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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해병 전력증강 가속화 수뇌부 의지가 승부 가른다

‘3차 연평해전’ 시나리오&대응전략

해군·해병 전력증강 가속화 수뇌부 의지가 승부 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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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차 연평해전은 ‘방심하면 당한다’는 평범한 군사적 진리를 새삼 일깨웠다.
  • 당시 군 지휘부는 북한군의 도발 위협을 안이하게 판단했고, 작전·전술에서도 실패했다. 만약 3차 연평해전이 발생한다면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 남북 해군력 분석을 바탕으로 북한의 도발 시나리오 및 한국군의 대비 태세를 점검한다.
해군·해병 전력증강 가속화 수뇌부 의지가 승부 가른다

5월 10일 노동신문에 보도된 북한의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발사 광경.

올들어 북한의 도발이 심상치 않다. 설 연휴에는 대함미사일 시험발사와 섬 타격·점령훈련을 과시하더니 5월에는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능력까지 자랑하기에 이르렀다. 최근에는 서해 북방한계선(NLL) 최남단 무인도 갈도에 전진기지까지 구축한다. 2차례 연평해전을 유발한 6월 꽃게 성어기를 맞아 북한 해군의 NLL 위협을 점검해보자.

전통적으로 공산국가치고 강한 해군력을 자랑하는 경우는 보기 드물다. 이는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의 특징에 기인한다. 소련은 대륙국가의 특성상 지상군 전력에 중점을 뒀기에 해군은 자국의 근해만을 지키는 연안해군에 머물렀다. 따라서 소련은 수상함보다는 잠수함 건조에 힘을 쏟아 2차대전 당시에는 세계 최대의 잠수함대를 보유했다. 종전 이후 6·25전쟁 시기까지만 해도 소련 해군의 대양작전 능력은 전무하다시피 했다. 그리고 이런 특성은 그대로 북한에 이어졌다.

북한 해군의 역사

북한 해군의 모체는 1945년 10월 동·서해의 해안지대에 창설한 수상보안대다. 이는 곧 해안경비대로 개칭됐고, 창설 후 줄곧 군이 아니라 내무성 관할로 있다가 1949년에야 민족보위성(現 인민무력부)으로 이관돼 북한 해군이 됐다. 6·25를 준비하는 북한의 해군력은 육군이나 공군과는 달리 강하지 못했다. 일본에서 들여온 경비정이나 발동선에 의존하던 북한 해군은 1949년 12월 소련의 군사원조로 대·소형 전투함정을 갖췄다. 이어 경비함 30여 척, 지원함 80여 척으로 증강했다. 경비함은 주로 소형 함정으로 G-5 어뢰정이 주력이었다.

6·25전쟁 때 북한은 이런 약한 해군력 탓에 제해권을 잃었다. 중국에서 물자를 받기 위해 서해와 서해안의 육로를 활용했는데, 이것까지 유엔군에 견제당하게 됐다. 이미 우세한 해군력으로 제해권을 장악한 유엔군은 북한의 병참선을 차단하기 위해 서해안 전략도서들을 확보했다. 이에 따라 1951년 교동도에서 시작해 연평도, 백령도 등 서해5도를 확보했다. 이후 우리 군은 평안남도와 황해도를 가로지르는 대동강 하구의 광량만에 위치한 석도와 초도까지 점령했다. 북한의 서해 최대 항구인 진남포에서는 30여km, 평양까지는 70여km밖에 안 되는 거리였다.



종전 후 마크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은 비무장지대(DMZ)와 연결하는 가상의 해상선인 NLL을 만들고, 유엔군의 활동 영역을 NLL 이하로 제한했다. 그 결과 석도나 초도 같은 요충지를 북한에 넘겨주고, 동해의 여도나 양도 등 전략도서까지 포기하게 됐다. NLL 이북에서 군사작전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니 북한에 은혜를 베푼 것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북한은 이에 반대하지 않았을뿐더러 내심 반겼을 것이다.

6·25 이후에도 북한의 해군력은 연안전력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동해함대엔 소형함·고속정·잠수함을 중심으로 한 공세적 전력을, 서해함대엔 공방급 공기부양정을 위주로 하는 상륙전력을 배치했지만, 한미연합해군에 비하면 턱없이 허약하다. 게다가 북한 해군에는 절대적인 약점이 있다. 육지에 막혀 동해함대와 서해함대의 상호 증원이 불가능하다. 동·서해 함대가 완전히 단절된 것이다.

물론 강점도 있다. 북한은 1960년대 위스키급 잠수함과 공작원 침투용 잠수함을 도입했다. 우리 해군보다 30년이나 빨리 잠수함 전력을 확보했다. 비대칭전력에서 우위를 점하면서 약점을 극복하려 한 것이다. 또한 약한 수상함 전력을 대신해 옹진반도나 장산곶 일대를 요새화하고 해안포와 지대함미사일을 배치해 전력을 보완했다. 공군의 약한 항공력을 대공미사일과 대공포의 반(反)항공군으로 보완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1970년대 초에는 수상함 전력의 강화를 시도됐다. 자국산 1500t급 나진급 호위함을 동해와 서해함대에 각각 1척씩 배치했다. 하지만 북한군의 주력은 여전히 배수량 1000t 미만의 경비정과 고속정이었다.

북한은 배의 크기에는 연연치 않았다. 장비보다는 정신력과 전술을 강조하는 ‘우리식 해군무력’ 건설에 주력했다. 굳이 대양에서 싸우지 않아도 그만이고, 근해 작전능력을 극대화하면 된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북한은 고속돌진전술과 화력집중전술에 집중해 실전능력을 키웠다.

이런 전투 의지를 보여준 사례가 1999년 이후 계속된 NLL 해상충돌이다. 1999년 6월 15일 1차 연평해전에서 북한은 먼저 공격했으나, 자동화 장비를 갖춘 우리 해군의 반격으로 참패를 당했다. 선제공격을 한 SO-1급 초계정 등산곶 684정은 반파, 신흥급 어뢰정 1척은 침몰했으며, 무려 130여 명의 사상자를 낸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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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욱 | 한국국방안보포럼 선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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