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2월호

“李·尹은 태종, 安은 세종 닮았다”

‘태종처럼 승부하라’ 박홍규 고려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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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자홍 기자

    jhkoo@donga.com

    입력2022-01-30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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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외형은 박정희, 내용은 DJ가 태종과 유사

    • 이병철-이건희 부자 태종·세종 시대 연상

    박홍규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지호영 기자]

    박홍규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지호영 기자]

    고려가 무너지고 조선이 건국되던 여말선초(麗末鮮初), 조선 건국에 앞장서고 두 차례 왕자의 난을 거쳐 왕좌에 오른 ‘태종 이방원’의 모습을 조명한 KBS 드라마가 시청자의 이목을 끌고 있다. 대통령선거라는 현실 속 권력 교체기와 맞물려 이방원의 권력투쟁과 왕좌를 향한 집념이 대통령이 되고자 벌이는 여야 대선후보의 각축전과 닮았기 때문이다. 서점가에서는 태종 이방원의 일대기를 다룬 책 ‘태종처럼 승부하라’가 독자의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다.

    창업·수성 동시에 이룬 군주

    ‘태종처럼 승부하라’는 변방 무장 이성계의 아들로 태어나 조선왕조의 가장 영광스러운 시대로 알려진 세종 시대를 열어준 태종 이방원의 정치적 일대기를 다룬 책이다. 태종의 삶을 크게 네 시기로 구분했다. 1부는 이방원이 정몽주를 척살하고, 두 차례 왕자의 난을 거쳐 왕좌에 오르는 권력 쟁취 과정을 담았고, 2부에서는 태종 ‘집권 전반기’ 10년을 다뤘다. 유교 정치의 기틀을 닦는 동시에 사돈과 외척까지 숙청한 태종의 ‘야누스적 정치’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집권 후반 8년을 담은 3부는 유신의 교화 선언 이후 ‘유교적 군주’로 거듭나는 태종의 모습을 그린다. 4부는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준 뒤 승하하기 전까지 4년간 상왕으로서 세종의 치세를 뒷받침한 ‘상왕기’를 다루고 있다.

    ‘태종처럼 승부하라’를 펴낸 박홍규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태종은 창업과 수성을 동시에 이뤄낸 역사적으로나 세계적으로 드문 군주”라며 “태종이 권력을 쟁취하고 국정을 안정시키는 과정에 어떤 승부수를 던졌는지 살펴보면 이번 대통령선거에 나선 대선후보들이 ‘승리’하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힌트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태종처럼 승부하라’는 태종 재위 18년 가운데 10년을 기점으로 창업과 수성의 군주로 구분했다. 어떤 이유에서인가.

    “학계에서는 그동안 태종을 ‘권력의 화신’과 ‘유교적 군주’라는 서로 다른 두 이미지로 구분해 연구해 왔다. 골육상쟁을 통한 권력 찬탈과 권력 유지를 위한 무자비한 숙청을 부각하면 태종은 ‘권력의 화신’이 맞다. 그에 비해 신생 왕조의 제도 확립과 왕권 강화라는 유교적 군주의 면모에 초점을 맞추면 태종은 세종의 융성한 치세 기반을 닦은 ‘공론정치가’다. 그러나 이 같은 이분법적 설명으로는 태종 리더십의 요체를 보여주는 데 한계가 있다. 권력의 화신과 유교적 군주라는 이분법에서 벗어나 태종의 삶을 입체적으로 살펴봐야 ‘정치가다운 정치가’ 태종의 진면목을 파악할 수 있다.”

    태종이 정치가다운 정치가로 변신한 시점을 언제라고 보나.

    “태종 이방원이 폭력적 방법으로 권력을 잡는 과정은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 태종은 18년을 통치했고,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준 뒤에도 4년 더 상왕으로 후견인 노릇을 했다. 태종 입장에서 보면 왕위에 오르기까지는 ‘권력의 화신’이었지만, 왕위에 오른 이후부터는 조선왕조의 미래를 준비하는 데 더 많은 힘을 쏟았다. 특히 태종이 진짜 승부수를 던진 지점은 재위 10년 ‘유신의 교화’를 선언하며 ‘창업 군주’에서 ‘수성 군주’로 변모했을 때다.”



    창업 군주와 수성 군주는 어떻게 다른가.

    “태종의 집권기는 1398년의 정변에서 시작해 태종 10년 외척 민씨 형제의 척결까지를 전반기, 유신의 교화 선언 이후를 후반기로 구분할 수 있는데, 전반기가 정변으로 인한 이중구조의 시기였다면 후반기는 전반기에 이뤄진 정치제도와 강화된 왕권을 바탕으로 본격적으로 유교 정치를 시도한 때다.”

    태종이 어떤 이중구조에 놓여 있었나.

    “집권을 위해 불가피하게 정변을 일으켜야 했던 구조와 공자와 맹자 중심의 ‘주자주의’(박 교수는 ‘성리학’ 대신 주자주의라는 개념을 사용했다)를 통치 이념으로 삼아 유교적 통치를 해야 하는 상황에 동시에 놓여 있었다. 그런데 태조가 죽고 민씨 형제를 처단한 재위 10년 즈음에는 정변 구조가 완전히 소멸됐다. 이때 태종은 자신의 왕권에 위협이 될 인물이 없었기에 전제군주의 길로 나아갈 수도 있었지만 유교적 군주로 결정적 전환을 시도한다. 조선의 앞날을 위해 승부수를 던진 것이다.”

    결정적 승부수=유신의 교화 선언

    결정적 승부수가 무엇인가.

    “태조가 죽자 태종은 주자가례에 따라 3년상을 치르고 태조의 신주를 종묘에 모시는 부묘 의식을 거행함으로써 완벽하게 권력자로서 홀로서기를 했다. 이때 태종은 ‘새로운 정치를 하겠다’고 선포했다. 그것이 ‘유신의 교화’다. 유신은 낡은 제도를 새롭게 고친다는 의미로 일본의 메이지유신, 한국의 10월 유신과 같은 단어다. 즉 태종이 ‘유신의 교화’를 선언한 것은 태조 없는 정치의 시작, 유교적 군주로서 자신만의 정치 시대 개시를 선포한 것이다. 조선왕조가 오래가려면 힘만으로 통치해서는 안 되겠다, 주자주의에 입각해 말씀으로 교화시켜 통치하겠다는 결심이 ‘유신의 교화’ 선언으로 이어진 것이다.”

    박 교수는 “태종은 ‘유신의 교화 선언’ 이후 후반기 8년과 상왕기 4년까지 총 12년 동안 주자주의에 기초한 유교 군주로서 통치 모범을 보였고, 그 덕에 세종이 큰 업적을 쌓을 수 있었다”고 강조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집권 세력이 태평성대를 구가했을 때는 단절의 역사가 아니라 릴레이 계주 선수들이 바통터치를 하듯 물 흐르듯이 선대와 후대가 조응한 시대였다. 권력의 단절은 곧 정변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박 교수는 “태종이 집권 10년차 ‘유신의 교화’ 선언으로 창업 군주에서 수성 군주로 스스로를 변모시킨 것은 조선왕조의 먼 미래를 내다보고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깊이 성찰했기에 가능한 결단이었다”며 “태종이 자기 객관화를 통해 역사적 소임을 정확히 알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평가했다.

    “시대와 체제를 초월해 정치의 본질은 권력을 매개로 이념을 실현해 가는 과정이다. 정치가가 자신에게 주어진 과업을 이뤄내려면 자신이 갖고 있는 권력의 효용과 한계부터 직시해야 한다. 무모하게 개혁에 나섰다가 실패한 지도자를 정치가라고 할 수는 없지 않나. 현실적 제약을 극복해내 시대적 과업을 실천함으로써 공동체를 위해 업적을 남긴 사람만이 지도자이자 정치가로 추앙받을 자격이 있다. 그런 점에서 태종은 집권 과정에서 ‘성군’이라고 할 수 없지만, 집권 후반기 ‘유신의 교화 선언’ 이후는 세종 치세를 연 성군의 길을 걸었다고 보는 게 옳다. 태종은 권력 교체와 왕권 확립이란 창업과 수성을 모두 해낸 정치가다.”

    박 교수는 “태종이 양녕에서 충녕으로 세자를 교체한 것도 자신의 뒤를 이어 ‘유교 군주’의 치세를 더 바랐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양녕은 아버지 태종을 닮아 혈기왕성했다. 무가(武家)의 후예답게 사냥을 즐겼고, 궁궐 안에서 성군 공부에 매진하기보다 음악과 여색을 즐겼다. 아버지보다 훨씬 많은 교육을 받은 양녕은 자신이 왕위를 계승하면 정치를 아버지보다 더 잘할 것이란 자부심이 강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양녕의 자부심이 ‘자만심’으로 변질되면서 태종이 의도한 성군 프로젝트에 반발했다. 유교적 치세를 바랐던 태종이 양녕 대신 충녕을 최종 선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재명·윤석열 태종 유형에 가깝다”

    박홍규 교수는 “태종은 자신이 서 있는 역사적 좌표를 정확히 인식했기에 집권 후반기 스스로 성군의 길로 들어섰다”고 평가했다. [지호영 기자]

    박홍규 교수는 “태종은 자신이 서 있는 역사적 좌표를 정확히 인식했기에 집권 후반기 스스로 성군의 길로 들어섰다”고 평가했다. [지호영 기자]

    ‘별의 순간’을 잡아 창업에 성공했다 하더라도 수성에 성공하지 못하면 ‘유성’처럼 빛을 잃고 한순간 사라지는 게 권력의 세계다. 20대 대통령선거를 앞둔 대한민국 정치 현실에 500년 전 태종의 리더십이 시사하는 바는 뭘까.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역대 대통령 가운데 태종과 유사한 리더십을 발휘한 대통령이 있나.

    “표면적으로 태종과 가장 유사한 사람은 박정희다. 태종이 조선의 세 번째 왕, 박정희도 광복 이후 세 번째 대통령이다. 쿠데타로 집권해 18년을 재임하고 유신을 선포한 것도 비슷하다. 외형은 비슷한데 내용은 많이 다르다. 태종은 유신의 교화 선언 이후 힘의 정치가 아닌, 인과 의를 중시하는 유교적 군주로 거듭났다. 그에 비해 박정희는 유신 이후 절대 권력자의 길을 걸었다. 10월 유신 이후 ‘한국적 민주주의’라고 했지만 산업화와 국방 안보를 우선시하며 인권과 참여 같은 민주주의의 기본 가치를 희생시켰다. 결과적으로 자유민주주의의 이념에서 더 멀어진 것이다. 그러면서 권력은 더 절대화됐다. 결국 국민 마음이 멀어졌고, 그 끝은 비극적 결말로 이어졌다. 태종이 권력의 정점에 섰을 때 스스로 유교적 군주로 다시 태어나 세종의 치세를 뒷받침한 것과 달리 박정희는 유신 선포 이후 절대 권력자의 길로 들어선 것이 가장 큰 차이다.”

    박정희가 아니면 역대 대통령 중 누가 태종과 유사한가.

    “내용적으로는 김대중 전 대통령(DJ)이 태종과 좀 더 흡사하다.”

    어떤 점에서 그런가.

    “권력을 장악하는 집권 과정이 많이 닮았고, 권력을 유지하고 승계한 과정도 비슷하다.”

    박 교수는 “태종과 DJ는 권력, 즉 집권을 향한 집요함 측면에서 비슷한 특성을 보인다”며 “네 번의 도전 끝에 정적이었던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와 DJP연합을 이뤄 집권에 성공한 것은 두 차례 왕자의 난을 거쳐 왕좌에 등극한 태종과 집권에 대한 집념에서 유사성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DJ가 집권 후 IMF 외환위기를 극복하고 실용적 인재 등용과 국민통합, 남북 화해를 위해 노력하고 한일관계를 회복시켜 동아시아에서 한국의 위상을 크게 높인 점도 태종이 인재를 널리 등용하고 다양한 제도 정비로 세종의 치세를 예비한 것에 비견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이제 곧 차기 대통령을 선출할 선거가 치러진다. 여야 대선후보 가운데 태종의 면모를 갖춘 후보는 누구인가.

    “이재명 민주당 후보와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가 태종 유형에 가깝다. 이 후보는 시시각각 변하는 상황 변화에 기민하게 대처하는 모습이 조선 건국 초기 태종이 보였던 민첩함을 연상시킨다. 대장동이란 난관을 뚫고 대선후보에 오른 과정은 불리한 여건을 극복한 태종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대선후보에는 올랐지만 본선이라는 마지막 관문이 남았다.

    “문재인 대통령을 지지했던 세력을 이 후보가 자신의 지지자로 만들어낸다면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다.”

    이 후보가 창업 과정은 태종과 비슷할지 모르지만, 수성을 잘할 수 있겠느냐는 우려가 있다.

    “권력을 장악해 가는 과정은 이 후보가 태종에게 더 배울 건 없다. 이 후보가 태종에게 배워야 할 것은 집권 후반기 진짜 승부다. 정치가라면 권력을 추구하더라도 한계를 명확히 인식하고 미래를 위해 지금 할 일이 무엇인지, 또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잘 판단해야 한다. 국가의 이익이 무엇인지, 국민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해 그것을 구현하는 게 지도자다. 태종은 신생 왕조 3대 왕으로써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정확히 인식하고 힘의 지배가 아닌, 인과 의라는 유교적 이념에 따라 통치하는 성군이 되는 길을 스스로 선택했다. 태종이 자신이 서 있는 역사적 좌표를 정확히 인식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尹, 태종의 용의주도함 배워야

    윤석열 후보는 어떤가.

    “추미애 전 장관과 갈등을 빚은 국면에서 태종의 결기와 강단을 보여줬다. 그런데 태종과 다른 점도 많다.”

    어떤 점에서 그런가.

    “윤 후보가 검찰총장 시절에는 어땠는지 몰라도 정치의 영역에 나와 선대위를 꾸리고 선거 캠페인을 하면서 지금까지 보여준 모습은 꼼꼼하고 용의주도하지 못했다. 어느 면에서는 다소 설렁설렁하다는 느낌도 줬다. 태종은 권력투쟁을 할 때도 그랬지만 통치할 때도 시나리오를 치밀하게 짜서 에이전트까지 활용해 주도면밀하게 일을 처리했다. 태종은 집권하기 전까지 매 순간이 절체절명 위기의 연속이었다. 한 걸음만 잘못 디뎌도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정확히 인식했기에 호방했지만 용의주도함을 잃지 않았다. 지금까지 윤 후보는 그 같은 주도면밀함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대선후보로서 윤 후보의 당선 가능성은 어떻게 보나.

    “윤 후보 경쟁력은 후보 개인의 능력뿐 아니라 국민의힘이 얼마만큼 후보를 백업해 줄 수 있느냐에 달렸다. 그런데 지금까지 국민의힘이 보이는 모습은 큰 힘이 못되고 있다.”

    태종의 집권 과정에서 윤 후보가 배울 점은 무엇일까.

    “큰 싸움을 앞둔 태종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내부 단속이다. 지금 윤 후보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경쟁자였던 홍준표 의원과 함께하는 것이 아닐까. 당내 인사조차 아우르지 못하는데, 대통령이 돼서 국민통합, 사회통합을 이룰 수 있을 것이란 믿음을 국민에게 어떻게 줄 수 있겠나.”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는 어떤가.

    “태종은 자신을 둘러싼 외부 상황 변화를 예민하게 관찰하고 결정적 순간에 먼저 움직여 상황을 자기에게 유리하게 바꿔냈다. 한계상황에 부딪히면 돌파하고 나중에 수습했다. 그런 점에서 안 후보는 태종이라기보다 세종 이미지에 더 가깝다.”

    태종 없는 세종은 가능하지 않은 것 아닌가.

    “안 후보 스스로 권력을 창출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정치 입문 이후 정치적 자산을 많이 잃었다. 집권하려면 그를 도울 조직이 튼튼하거나, 국민 마음을 사로잡을 정책이 있어야 하는데, 둘 다 분명치 않다. 다만 세종을 아버지 태종이 만들어줬듯 세종형 안철수를 국민이 만들어줄 수는 있다. 국민이 치세를 잘할 것 같은 리더를 찾는다면 말이다.”

    태종처럼 승부해야 하는 것이 꼭 정치 영역에만 국한된 얘기는 아닌 것 같다. 대기업의 경영권 승계가 활발한데, 대기업 총수 가운데 태종에 비견할 만한 이는 누구라고 보나.

    “기업 쪽이 내 전문 분야가 아니라 상식적 수준에서 얘기하면 창업과 수성을 잘 이어온 기업은 삼성이 아닐까 싶다. 이병철 회장이 창업했고, 장남 대신 삼남을 후계자로 정한 것도 비슷하고, 이건희 회장이 반도체 등으로 업종 전환을 잘해서 글로벌 기업으로 키운 것은 세종의 융성한 치세에 비견할 만하다.”

    현대그룹은 어떤가.

    “정주영 회장 자녀들의 경영권 다툼을 ‘왕자의 난’이라고 표현했을 만큼 유사한 점이 있다. 왕자의 난을 거쳐 정몽구 회장이 현대차그룹을 이끌고 아들 정의선 회장에게 물려준 상황은 조선 초기와 비슷하다. 창업주 정주영 회장은 태조, 왕자의 난을 거쳐 현대차그룹을 이끈 정몽구 회장은 태종에 비유할 수 있다. 정 회장도 현대차그룹을 글로벌 기업으로 키우지 않았나. 왕조도 그렇지만 기업 역시 리더가 먼 미래를 내다보고 수성할 수 있는 기틀을 잘 닦아 놓는 게 중요하다.”



    구자홍 기자

    구자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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