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0년대 노동절(5·1) 집회에서 군중의 환호에 답하는 김일성.
전후 북한의 실태는 경제를 복구하고 새로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데 거의 맨손으로 시작해야 할 정도로 처참했다. 공업과 농업을 망라해 피해를 보았는데 공업 중에서도 중공업과 기간산업부문의 공장 설비는 완전히 파괴됐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경제적 파괴에 더해 일제로부터 물려받은 식민지적 경제구조의 후진성과 낙후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지속된 점은 북한을 더더욱 힘들게 하는 또 하나의 제약이었다.
이제 북한은 정부 수립 이후 마련해놓은 이른바 ‘전쟁 이전 평화적 건설시기’(1948~50)의 경제적 자산이 거의 손상된 채 새롭게 시작해야 했다. 그것도 단순한 복구를 넘어 사회주의 건설을 이뤄야 하는 험난한 시기에 말이다.
사실상 1953년 이후 북한에는 통일된 발전전략이 부재했다. 그리고 이 같은 1950년대의 상황은 (지금의 북한체제의 일원성을 고려할 때) ‘역사상 정치적으로 가장 풍부했던 시기’였다. 전후 복구와 사회주의 건설을 놓고 다양한 노선이 제출됐고 그것이 정치적 경쟁과 갈등으로 확산됐기 때문이다.
복구와 건설을 둘러싼 노선 갈등
전쟁 이후 북한에 가장 시급한 문제가 무엇인지는 명약관화했다. 전쟁으로 파괴된 경제를 신속히 복구해 피폐해진 인민생활을 하루빨리 향상시키는 것이 가장 긴급한 과제였다.
그러나 저발전 국가의 사회주의가 모두 그러하듯 당시 북한은 전후 복구말고도 또 다른 국가목표를 고려해야 했다. 바로 사회주의의 건설이었다. 파괴된 경제를 단순히 원상태로 복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적 공업화의 기초를 축성’하는 것부터 출발해야 하는 동시적 과제를 안고 있었다.
이렇듯 북한에 있어 전후 인민경제의 복구발전과 사회주의 건설은 동전의 앞뒷면과도 같은 것이었다. 따라서 당면한 경제복구와 건설은 사회주의적 지향을 전제로 진행돼야 했고 그것은 이 시기 북한의 경제노선에 ‘전략’이 필요함을 뜻했다.
그러나 당시 북한에는 단일한 리더십과 합의된 사회주의 경제건설 노선이 확고하게 존재하지 않았다. 이는 곧 이 시기가 발전전략을 새롭게 짜는 과정임을 뜻하며 동시에 발전전략을 둘러싼 각 세력간의 치열한 갈등과 대결이 존재함을 암시한다.
북한의 공식 발표에 따르면, 전후 1953년 8월에 개최된 당중앙위 6차 전원회의에서 축적 방식에 관련한 노선, 즉 ‘중공업의 우선적 장성과 농업 및 경공업의 동시발전 노선’이 채택됐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1956년에 발간된 자료에 실린 이 회의 연설문에는 김일성의 동시발전 노선에 관한 언급이 전혀 없으며 다만 공업복구 건설에서 ‘선후차(先後差)를 두어야’ 하고 그것은 ‘기본시설에 우선을 두어야 한다’는 정도로만 언급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