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이런 중국집이 있어?”
“이렇게 맛있는 음식이 왜 이렇게 싸요?”
평생 20% 할인, 골목식당 성공 비밀
한국 고유 ‘짜장면 한 그릇’ 문화
‘서교동에서 세계로’ 오늘도 춘장 볶는 ‘왕 사부’
서울 마포구 서교동 중식당 진진의 오너 셰프 왕육성 대표. [김도균 객원기자]
“자리에 앉자마자 ‘탕수육 하나, 짜장 둘’ 주문을 해요. ‘죄송합니다. 짜장면이 없습니다. 탕수육은 안 합니다’라고 하니 ‘여기 중국집 아니오?’ ‘네, 맞습니다.’ ‘뭐 이런 중국집이 있어?’ 그러곤 나가버려요.”
진진 대표 왕육성(68) 씨가 떠올리는 8년 전 풍경이다. 호텔 중식당 오너 셰프였던 그가 오가는 사람도 별로 안 보이는 으슥한 골목에 손바닥만 한 식당을 열자 업계에서는 “왕육성이 망했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코리아나호텔 대상해 시절부터 왕 대표의 제자로 지금은 진진을 공동 경영하는 황진선(36) 셰프도 개업 초기 웃지 못할 장면을 떠올린다.
“친구 네 분이 술 한잔 마시다 시비가 붙었어요. 당장 테이블을 엎어버릴 기세로 싸워서 사고라도 날까 봐 조마조마했는데 다행히 계산은 잊지 않았기에 ‘맛있게 드셨어요?’라고 물었어요. 그때까지도 죽이네 마네 하던 아저씨들이 동시에 ‘음식 진짜 맛있네요’ ‘이렇게 맛있는 음식이 왜 이렇게 싸요?’라고 되묻는 거예요.”
골목식당 진진은 ‘가성비’로 지역 주민에게 스며들었다. 그리고 3년 뒤 세계적 레스토랑 평가서 ‘미쉐린 가이드’로부터 별 하나를 받았다. 별 하나는 ‘차별화된 음식으로 특별한 경험을 선사하는 레스토랑’이라는 의미다. 2017년, 2018년, 2019년 3년 내리 별 하나, 2020년부터 ‘합리적 가격으로 훌륭한 음식을 내는 식당’이라는 의미의 ‘빕 구르망’에 선정됐다.
올해는 왕 대표가 중식업계에 몸담은 지 50년이 되는 해다. 1972년 서울 성북구 장위동 대성원에 ‘조바’(홀에서 잔심부름 하던 점원을 가리키는 일본어)로 취직해 주방에서 음식을 내오고 계산하고 틈틈이 철가방도 들던 소년은 어느새 ‘왕 쓰부(사부)’로 불리는 스타 셰프가 됐다. 최근엔 ‘진진, 왕육성입니다’(동아시아)라는 책도 나왔다. 왕육성의 요리 인생은 곧 한국 중화요리 반세기의 기록이다.
고정관념 깬 동네서 즐기는 호텔 요리
2013년 12월 31일 환갑을 코앞에 두고 왕육성 씨는 코리아나호텔 중식 레스토랑 대상해 문을 나섰다. 화교학교를 중퇴하고 중식업계에 발을 들여놓은 지 40년, 대상해와 인연을 맺은 지 28년 만이었다. 남들은 은퇴를 생각할 때 그는 새로운 도전을 했다. 테이블 몇 개짜리 작은 식당에서 동네서 즐기는 호텔 요리를 해보기로 한 것. 권리금이 없는 자리에, 시설 투자를 많이 하지 않고, 주방장 한 명과 보조 서너 명이 감당할 수 있는 40~50석 규모라면 해볼 만했다. 시설에 들어갈 비용을 줄여 재료에 투자하고 직원들에게 한 푼이라도 더 주면 호텔 못지않은 고급 요리와 서비스를 제공할 자신이 있었다.점심 장사는 하지 않고 오후 5시 가게 문을 열어 5시, 7시, 9시, 2시간 단위로 예약을 받기로 했다. 메뉴는 작은 주방에서 적은 인원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10가지를 엄선했다. 살아 있는 우럭의 피를 빼서 냉장 숙성시킨 후 통째로 쪄내 대파채·고수·생강·간장소스·홍고추와 함께 먹는 칭찡우럭, 독특한 향과 아삭한 식감을 지닌 대만 채소 카이란과 소고기 볶음, 다진 새우살을 식빵 사이에서 서서히 온도를 높여가며 튀기는 멘보샤, 그리고 대게살볶음, 오향냉채, 마파두부, 전복팔보채, 마의상수, 어향가지, 소고기양상추쌈이 포함됐다.
반면 짜장면, 짬뽕 같은 식사거리와 어느 중국집에나 있는 탕수육과 양장피는 뺐다. 취약한 동네 상권에서 고만고만한 식당들과 경쟁하지 않겠다는 원칙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테이블 위에서 간장, 식초, 고춧가루를 치우고 기본 찬에서 단무지, 양파, 춘장을 없앴다. 대신 호텔 중식당처럼 자차이무침, 볶은 땅콩, 고수 세 가지를 내놓았다.
요리가 부담스러워 망설이는 손님들을 안심시킨 것이 회원제였다. 3만 원만 내면 진진의 평생회원으로 20% 할인을 받는다. 한두 번만 이용해도 가입비가 빠지니 비용을 의식하지 않고 요리를 즐기는 사람이 늘었다. 그만큼 식당의 이익은 줄지만 대신 회원이 되면 재방문 빈도가 높고 다른 식당보다 가성비가 좋으니 더 많은 요리를 시켜 매출이 늘었다. 문을 연 지 8년 만에 회원이 10만 명 가까이 된다면 이처럼 성공한 마케팅이 또 있을까.
“경쟁하지 않겠다”는 장사의 신
‘서교동진향’에서 직접 웍을 돌리며 짜장면을 만드는 왕육성 대표. [김도균]
“신관을 열면서 점심도 할 계획이었어요. 그런데 주변 식당 주인이 편지를 보내 왔어요. 장사가 안 돼 걱정이니 자기네 가게를 인수하면 어떻겠냐는 내용이었죠. 아차 싶더라고요. 그나마 얼마 안 되는 손님을 진진이 빼앗을 수는 없잖아요. 신관도 점심 장사는 안 하기로 했죠. 진진이 문을 열기 전까지 주변에 고깃집과 국밥집 두 군데밖에 없었어요. 저희 가게를 찾아온 손님들이 대기 줄이 너무 길면 일단 다른 식당에 가서 수육 한 접시 먹으며 자리가 나기를 기다리니 나중에는 동네에서 환영을 받았어요.”
1년 뒤 홍대역과 합정역 사이 주차장이 확보되고 대중교통이 편리한 곳에 3호점 진진가연을 열었다. 주변 직장인을 겨냥해 점심 식사거리로 하얀 짬뽕을 메뉴에 넣은 것도 고심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3호점 주변에는 중식당이 두 군데나 있었어요. 진진이 들어오면 다 죽는다고 했죠. 그래서 저희는 다른 집 메뉴에 없는 하얀 짬뽕을 냈어요. 빨간 짬뽕과 탕수육을 원하는 손님에겐 저쪽 집으로 가시면 된다고 안내했어요.”
그 무렵 ‘미쉐린 가이드’로부터 연락이 와서 자료를 요청했다. 등록 여부는 심사해 봐야 알 수 있다고 했지만, 베이징이나 상하이도 아니고 서울의 동네 중식당에 관심을 가질 이유가 뭐 있겠나 싶어 잊어버렸다. 그런데 2016년 11월 7일 ‘미쉐린 가이드’ 서울 편 발간 행사에 참석해 달라고 했다. 진진이 별 하나를 받았다는 것도 행사장에 가서야 알았다. 2020년 ‘빕 구르망’으로 평가 등급이 한 단계 떨어졌을 때 섭섭하지 않았느냐고 묻자 왕 대표는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고 했다.
“별을 받을 때도 과분하다고 생각했어요. 진진이 격 있는 요리를 앞세웠지만 규모와 시설이 변변찮은데 왜 줬을까 싶었죠. 별 받은 식당들을 보면 한 끼에 수십만 원씩 하는 곳이잖아요. 일반인은 도저히 가볼 엄두가 나질 않죠. 진진 같은 동네 식당은 ‘빕 구르망’이 딱 좋아요. 누구나 한번 가볼까 할 만큼 만만해야 하니까요.”
별을 받고 나서 왕 대표는 직원들에게 “괜히 우쭐할 일이 아니다. 화장실 청소 한 번 더 하고, 끈적이는 테이블을 바꾸고, 기본을 지키자. 정상을 오르기는 어렵지만 내려가는 길은 금방이다”라고 했다.
왕 대표는 지금도 매일 빗자루를 들고 나와 가게 앞을 청소한다. 비질은 그가 처음 사회생활을 하면서 배운 장사의 기본이었다. 1970년 12월 서울 연희동 화교학교 4학년(고등학교 1학년) 1학기 기말고사를 앞두고 그는 학교를 그만뒀다. 조회시간에 담임선생님이 “월사금 아직도 안 낸 놈 있지? 손들어 봐”라고 한 것이 발단이었다. 가난은 부끄럽지 않지만 수치는 참을 수 없었던 자존심 강한 소년은 무작정 기숙사를 나왔다. 어려운 살림에도 장남을 서울로 유학 보낸 어머니가 흘릴 눈물을 생각하니 도저히 가족이 있는 대전으로 갈 수 없었다. 대신 외삼촌이 중국집 청평관을 운영하고 있는 충주로 갔다. 정작 충주에 도착한 뒤 식자재, 직물, 잡화를 도매로 취급하는 영풍상회 배달원으로 취직했다. 그때 화교였던 주인 할아버지에게 제일 먼저 배운 것이 ‘비질’이고, 두 번째로 배운 것이 ‘웃음’이었다.
“장사꾼은 항상 웃어야 한다. 손님을 보면 무조건 먼저 한번 웃고 이야기를 시작해라. 그래야 내 말이 손님 귀에 들어간다.”
진진 요리의 뿌리는 톈진
“진진이 무슨 뜻인가요?”손님들이 한 번씩 하는 질문이다. 진진 두 글자에는 한국 화교의 역사가 담겨 있다. 왕 대표의 아버지 왕준예(1913~1983) 씨의 고향은 중국 황허 하류로 톈진(天津)에서 가까웠다. 5형제의 막내였던 왕준예 씨는 주물공장에서 일하다 1937년 중일전쟁이 터지자 인천행 배에 올랐다. 돈을 벌면 중국에 남은 가족들에게 부치고 오가는 인편에 안부를 확인했으나 대륙에 공산 정권이 들어서고 6·25전쟁이 터지면서 소식이 끊겼다. 아버지는 끝내 고향 땅을 밟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진진의 첫 글자는 아버지의 고향 톈진에서 따왔다. 두 번째 진은 지금 그가 살고 있는 한강변 마포에 있던 옛 나루터 양화진에서 따왔다. 서해를 사이에 두고 톈진과 양화진이 이어지는 것을 떠올리면 진진은 한국과 중국이 요리로 만나는 흥미로운 공간이 된다.
왕 대표의 어머니 왕경령(89) 씨의 고향은 산둥성 무핑현으로 지금은 옌타이시에 편입됐다. 어머니는 1949년 가족과 함께 공산 정권을 피해 인천에 왔지만 6·25전쟁이 터지자 또다시 피난민 신세가 됐다. 청주에서 살던 아버지가 충주로 피난 온 어머니를 만나 결혼했고, 다시 안동으로 이사해서 왕육성이 태어났다. 왕육성이 영풍상회를 그만두고 다시 서울로 와서 1972년 중국집 대성원에 취직한 것도 어머니 덕분이었다. 대성원 안주인이 어머니와 같은 동네 출신이었다.
1974년 봄 대관원으로 옮겼다. 가게는 종로3가와 수표교 사이 관수동에 있었다. 명동, 소공동과 함께 서울 3대 차이나타운을 형성하던 관수동에는 한때 중국식당 열댓 개가 몰려 있을 만큼 번성했다.
“한국 경제가 고도성장하던 시기라 해외 바이어가 많이 찾아왔고 그들을 접대할 곳이 필요했어요. 그중에서도 대관원은 장수주 주방장을 비롯해 칼판장 오배상, 면판장 왕선명, 불판장 진학부 등 전설 같은 요리사들이 포진해 있었죠. 먹는 사업이 유망하니 일류 식당에서 고급 요리를 배우고 싶었어요. 대관원 왕서무 사장과 친분이 있는 외삼촌에게 추천서를 받아 들고 갔죠.”
사장은 주방장에게 “자리 하나 만들어주라”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조금 뒤 주방장이 따로 부르더니 “지금 (주방에 들어오려고) 5명이 줄 서 있어. 사장님이 지시했는데 안 된다고 할 수는 없고 일단 홀에서 일하며 기다리면 넣어줄게”라고 해서 크게 실망했지만 “요리는 주방에서 배우는 게 아니야. 홀에서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어”라는 말에 정신이 번쩍 났다.
주방 일은 설거지를 담당하는 싸완 또는 솨완(涮碗), 면을 뽑고 만두를 빚는 면판, 식재료를 다듬고 써는 칼판, 재료를 볶고 튀기고 끓이는 불판으로 나뉜다. 불판이 주방장이 되는 경우가 많지만 그날그날 장을 보고 재료에 맞게 메뉴를 짜는 칼판이 그 역할을 하기도 한다. 왕육성은 주방 살림을 맡는 칼판이 되고 싶었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에는 재료 관리가 까다로워 가게의 흥망를 좌우하는 게 칼판이었죠. 예약 손님 상황을 보고 날씨를 예측해서 적당량의 재료를 확보하고 그날로 소진해야 해요. 소진하지 못하면 적자가 나는 거죠.”
목소리만 들어도 주소까지 기억해
그 시절 요리 사부들의 월급은 보조들에 비해 많게는 열 배, 적어도 일고여덟 배 차이가 났다. 신참들은 하나라도 더 빨리 배우려 했고 그럴수록 요리사들은 쉽게 기술을 알려주려 하지 않았다. 함부로 가르쳐줬다가 자기 자리가 위협받을 뿐 아니라 설움과 수모를 겪으며 배운 기술을 쉽게 넘겨주고 싶지 않은 심리도 작용했다. 왕육성은 우회 작전을 썼다. 가장 먼저 출근해 홀 청소와 손님 맞을 준비를 마치면 주방에 들어가 재료를 다듬었다. 자기들이 할 일을 대신해 주니 미안했던지 칼판 선배들이 슬쩍 칼질할 기회를 주곤 했다. 대관원 시절 홀에서 근무하며 손님 모시는 법을 배웠고, 눈동냥으로 고급 요리를 익혔다. 요리법을 노트에 적고 그림으로 그렸다. 홀 근무자가 2년 만에 중식조리사 자격증을 따자 대관원 직원들 모두 놀라워했다.“주문 전화가 오면 라조기, 난자완스, 깐풍기 받아 적고 끊어요. 금세 다시 전화가 와서 ‘주소를 얘기하지 않았는데 어딘지 알아요?’ 하고 물으면 ‘330-12번지, 사모님 목소리만 들어도 알아요’라고 하죠.”
단골의 목소리만 들어도 주소까지 기억하는 홀 서빙 직원을 칭찬하지 않는 손님이 없었고 그 칭찬은 곧 사장의 귀에 들어갔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그는 마케팅의 귀재였다. 뚝섬 근처 성수원에서 일할 때 경마장 안으로 짜장면 세트 메뉴를 만들어 배달하는 아이디어를 냈고, 성수동에 새로 공장들이 생기면서 젊은 직원들이 늘어나자 그 회사의 총무과장을 설득해 공장 안으로 배달을 했다. 직원 명부를 만들어놓고 각자 먹은 만큼 서명하면 봉급날 일괄 수금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장위동 대성원, 뚝섬 성수원, 종로 대관원, 삼성본관 해당화, 대우빌딩 홍보석, 신촌 만다린, 명동 사보이호텔 호화대반점, 남산 다리원을 거쳐 1982년 봄 스물여덟 살의 왕육성은 플라자호텔 도원의 칼판장이 됐다. 도원의 칼판장으로서 재료 수급과 관리, 메뉴 개발을 맡았다. 종종 청와대, 총리공관, 대기업 영빈관으로 출장을 나갔다. 왕 대표는 그 시절 “칼을 잡으면 시간을 잊고 집보다 주방이 좋았다”고 말한다.
저렴하면 더 시키고, 요리는 술을 부른다
1985년 11월 태평로 코리아나호텔이 문을 열고 22층 식당가에 중식당 대상해가 자리 잡았다. 호텔 측은 홍콩 유명 중식당의 요리사 세 명을 모셔왔다고 대대적인 홍보를 했지만 그 효과는 오래가지 않았다. 식당 운영이 고전을 면치 못하자 도원의 부주방장 왕육성에게 대상해 주방장을 맡아달라는 제안이 왔다. 버린 장사를 살리는 일은 쉽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망설였지만 대상해의 장부를 열어보고 자신감을 얻었다. 이리저리 새는 비용을 막고 매출을 늘리면 승산이 있었다. 저렴하지만 고급스러운 코스요리를 만들었더니 입소문이 나서 1년 만에 매출이 10배가량 뛰었다. 특급호텔에서 10만 원 하는 요리를 원가 수준인 4만 원에 냈다. 저렴하면 추가 주문이 이어진다. 요리는 술을 부른다. 밑지는 장사가 아니었다.1997년 호텔 측이 식당가를 직영에서 임대로 전환하면서 마흔셋의 왕육성은 주방장에서 주인장이 됐다. 중식계에 발을 디딘 지 25년 만에 오너 셰프가 됐지만 하필이면 김영삼 정부 말기 금융위기가 찾아오고 기업들이 줄도산을 하는 시기였다. 왕 대표는 난관에 부딪힐 때마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냈다. 간단한 요리 두세 가지가 나오는 비즈니스 코스를 개발해 직장인들이 부담 없이 찾아오게 했고, 식자재 비용을 현금으로 지급해 더 좋은 물건을 더 저렴하게 공급받았다. 남들은 장사가 안 돼 문을 닫을 때 대상해의 수익은 오히려 늘어났다.
2004년 주5일 근무제 도입도 식당엔 악재 중의 악재였다. 손님이 있든 없든 임차료와 인건비는 계속 나가기 때문에 주말에도 손님을 오게 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7만2000원 호텔 코스 요리를 3만6000원에 즐길 수 있는 주말 스페셜을 만들었더니 예약 없이 온 손님들이 줄을 서서 기다릴 만큼 대히트를 했다. 하지만 적당히 놀다 퇴근하던 주말에도 손님이 몰려들자 직원들의 불만이 커졌다. 설렁설렁 일하는 모습이 눈에 띄자 폭탄선언을 했다. “다음 달부터 월급을 없애겠습니다.” 대신 매출액에 연동해서 인센티브를 주겠다고 했다. 아무도 그만두지 않았다. 오히려 장사가 더 잘되고 월급이 올라 모두 만족해했다.
다시 짜장면에 꽂힌 까닭은
폭우가 쏟아지던 6월 마지막 날, 왕육성 대표는 서교동진향에서 일찌감치 점심 장사를 마감하고 홀로 짜장면 소스를 연구하고 있다.“비가 오는 날엔 짜장면처럼 기름기 있는 음식을 찾는 손님이 많아요. 1시 반쯤 오늘 준비한 재료가 소진돼 문을 닫았어요.”
서교동진향은 진진, 진진가연, 진진야연(심야식당)에 이어 네 번째 브랜드다. 그는 이곳을 짜장면 연구소라고 부른다. 스스로 진진의 메뉴에서 빼버린 짜장면을 다시 연구하게 된 계기는 박찬일 셰프가 쓴 책 ‘짜장면-곱빼기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가’(세미콜론)였다. 당시 박찬일 씨의 요청으로 오래전 기억 속의 짜장면 레시피를 복원하면서 짜장면에 대한 일종의 책임감을 느꼈다고 한다.
“1960~70년대의 기억이야. 우선 칼판에서 넘어온 돼지고기를 받아요. 주로 다릿살이 많고, 비게도 섞여 있어. 정(깍뚝썰기)으로 썰어. 비게도 기름 뽑으려고 웍에 가열하면 아부라기라고, 기름이 뽑히고 난 섬유질이 있어요. 이게 아주 맛있어. 튀긴 건 다 맛있을 때니까, 이것도 짜장에 넣어요. 그때는 양파가 비쌌어요. 철따라 무슨 재료든 다 썼지. 늙은 호박, 애호박, 무말랭이, 그것도 없으면 삶은 무를 넣기도 해요. 고구마, 감자, 양배추도 많이 썼어요. 요새는 거의 사철 일정한 채소가 있지만 그때는 제철에만 뭐가 나왔거든.”
짜장면 연구소의 최종 목표는 한번 먹으면 자꾸 생각나는 짜장면이다.
“짜장면의 기본 재료는 장이죠. 예전처럼 장을 직접 제조하면 집집마다 짜장면 맛이 현격하게 차이가 날 거예요. 지금은 장을 시중에서 구입해 쓰기 때문에 출발점이 다 같아요. 그래서 된장을 섞거나 고추장을 넣거나 조선간장, 콩가루, 밀가루를 볶아서 넣기도 해요. 짜장이라는 용어가 장을 기름에 튀긴다는 뜻이에요. 같은 장이라도 튀길 때 불의 온도와 타이밍에 따라 맛이 달라져요. 짜장이 200도 기름에 들어가는 것과 180도에서 들어가는 것은 미세한 맛의 차이가 있지만 된장 혼합은 큰 차이를 가져오죠. 예를 들어 시골 막장을 넣으면 깊은 맛이 나요. 카레가루, 후추를 넣기도 하고요. 방법은 무궁무진하니까 모두 시도해 봐야죠. 매일 변화를 줄 수는 없지만 다달이 달라질 수는 있어요. 직원들끼리 시식하고 손님들에게 평가받고 또 바꿔요.”
서교동진향을 찾는 손님들은 올 때마다 다른 맛의 짜장면을 먹는 셈이다. 왕 대표는 짜장면 하나로 ‘서교동에서 세계로’라는 큰 꿈을 꾸고 있다.
“짜장면은 중국에서 왔지만 한국식 짜장면을 선호하는 사람이 많아요. 일단 중국 짜장면은 너무 짜요. 또 중국에는 ‘짜장면 한 그릇 문화’가 없어요. 고깃집에서 후식 냉면 먹듯 요리 먹고 짜장면 한 젓가락 먹는 정도죠. 한국처럼 짜장면, 짬뽕 한 그릇을 먹기 위해 중식당에 가지는 않아요. 이렇게 연구하다 보면 언젠가 서교동 짜장면이 세계적인 짜장면이 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