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7년 9월2일 아프가니스탄에서 피랍됐다가 석방된 19명이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입국했다. 피랍자들과 함께 귀국한 김만복 국정원장과 한국 협상대표(검은 선글라스).
최근 중국 베이징을 중심으로 북측 인사들 및 그들과 접촉한 해외동포와 내국인들 사이에 이 부분과 관련한 말들이 흘러나와 관심을 끈다. 앞의 네 가지 사례는 그렇게 나온 얘기들 중 일부분이다. 골자는 노무현 정부가 2차 정상회담 성사를 위해 북측에 얼마간의 현금을 지급했고, 그 과정에 아프간 인질 석방 교섭이 활용됐다는 것.
노무현 정부가 2차 남북정상회담 성사를 위해 북측에 대가를 지급했다는 의혹은 사실로 밝혀질 경우 결코 가볍게 넘길 사안이 아니다. 무엇보다 이는 노무현 정부가 견지해온 정상회담 성립의 대전제를 스스로 저버린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정보 혹은 첩보는 최종 확인이 어렵다. 남과 북의 몇 안 되는 당사자는 아직 입을 열 처지가 아니고, 입증 자료가 나오기도 당분간은 무망하다. 지난해 7월 이후 수집된 ‘정황 증거’들과 안팎의 첩보들을 종합해 ‘2차 정상회담 뒷거래’ 의혹을 재구성해보고자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평양發’ 남북정상회담 성사 배경
애당초 예정됐던 2차 정상회담 일정은 지난해 8월28~30일이었다. 북한 김양건 통전부장의 요청으로 김만복 국정원장이 8월2~3일 비밀 방북해 정상회담을 제의받았고, 김 원장은 이를 노 대통령에게 보고해 오케이 사인을 받은 후 8월4~5일 다시 방북해 정상회담 개최합의서에 서명했다는 게 지금까지 알려진 내용이다.
그러면 북한은 왜 그 시점에 ‘정상회담 카드’를 갑자기 꺼내 들었을까. 믿을 만한 북한 소식통에 따르면 평양은 지난해 6월 이후 북미관계 등 전반적인 틀을 재조정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남북정상회담은 평양의 모든 부서가 동의하는 사안이 아니었다고 한다. 심지어 표면상 대남업무를 총괄하는 통일전선부 내에서도 “해봐야 얻을 게 없다”는 반대론과 “남측 차기 정권에 대비해야 한다”는 찬성론이 엇갈렸다고 한다.
이 와중에 7월 초 국정원으로부터 정상회담 제안이 평양에 전달된다. 그러나 이는 노무현 정부 4년여 동안 ‘수시로’ 있었던 일이었기에 평양으로선 주목할 만한 사안이 아니었다고 한다. 7월 중순경에도 비슷한 제안이 재차 평양에 전달됐다. 그런데 이 때의 제안은 이전 제안들과는 조금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북측에 대해 무언가 다양한 ‘약속’이 제시됐다는 점에서, 정상회담을 받을 것인지 말 것인지에 대한 평양의 고심이 시작됐다는 얘기다.
결론은 8월 초 김만복 원장을 평양에 불러들이는 것이었다. 이는 ‘불러다놓고 담판 짓는’ 전형적인 평양식 접근법이다. 이처럼 전격적으로 이뤄진 합의과정에서 사전 의제 확정 등 통상적인 외교 수순은 완전히 무시됐다. 남북 양쪽에서 당시 상황을 추적했던 한 전문가는 ‘일단 만나는 데 의의를 두는 수준이었다’고 설명했다.
‘평양발(發)’ 남북정상회담 합의가 의미하는 것은 ‘남(南)의 조건 제시 및 북(北)의 수용’이라는 골격이 완성됐음을 뜻한다. 남측 정부는 필요에 의해 어떻게 해서든 임기 말 정상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한 조건들을 제시했고, 북측은 제시된 조건을 꼼꼼히 따져본 뒤 이를 수용했다.
그런데 예정된 정상회담 일정을 불과 열흘 앞둔 8월18일, 북측이 갑작스럽게 회담 연기를 통보해왔다. 표면상 이유는 8월 초부터 북한 전역을 강타한 폭우였다. 더욱이 재조정된 회담일은 예정일로부터 5주나 미뤄진 10월 2일로 결정됐다. 여기서 떠오르는 의문 하나. 북한이 정상회담을 연기한 이유는 단지 수해 때문이었을까. 남북 양측이 드러내놓고 말하지 못할 또 다른 속사정이 있었던 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