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샤넬은 몸을 꽉 조여 억압했던 코르셋에서 여성을 해방시키고, 자유로운 활동을 위한 여성용 팬츠, 손이 가방으로부터 자유로워지게 해준 숄더백 등의 디자인으로 시대를 앞서가며 새로운 시도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샤넬 홈페이지 제공]
그럼에도 샤넬은 2021년 2월을 시작으로 7월, 9월, 11월 총 4차례나 제품 가격을 인상했다. 샤넬을 대표하는 클래식 아이템인 ‘2.55백’ 미디엄 사이즈는 지난해만 260만 원 올라 1000만 원을 훌쩍 넘겼다. 샤넬은 2021년 10월부터는 인기 라인인 ‘타임리스 클래식 플랩 백’과 ‘코코 핸들 핸드백’을 1인당 연간 1개씩만 구매할 수 있도록 판매 정책을 변경했다. ‘스몰 레더 굿즈’ 카테고리에서도 동일 제품을 연간 2개 이상 구매하지 못하게 제한했다. 새벽부터 매장 앞에 대기했다가 문이 열리자마자 달려가는 오픈런, 제품을 구매한 뒤 비싼 값에 웃돈을 얹어 재판매하는 리셀 현상을 막기 위한 샤넬의 자구책이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는 올해도 계속 될 것으로 예상된다. 한국 소비자들의 샤넬에 대한 열망은 어디에서부터 비롯한 것일까. 샤넬이라는 브랜드가 만들어진 원류를 따라가 보면 단순한 패션 브랜드가 아님을, 그렇기에 사랑할 수밖에 없음을 짐작할 수 있다.
디자이너 코코 샤넬
1918년 파리 캄봉 거리에 오픈한 샤넬 매장. [인사이드 샤넬 제공]
1901년 그는 18세에 프랑스 중부에 위치한 물랭의 기숙학교로 옮겨 졸업했다. 이후 낮에는 의상실에서 보조 양재사로 일하고 밤에는 카페에서 노래를 부르며 생계를 이어갔다. 오늘날 샤넬 로고에 사용된 두 개의 ‘C’는 샤넬의 애칭인 ‘코코 샤넬’에서 비롯됐다. 정작 샤넬 자신은 코코 샤넬이라고 불리기를 싫어했다. 이 애칭은 그녀가 자주 부르던 ‘코코가 트로카데로에서 누구를 만났던가(Qui qu'a vu Coco dans le Trocadero)’라는 노래의 가사에서 비롯됐는데 생계를 위해 노래를 부르던 시절은 그가 디자이너로 알려진 뒤 숨기고 싶어 했던 과거였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샤넬은 1910년 부유한 집안 출신의 젊은 장교이던 에티엔 발잔을 만나 프랑스 상류 사회에 입문했다. 샤넬은 발잔의 재정적 후원으로 1913년 파리에 여성용 모자 가게를 열며 디자이너로서 첫 발을 뗐다. 그리고 발잔의 친구인 영국 출신 사업가 아서 카펠을 만났는데 사업가였던 카펠은 샤넬의 꿈에 귀 기울였다. 1916년 샤넬은 카펠의 도움으로 프랑스의 휴양지인 도빌에 모자와 함께 단순한 스포츠 웨어를 취급하는 상점을 오픈했다. 이 경험을 토대로 그는 다른 휴양지인 비아리츠에 양장점인 ‘메종 드 쿠튀르’를 열고, 첫 의상 컬렉션을 발표하며 정식 디자이너로서의 시작을 알렸다. 카펠은 1918년 영국 귀족의 딸과 결혼했지만 이후로도 샤넬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이듬해 카펠은 교통사고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는데 샤넬은 “카펠을 잃었을 때 나는 모든 것을 잃었다”며 깊은 슬픔을 표했다.
1918년 고급 양장점인 ‘오트 쿠튀르’의 디자이너를 의미하는 ‘쿠튀리에르(couturiere)’로 정식 등록한 샤넬은 패션의 중심지인 파리 캄봉 거리에 매장을 오픈했다. 1920년대까지만 해도 몸을 꽉 조여 억압하는 코르셋이 유행했는데 샤넬은 활동하기 편안하고 실용적인 저지와 트위드 소재를 활용해 단순하고 기능적인 의상을 제작했다. 이 의상들은 심플함과 편안함을 강조하면서도 우아하고 기품 있는 스타일을 간직해 고가임에도 사교계 여성들 사이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명품은 편안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럭셔리가 아니다”라는 그의 격언에 충실한 샤넬의 디자인은 심플함과 편안함을 강조했고 패션 산업에 혁명을 일으켰다.
아르데코의 상징이 된 향수 ‘샤넬 N˚5’
샤넬 N˚5를 잠옷으로 입는다고 말해 화제가 됐던 매릴린 먼로의 전성기 모습. [Gettyimage]
샤넬은 5를 행운의 숫자로 생각했는데 마침 개발된 순서대로 붙여진 향수 샘플 가운데 5번째 향을 선택했고, 자신의 이름을 붙여 ‘샤넬 N˚5’라고 명명했다. 이는 디자이너의 이름이 들어간 최초의 향수로 알려져 있다. 샤넬의 행운의 숫자 5는 샤넬 N˚5를 처음 선보이는 날을 1921년 5월 5일로 정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이 향수는 국경과 시간을 초월해 오랜 기간 크게 사랑받았는데 1952년 할리우드 배우 마릴린 먼로가 “잠옷으로 뭘 입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몇 방울의 샤넬 N˚5”라고 답한 일화로도 유명하다. 시대를 앞선 모던함을 패키지 디자인으로 보여준 샤넬 N˚5 향수병은 당시 유행한 아르 데코(Art Deco) 양식을 반영했는데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1959년 뉴욕 근대 미술관(The Museum of Modern Art)에 영구 소장돼 있다. 또한 샤넬 N˚5 향수병은 1960년대 팝 아트를 대표하는 앤디 워홀이 실크 스크린 기법의 작품으로 제작해 대중적인 관심을 받았다.
샤넬의 혁신적인 디자인들은 사랑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된 경우가 많았다. 이는 그의 수많은 명언 가운데 “일할 시간과 사랑할 시간. 그밖에 또 다른 어떤 시간이 필요하단 말인가”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일례로 샤넬은 1923년 영국의 대부호 웨스트민스터 공작을 만나 사랑에 빠졌는데 그로부터 영감을 받아 트위드 소재와 영국식 금색 단추를 디자인에 활용했다.
틀을 깨는 디자인을 선보였던 샤넬은 매번 다양한 방식의 새로운 시도로 주목받았다. 1924년 발표한 코스튬 주얼리와 1926년 선보인 리틀 블랙 드레스가 대표적인 예다. 샤넬은 당시 경제적인 부를 과시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던 주얼리에도 변화를 줬는데 인조 진주나 크리스털 등의 인조 보석과 진짜 보석을 조합해 코스튬 주얼리 제작을 시도했다. 이런 코스튬 주얼리를 통해 단순한 의상디자인에 우아함을 더했다. 또 리틀 블랙 드레스는 아르 데코 양식의 기하학적 특성을 반영했는데 과거에 주로 상복으로 사용되던 블랙 컬러를 여성의 일상복에 도입하는 혁신을 이끌었다. 미국의 패션지 ‘보그’는 샤넬의 리틀 블랙 드레스 디자인이 복제를 통한 대량 생산에 용이하다며 미국 포드의 자동차에 비유해 “The Chanel ‘Ford’”라고 소개하면서 그 신선함에 찬사를 보냈다. 실제로도 샤넬 디자인은 미국에서 복제가 성행했는데, 샤넬은 이를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본인의 디자인 가치를 인정받은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샤넬 디자인 복제의 성행은 샤넬 디자인의 홍보 효과와 진품 샤넬 상품의 희소성을 더욱 높여줬다.
여성의 손을 자유롭게 한 2.55백
2.55백과 노년의 샤넬. [샤넬 홈페이지 제공]
전쟁을 치르는 동안 프랑스에서 샤넬의 입지는 좁아져 갔다. 1939년 2차 세계대전으로 샤넬은 쿠튀르 하우스를 닫고 프랑스 남부로 피신했다. 나치가 파리를 점령할 당시 그는 독일군 장교 한스 귄터 폰딩클라게와 교제했는데, 그 과정에서 나치에 협력한 행위가 밝혀져 스위스로 떠나 망명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15년간 스위스에서의 망명 생활을 접고 귀환한 그는 1954년 71세의 나이로 컬렉션을 발표했으나 파리에서의 컬렉션은 실패했다. 반면 샤넬의 수트는 미국과 영국에서 호평을 받았으며 샤넬은 1955년 미국 달라스에서 열린 오스카 시상식에서 과거 50년간 큰 영향력을 가진 패션디자이너에게 수여하는 모드 오스카상을 받았다. 또한 그녀는 퀼팅 처리한 가방에 체인을 달아 샤넬에 첫 번째 백 2.55백을 론칭했다. 1955년 2월에 만들어져 붙여진 이름의 2.55백은 여성의 손이 가방으로부터 자유로워지게 해준 숄더백으로 지금까지 ‘클래식 백’으로 불리며 사랑받고 있다.
샤넬은 1960년대 아리스토텔레스 오나시스가 설립한 올림픽항공사의 승무원복을 디자인했으며, 1970년 샤넬 향수 No.19을 발표했다. 그는 1960년대에 등장한 미니스커트의 대유행을 강하게 비판하면서 짧은 스커트를 거부했다. 이러한 샤넬의 태도는 몸을 꽉 조여 억압했던 코르셋에서 여성을 해방시키고, 자유로운 활동을 위한 여성용 팬츠, 손이 가방으로부터 자유로워지게 해준 숄더백 등의 디자인으로 시대를 앞서가며 새로운 시도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젊은 날의 모습과는 대조적이었다. 샤넬은 1971년 88세 일기로 파리 리츠 호텔에서 사망했다. 모국인 프랑스에서는 그가 정식 전범 재판을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국에 묻히는 것을 불허했다. 결국 그는 망명지였던 스위스 로잔에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