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홍락/매일신문 정치1부 기자
“아이고 선거요, 그거 관심 없습니다. IMF로 먹고 살기 바쁜 판에 뭐 먹을 것 있다고 선거에 신경쓰겠습니꺼.”
대구에서 개인택시를 운영하고 있는 김상진(45)씨의 말이다. 김씨의 이 말은 사실 지역일반의 기류를 대변하는 말이기도 하다. 오는 4월 총선을 두고 새 천년을 맞아 치르는 첫 선거니 하면서 언론 등에서 의미를 부여하고 있지만 대구지역에서는 아직껏 선거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렵다.
다만 여야 정당마다 공천작업이 본격화되면서 출마 예정자들과 주변 인사들만 중앙당 방문과 지역 여론 조성 등에 분주할 뿐이다.
그러나 수도권에서 불붙기 시작한 총선시민연대의 낙천 낙선운동에 대해서는 여느 지역과 마찬가지로 적지 않은 관심이 느껴진다.
총선에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으면서도 시민단체의 낙천 낙선운동이 이번 선거에 끼칠 영향에 적잖은 사람들이 주목하고 있다.
3공 이후 6공화국에서 이르기까지 박정희·전두환·노태우 세 명의 전직 대통령을 배출해 어느 지역보다 보수 성향을 보여온 대구사람들이 시민단체라는 개혁성향 단체의 활동에 (각자의 긍·부정적인 평가는 차치하고) 이처럼 관심을 보이는 것도 이례적이다.
변화 외면 한나라당 먹을 것 없는 총선밥상
공천과정에서도 민주당과 자민련은 공천을 주려고 해도 적당한 사람이 나서지 않아 인물난에 허덕이는 반면, 한나라당은 공천을 받으려는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뤄 교통정리에 골머리를 앓는 모습을 보였다.
통상 현실적으로 철저히 무장돼 있기 마련인 정치 지망생들의 이와 같은 모습에서 이곳 정서의 흐름을 읽을 수 있다. 소위 ‘한나라당 정서’란 것이 이 지역의 현주소인 셈이다.
한나라당 공천을 따내면 사실상 당선이라는 ‘한나라당 말뚝론’이 여전히 팽배해 있는 실정인 것이다.
15대 총선 때는 YS정권의 실정으로 반 YS정서가 드높아지면서 자민련이 지역에서 녹색돌풍을 일으켜 대구 지역 의석 13석 중 8석을 차지했다. 한나라당의 전신인 신한국당은 강재섭(대구·서을), 김석원(대구 달성군) 의원만이 당선되는 데 불과, 처참한 몰골을 보였다.
한나라당(신한국당)의 그와 같은 처지는 지난 97년 대선을 전후해 완전히 반전을 이뤘다. 현실을 빙자한 자민련과 무소속 인사들의 신한국당 입당도 총선 직후부터 대선 때까지 꾸준히 봇물을 이뤘다.
반 DJ 선봉이라 할 대구가 국민회의(현 새천년민주당)와 자민련에 맞서 선택할 착지점은 이회창 후보를 내세운 한나라당뿐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치러진 지방선거는 그야말로 ‘한나라당 말뚝론’을 실감케 했다. 대구시장 선거는 물론 대구 지역 8개구·군 중 무소속이 당선된 남구를 제외한 7개 지역의 기초단체장 당선에다 광역의회마저 싹쓸이했다. 특히 광역의회 선거에서 유권자들은 당시 인물은 불문한 채 선거기호 1번인 한나라당 후보를 찍는 행태를 연출하기도 했다. 이번 선거에서도 이같은 선거행태가 반복될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우선 지방선거 당시와 지금을 비교해보더라도 별다른 상황변화가 없다는 것이 이유로 꼽힌다. 영·호남과 충청 등 삼각축을 이루어온 지역구도는 시간이 갈수록 이번 선거에서 더 뚜렷하게 전개될 판이고 DJ정권의 남다른 구애(求愛)에도 불구하고 지역의 반DJ정서 또한 변화조짐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한나라당에서 ‘이번 선거는 DJ정권에 대한 중간평가이자 차기 대선의 예선 격’이라며 ‘대구 경북에서 다음 정권을 되찾아오자’는 등으로 ‘원초적 본능’을 자극할 경우 상황이 더욱 심화할 가능성도 제기된다.
여타지역에 비해 이 지역 유권자들이 이번 총선에서 정치에 새로운 바람이 불기를 기대하는 바가 낮은 것은 아니다.
신진인사에 대한 기대가 53.7%에 이르고 부동층 또한 45.5%에 이르는 등 지역 여론조사기관인 에이스리서치가 지난 1월 대구 경북 지역에서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에도 잘 나타나 있다. 그러나 그같은 바람을 오는 총선에 투영시키는 데 유권자들은 현실적 한계를 느끼고 있다. 사실 각 정당이 이번 총선에 나설 후보자를 선정하는 과정을 보더라고 유권자들의 기대에 턱없이 부족하다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지역 제1당인 한나라당의 공천심사과정을 지켜보면 현역의원 위주로 공천이 진행되면서 지역의 일반적 바람인 신진인사로의 교체 등 변화된 어떤 모습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DJ와의 공조’라는 원죄로 인해 이 지역에서 최악의 당 인기도를 보이고 있는 자민련의 경우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대구 달서 갑 위원장이던 김한규 전총무처장관을 비롯한 탈당 사례가 이어지면서 아예 현 지구당위원장 교체는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다. 공석인 지구당을 채우기 위한 사람 찾기에 급급한 실정이다. 이 지역에서 첫 교두보를 마련하려는 민주당은 반 DJ정서의 두터운 장벽에서도 인물 찾기에 고군분투중이다. 하지만 그나마 몇 안 되는 출마 확정 인사조차 지역민들의 관심을 유도할 ‘밥상’을 찾지 못하고 있다.
낙천명단 중시한다지만
공천이 진행되고 있는 현 상황에 대해 지역의 시민·노동단체들도 우려하고 있다. 총선시민연대 대구본부 사무국장인 권혁창(33)씨는 “시민과 시민단체의 의견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기보다 여야 경쟁을 통해 눈가리고 넘어가는 예전과 똑같은 행태가 벌어지고 있다”며 안타까움을 표명했다.
정형근 의원 사태로 또다시 상황을 호도하고 있다는 시각인 것이다. 한국노총 대구본부 의장인 김경조(53)씨는 각 정당의 공천 과정과 관련, “도덕적으로 흠결이 있는 인사를 공천하고 있는 각 정당의 행태가 대단히 아쉽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도 이들 단체가 정당을 보는 눈에 차이가 있을까. 이에 대해 권씨는 “정책 면에서 민주당이 한나라당과 자민련 등에 비해 개혁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대구 경북지역에 관한 한 민주당에는 크게 기대할 것이 없다”는 언급으로 대신했다. 민주당의 지역 공천 대상인사들의 면면을 보더라도 득표력 기준이어서 개혁적 의미를 부여하기에 맞지 않다는 것이다.
반면 김씨는 한국노총 정치국에서 지난 1월 지역 노동자 2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 한국노총과 제휴할 정당으로 한나라당이 가장 높게 나타났다고 전했다. 지역의 일반 정서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결과치인 셈이다.
이와 같은 상황 전개 속에 총선 시민연대 등 시민단체의 낙천 낙선운동이 이번 총선 중 지역에서도 일정 효력을 가지느냐에 주목되고 있다. 일단 시민들은 이들 단체의 활동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총선시민연대의 낙천명단 발표가 가시화한 지난 1월 말 에이스리서치의 여론조사 결과, 대구와 경북 지역 유권자 가운데 ‘(낙천대상에 끼면) 지지후보를 바꾸겠다’고 응답한 사람은 76.7%에 달했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대로 이런 응답이 현실에서도 그대로 적용될지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시간이 흐르면서 시민단체의 활동에 대한 순수성을 의심하는 시각이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힘입은 듯 한나라당은 지역에서 총선시민연대 등 시민단체에 의해 몇 차례 발표된 낙천 대상자 명단에 오른 사람들 중 극히 일부만 배제한 채 그대로 공천을 주고 있다. 배제 인사조차도 시민단체의 의견을 존중해서라기보다는 공천자 교통정리에 활용할 뿐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심지어 시민단체의 낙천 낙선자 명단발표를 공천에 적극 반영하겠다고 밝힌 민주당조차 인물난 등으로 지역에서 원칙 없는 공천을 하고 있다. 자민련은 아예 수용하지 않겠다고 밝힌 만큼 언급할 필요도 없다.
특히 한나라당이 이처럼 ‘대담한’ 공천을 행할 수 있는 것은 지역구도라는 큰 버팀목이 있기 때문이다. 한나라당은 물론 자민련도 제기 하는 ‘음모론’이 지역에서 일정한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는 믿음에서다. 낙천대상 명단에 오른 지역의 한 현역 의원은 낙천대상 혐의를 극구 해명하면서도 “낙천 낙선 명단에 오른 것이 오히려 선거전략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언급할 정도다. 사실 지역에서는 시민단체는 낙천 낙선운동이 ‘시민단체와 여권 핵심부 간의 짜고 치는 고스톱’이란 음모론적 해석에 적지 않게 귀를 기울이는 모습이다.
식자층도 시민단체의 그와 같은 활동이 오히려 지역구도를 자극해 결국 대구·경북지역에서 한나라당의 선거전략을 도와주는 게 아니냐는 우려를 제기하고 있다. 시민단체의 어떤 활동이든 그 순수성을 의심받게 되면 더는 효력을 가질 수 없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민단체의 낙천 낙선운동이 지역에서도 여전히 지켜봐야 할 주요 변수라는 데는 이론이 없다. 진행형이기 때문이다. 낙천운동에 이어 낙선운동으로까지 번질 경우 유권자들의 방향을 쉽사리 예측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제대로 방향을 잡을 경우, 시민들의 변화에 대한 강렬한 욕구와 맞물리면서 휘발성이 큰 사안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또 다른 변수는 소위 ‘영남신당’ 창당을 들 수 있다. 영남권을 주도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는 정호용 의원 등이 물밑에서 추진해온 영남신당이 태동할 경우, ‘차기 대선에 나설 지역 인사를 키우자’는 등으로 지역민의 정치적 공허감을 자극해 세를 키울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와 함께 현재 수사가 진행되고 있는 정치인에 대한 병무비리와 선거 때마다 불거져 나오는 색깔론 시비 등도 지켜 볼 변수다.
하지만 이런 변수들이 ‘전가의 보도’로 여겨지는 ‘지역구도’를 압도하는 위력을 떨칠 것인가에는 고개를 가로젓는 이들이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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