 정직하다든지, 경건하다든지 하는 것을 여러 사람에게 느끼게 하는 일은 매우 필요하다’는 강조를 잊지 않았다(군주론, 18장).
야릇하게 덧붙인 그 보탬말은 무엇을 뜻하는가. 현대 정치인들의 인간 관찰을 일반화해 요약해본다.
이 세상에 배신자들의 존재는 확실하다. 동시에 한편으로는 착한 사람들이 건재한다. 가장 많은 부류는 중간에서 흔들리는 유동 인구다. 이들은 비록 각자의 다양한 이해타산에 따라 이리저리 동요한다 해도 착한 사람을 우러러보거나 믿고 맡길 줄은 안다. 그리고 배신자니 악인이니 불리는 사람이라 해도 그 자신은 믿지 못할 사람을 모시거나 따르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영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신뢰의 확보가 으뜸으로 중요하다. 정책 발표에서도 그렇고 인간관계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런데 상앙의 경우는 후자에서 맹점이 지나쳤다. 각박한 성격 탓이다. 그것은 ‘첩의 아들’로 태어난 불행한 환경에 연유하는 것으로 보인다. 유전적 요인에 대해서는 참고자료가 없다.
나아가 극한 상황에 처한 상앙의 방황에서는 비장이 아닌 비참으로 얼룩진 판단착오의 징후가 감지된다. 그것은 인생관이 아니라 사생관(死生觀)의 문제로 귀착되는 것 같다. 일찍이 플라톤은 ‘철학은 사망의 연습이다’고 갈파했다. 진·선·미 연구와 관련해 당황하지 않고 죽음을 영접하는 자세를 가르친 것이다. 사망은 자기의 미학(美學)을 따르는 최후의 자유 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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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점에서 서구인과 일본인, 아랍인은 죽음 앞에서 그다지 당황하지 않는다. 상앙은 그러한 자세를 정립하기에 시간적 여유가 부족했던 것 같다. 사생결단의 위기에 즈음해 어쩔 줄 몰라 하고 갈팡질팡하다 인생론의 미학과는 거리가 먼 최후를 ‘타인의 선택’에 의해 맞이한 꼴이 됐으니 말이다.
문제는 산적해 있으나 민주주의가 정착되지 않은 신생국에서 개혁을 제창하려면, 플라톤의 가르침에 따른 사생관의 정립이 요청된다. 권력에는 언제나 위험이 따르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