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소통 문제 해결 방식 꿰뚫어
국익에 방점 찍은 철저한 직업 정신
‘진정한 소프트파워’ 보여준 외교관
리퍼트가 남긴 외교의 果實
2015년 3월 5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강연장에서 마크 리퍼트 전 미국대사가 괴한에게 피습당해 피를 흘리고 있다. 리퍼트 전 대사는 사건 당시 의연한 모습을 보였다. 이후에도 변함없는 한국 사랑을 드러내 한국 국민에게 더 큰 사랑을 받았다. [뉴스1]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초대 대사인 존 무초에서 현 대사(25대) 필립 골드버그에 이르기까지 주한미국대사는 한국 정부·사회에 특별한 영향력을 미쳐왔다. 필자의 대학 시절인 1980년대를 돌이켜 보자면 현재 ‘586세대’라고 불리는 당시 운동권 친구들은 미국이 한국 정치에 미치는 막강한 영향력을 비판하며 주한미국대사를 ‘미국총독’이라고 비아냥거리곤 했다.
일화가 또 있다. 1974년 7·4 공동성명을 앞두고 박정희 당시 대통령은 남북 접촉을 진행한 실무 조직에 갑자기 “미국에 알렸느냐”고 질문했다. 박 대통령은 극도의 보안을 전제로 실무진에게 남북대화 추진을 지시한 상태였다. 이를 충실히 따랐던 실무총책은 당연히 “미국에 알리지 않았다”고 했는데, 박 대통령은 “조선 왕이 돼봐야 중국 천자의 영향력을 안다”고 말하며 공동성명 발표 이전 미국에 이와 같은 사실을 세세히 알리도록 지시를 변경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한국 정치에 미치는 미국의 힘을 표현한 일화인 셈. 이때의 ‘실무진 대표’가 후일 김대중 정부 초대 통일부 장관을 맡은 강인덕이다. 위의 일화는 그가 필자에게 직접 말한 사실이다.
한국 정치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미국대사가 한국 1위 기업 삼성의 부사장급 임원을 맡고 있다. 이는 한미관계에서 또 하나의 변곡점을 의미한다. 한국 국민은 리퍼트가 대사 시절 국내 좌파 세력의 테러로 피를 철철 흘리던 모습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필자도 그에 대한 기억이 선명하다. 2015년 한글날(10월 9일) 필자는 그를 국방부로 초대해 한미 간 현안을 진지하게 토론했다. 당시 리퍼트가 들려준 ‘미국 행정부 내부의 소통 방식’은 지금까지도 깊은 감동으로 남아 있다.
“고위층과 직접 전화하세요”
2015년 당시 한미 간 최대 안보 현안은 한국형 차기 전투기(KF-X·보라매) 개발에 필요한 핵심기술 이전을 미국이 거부한 것이었다. 진상은 다음과 같다. 미국은 2014년 9월 F-35를 한국에 수출했다. 이 과정에서 한 미국 민간 항공사를 통해 25건의 기술 공여를 약속했다. 미국 정부의 승인이 전제 조건이었다. 그런데 2015년 미국 정부는 25건 중 핵심기술 4건(AESA 레이더, 적외선 추적장비(IRST), 전자광학 추적 장비(EOTGP), 전자파 방해장비(RF jammmer)등 핵심기술 4건의 수출 승인(E/L)을 거부했다.필자는 당시 국방부 차관으로서 당시 미국대사이던 리퍼트와 대화를 통해 미국 정부의 태도를 바꾸고 싶었다. 그를 만나 한국 정부의 입장을 강력히 피력하려 했다. 그때까지 미국대사가 국방부 차관실을 방문해 현안을 논의함은 전례 없는 일이었다. 주변 직원들은 “무리한 생각”이라며 말렸지만 필자는 ‘새로운 선례를 만들면 되는 것 아닌가’ 싶어 리퍼트를 초대했다. 그는 초대에 응했다. 초대를 해보긴 했지만 정말 응한 건 솔직히 다소 뜻밖이었다. 약 1시간 동안 국방부 차관실에서 한미 안보 현안과 관련한 깊은 대화를 나눴다.
리퍼트는 필자의 말을 주의 깊게 경청하더니 명확히 답변했다.
“어려운 문제일수록 미국 고위층과 직접 대화하라.”
그는 미국 국방부 장관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대화를 시도하라고 조언했다. 자신도 자주 미국 대통령과 직접 통화해 문제를 해결한다고 밝혔다. 필자는 리퍼트의 말을 들으며 그의 ‘진면목’을 목도한 기분이 들었다.
한국에서 중요 안보 현안이 발생하면 한미연합사령관과 우리 군 고위층(주로 합동참모본부의장)이 협의한다. 이때 한국의 태도는 국방부 장관과 대통령 간의 의사소통으로 조율돼 정해진다. 반면 미국은 연합사령관-태평양사령관-미국 국방부 정책실-차관-부장관-장관과 같은 다단계를 거쳐 결정된다. 그리고 역순의 다단계를 거쳐 한국 정부에 이를 전달한다. 리퍼트는 이러한 의사소통 방식의 문제점과 해결 방식을 꿰뚫고 있던 것이다.
미국 동맹그물망 정책의 핵심
리퍼트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보자. 리퍼트는 스탠퍼드대와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정치학을 공부한 후 베이징대에서 중국어를 공부했다. 1999년부터는 상원 민주당 원내대표 토머스 대슐 등 의회 지도자의 참모로 일했다. 2008년 버락 오바마 대통령 선거캠프에서 일했고, 당선 이후 대통령 보좌관으로 근무했다. 2009년 오바마가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국방부 비서실장, 국가안보회의(NSC) 등 안보 관련 부서를 거쳐 2014년 한국대사로 임명됐다. 한국대사를 지낸 이후엔 보잉 외국정부 담당 부사장, 유튜브 아시아태평양(APAC) 지역 정책 총괄 디렉터를 역임했다.리퍼트는 의회 보좌관, 백악관 참모, 외교관, CEO 등 여러 일을 했다. 변화무쌍하지만 이를 살펴보면 그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인자는 동일하다. ‘태평양’ ‘미국의 국익’ ‘현지화’다. 베이징대에서 중국어를 공부한 것, 보잉 부사장과 유튜브 아태지역 사장 등을 지낸 것은 태평양 지역에 대한 미국의 이익을 위함이다. 반도체 공급망 확보가 미국의 핵심 이익으로 부각된 가운데 삼성전자 임원이 된 것 역시 미국의 태평양 지역 이익 및 전략과 깊이 관련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미국의 대외정책, 안보정책과 관련해 ‘동맹그물망 정책(Net of alliance)’을 설계하는 데 주요한 역할을 했다. 동맹그물망 정책이란 미국이 양자동맹, 다자동맹을 그물망처럼 엮어내 비용을 줄이면서도 국제질서를 주도할 수 있게 해 안보 역량을 극대화함을 일컫는다. 미국의 진중(陣中) 신문 ‘성조(Stars and Stripes)’지는 “미국 국방부가 아시아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키우기 위한 새로운 전략을 시행했다. 리퍼트는 태평양 국가와 미국 간 관계를 긍정적으로 변화시켰다. 미국 국방부의 계획에 중요한 역할을 한 셈”이라고 보도했다.
리퍼트의 철저한 직업정신
다음은 현지화다. 2015년 리퍼트는 한국에서 태어난 첫아들에게 ‘제임스 윌리엄 세준 리퍼트(James William Sejun Lippert)’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어 한국에서 태어난 딸의 이름도 비슷하게 ‘캐롤라인 세희 리퍼트(Caroline Saehee Lippert)’로 지었다. 세준(洗俊)은 정직하고 깨끗한 삶을 사는, 뛰어난 인물이 되라는 것을 의미하며 세희(洗希)는 세상을 바르고 깨끗하게, 희망을 가지고 살라는 뜻이다. 당시 리퍼트가 “아이의 이름은 한국 방식으로, 사주를 보고 정한 것”이라고 말해 화제가 된 바 있다.리퍼트의 ‘한국 사랑’엔 진심이 우러난다. 2015년 3월 리퍼트는 좌파 테러리스트에 의해 피습됐다. 25㎝길이 칼에 찔려 6곳을 다쳤다. 50여 바늘이나 꿰매야 하는 수술을 앞뒀음에도 그는 침착했다. 피습을 당한 후에도 한국에 대한 애정을 잃지 않았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리퍼트는 개신교(성공회) 신자다. 그럼에도 한국에서 태어난 자신의 아들·딸에게 사주에 입각한 이름을 지어주는 것에서 무엇을 느낄 수 있을까. 사람에 따라 그가 다소 엉뚱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필자는 리퍼트가 한국 문화에 대한 존경을 내비침으로써 한미 간 일체감을 굳건히 하고, 이를 통해 한반도에서 구현하고자 하는 미국의 대외정책을 한결 용이하게 만들려는 의도였다고 본다. 쉽게 말하자면 ‘직업 정신이 철저했다’는 뜻이다.
리퍼트가 한국 국민·사회와 일체감을 형성하기 위해 노력한 일화는 수없이 많다. 좋아하는 프로야구 구단 두산 베어스의 경기를 보기 위해 퇴임 이후에도 한국 야구장을 찾는다. 대구시의 ‘치맥파티’에도 참가한다. 한국 친구가 미국을 방문해 그와 만나자고 하면 어김없이 “소맥파티 준비해 와야 만나줄 거야”라는 농담을 건넨다. 외교관의 소프트파워(상대로 하여금 스스로 그렇게 행동하고 싶게 만드는 능력. 군사력, 경제력, 자원 등 상대의 이익을 위협해 강압하는 능력인 하드파워와 대비되는 개념)는 문화를 수출할 때만 작용하는 것이 아니다. 문화를 수입할 때도 영향을 미친다. 리퍼트는 이러한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는 인물이다.
리퍼트는 우리에게 무엇을 시사하는가
근래 세계엔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국가정체성 확대전(戰)’이 치열하다. 이는 또 다른 형태의 이데올로기 전쟁이다. 역사상 국가정체성으로 인해 수많은 전쟁이 벌어졌다.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전쟁은 11세기 말에서 13세기에 걸친 십자군전쟁이다. 제1·2차 세계대전, 6·25전쟁도 국가정체성과 관련된 이데올로기 전쟁이었다고 볼 수 있다. 정체성 전쟁은 단기간에 끝나지 않는다. 또 1회로 끝나지 않는다. 우크라이나에서 진행되는 전쟁도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영토분쟁 차원의 전쟁이 아니라 세계적 차원의 정체성 전쟁으로 진행되는 양상을 나타내고 있다. 상당 기간 지속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이러한 국제정세 속에서 외교관의 역할은 특히 더 중요하다. 기술의 발달로 실시간으로 정보가 공유되는 세상이다. 외교관이 독자적으로 판단·조치하거나 혹은 책임져야 하는 일은 줄어들고 있다. 이러한 여건에서 외교관은 무엇보다 본국 정부와 소통 채널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 리퍼트에게서 느낀 바를 토대로 다음 몇 가지 점을 말하고자 한다.
첫째, 외교관은 대통령을 포함한 대통령실과의 긴밀한 소통 관계를 확립해야 한다. 리퍼트의 자신 있는 행보는 그에 걸맞은 보고 체계를 확보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대통령, 외교부 장관이 이러한 여건을 만들어줄 필요가 있다.
둘째, 외교관은 현지 국민과 정부로부터 진정 어린 존경을 받을 수준의 모범을 보여야 한다. 리퍼트는 한국 정부와 국민으로부터 존경받았다. 리퍼트를 ‘주한미국대사 마크 리퍼트’보다 ‘세준·세희 아빠’로 기억하는 이도 있다. 리퍼트와 소맥을 즐긴 인사들은 하나같이 그에게 일체감을 느꼈고, 이는 미국에 대한 일체감으로 확장됐다. 한국 국민이 미국과 중국에 대해 갖는 상이한 친밀감은 리퍼트가 뿌린 친한(親韓) 외교의 과실이다.
셋째, 국민의 외교관에 대한 경직된 시각을 바꿔야 한다. 주일한국대사가 일본 기업에, 주미한국대사가 미국 기업에 일자리를 구했다고 가정해 보자. 한국 국민은 어떻게 생각할까. ‘자존심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반면 리퍼트가 삼성전자 임원으로 일해도 이를 불편하게 여기는 미국 여론을 찾아볼 수 없다. 미국 정부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리퍼트가 바이든 대통령의 동맹 강화 정책에 큰 도움을 주리라고 여길 것이다.
리퍼트와 소맥 한잔을 다시 기대하며
리퍼트의 이야기를 좀 더 자세히 쓰기 위해 몇 가지 질문을 그에게 트위터로 보냈는데, 아직 답이 없다. 현 정부와 전 정부의 대외정책 차이에 관해 그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외교관답게’ 답을 피하는 듯하다. 2017년 1월 트럼프 정부가 출범하자 정무직 외교관이 군말 없이 자리를 비우는 모습도 산뜻했다. 전 정부의 정무직 공직자들이 배워야 할 모습이다. 가까운 시간에 리퍼트를 만나 소맥 한잔 하면서 그에 대한 나의 글을 평가받고 싶다. 한국 외교·안보 전문가 집단에서 리퍼트 같은 사람이 많이 나오길 바란다. 광복절, 정부수립기념일을 앞두고 무초, 브라운, 워커, 성 김 등 역대 주한미국대사들의 활동이 주마등처럼 생각난다. 한국 국민 홀로 오늘의 한국을 만든 것이 아니다. 인정하든 못 하든, 그것이 진실이다.백승주
● 1961년 출생
● 부산대 정외과 졸업, 경북대 대학원 정치학 박사
● 前 한국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장
● 前 한국정치학회 부회장, 중국 베이징대 방문교수
● 前 국방부 차관, 20대 국회의원
● 現 국민대 석좌교수
● 저서 : ‘백승주 박사의 외교이야기’ 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