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 돼가는 586 운동권 선배님들”
탈당했는데 민주당 광주시장 선대위원장?
당권주자들은 선 긋기, 처럼회는 옹호
‘구청장 민형배’가 쓴 세 권의 멋진 책
“정권 장악을 위해 착취당하는 광주”
위장 탈당과 운동권 콤플렉스의 연결점
5월 3일 국민의힘 의원들이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장 앞 로텐더홀에서 ‘검수완박’ 법안의 형사소송법 개정안 처리에 반대하며 구호를 외치는 가운데 민형배 무소속 의원이 본회의장으로 향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이에 법제사법위원장을 지낸 민주당 이상민 의원은 이날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고민이 있었겠지만 정치를 희화화하고 소모품으로 전락시키는 것”이라며 “어렵고 복잡할수록 원칙대로 정공법으로 가야 한다”고 호소했다. 그러면서 “국민께서 지켜보고 있다”며 “헛된 망상은 패가망신의 지름길이다. 분별력 있게 합시다”라고 경고했다.
민주당 비상대책위원회 조응천 위원은 4월 21일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서 민형배의 탈당을 “무리수”라고 평가하며 “절차적 정당성이 없으면 민주주의가 무너진다는 말이 있다”고 했다. 그는 “(지난 총선 당시) 위성정당에 대해서 대선 기간 중에 이재명 후보가 몇 번 사과하고 반성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얼마 됐다고 또 이런 탈당까지, 무리수를 감행하는가”라며 “국민들이 뭐라고 생각하실지 좀 두렵다”고 했다.
범여권으로 분류되는 시대전환 조정훈 의원은 같은 날 YTN 라디오에 출연해 “목적을 위해서는 어떤 수단도 가능하다는 (태도를) 초등학생들한테 설명 가능할까. 민주주의(국가)를 태어나면서부터 살게 된 분은 받아들일 수 없다”라며 “586 운동권 선배님들이 반독재를 위해서 피 흘려 싸웠는데 이게 민주 독재다. 입법 독재다”라고 했다. 그는 “저는 586 이후 세대로서 민주화를 이룬 선배들을 우상처럼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 우상들이 괴물이 돼가는 게 아닌지 생각한다”라고 했다. 정의당도 민형배의 탈당을 “대국회 민주주의 테러”라며 강하게 비판했다.
“봤어요? 확인했어요?”
5월 3일 박홍근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가운데)가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에서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 두 번째 법안인 형사소송법 개정안과 ‘중대범죄수사청’ 설치를 다루는 국회 사법개혁특별위원회 구성안이 통과 된 후 의원들과 웃으며 인사를 나누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4월 21일 이재명의 팬카페 ‘재명이네 마을’에는 민형배에게 후원금을 보냈다는 인증 샷이 속속 올라왔다. 대부분 민형배를 응원한다는 의미에서 1004원이나 1만 4원을 보냈으며, 5만 원, 10만 원을 후원했다는 인증 샷도 게시됐다. 이들은 후원 인증 샷을 게시한 뒤 “민형배 의원님의 용기 있는 선택에 응원을 보냅니다” “대의를 위해 희생하신 민형배 의원님” “민형배 의원님 돈쭐 내줍시다” 같은 응원 메시지도 적었다. 민형배의 블로그에 응원 댓글을 달자거나 민형배의 유튜브 채널 구독을 독려하는 움직임도 있었다. 팬 카페의 한 회원은 “민형배TV 구독자가 이제 1만 명인데, 10만 명까지 가보자. 실버버튼 선물 해주자. 우리 민주당원들이 함께한다는 걸 보여주자”고 호소했다.
이런 응원에 고무된 민형배는 4월 26일 검수완박법 안건조정위원회 무소속 위원으로 참석해 8분 만에 찬성 의결을 통과시켜 안건조정위를 무력화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그는 ‘위장 탈당’이라는 비판에 대해 “탈당은 바른 선택이라는 확신이 있고, 누군가 감당해야 할 일이기에 묵묵히 참고 있을 뿐이고 검찰 정상화를 위해 온갖 비난도 감내해야 할 제 몫”이라고 항변했다. 그러면서 “국민의힘은 정말이지 난장판 정당”이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그러나 민심은 민형배의 생각과는 다른 판단을 내렸다. 5월 2~4일 검수완박 법안의 국회 통과 직후 엠브레인퍼블릭 등 4개 기관의 공동 여론조사에서 검수완박 입법에 대한 부정 평가가 52%나 됐고, 긍정 평가는 33%에 그쳤다. 물론 이런 여론조사 결과 따위에 흔들릴 민형배는 아니었다. 5월 9일 법무부 장관 후보 한동훈 인사청문회에서 국민의힘 조수진 의원이 한동훈에게 “위장 탈당은 위장 전입과 다르지 않은 것이므로 처벌해야 하지 않겠느냐”라고 질문하자, 민형배는 발언 기회를 받아서 다음과 같이 강하게 항변했다.
“제가 뭘 위장 탈당을 했습니까. 뭘 위장했습니까. 탈당 안 해놓고 탈당했다고 했습니까. 저는 지금 민주당 소속이 아니에요. 탈당했잖아요. 그런데 위장 탈당이라고 해요? 여기가 무슨 언론사 데스크인 줄 아십니까? 어디다 복당 약속을 했다는 말이에요? 봤어요? 확인했어요?”
탈당과 선거운동은 별개다?
제21대 총선이 치러진 2020년 4월 15일 광주 서구 더불어민주당 광주시당에서 민형배 당시 광산구을 후보가 민주당 점퍼를 입고 엄지를 치켜세워 보이고 있다. [뉴스1]
상황은 민형배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5월 12일 민형배가 자신의 지역구인 광주 광산구 을에서 민주당 소속으로 지방선거에 출마하는 후보들에 대한 공천장 수여식에 참석했으며, 인사말을 통해 후보들을 격려하고 기념 촬영까지 했다는 게 알려졌다. 이어 민주당 광주광역시장 후보 강기정 선거대책위원회의 공동 상임선대위원장으로 이름을 올렸다는 것도 알려졌다. 이에 국민의힘은 민형배를 향해 “위장 탈당이 명백해졌다”며 “국민과 광주시민을 기망하는 행위”라고 비판했지만, 민형배 측은 “탈당과 선거운동은 별개”라며 “선거운동은 당 소속과 상관없이 누구나 할 수 있다”고 반박했다.
민형배는 5월 13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온라인 카페 ‘여성시대’ 회원들로부터 감사패와 선물을 받았다고 올린 뒤 “검찰을 정상화하겠다는 더불어민주당의 집단 의지를 관철하기 위한 정치적 결정을 했고, 후회하지 않는다”며 “보내주신 꽃과 응원으로 의원실은 넉넉하고 화사하다”고 말했다. 그는 “‘여성시대’ ‘재명이네 마을’ ‘민주당 2030 여성당원들’ 그리고 모든 주권자 시민께 감사드린다”고 덧붙였다. 그는 검찰개혁과 민주당의 처지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더불어민주당은 이제 야당의 옷을 입었다. 재빨리 적응하고 ‘야당답게’ 잘 하겠다”고 말함으로써 사실상 민주당 의원의 행보를 보여주고 있다는 비판이 다시 제기됐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 정도면 자신의 ‘위장 탈당’을 흔쾌히 인정하면 될 일인데, 그는 한사코 그걸 거부했으니 말이다. 스스로 생각해도 그게 좀 억지스럽다고 생각한 건지는 모르겠으나, 5월 15일 페이스북에선 조금 다른 자세를 취했다. 그는 “나는 검찰 권력 정상화와 민주당 DNA 이 두 가지 정체성을 실현하기 위해 민주당을 탈당했다”며 “나의 ‘민주당 친화’는 굳이 언론이 나서 시비 걸 일이 아니다. 그게 원래 나의 정치적 DNA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나는 검찰 권력 정상화에 비상한 수단을 썼다. 그것을 ‘편법’ ‘꼼수’라고 비난한다면 감수하겠다”며 “같은 상황이 온다 하더라도 나는 주저 없이 비상한 수단을 쓸 것이다. 내가 감수해야 할 비난보다 검찰 권력 정상화로 얻을 공익이 훨씬 더 크다고 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더 많았다. 광주에서 초중고교를 나온 철학자 최진석은 5월 27일 ‘중앙일보’ 칼럼에서 민형배의 위장 탈당에 대해 이렇게 개탄했다.
“제도를 지켜주는 울타리인 신뢰를 무너뜨렸다. 우리는 여전히 이것을 정의라고 공개적으로 칭송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수준을 살고 있다. 이렇게 눈을 질끈 감고 제도와 법이 주는 작은 승리는 얻었을지 몰라도, 제도와 법의 토대를 허무는 반문명적인 큰 패배를 자초하였다. 진영의 노예가 되어 염치를 아는 더듬이가 부러져서 향원으로 전락한 결과다.”
“민형배, 낙동강 오리알 되나”
2021년 9월 2일 ‘처럼회’ 소속 의원들이 서울 여의도 국회 소통관에서 ‘윤석열 검찰 공작정치 규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당시 직함 기준으로 김의겸 열린민주당 의원, 더불어민주당 민형배·윤영덕·김승원 의원, 열린민주당 최강욱 대표, 강민정 의원, 김용민 더불어민주당 의원. [뉴스1]
민형배는 민주당 복당 계획에 대해 “복당해야죠”라며 “그런데 아직 당에서 복당하라고 요청이 들어오지 않아서 기다리는 중”이라고 했다. ‘복당을 신청한 것이냐’는 물음에는 “지금 신청돼 있는 건 아니고, 당에서 요청이 있으면 하겠다”며 “왜냐하면 1년이 지나야 복당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특별한 조치가 필요하다”며 “당무위원회 의결 같은 것이 있어야 될 것”이라고 했다.
6월 8일 민형배가 민주당에 복당을 신청한 것으로 확인됐지만, 여론이 워낙 안 좋아 지도부가 그의 복당을 부담스러워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민주당 당권 주자들도 민형배의 복당에 부정적 입장을 밝혀 ‘낙동강 오리알’이 될지도 모른다는 관측까지 나왔다.
6월 29일 당대표 출마를 공식 선언한 강병원은 이튿날 라디오에서 “위장 꼼수 탈당은 우리 민주주의 규범을 깨뜨리는 행위”라며 “민 의원을 안 받아야 한다”고 했다. 그는 “검수완박을 민주당이 강행해 국민들이 얼마나 비판했느냐”라며 “이후 여론조사가 10%씩 떨어졌다”고 했다. 6월 30일 당대표 출마 선언을 한 박용진도 이날 언론 인터뷰에서 “무소속 윤미향 의원의 제명 문제, 민형배 의원의 복당 문제가 국민이 새로운 민주당을 판단할 중요한 가늠자가 될 것”이라며 “아무리 민주당이 ‘우리 달라졌어요’라고 말로 얘기해 봤자 국민들은 이 두 사안을 어떻게 처리하느냐로 민주당을 판단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자 ‘처럼회’ 소속 의원들이 민형배를 옹호하면서 복당을 주장하고 나섰다. 장경태는 “민 의원의 복당은 희생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제자리로 바로잡아야 할 절차”라고 했고, 유정주는 “민형배 의원은 검찰개혁이라는 소명을 다하기 위해 살신성인(殺身成仁) 했다”면서 “민 의원의 탈당은 절차적 정당성이라는 표면적 이유를 무기 삼아 기득권을 공고히 한 검찰을 국민의 검찰로 되돌려 놓기 위한 대승적 결단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전 민주당 비상대책위원장 박지현은 “장경태 의원이 민형배 의원의 복당을 촉구했는데, 국민의 시선은 개의치 않는 것 같다”며 “편법을 관행으로 만들어 선거 패배의 원인을 제공했던 일에 대한 책임과 반성도 찾아볼 수 없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국민을 보고 정치를 하는 건지, 팬덤의 비위를 맞추려고 정치를 하는 건지 알 수 없다”며 “내로남불과 온정주의와 팬덤 정치 때문에 세 번이나 선거에 지고 말았다”고 썼다.
민형배는 7월 1일 페이스북을 통해 “전당대회를 앞두고 저의 복당 여부를 이슈화하려는 시도가 있다”며 “전당대회 과정에서는 누구든 거론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특히 악용하려는 시도가 있다면 그건 반칙이고 배신”이라고 밝혔다. 그는 “다만 한 가지는 분명히 말씀드린다”며 “저의 탈당을 압박 수단으로 삼아 의장 주도 여야 합의안이 나왔고, 지난 4월 30일 검찰청법과 형사소송법 일부개정법률안이 본회의를 통과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모든 민주당이 찬성한 법안”이라며 “저의 탈당과 복당에 뭐라 말하든 민주당 의원이라면 이 법안을 스스로 부정하지 말기 바라며 복당 반대가 표가 될 것이라는 오판도 함께 거둬주시면 좋겠다”고 했다.
“광주, 대의 위해 한 표 행사 강요받아”
민형배의 위장 탈당과 관련된 그간의 전개 과정과 논란을 소개한 게 너무 길어졌다. 이제 내가 그를 매우 높게 평가했던 이유를 말씀드릴 때가 됐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건 그가 광주 광산구청장 시절이던 2013년 10월에 출간한 ‘자치가 진보다’라는 책을 통해서였던 것 같다. 나는 그의 다음 진술이 마음에 들었다.“민주 정부 10년을 거치고도 광주는 그냥 광주에 머물러 있다. 광주·전남에 연고를 둔 정치 엘리트, 고위관료, 일정 규모 이상의 기업 등이 잠깐 동안 괜찮은 기회를 누렸을 뿐이다. 이 진실을 뒤집으면, 정치권력을 ‘빼앗긴’ 현재 직접적으로 타격을 받는 사람들은 광주·전남 시도민이 아니다. 한때 괜찮은 기회를 누린 그들이 기회를 박탈당했을 뿐이다.”
맞다, 이게 바로 호남의 문제요, 한국 정치의 문제다. 이어지는 그의 말을 더 들어보자.
“그들의 기회 박탈을 우리 모두의 기회 박탈로 포장한 다음, 지역의 유권자를 중앙정치에 동원했던 것이 지금껏 우리 지역에서 벌어진 정치행태였다…이 과정에서 우리는 자치와 지역을 잃었다. (중략) 선거가 민주주의의 꽃이라면, 자치는 민주주의의 뿌리이다…한국의 민주주의는 투표하는 날 하루만 작동하는 ‘선거민주주의’에 머물러 있다.”
나는 2015년 1월 광주 투게더광산 나눔문화재단 강연회에 초청받아 ‘우리 마음속의 6·25: 우리는 언제까지 ‘전쟁 같은 삶’을 살아야 하나?’라는 주제로 강연을 한 적이 있다. 나는 강연회에 참석한 시민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민형배가 얼마나 괜찮은 구청장인지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내가 그런 이야기를 통해 판단하기론, 그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전쟁 같은 정치’에도 단호히 반대할 인물이었다.
민형배가 2015년 12월에 출간한 ‘내일의 권력’이란 책도 눈여겨볼 만하다. 그는 이 책의 출간 후 ‘한겨레’와 인터뷰하면서 “정권교체를 외치는 것이 유일한 정치행위가 돼버린 야당에 불만을 쏟아내려고 쓴 책이다”라며 “권력을 분해해 다시 짜야 한다. 시민과 지역이 권력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 대의제 선출직도 제대로 작동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대통령과 중앙정부만 권력으로 인식하는 것이 문제”라며 “사회 권력과 자치 권력이 내일 권력의 그릇이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야당이나 지지층 모두가 지금 이 자리에서 할 일을 찾지 못하고 ‘다음 대선’만 손꼽아 기다리며 정치의 진공상태를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민형배가 여전히 광산구청장(재선) 시절인 2017년 12월에 출간한 ‘광주의 권력’도 아주 멋진 책이다. 특히 이 책의 제7장 제목이 가슴에 팍 와닿았다.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에 뒤처진 광주’. 아, 늘 내가 쓰고 싶은 글의 주제였다. 나는 호남, 특히 광주의 정치 성향과 선택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많다. 좋건 나쁘건 바로 그게 한국 민주주의 발전의 발목을 잡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쓰지 못했다. 쓸 수 없었다. 내게 그럴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나 같은 사람이 많을 게다. 광주에 대해 “저건 아닌데…”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런 생각을 입 밖에 낼 수 없는 사람들은 꼭 비겁하거나 소심해서 그런 건 아니다. 고통받지 않은 사람이, 그것도 사실상 그 고통을 피해 살았던 사람이, 고통받은 사람들의 정치 성향과 행태에 대해 비판적으로 말하는 건 예의가 아니다.
그러나 민형배에겐 그런 자격이 있다고 믿었기에 큰 기대를 걸었다. 그는 광주 시민사회 원로들의 추천을 받아 노무현 청와대에 들어가 국정홍보·인사관리 행정관, 사회조정 비서관으로 일했을 정도로 지역사회의 신망을 받고 있는 인물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앞서 언급한 글에서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에 뒤처진 광주에 대한 적나라한 고발과 비판을 자제한 걸로 보아 그 역시 자격 문제에 발목이 잡히고 말았던 것 같다. 그럼에도 나는 그에게 성찰이 펄펄 살아 있는 게 좋았다. 다음 말씀은 원론적 수준의 의견 표명일망정 감동적이지 않은가?
“형식민주주의가 정착한 이후에 ‘민주화의 성지’는 민주당 계열 정당이 독식하면서 정치적으로 ‘착취’당했다. 광주시민의 열정은 광주를 위해 쓰이지 못하고 전국 정치 연료로 징발당했다. 대통령선거, 국회의원 선거를 휩쓴 구호는 언제나 정권교체였다. 광주는 없었다. 심지어는 지방선거를 하는 데도 정권교체의 대의를 위해 한 표 행사를 강요받았다.”
‘위장 탈당’과는 거리가 먼 권력관
평소 광주를 비롯한 호남 전역에서 저질러지고 있는 ‘민주당 1당 독재’에 대해 강한 문제의식을 갖고 비판해 오던 나로선 동지를 만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는 민형배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한 호남 정서에 반하는 정치적 행보도 얼마든지 걸을 수 있을 것이라 믿었기에 그의 리더십하에 호남 정치가 달라지기를 기대했다. 물론 나의 기대는 배신당했다. 그는 기존 호남 정서를 강화하는 쉬운 방향으로 강경 노선을 내달렸으니 말이다.내가 민형배의 저서 3권을 소개한 이유는 민형배의 권력관과 정치철학의 일면이나마 소개하고 싶어서였다. 독자들께선 이미 판단하셨겠지만, 그의 권력관과 정치철학은 위장 탈당과는 거리가 멀다. 멀어도 너무 멀다. 위장 탈당은 좋은 목적을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릴 필요가 없다는 마키아벨리즘의 관점에선 이해될 수 있겠지만, 민형배는 시종일관 사회 권력과 자치 권력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절차적 정당성의 가치를 외쳐온 사람이다. 게다가 그는 광주가 정권교체의 도구로 착취당해 온 것에 대해 분노해 온 사람이 아닌가.
그런데 내가 그렇게 보았던 그가 어쩌자고 ‘위장 탈당’을 한 데다 그걸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큰소리를 친 것인지, 그리고 ‘후안무치’니 ‘야바위 짓’이니 하는 비난에 역공을 펼 정도로 하늘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는 듯 행세한 걸까? 만약 그의 그런 행위를 진정성이 있는 걸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그걸 어떻게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을까?
누가 시킨 건 아니었지만, 나는 그런 고민으로 골치가 아팠다. 그러다가 그가 6월 15일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 새삼 주목하게 됐다. 민주당 내에서 ‘처럼회 해체론’이 등장한 것에 대한 강한 반론이었다. 그는 “처럼회는 개혁을 중시하는 의원 20명 정도가 함께 참여하는 연구 모임이다. 굳이 분류한다면 계파가 아닌 정파”라며 “순교자까지는 몰라도 개혁에 헌신하려는 적극성을 갖고 있다. 해체를 거론할 게 아니라 되레 응원과 격려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어 민형배는 공격 모드로 전환해 “개혁을 중시하다 보니 수구 언론이 ‘강경파’로 분류하고 있다. 개혁의 적절성과 정당성을 따지는 것은 필요하나 개혁 자체를 ‘강경’으로 몰고 가는 건 정말 엉뚱하다. 수구 언론의 ‘전형적인 토끼몰이’ 작전”이라며 언론 탓을 했다. 이에 강성 지지자들은 “수구 언론이 (만든) 프레임과 이간질에 놀아나지 말자”며 ‘처럼회’ 해체를 주장하는 다른 의원들을 ‘수박’, 즉 ‘겉은 푸르면서(민주당 상징색) 속은 빨간(국민의힘 상징색) 정치인’이라고 비난했다.
처럼회가 개혁파라는 주장인데, 노무현 정부에서 대통령홍보수석비서관을 지낸 조기숙 이화여대 교수가 바로 전날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 동의하는 사람이 더 많지 않았을까?
“처럼회가 개혁을 했다고? 무슨 개혁이냐? 한동훈 (법무부 장관) 영웅 만들기,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으로 지방선거 참패에 기여한 게 개혁인가? 처럼회가 해리포터라도 되나? 입으로 주문만 외우면 개혁이 이뤄지게.”
증오와 적개심 키우는 ‘순교자 정치’
민형배의 글에 등장한 개혁이라는 단어도 듣기에 좀 민망했지만, 내 눈에 번쩍 뜨인 건 ‘순교자’라는 단어였다. 이 단어는 전날 처럼회의 핵심 멤버인 황운하가 쓴 것이었다. 그는 처럼회 회원들을 “시대적 과제라 볼 수 있는 정치개혁이나 검찰개혁 과정에 기꺼이 순교자가 될 수 있다는 헌신의 각오가 돼 있는 분들”이라고 주장했다. 서기 2022년에 순교자라는 말을 듣게 되다니 놀랍다 못해 어이가 없었다. 그렇다면 민형배는 순교자의 마음으로 위장 탈당을 했다는 걸까? “순교자까지는 몰라도 개혁에 헌신하려는 적극성을 갖고 있다”는 그의 말은 자기 겸양으로 이해하는 게 옳을지도 모르겠다.20여 명의 처럼회 회원 가운데 가장 순교자 이미지가 강해 보이는 사람을 고르라면 나는 민형배를 택하련다. 늘 진정성이 흘러넘치는 그의 얼굴과 더불어 그의 강한 ‘운동권 콤플렉스’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자치가 진보다’에서 “나는 고난받지 않은, 소심한, 소극적인 운동권이었다”며 자신에게 그런 ‘운동권 콤플렉스’가 있다고 고백했다. 그는 “어두운 시절에 진 빚을 조금이라도 갚고 싶었다”며 이 콤플렉스를 동력으로 삼아 정치를 하고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민형배의 위장 탈당은 유정주의 말마따나 “검찰개혁이라는 소명을 다하기 위한 살신성인(殺身成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나는 그렇게 믿고 싶다. 지지를 보낼 순 없어도 경의를 표하는 게 옳겠지만, 나는 위장 탈당으로 대변되는 그의 최근 정치활동은 “자치가 진보”라는 자신의 대원칙에서 크게 이탈한 것임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자치가 진보”라는 건 기초자치단체장 시절에나 할 수 있는 말이고, 금배지를 달고 나면 자치는 잊어야 하는가?
광주를 비롯한 호남의 ‘1당 독재’가 지역사회를 병들게 하고 있는 문제는 어찌할 것인가? 호남이 정권장악의 도구로 착취당해 온 것에 대한 그의 분노는 어디로 갔는가? 검수완박을 하면 이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가? 자신의 정치언어를 돌아보시라. 순교자의 비장미와 더불어 강한 증오와 적개심이 흐르고 있다. 현실 세계에서 순교자는 그 어떤 장점에도 불구하고 순교하지 않는 사람을 낮춰보는 독선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처럼회는 물론이고 민주당이 살려면 지금까지 해온 ‘가짜 순교자 정치’에서 탈출해야 한다.
민형배에게 “자치가 진보”라는 대원칙이 여전히 유효하다면, 이제는 자치를 신봉하는 지역정당에 눈을 돌려야 할 때가 아닌가? 서울에 중앙당을 두고 5개 이상의 시·도당을 설치해야 정당 등록을 받아주는 기존 정당법을 바꾸는 데에 민형배가 앞장서야 하지 않겠는가? 민주당에 복당하기 위해 애쓰지 마시라. 원래 이렇게 되게끔 의도한 건 아니었을망정 그의 무소속 신분은 축복일 수 있다. “자치가 진보”임을 실천하면서 널리 전파하는 데엔 무소속 신분이 훨씬 더 유리하고 바람직하다. 아직 민형배에 대한 기대를 포기할 수 없기에 이런 글을 쓰게 되었음을 이해해 주시기 바란다.
강준만
● 1956년 출생
● 성균관대 경영학과 졸업, 미국 위스콘신대 메디슨캠퍼스 언론학 박사
● 現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 저서 : ‘발칙한 이준석: THE 인물과사상 2’ ‘싸가지 없는 정치’ ‘부동산 약탈 국가’ ‘한류의 역사’ ‘강남 좌파’ ‘노무현과 국민사기극’ ‘김대중 죽이기’ 등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