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월4일 총선을 앞두고 경기 수원 영통 지역구에서 한나라당 박찬숙 후보(오른쪽)가 유권자의 손을 잡고 지지를 부탁하고 있다.
‘친이의 굴욕’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대선후보 경선 때 이명박 후보 캠프의 대변인을 지냈고 대통령직인수위 기획조정분과위원으로 활동한 박형준 의원도 한나라당 텃밭인 부산 수영에서 친박 무소속 유재중 후보에게 졌다. 부산에서는 한반도대운하 공약을 주도한 박승환 의원(금정), 선대위 2030기획팀장이던 김희정 의원(연제), ‘BBK 수비수’로 활약한 오세경 변호사(동래)가 무소속 바람에 추풍낙엽이 됐다. 송태영 전 당선인 부대변인(충북 청주 흥덕 을), 김해수 전 대선후보비서실 부실장(인천 계양)을 합쳐 모두 9명의 이 대통령 핵심 측근이 낙선했다. 이명박 핵심 측근으로 불린 출마자가 20여 명이었으므로 절반가량이 여의도 입성에 실패한 셈이다.
친이 핵심의 몰락은 한나라당 내부 권력암투의 부산물이다. 선거 기간 중 ‘박근혜를 사랑하는 모임(박사모)’은 이재오·이방호·전여옥·박형준·오세경 후보 등을 ‘살생부’에 올려놓고 낙선운동을 펼쳤다. 이 가운데 살아남은 인물은 전여옥 후보뿐이다. ‘박사모의 저주’라는 신조어가 만들어질 만도 했다. 박사모는 심지어 이방호 후보를 낙마시키기 위해 민주노동당 강기갑 후보를 지원했다. 강기갑 후보는 “(내가 당선된 데는) 박사모의 도움도 빼놓을 수 없다”고 말했다.
친이 진영 내부에서 벌어진 살벌한 파워게임도 ‘이명박의 남자들’이 대선 승리 후 불과 4개월 만에 쓰라린 패배를 당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친이 핵심 간 헤게모니 다툼의 부산물인 새 정부 인사파동과 공천갈등으로 이명박 정부는 출범 초기부터 여론의 따가운 눈총을 받았고, 유권자들이 그런 실망감을 총선에서 투표로 표출했다는 것이다.
지난 연말 대선이 끝난 직후부터 친이 내부의 권력암투는 심각한 양상으로 전개됐다. 과거 정권의 경우 출범 초기엔 새 대통령을 중심으로 탄탄한 친정(親政)체제가 구축됐다가 임기 중반을 고비로 권력갈등이 서서히 고개를 들었지만 이번엔 취임식도 하기 전에 헤게모니 다툼이 벌어졌다.
이 대통령이 노무현·김대중·김영삼 전 대통령과 달리 비(非)정치인 출신이어서 여러 세력을 끌어모아 정권을 창출하다 보니 태생적 한계가 있었다는 분석도 있다. 대선 후 4개월 만에 총선이 치러지고 3개월 후에 당 대표를 선출하는 빡빡한 정치일정도 주요 원인으로 거론됐다. 그러나 친이 핵심세력의 총선 탈락을 ‘자업자득’으로 보는 시각도 많다. 이명박계 내부에서 스스로 분화해가면서 상호간 권력다툼으로 힘을 소진했기 때문이다. 총선 전의 친이 세력은 세 갈래였다. 이상득 부의장, 이재오 의원, 정두언 의원을 핵으로 정립(鼎立)하는 구도였다.
이상득 그룹의 막후 실력자는 최시중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이었고, 실무적으로 권력을 행사한 인물은 이 부의장의 보좌관 출신인 박영준 청와대 기획조정비서관과 장다사로 청와대 정무1비서관이었다. 류우익 현 대통령실장과 이방호 사무총장, 정종복 사무부총장도 이 라인에 속했다.
이재오 의원 그룹에는 공성진·진수희·차명진·이군현 의원 등 현역 의원이 대거 포함됐다. 정두언 의원은 계파 장악력이 이 부의장이나 이 의원보다는 떨어졌지만 ‘MB 직계’라고 부를 수 있는 그룹의 리더였다. 4·9 총선을 통해 국회 입성에 성공한 이춘식·정태근·백성운·조해진·권택기·강승규·김영우 당선자 등이 정두언 그룹으로 꼽혔다. 이들 대부분은 이 대통령의 서울시장 재임시절부터 대권 플랜을 짠 ‘안국포럼’ 출신들로 ‘하이서울팀’ 멤버들이다. MB 직계는 심정적으로 이상득계보다는 이재오계에 가까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