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8월호

3不·1限… 중국은 고개 숙인 한국을 원한다

[노정태의 뷰파인더] ‘중국몽’ 완성 위한 힘자랑

  •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철학 basil83@gmail.com

    입력2022-08-13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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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계화의 주춤 혹은 퇴행을 보며

    • 리카도의 ‘비교우위론’과 아이폰‧갤럭시

    • 우크라이나 전쟁과 어떤 시대의 종말

    • 경제학은 가고 정치경제학이 귀환하다

    3월 11일 윤석열 당시 대통령 당선인이 서울 여의도 국민의힘 중앙당사에서 싱하이밍 주한 중국대사를 접견하는 와중에 딴 곳을 바라보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3월 11일 윤석열 당시 대통령 당선인이 서울 여의도 국민의힘 중앙당사에서 싱하이밍 주한 중국대사를 접견하는 와중에 딴 곳을 바라보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한국 정부는 대외적으로 3불(不) 1한(限)의 정치적 선서를 정식으로 했다.”

    왕원빈 중국 외교부 대변인이 8월 10일 정례브리핑에서 사드(THAAD) 배치 문제를 두고 한 말이다. 이 말은 사실일까. 문재인 정부 시절이던 2017년 10월 말, 한국이 사드 관련 3개 항목을 공개적으로 표명한 것은 맞다. 당시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국회 국정감사에서 3불에 대해 ①한국이 사드 추가배치를 하지 않고 ②미국의 미사일방어 시스템에 불참하며 ③한·미·일 군사동맹을 맺지 않겠다는 취지로 말했다. 하지만 중국이 이번에 끼워 넣은 ‘1한’, 즉 현재 배치된 사드의 운용마저 제한적으로 하겠다는 이야기를 한 적은 없다. 또 사드 3불 정책은 중국에 대한 약속이 아니므로 그 어떤 대외적 기속력을 갖지 못한다. 현재 국내 여론은 대체로 중국이 무리한 요구를 하고 있다는 쪽으로 향하는데, 그러한 인식은 타당하다.

    한국 향한 5대 요구의 속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최근 공산당 지도부 세미나에서 “향후 5년은 중화민족의 부흥과 관련된 중요한 시기”라고 강조하며 최근 10년 동안 역사적 성과를 거뒀다고 자평했다. [신화 뉴시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최근 공산당 지도부 세미나에서 “향후 5년은 중화민족의 부흥과 관련된 중요한 시기”라고 강조하며 최근 10년 동안 역사적 성과를 거뒀다고 자평했다. [신화 뉴시스]

    중국 외교부는 홈페이지를 통해 한국을 향한 5대 요구도 제시했다.

    “마땅히 독립자주 노선을 견지해 외부 간섭을 배제해야 한다.” “마땅히 근린 우호를 견지해 서로의 중대 관심사항을 배려해야 한다.” “마땅히 개방과 협력을 견지해 공급망 안정을 수호해야 한다.” “마땅히 평등과 존중을 견지해 상호 내정에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 “마땅히 다자주의를 견지해 유엔 헌장의 원칙을 준수한다.”

    하나같이 좋은 말 같지만 맥락을 놓고 보면 그렇지 않다. 1항은 ‘한국은 미국으로부터 벗어나라’는 뜻을 품고 있다. 한미동맹을 버리거나 약화시키라는 소리다. 2항은 티베트, 위구르 등 중국이 비판받는 인권 문제 등에 언급하지 말라는 뜻. 3항은 미국이 주도하는 반도체 공급을 위한 국제 동맹인 ‘칩4’에 가입하지 말거나, 가입하더라도 중국이 배제당하지 않도록 노력하라는 이야기다. 4항과 5항은 1항과 마찬가지로 미국 중심 세계 질서로부터 이탈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중국은 왜 이럴까.



    그 이유는 단순하지만 복잡하다. 간단히 이야기하자면 ‘칩4’로 대표되는 반도체 공급망, 더 나아가 세계 경제 구조의 개편을 앞두고 중국이 힘자랑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행보가 어떤 거시적 차원의 변화를 전제하고 있는지 이해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우리는 20세기 중반부터 21세기 초까지 지속돼온 거대한 경제적 흐름, 말하자면 ‘세계화’가 주춤하거나 퇴행하는 것을 목격하는 중이다. 반대로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중반까지 세계를 지배하던 정치적, 경제적 움직임이 되살아나고 있다. ‘경제학’의 시대는 가고 ‘정치경제학’의 시대가 돌아오고 있는 것이다.

    데이비드 리카도의 ‘비교우위론’

    잘 알려진 학술적 상식. 본디 경제학(Economics)이라는 학문은 없었다. 정치경제학(Political Economics)이 있었을 뿐이다. 1815년, 당시 영국의 최대 쟁점은 곡물법(Corn Law)이었다. 영국 농민을 보호하기 위해 수입되는 곡물에 높은 관세를 매기는 것은 옳은가, 그른가. 영국 정치인들은 대체로 보호 관세를 옹호하는 쪽이었지만, 생각이 다른 지식인들이 있었다. 그 중 대표적인 이가 바로 데이비드 리카도다.

    리카도는 외국에서 생산되는 곡물을 저렴한 가격에 수입하고, 대신 영국에서 낮은 가격으로 생산하는 질 좋은 모직물을 수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단지 막연하고 추상적인 생각에 멈춘 것이 아니었다. 설령 영국에서 생산되는 밀이 더 저렴하다 해도 영국이 외국에 비해 더 좋은 가격으로 경쟁력 있는 모직물을 생산할 수 있다면 밀농사를 집어치우고 모직물 생산에 집중하는 편이 낫다는 과격한 주장을 폈다.

    리카도는 그러한 발견에 ‘비교우위론’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간단한 방정식을 통해 입증해 보였다.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의 뒤를 이어, 경제학이 본격적인 학문으로 발돋움하게 된 결정적 사건이다. 물론 리카도 본인은 자신의 새로운 학문을 정치와 분리해 생각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리카도의 비교우위론은 대단히 중요한 몇 가지 정치적 함의를 지니고 있다.

    비교우위론의 내용을 따져보자. 첫째, 두 나라가 각각 잘하는 분야에 집중한다. 둘째, 각자 잘하는 분야를 더욱 잘하고자 각 나라의 특성에 맞게 생산을 특화한다. 셋째, 서로 교역을 통해 효용을 극대화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경제를 운용하려면 정치적 조건 몇 가지가 필요하다. 첫째, 두 나라는 전쟁 상태가 아니어야 한다. 둘째, 양국 교역의 편의를 위해, 그리고 정확한 계산을 위해, 가급적이면 같은 화폐를 이용하는 편이 바람직하다. 셋째, 각국은 자국뿐 아니라 교역 상대방을 위해서라도 비교우위의 경쟁력을 극대화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산업 구조 조정은 불가피하다.

    이야기가 좀 복잡하게 느껴졌을 수 있지만 위 내용을 다시 한 번 읽어보면 이해하는 게 어렵지 않을 것이다. 현재 글로벌 자본주의가 바로 이렇게 작동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는 국경을 넘어 다양한 기업이 서로 경쟁하고 또 협업하는 게 자연스러운 세상을 살고 있다. 미국에서 디자인한 아이폰은 전 세계에서 채집한 광물과 자원을 바탕으로 각국에서 부품을 만들어 최종적으로 중국의 팍스콘에서 조립한다. 많은 생산 기지가 한국과 베트남에 있다는 점이 다를 뿐 삼성전자의 갤럭시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렇듯 복잡해진 국제분업 체계에서 각국은 길면 수십 년, 짧으면 심지어 수년 단위로 주요 산업을 재구성한다. 1950년대에는 경제적으로 국제 사회에 아무 영향이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던 대한민국은 2020년 현재 세계 10위권의 수출 공업 국가가 돼 있다.

    6월 10일(현지시간) 아시아안보회의(샹그릴라 대화)에 참석한 이종섭 국방부 장관(왼쪽)이 싱가포르 샹그릴라 호텔에서 웨이펑허 중국 국방부장과 양자회담에서 기념촬영 후 자리로 향하고 있다. [뉴스1]

    6월 10일(현지시간) 아시아안보회의(샹그릴라 대화)에 참석한 이종섭 국방부 장관(왼쪽)이 싱가포르 샹그릴라 호텔에서 웨이펑허 중국 국방부장과 양자회담에서 기념촬영 후 자리로 향하고 있다. [뉴스1]

    블록 경제에서 단일 시장까지

    이제는 전 세계 그 어떤 나라도 단일 시장으로 이뤄진 국제 경쟁과 분업 체계에서 이탈해 있지 않다. 이는 당연하거나 자연스러운 모습이 아니다. 20세기 초, 대공황 직후 블록 경제(block economy)가 작동하고 있을 무렵, 세상은 다른 방식으로 움직였다.

    당시 세계는 크게 네 개 정도의 경제권으로 작동했다. 영국과 그 식민지로 이루어진 파운드 블록, 프랑스와 그 식민지로 이루어진 프랑 블록, 미국과 필리핀 등으로 구성된 달러 블록, 마지막으로 독일과 소수의 해외 영토가 만드는 마르크 블록이 그것이다. 이렇듯 나누어진 블록은 관세 및 다양한 비관세장벽을 이용해 다른 블록을 견제했다. 서로 역내의 자원과 시장을 독점하기 위해 자유무역을 줄여나갔다. 리카도의 이상은 좌절됐고, 경제적 분단과 갈등은 결국 또 한 번의 세계대전으로 이어지고 말았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상황은 크게 달라졌다. 미국이라는 신흥 초강대국이 독일과 일본을 동시에 꺾으면서 말 그대로 세계의 지배자로 떠올랐다. 소련을 중심으로 한 공산진영이 존재하긴 했으나 블록 경제 시대와 달리 공산진영은,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자본주의가 아닌 다른 길을 택하고자 했다. 미국이 만들고 미국이 제시하는 표준에 따르는 것, 그것이 자본주의 질서가 됐다. 그리고 미국의 선택은 리카도가 꿈꾸던, 비교우위론에 입각한 자유시장경제였다.

    1991년 소련이 해체되고 공산주의의 이상이 역사의 유물로 허물어지자 미국 중심의 자유시장경제는 대체 불가능한 ‘단 하나의 질서’로 자리매김했다. 미국이 중국을 WTO(세계무역기구)에 가입시키고, 이전까지 한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가 나눠 수행하던 ‘세계의 공장’ 자리를 넘겨준 건 그러한 변화를 상징하는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아직 민주주의 국가가 아닌 나라, 여전히 표면적으로는 공산주의를 표방한 중국을, 자본주의 질서 속으로 끌어들이면 이후 민주화는 자연히 이루어지리라는 낙관주의적 발상의 산물이기도 했다. ‘정치경제학’이 아니라 ‘경제학’이면 충분하다는 사고방식이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의 지식인들 사이에 상식처럼 통하던 무렵이다.

    지금 우리는 바로 그 시대가 종말을 고하는 모습을 목격하고 있다. 2008년 경제위기 이후 삐걱거리던 자유시장경제의 이상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해 본격적으로 허물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러시아는 유럽으로 연결된 천연가스 파이프를 잠그겠다고 협박한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에서 수출하는 곡물이 운송되는 해상 경로를 틀어막아 국제적으로 식량 가격 폭등을 유발하기도 했다. 리카도와 곡물법 논쟁을 할 때 영국의 보수적인 정치인들이 우려했던 바로 그 상황이 현실에서 벌어진 것이다.

    때로 어떤 나라는 경제적 이득을 포기하면서까지 비합리적인 목적을 이루고자 한다. 물론 이것은 자유시장경제의 역사 전체를 놓고 보면 작은 반례일 뿐이겠으나,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보며 긴장하지 않을 도리는 없는 것이다.

    ‘안미경중’이 몽상인 이유

    반도체라는 현대 산업의 필수품을 놓고 미국과 중국이 벌이는 힘 싸움은 이러한 맥락을 전제할 때만 온전히 이해 가능하다. 미국은 중국을 자유시장경제의 일원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장기적으로 미국 중심의 세계 질서 속 일원으로 만들고자 했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성장한 중국은 미국 중심 세계의 하위 파트너 역할에 만족할 생각이 없다. 중국이 세계의 중심에 있는, 아편전쟁 이전 국제 질서로의 ‘회복’을 원한다.

    단일한 정치적 질서 속에서 오직 경제만 생각할 수 있었던 경제학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경제와 정치를 함께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정치경제학의 시대가 돌아오고 있다. 중국이 한국을 향해 상식의 선을 넘는 주권 침해적 발언을 쏘아대는 이유도 그런 맥락에서 해석 가능하다. 중국은 중국 중심의 국제 질서라는 어떠한 정치적 이상이 달성되는 것을 원하기 때문이다. 한국 정도 되는 나라가 ‘자발적으로’ 고개를 숙이는 모습이 연출되는 것은 중국 처지에서 볼 때 ‘중국몽’을 완성하기 위한 중요한 퍼즐인 셈이다.

    ‘안미경중’, 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과 함께하면 된다는 사고방식이 현실성 없는 몽상인 이유도 거기 있다. 중국이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원하는 건 경제가 아니다. 중국은 중국 중심의 세계 질서를 원한다. 1945년 광복 이후 우리의 평화와 번영의 밑바탕이 된 미국 중심의 자유무역체제와 그 바탕이 되는 국제 질서를 원치 않는 것이다. 대한민국은 자유시장경제에 입각한 민주주의 국가다. 제77주년 광복절을 이틀 앞둔 오늘, 우리가 가야 할 길은 더할 나위 없이 분명하다.


    노정태
    ●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불량 정치’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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