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공간에서 만난 ‘공룡이’
아이는 어른보다 靈的 레벨 높다
디지로그 세대는 지식을 평평하게 흡수
선하게 행동해야 친구 생기는 세상
게이미피케이션이 만든 직업 세계
최근 ‘메타버스란 무엇인가’를 출간한 이인화 작가. [조영철 기자]
2008년 이화여대에서 메타버스를 연구하는 ‘가상세계 문화기술연구소’를 설립, 8년간 운영했던 소설가 이인화(56)는 국내 몇 안 되는 메타버스 전문가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최근에 펴낸 ‘메타버스란 무엇인가’(2021)에 눈길이 간 이유다. 단순히 기술이나 마케팅적 접근이 아니라 가상공간 속 실제 삶에 대한 생생한 인문학적 접근이란 점에서 쉽게 다가오고 읽혔다. 이번 책도 한 달 만에 쓴 것이라고 한다. 집필실이 있는 서울 양천구 목동 오피스텔은 공간의 90% 정도가 책에 둘러싸인 작은 도서관이었다.
열세 살 유튜버는 나의 스승
책 서문은 유튜브와 비슷한 인터넷게임 가상공간 로블록스에서 만난 ‘공룡이’와의 인연으로 시작한다. ‘거지놀이’를 하며 아이템을 구걸하던 작가에게 ‘공룡이’는 흔쾌히 아이템을 선물한다. 작가는 선물을 받아 들고 이렇게 묻는다.“공룡이는 열두 살일까, 열세 살일까, 아니면 더 많을까. 공룡이의 단호함, 당당함, 거리낌 없는 연대감. 그가 준 아이템은 부모가 준 용돈으로 산 것이 아니라 제 손으로 번 것이다. 공룡이는 ‘로블록스’에서 스스로 돈을 벌고 있는 개발자 어린이 중 하나다. 나는 기껏해야 나뭇가지, 우유 같은 아이템을 받으려고 구걸을 한다. 공룡이는 내게 왜 이런 걸 주는가? 콩나물시루처럼 빽빽이 들어차 와글거리는 사람들의 우스갯소리, 환호, 야유, 욕설, 협박, 낄낄낄깔깔 혼을 빼놓았다 이리 갔다가 저리 갔다가, 걸어갔다가 뛰어갔다가, 로그아웃으로 사라졌다가 나타났다가 했다. 그런데 거기에 예기치 않은 친절과 사랑이 숨어 있었다.”
인터뷰는 ‘공룡이’로 대표되는 인터넷게임 로블록스 가상공간 안 10대 이야기로 시작됐다.
로블록스에서 만난 10대들을 ‘형아’라고 부르는 게 인상적이었습니다. 책에 쓰신 대로 메타버스 공간에서는 ‘어린이가 어른의 스승’인 건가요.
“나이에 대한 고정관념을 깬 게 ‘로블록스’ 덕분이었습니다. 제가 스승으로 생각하는 유튜버 중에 ‘옐롯’이라는 열세 살 초등학생이 있는데요. ‘나도 게임 한번 만들어보자’ 찾다가 알게 됐습니다. 목소리는 어린데 청산유수고 핵심을 찔러서 강의하는 데 깜짝 놀랐습니다. 처음에는 게임 개발자인 아버지가 원고를 써주고 대신 읽는 거라고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직접 만났나요.
“옐롯을 의심하지 않게 된 건 1대 1 문답으로 가르침을 받을 때였습니다. 숱한 돌발 질문도 완벽하게, 그것도 감정의 흔들림 없이 평온하게 답하는 걸 보면서 스스로 답을 한다는 걸 알게 됐죠.
제자 남편이 방송국 PD인데 어렵게 수소문해 옐롯의 소재를 알아내 찾아 갔더니 거제도에 너무 평범한 서민 가정에서 자라는 초등학교 6학년생이었습니다. 부모가 맞벌이라 큰아들 옐롯에게 점심값을 주고 나가면 남동생 데리고 제일 잘 놀 수 있는 게 로블록스에 들어가는 거였다고 하더군요. 그러다 게임 만드는 법을 스스로 터득해 직접 유튜브로 가르치게 됐다는 겁니다. 제자가 옐롯에게 학기말 특강을 요청했더니 ‘나이도 어리고 실력과 말재주가 부족해 힘들 것 같다’는 정중한 거절의 답을 들었다고 합니다.
옐롯의 경우는 특별하지 않습니다. 지금 어린이들은 더는 옛날의 어린이가 아닙니다. 10대 소녀 환경운동가인 그레타 툰베리나 10대 소녀 과학자 기탄잘리 라오 같은 셀럽이 괜히 나온 게 아니란 말이죠. 문명이 변하고 있습니다. 이어령 선생 용어로 ‘디지로그’ 문명이 돼 아날로그와 디지털이 막 섞이면서 나이 장벽이 깨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게 지금 메타버스 공간에서 이뤄지는 일들입니다.”
경제력을 갖게 된 역사상 첫 어린이들
그는 “어린이들이 경제력을 갖게 된 것에 주목해야 한다”며 말을 이었다.“코로나 블루라고 하지만 아이들은 메타버스에서 잘 놀 뿐만 아니라 한 푼이라도 더 벌려고 열심히 움직입니다. 거래를 하고, 퀘스트를 수행하고, 펫을 양육하고, 옷을 만들고 차와 배, 비행체를 만들어요. 새로운 월드를 만들어놓고 입장료를 받기도 합니다. 한 해 우리 돈으로 60억 원을 번 소년도 있습니다.
저는 이런 변화가 굉장히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어린이들은 어느 공동체에서나 돈도 지식도 권력도 없는 약자(弱者) 아닙니까. 그런데 그들이 경제력을 갖게 되면서 더는 성년에 대한 미성년, 부모에 대한 자식, 스승에 대한 제자 이런 관계가 아닌 동등하고 평등한 사회 구성원으로 자리매김하는 시대가 옵니다. 사회적으로 가장 약한 사람들에게 좋은 것이 모두에게 좋은 거 아닌가요.”
멘털로는 너무 연약한 사람들 아닐까요. 물론 나이가 든다고 강해지는 건 아니지만.
“나이가 어리고 순수하기 때문에 더 예민하고 섬세해서 보는 눈이 날카롭다고 할 수 있죠. 도를 깨친 선사들이나 피카소도 아이의 순수한 눈으로 세상을 보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아이들이야말로 어른들보다 영적(靈的) 레벨이 높죠.
로블록스 안 어린이들이 얼마나 예민하나면 상대의 미세한 몸짓 하나도 그냥 지나치지 않아요. 열세 살 형이 저를 자기들이 만든 월드로 데려 가는데 저는 사실 가고 싶지 않은 월드가 많습니다. ‘점핑 맵’ 같은 거는 속이 울렁거리고 심할 때는 토할 거 같을 때도 있어요. 발판에서 뛰어내려야 되는데 아래를 내려다보면 너무 어지럽거든요. 그래서 딴청을 피우면 금방 알아챕니다.”
원래 선생이 게임 마니아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속이 울렁거릴 정도로 아이들을 쫓아다닐 일은 아닌 것 같은데요(웃음).
“저한테 진짜 뭘 주는데 어떻게 안 따라갑니까? 저는 거지고 형들이 주는 걸로 먹고사는데 따라가 줘야지요. 좋아서 하는 게 아니에요. 사회생활하고 똑같습니다.”
메타버스 가상공간을 경험한 적이 없는 저로서는 아바타의 몸짓만 보고도 마음을 알아챈다는 말이 신기하게 들립니다.
“본래 사람들이 대화할 때 언어를 통한 소통이 7%밖에 안 됩니다. 아바타끼리 소통하는 가상공간에서는 표정이나 몸짓을 읽는 게 더 중요하죠. 더구나 어린이들은 감각이 예민하고 집중력이 더 뛰어납니다.”
‘디지로그’ 어린이들은 흔히 말하는 MZ세대와는 또 다른 것 같아요.
“지금 메타버스 주류 세대는 MZ가 아니라 그다음 세대, 이른바 ‘알파 세대’입니다. MZ세대가 1980~2004년생이라고 할 때 알파 세대는 2004~2008년에 태어난 아이들입니다.”
그 세대의 특징을 짚는다면요?
“한마디로 모든 걸 평면적으로 이해합니다. 처음부터 본투비(borm to be) 글로벌입니다. 우리 같은 중년들에게 ‘글로벌’이란 비행기나 배를 타고 해외로 나가 글로벌 시장에 진출한다고 할 때 쓰는 의미잖아요. 한마디로 나(I)는 여기에 있는 거고, 몸이 이동하는 거죠. 하지만 로블록스 안에서는 81개국 언어가 채팅으로 마구 올라옵니다. 200개국이 넘는 아이들이 들어와 노니까요. 인터넷 공간에서 정말 평등한 소통이 이뤄지는 거죠.”
채팅 문자들이 다 번역되나요.
“아니요. 한글은 한글대로 뜨고 영어는 영어, 심지어 아프리카어도 올라옵니다.”
그런데 어떻게 소통하나요
“앞서 말했듯, 언어보다 몸짓으로 하니까요. 물론 한국어도 올라옵니다. 한국어와 다른 언어를 쓰는 바이링귀스트(이중 언어자)도 있고요. 걔들이 또 다른 아바타를 연결해 줍니다. 노는 데 아무 문제없습니다. 메타버스 세상은 그야말로 정말 평평한 판입니다. 완전한 메타버스 세상이란 건 말 그대로 다른(메타·Meta는 영어 접두사로 무엇을 넘어, 무엇에 대한, 무엇을 초월한이라는 뜻) 유니버스(우주), 메타 유니버스입니다.”
지금 10대는 지식 습득 과정이 다르다
그는 알파 세대는 지식 습득 과정도 완전히 다르다고 했다.“디지로그 세대의 학습 방식은 사회적 분산 인지 환경에서 배우는 지식입니다. 인터넷에 산재한 지식을 평평하게 흡수한다는 말이죠. 옛날에 우리 세대는 교실에서, 선생님을 통해서 배웠습니다. 지식을 ‘흡수’한 거죠. 그때는 인터넷도 없었고, 사물을 다르게 볼 수 있는 거라곤 책 정도밖에 없었습니다. 지금은 인터넷 안에 모든 지식이 있고 그게 널리 흩어져 있습니다. 초·중·고교, 대학교라고 하는 어떤 레벨링된 제도 속에서 공부하는 게 아니고 완전히 평평한 평면 위에 놓인 지식을 배우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사고구조도 바뀌나요.
“그렇죠. 과거가 아닌 지금 현재가 중요해지죠. 우리 세대가 살았던 시대는 민주화, 산업화, 선진화처럼 뭔가 해결해야 될 역사적 과제가 있었잖아요. 그런데 지금은 미국, 알바니아, 르완다 소식이 인터넷 공간 안에서 평등한 콘텐츠가 돼 실시간으로 올라옵니다. 이러다 보니 구성원들은 어떤 단일한 목표라는 시대적 과제가 있는 게 아니라 각각 다른 비전과 목표와 취향을 가진 사람들이 각자의 인생을 즐겁게 살아가는 게 최선인 시대가 된 거죠. 어제로부터 이어지는 인연의 끈에 연연하는 문화가 아니고 오늘과 내일이 중요한 문화.”
아이들이 더 똑똑해졌다고도 할 수 있나요.
“훨씬 똑똑해졌지요. 제 장인이 고등학교 생물 선생님이셨는데 1950년대 후반 60년대 초반에 대학을 다닐 때 DNA라는 걸 처음 배우셨대요. 그런데 요즘 아이들은 DNA를 넘어 인간게놈 유전자가위까지 배우고 있어요.”
저희 같은 중년은 새것을 따라가기가 숨이 가쁜데요.
“계속 배워야지요. 옛날 것은 빨리 정리하고 새로운 것을 배우면서 현재와 미래를 긍정해야 됩니다. 저는 배우 이순재 선생님을 존경하는데요. 얼마 전에 연극 ‘리어 왕’을 마치셨죠. 어느 인터뷰에선가 ‘나이 드니까 대사가 외워지지 않아서 연습을 더 많이 해야 된다’고 하시더라고요. 맞아요. 나이가 들수록 공부를 포기할 것이 아니라 공부할 시간을 더 늘려야 합니다. 양을 늘려야 겨우 옛날만큼 따라갈 수 있습니다. 한국 여성 평균연령이 90세가 넘는 시대가 곧 옵니다. 그러면 적어도 75세까지는 일해야 됩니다. 그러려면 끊임없이 배워야죠. 지금까지 배운 것보다 더 많이, 아침부터 밤까지 공부해야 됩니다.”
도대체 뭘 위해서 그렇게 힘들게 살아야 하죠?
“배우는 거 자체가 즐거운 일 아닌가요. 목적이요? 공자가 말한 배움의 기쁨을 누려야지요.”
메타버스 게임 공간은 선(善)한 공동체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가전 정보기술 전시회 ‘CES 2022’에서 한 관람객이 현대차 메타버스를 체험하고 있다. [동아DB]
“로블록스를 체험해 보면 아시겠지만 그 문화는 굉장히 선(善)합니다. 정말 힐링이 많이 됩니다.”
힐링이 된다고요?
“애들이 너무 착합니다. 완전히 동심으로 돌아가 진짜 내가 잊어버리고 있던 어린 시절을 느낍니다. 뭐든 도와주려 하고 친절을 베풀려 하고 말이죠. 현실에는 그렇지 않던 아이들도 여기에 들어오면 그렇게 되는 것 같아요. 어른들은 지금 접촉의 공포, 경제적 공포, 불안과 불행을 이야기합니다. 코로나19로 지구촌 전체가 인종적·사회적 긴장감으로 가득하지요. 넷플릭스와 유튜브로 시간을 보내면서 정보 추천 알고리즘이 만드는 편향성에 중독돼 가고 있지 않습니까. 저는 로블록스에 들어가면 ‘당신들이 지금 해야 할 일은 우리처럼 사는 거예요. 이런 행복감을 당신들도 누릴 자격이 있어요’라고 말하는 아이들 목소리가 들려요. 정말 생기발랄한 세상이거든요.”
그는 “로블록스 세상이 선한 것은 선하게 행동해야 친구가 생기기 때문”이라고도 했다.
“그 안에서 나쁜 평가를 받으면 소문이 쫙 나요. 바로 왕따가 됩니다. 남으로부터 선물을 받기만 하고 보답하지 않는다거나 초대를 받았는데 가지 않는다거나 인사를 했는데 응답하지 않는다 같은 부정적 평판이 쌓이면 친구들이 떨어져 나가고 어느 순간 아무도 말을 걸지 않습니다.”
아바타를 바꿔버리면 되지 않을까요.
“(단호한 표정으로) 그건 안 됩니다. 아바타 만드는 것 자체가 돈이 듭니다. 아이들은 아바타만 보고도 얼마짜리인지 금방 압니다. 얼굴 표정은 물론 눈짓, 몸짓, 심지어 머리카락 염색, 가발에도 돈이 들어갑니다.”
나쁜 평은 어떻게 알려지나요.
“ID가 다 있으니까요. 계속 따라다니는 거죠.”
로블록스 체험은 얼마나 하신 건가요.
“집중적으로 한 건 1년 정도 됩니다. 원래 로블록스가 나온 건 10년이 넘어요. 처음에는 너무 거칠었어요. 그냥 초록색 평면만 있고 너무 조악해서 ‘망하지 않겠어?’ 했습니다. 제가 학교에 있을 때 수백 개 메타버스에 거주하며 연구했더랬습니다. 당시만 해도 500여 개가 넘었고, 대학원생마다 전담하는 메타버스가 따로 있었습니다. 대부분이 망했죠. 저는 그 과정을 다 지켜보았습니다. 로블록스와 비슷했던 ‘클럽 펭귄(Club Penguin)’도 순식간에 문 닫는 걸 보았으니까요. 지난 몇 년간은 게임에서 손을 놓고 있었는데 갑자기 2020년부터 로블록스 검색어가 마구 뜨더라고요. 조회수도 급격히 올라가고. 저럴 게임이 아닌데 싶어서 다시 들어가 봤더니 와아~ 옛날과 완전 달라졌더라고요.”
무슨 변화가 있었던 건가요.
“개발자들이 들어와 크리에이터(창작자) 이코노미가 생긴 거죠. 유능한 개발자 몇 명만 있어도 전체 메타버스에 엄청난 활력을 불어넣습니다. 크리에이터 한 3~4%가 전체 공간에 에너지를 다 공급한다고 보면 됩니다.”
월 160만 원씩 버는 게임 생태계
현실도 살아내느라 힘든데 굳이 가상공간까지 들어가서 에너지를 쓸 필요가 있을까요? 돈이 되나요, 밥이 되나요(웃음)“저는 스트레스가 사라집니다. 실제로 게임이나 인공지능 채팅을 하면 스트레스 완화 효과가 있다는 논문도 많습니다. 우울증도 줄고요.”
저는 인터넷게임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습니다.
“잘하셨습니다(웃음).”
그리고 일단 게임에 대해 부정적입니다.
“부정적인 거 분명히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측면을 최소화하고 일상의 문화로 끌어당기려는 노력도 함께 진행되고 있다고 봅니다. 작년에 유동수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사행성 확률형 아이템 금지법을 발의한 것이 대표적입니다. 사람들이 게임하면서 지나치게 돈을 많이 쓰지 못하게 만드는 최소한의 제재가 필요합니다. 로블록스만 해도 10대가 워낙 많이 모이니까 미성년자 약취, 유인 이런 것들을 못하게 하는 제도가 발달돼 왔습니다. 예를 들어 숫자 입력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식으로요.”
휴대전화 번호랄지 금액이랄지?
“그렇습니다. 주목할 건 게임 그 자체가 아니라 게임 경제, 즉 게이미피케이션입니다. 게임 세상은 지금까지 없었던 경제를 만들어냅니다. 현실에서 일자리가 생기는 건 한계에 도달했다는 거 다 아시잖아요.”
그는 대표적인 예로 필리핀을 들었다.
“필리핀에서 만든 ‘액시인피니티(AXS)’라는 게임이 100만 명 이상을 먹여 살리고 있어요. 물방울처럼 생긴 ‘액시’라는 몬스터를 사서 카드를 가지고 배틀을 하면 돈이 나오는데 그걸 채굴해서 NFT(대체불가능토큰) 거래소에 파는 거예요. 그걸로 한 달에 160만 원 정도를 버는데 필리핀에서는 충분히 생활비가 되거든요. 사실 게임을 아는 사람 처지에서 보면 굉장히 허접한 게임이에요. 그런데 거기서 팔리는 물방울 하나가 제일 싼 게 40만 원이고. 1000만 원짜리도 있어요. 전문적으로 대여해 주는 사람도 있는데 택시 회사처럼 사납금을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완전히 새로운 직업 세계예요. 어떻든 그 속에서 먹고사는 사람이 100만 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거래소에서 시세차익을 보고 파는 사람들은 한국 사람들이고, 게임이 돌아가는 건 미국 아마존 클라우드 서버에서고요. 완전 글로벌이죠.”
저 같은 사람이 게임 생태계를 이해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일단 로블록스를 해보시라고 권하고 싶네요. 한 10년쯤 실패와 좌절을 겪으면서 버티기를 했기 때문에 잘 공부해 보면 뭔가를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게임 생태계의 또 다른 예를 하나 들어볼까요. 벤야민 아흐메드라는 열두 살 난 런던의 초등학생 소년이 여름방학 며칠 동안 ‘이상한 고래’라고 하는 고래 아이템을 3550개 만들었어요. 같은 이미지를 쭉 복사한 다음에 빨간색, 파란색으로 색깔을 조금씩 바꾸는 식으로 팔아서 우리 돈 무려 4억 원을 벌었어요. 그중에는 1만 원짜리도 있고 5000원짜리도 있어요. 어떤 고래의 등에는 빨간 점을 찍어놓고 600만 원에 판 것도 있습니다. 이런 감성은 기존에 우리가 미술품이나 예술을 보는 그런 미학과는 완전히 달라요.”
그런 감성이 이해되세요?
“저도 열심히 이해하려고는 하는데 빨간 고래가 600만 원이란 거는 쉽게 동의가 안 돼요. 그런데 앞으로는 디지털 세대가 대세로 갈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비트코인으로 큰돈을 번 20대, 30대는 디지털 자산에 대해 생각하는 게 완전히 다르더라고요. 제가 아는 어떤 게이머는 이더리움으로 하루에 12억 원을 벌더니 다시 하루 만에 8억 원어치 아이템을 사더군요. 전설 아바타를 2700만 원에 사고 전설무기, 전설갑옷, 전설신발, 전설모자 이런 식으로 사니까 8억 원이 금방 나가더래요. 근데 그 8억 원은 돌려받을 수가 없어요. 누가 그 계정을 8억을 주고 사겠어요?”
“저 같으면 8억 원으로 아파트를 살 텐데”
[조영철 기자]
“그렇긴 한데, 디지털 자산에 대해 생각하는 게 이토록 다른 세대가 등장했다는 말을 전하고 싶은 거예요. 저 같으면 8억 원으로 아파트를 살 텐데(웃음). 그 친구는 서울 강남구 역삼동 월세 원룸에 살아요. 코인을 거래하는데 진짜 예의도 바르고 아는 것도 많아요. 처음에 8억 원을 질렀다는 이야기를 듣고 속으로 ‘미친 거 아닌가’ 했는데 아, 내가 저 세대의 가치로 아직 들어가질 못하는구나, 이렇게 생각이 바뀌더라고요.”
그들에게 돈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돈은 물론 중요하죠. 하지만 이더리움으로 한번에 돈을 많이 번 아이들은 디지털 자산에 대한 생각이 달라요. 이들은 무엇이 아름다운 예술인지가 관심사가 아니라 어떤 것이 가장 재미있는 인생이냐는 식으로 질문법이 달라요. 저는 그 친구를 보고 진짜 완전한 디지털 전환이 오겠구나 확신을 갖게 됐어요. 8억 원으로 확보할 수 있는 우월성이라는 게 굉장히 짧고 별거 아니거든요. 전설 아이템이란 것도 1년 지나면 아무것도 아닐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저런 세대가 있으니 우리는 진짜 앞으로 디지털 세상으로 다 들어가겠구나, 거스를 수 없는 대세구나 하는 확신이 들었어요.”
그렇게 큰돈을 날리고도 괜찮은가요.
“날린 게 아니고 투자한다고 생각하고 있을 겁니다.”
그럼 우울하지 않겠네요.
“그 게이머 입장에선 행복할 수도 있겠죠. 어떤 센스 오브 오너, 즉 소유자로서의 감각을 가지는 것이야말로 재밌는 인생을 살아가는 데 보탬이 된다고 하면 아이템 사는 데 8억 원을 쓸 수 있는 거예요.”
흔히 상상하지 못한 세계는 일단 두렵잖아요. 그렇다 보니 미래를 생각하면 불안과 공포감부터 들고요. 아이들의 인간성 상실을 어떡하면 좋으냐는 식의 걱정하는 목소리가 많이 나오는데 어떻게 보세요.
“메타버스에 들어오면 서로 누군지 모르니까 사기를 더 많이 칠 거 같은데 그렇지 않아요. 왜냐하면 자기가 했던 모든 일이 컴퓨터 로그로 다 남기 때문에 사기 치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그래서 메타버스 세상은 더 투명합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렇게 말씀하니 아바타끼리의 소통이 오히려 인간 그 자체, 실존과 실존이 부딪칠 수 있는 공간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드네요.
“맞습니다. 사람이 가진 진짜 역량, 진짜 인격, 이런 게 더 드러나는 거죠.”
그걸 좀 느끼신 사례가 있나요.
“요즘 기업에서 면접할 때 쓰는 AI역량검사라는 게 있습니다. 저도 직접 해봤어요. 일단 얼굴에 68개 점을 찍고 눈동자 트래킹을 해서 사람의 감정을 측정한다고 해요. 지금 이 순간에 얼마나 몰입하고 있는지 눈동자 움직임으로 알 수 있다는 거죠.
메타버스 세상은 현실보다 더 투명하다
다음에 본인을 소개하라고 해서 쭉 하면 페르소나 분류가 됩니다. 이어 게임을 해보게 합니다. 10가지 전략 게임을 하는데 얼토당토않은 결과가 나오는 게 있어요. 이때 AI는 피면접자가 그것에 어떻게 반응하나를 봅니다. 게임에 이겼느냐 졌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황당한 결과를 어떻게 매니지(manage)하는지 보는 거죠. 사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잖아요. 불운을 겪을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고, 가지고 있던 걸 다 잃을 수도 있잖아요. 중요한 건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잘 싸우는지에 있는데 AI가 면접을 통해 이런 걸 본다고 하니 놀랍지 않나요.”대단하네요.
“기업 인사 담당자로 20년 넘게 일한 후배가 있는데 AI가 사람을 매우 정확하게 본다고 하더군요. 어떤 면에선 더 적나라하다면서 말이죠. 예를 들어 ‘이 사람은 공격적 성향이 강하기 때문에 업무 압박이 심한 상황에서 동료를 괴롭힐 수 있다’ ‘이 사람은 금융 문제로 어떤 압박이 왔을 때 사고를 치고 돈을 횡령할 수 있다’ 이렇게까지 나온대요. 평가 의견서가 무려 A4용지로 4페이지, 5페이지에 달한답니다. AI평가는 참고자료이고 결정은 인간이 한다고 하지만 사실 부정적 결과가 나오면 쉽사리 채용하겠어요. 사실상 AI가 결정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어떻든 메타버스 세상에서는 인성이 더 부각된다는 거죠.
“그렇습니다. 능력과 지식이 중요한 게 아니고 조직에 들어와서 조직 내에 넓게 퍼져 있는 분산 인지 지식을 얼마나 잘 활용하느냐, 즉 동료들과 함께 얼마나 잘 일할 수 있는지가 매우 중요한 시대가 오는 거죠. 학벌도 힘을 못 쓰는 그런 시대 말입니다. 메타버스 세상은 순전히 역량 중심이라 학벌이 중요하지 않아요. 실제로 기업에서 스카이(SKY)를 뽑지 않고 고졸자를 뽑은 뒤 6개월 후에 업무 역량 평가를 해보니까 성과 역량이 상당히 높게 나온 사례가 있다고 들었어요.”
그렇다면 애들을 어떻게 키워야 하죠?
“애들 인생은 애들이 제일 잘 안다고 믿고 격려해 주되 너무 몰입해 잘못되지 않도록 최소한의 가이드라인만 해주면서 열심히 격려해 주는 게 필요하죠.”
워즈워스가 ‘무지개’에서 말한 진리
책 마지막에 “어린이가 어른의 스승이 되는 날이 왔다”는 표현이 무척 다가왔어요.“‘언젠가는’이 아니고 이미 왔습니다. 최근 다양한 방면에서 메타버스 트렌드가 확산하는데 많은 사람이 이제까지 하던 일에 3차원 시뮬레이션 공간을 덧붙이는 것으로만 이해하고 있어요. 하지만 3차원 시뮬레이션 자체는 아무 것도 보장하지 않습니다. 메타버스는 단독 이용(Stand-alone)이 아닌 다중접속이고, 재미·의미·보상을 내장한 서비스입니다. 그 중심에 사람과 사람의 상호작용이 있고 그 상호작용을 만드는 재미의 경험 모델입니다. 사람들이 메타버스에 거주하면서 만들어진 사용자 스토리에는 시장 분석이나 주가 전망을 위해 쓰인 해설서에는 없는 의미가 있습니다. 인생의 밝은 면이라고 할 수 있지요.
사실 인터넷에는 분노, 냉소와 조롱도 횡행하지만 친절이나 동정, 사랑의 마음도 강력하게 있잖아요. 현실과 달리 메타버스에는 그런 마음이 컴퓨터 그래픽으로 보이고 로그 데이터로 남게 되는 겁니다. 저는 책에서 메타버스의 숨은 희망을 생생한 사례와 함께 전달하려고 했습니다. 궁극적으로 이 책이 제시하려는 명제는 윌리엄 워즈워스가 ‘무지개’에서 말한 진리,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가 될 것이다’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