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4월호

DJ의 ‘충직한 종’ 이수동의 37년 그림자 인생

  • 김기영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hades@donga.com

    입력2004-10-29 16: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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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7년간 그림자 보필, “선생님과는 주종관계”
    • “조용한 사람, 이번 사건 나고 이름 알았다”
    • 권노갑은 DJ의 가신, 이수동은 이희호의 가신
    • “대통령과 재단에 천추의 한 남겼다”
    ”이수동씨요? 무슨 일을 저지를 인물이 아닙니다. 그를 둘러싼 소문은 말 그대로 소문입니다. 이권에 개입할 성품도 아니고 그런 정도의 거물도 아닙니다.”

    이수동 전 아태재단 상임이사의 비리의혹 사건이 터지기 6개월 전인 지난해 가을, 동교동계 한 중진의원은 “이수동씨에 대해 좋지 않은 소문이 돌고 있다”는 세간의 의혹을 이렇게 일축했다. 다른 동교동계 중진이라면 몰라도 이씨는 그럴 위치에 있지도 않고, 그런 일에 관여할 사람도 아니라는 게 이 의원의 주장이었다.

    이수동씨와 동교동의 내부사정을 아는 다른 사람들도 대체로 이 의원의 의견에 동의한다. “분수를 지킬 줄 아는 사람” “주제 넘게 나섰으면 벌써 알려졌을 인물”이라는 평가도 따라다닌다.



    동교동의 집사



    전직 정치부 기자로 동교동에 출입했던 원로 언론인은 “정치부 기자들에게는 예나 지금이나 동교동 가신(家臣) 하면 권노갑, 한화갑, 김옥두다. 이번 일이 터졌으니까 ‘아, 그 사람’하고 새삼 알게 됐지, 40년 전부터 동교동을 출입했지만 동교동 가신 중에 이수동이라는 사람이 있는 줄도 잘 몰랐다”고 말했다. 이 원로 언론인은 “동교동 DJ의 사저에 찾아가면, 손님이 드나드는 것에 관심 기울이지 않고 언제나 한편에서 조용히 자기 일을 하던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이수동씨였다”고 말했다.

    한 원로 정치인은 이수동씨에 대해 “동교동에 날아오는 각종 공과금 고지서를 챙긴다든지 집안 어디에 문제가 생기면 수선을 한다든지 하는, 말 그대로 동교동의 집사(執事)였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말했다.

    이수동씨가 아태재단 행정실장이던 1994년, 창립 당시 아태재단에 근무했던 한 인사는 이수동씨에 대해 “언제나 조용한 분이었다”고 기억했다. 그는 “재단 창립 무렵, 영국에서 돌아온 김대중 대통령이 정치일선에 나서기 전이었는데, 그러다보니 아태재단이 사실상 DJ를 따르는 정치인들의 사랑방 역할을 했다. 이수동 실장은 사무실에 찾아오는 손님들을 맞고 접대하는 일로 하루 일과를 보냈는데 늘 웃는 얼굴로 손님을 맞이하고 배웅하던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전직 국회의원 P씨는 “이수동씨는 그리 똑똑한 사람이 아니었다. 드러나지 않고 묵묵히 동교동의 일을 돕다보니 동교동 주변에서 그를 욕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말했다. P씨는 “야당시절 김대통령의 동교동 자택을 방문하면 보통 김옥두 의원이 손님들을 안내하는 역할을 했던 것 같다. 나도 무수히 동교동에 드나들었지만 이수동씨와는 한마디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었다. 정치적인 얘기는 권노갑씨와 나눴다. 이씨가 권씨와 같은 ‘동교동 1세대 가신’이라고 하지만 이씨의 역할은 말 그대로 ‘집사’였다”고 회고했다.

    김대통령의 집사였던 이수동씨가 비리혐의의 주인공이 되면서 그를 아는 사람들은 “설마설마하던 일이 터졌다”는 반응들이다. 이씨와 아태재단의 비리의혹이 김대통령의 두 아들로 번지고 있다. 당장 김홍업 아태재단 부이사장에게 비난의 시선이 쏠리고 있다.

    그러나 사실 이수동씨는 오래 전부터 ‘DJ의 정치자금’ 관련 뉴스에 심심치 않게 등장한 인물이다. 1997년 1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당시 신한국당(현 한나라당)은 세 차례에 걸쳐 ‘DJ 비자금 의혹’을 폭로했다. 당시 신한국당은 김대통령이 기업체 등으로부터 거액을 받았으며 이를 처조카인 이형택씨가 관리해왔다고 주장했다. 신한국당은 또 DJ는 정치자금 성격의 돈을 시중은행과 투신사, 증권사 등 수십 개의 금융기관에 아들들을 비롯한 친인척 40명의 이름으로 분산 예치해놓았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눈길을 끄는 점은 신한국당이 폭로한 계좌의 주인 가운데 김대통령의 친인척이 아닌 사람으로는 이수동씨가 유일하다는 사실이다.

    신한국당의 고발로 검찰은 김대통령의 비자금 사건을 조사했다. 그리고 1998년 2월, 검찰은 처조카 이형택씨가 관리한 349개 계좌 중 87개 계좌 47억6900만원과, 이수동씨 계좌에 들어있던 8억1000만원만 DJ와 관련이 있을 뿐 나머지는 친·인척의 개인용 계좌라고 사건 결과를 밝혔다.

    친인척도 아닌 이수동씨 명의의 계좌에 정치자금을 보관한 DJ, 정치권에서는 이 사건을 DJ와 이수동씨와의 친밀한 인간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준 사건으로 기억하고 있다. 동교동 주변에서는 바로 이런 두 사람만의 신뢰관계가 오늘날 이수동씨 비리의혹사건의 배경이라고 믿고 있다.

    앞서의 P 전 의원은 “이수동씨의 비리의혹은 그의 자리가 낳은 비극이다. 이수동씨가 김대통령 내외와 가깝고, 대통령의 차남인 홍업씨와 지근거리에 있다는 사실 자체가 로비의 표적이 된 본질적인 이유”라고 말했다. 아태재단에 근무했던 한 인사는 “김대통령이 대통령이 되기까지 40년 쌓인 인연이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이런저런 연(緣)을 앞세운 청탁이 곧장 청와대로 향할 수는 없으니까, 접근하기 쉽고 DJ와의 과거 인연을 잘 아는 이수동씨에게 몰린 것이고 그 와중에 비리사건이 터진 것”이라고 해석했다.

    아무튼 이수동씨로부터 시작된 아태재단 게이트는 퇴임을 앞둔 김대통령에게 두고두고 짐이 될 것으로 보인다. 김대통령 스스로 퇴임 이후 활동무대로 설정했던 아태재단의 존립마저 위협받고 있는 실정이다. 김대중 대통령도 이씨의 비리의혹 소식에 그 어느때보다 침통해하고 있다고 한다.

    김대통령과 이수동씨의 인연은 참으로 장구하다. 두 사람은 고향 선후배 사이다. 두 사람의 집안은 선친 때부터 알고 지냈다고 한다. 전남 신안군 하의도, DJ의 고향마을에서 두 사람은 앞뒷집에 살며 어린시절을 보냈다. 김대통령보다 여섯 살이 어린 이수동씨는 김대통령을 ‘형님’이라 부르며 따랐다.

    하의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목포중학에 진학한 이씨는 2학년 때까지 김대통령의 목포집에서 유학생활을 했다. 세월이 흘러 동교동의 가신이 된 이씨가 김대통령의 어머니와 화투를 함께 치며 시간을 보냈다는 일화가 있는데, 어린 시절 김대통령의 목포집에서 기숙했던 인연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두 사람이 정치적으로 ‘동지’ 관계가 된 것은 그로부터 한참의 세월이 흐른 1960년대 중반, DJ가 광화문에 내외문제연구회라는 개인 연구실을 내면서부터다. 이씨는 이 사무실에 출근해 DJ를 보좌하는 것으로 DJ와 정치적 인연을 맺게 된다.

    이수동씨에게 김대통령은 하늘과 같은 존재다. 물론 이수동씨가 이런 자신의 생각을 공개적으로 밝힌 적은 없다. 사실 공개된 자료에서 이씨의 흔적은 찾기 어렵다. 동교동의 비사를 다룬 책에도 뜻밖에도 이수동씨의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현역 정치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권노갑, 한화갑, 김옥두, 이협, 배기선, 설훈 등이 DJ의 측근들로 등장할 뿐이다. 그만큼 이씨가 동교동 내에서도 음지에서 말없이 움직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던 1987년, DJ의 두번째 대권도전을 앞둔 어느 날, 이수동씨는 돌연 출판물에 자신의 이름 석 자를 드러냈다. 그해 가을 ‘인동(忍冬)’이라는 출판사에서 발행한 ‘동교동 사람들’이라는 책의 말미에 ‘함윤식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제목의 편지글 5편이 실려 있는데 글쓴이가 바로 ‘전 김대중씨 경호실 차장’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이수동씨였다.

    1980년대 중반, 과거 DJ의 경호요원이었던 함윤식씨가 ‘동교동24시’라는 책을 통해 DJ와 동교동 가신그룹을 비난한 것과 관련, 이씨는 이 편지글에서 ‘함씨의 주장은 허위이고 왜곡’이라고 반박했다. 이 글을 쓸 당시 이수동씨는 미국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그의 글은 미국내 교포신문인 ‘코리안 스트릿저널’에 다섯 차례에 걸쳐 연재됐고, 그 편지를 ‘동교동 사람들’이라는 책에 옮겨 실은 것이다. 이씨는 편지글 곳곳에 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무한한 경외심을 드러내고 있다. 다음은 그 한 대목.

    ‘함형!

    한번 물어봅시다. 함형이 아는 국내정치인 가운데 김대중 선생님만큼 국민의 편에서 서서 투쟁하신 분이 누가 있으며 확고한 정치적 신념과 경륜을 가지신 분이 누구입니까? 김대중 선생님만큼 국제사회의 앞날을 내다보시는 분이 누구이며 자아의 성장을 위해 노력하신 분이 누구입니까? 김대중 선생님만큼 국민의 지지기반을 갖고 계신 분이 누구이며 반대를 위한 반대가 아니라 합리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정치인이 누구입니까? 대통령병에 걸렸다고요?

    함형!

    한 번의 도전에 실패하고 좌절하는 나약한 지도자라면 누가 그를 존경하고 따를 것이며 그의 앞길은 자명하잖아요. 그 많은 역경을 겪어오시면서 애국애족의 일념으로 불의와 타협하기를 거부하면서 비록 고독하고 힘겹지만 오직 일편단심으로 평생을 싸워온 정치인이 김대중 선생님 외에 누가 있습니까?

    국제사회는 끊임없는 전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선전포고 없는 경제전쟁 말입니다. 정치가로서 김대중 선생님만큼 경제에 밝으신 분이 있으면 말씀해 보세요. 대통령은 국민이 뽑습니다. 이제 헌법도 절차만 남았을 뿐 직선제가 확실하니 말입니다. 누구는 된다, 안된다 하는 것은 국민을 모독하는 이야기입니다.’

    이씨는 이 글 한편에서 김대통령과 자신과의 관계를 ‘주종관계’라고 까지 표현하고 있다. 어린 시절 ‘고향 형님’이었던 김대통령을 자신의 주인이라고 생각한 이수동씨. 그가 왜 37년간 그림자처럼 동교동 집사생활을 자청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함형!

    심지어 김대중 선생님과 비서 경호원들의 식탁메뉴가 다른 것까지 꼬집으셨는데 이런 교만이 어디 있어요? 선생님과 비서, 경호원의 관계는 수직관계이지 수평관계가 아닙니다. 주종관계이지 평등관계가 아니란 말입니다. 비록 메뉴가 달랐더라도 우리 같이 선생님 앞에 충성하던 시절을 회고해보면 부엌 아줌마들의 구수한 사투리에 토속음식으로 입맛을 맞추어 마련해준 식탁에서 권커니 먹거니, 비록 상다리가 휘청거리지 않더라도 양껏 먹고 마시는 우리가 아니었습니까.’

    이수동씨의 이력 가운데 가장 잘 알려져 있고 오랫동안 달고 있던 직함이 ‘김대중씨 경호실 차장’이다. 1971년 대선 때 이씨는 경호실 차장으로 DJ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녔고, 이 때문에 그는 아태재단 행정실장이라는 공식 직함을 달기 전까지 오랜 세월 ‘경호실 차장’으로 불렸다.

    DJ의 신변경호를 책임진 경호실차장 시절도 잠깐, 오랜 세월 이수동씨는 동교동의 안살림을 챙기는 집사로 DJ와 그의 가족을 도왔다. 1983년 DJ가 미국 망명생활을 할 때도 이수동씨는 DJ의 곁에서 그를 도왔다.

    1987년 13대 대선 때 이씨는 한국으로 돌아와 선거대책위 조직부위원장을 맡아 선거를 도왔고, 1992년 14대 대선때는 총무보좌역으로 DJ의 선거자금을 다루기도 했지만 그의 주된 역할은 동교동 집사였다.

    동교동의 가족 대소사를 챙겨온 이씨의 이력 탓에, 권노갑씨가 DJ 가신의 대표적 인물이라면 이수동씨는 이희호 여사의 가신이라고 평가하는 이들도 있다. 유신을 전후해 DJ가 불가피하게 망명생활을 할 때도, 이수동씨는 DJ 없는 동교동을 지키며 이여사의 손발 역할을 했다. 이런 인연으로 이수동씨는 이여사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는데, 그후 김대중가(家)에서 일어나는 대소사는 모두 이씨의 몫이 됐다고 한다.

    김대통령 집권 초기 하의도 생가복원 작업을 벌일 때도 이 일을 현장에서 챙기고 지휘한 사람이 이수동씨였다. 이씨는 김대통령의 동생 대현씨와 하의도를 오르내리며 현장 답사 등의 실무를 챙겼다.

    대통령 당선 이후 김대통령 내외가 청와대로 옮긴 뒤로도 한동안 이수동씨는 청와대 관저에 수시로 출입하며 김대통령과 이희호 여사의 사적인 일까지 챙겼다고 한다. 이씨는 김대통령이 퇴임 이후 거주할 자택의 관리도 도맡아 해왔다고 한다.

    김대통령이 일산 자택을 매각한 2년 전부터는 일산 자택에 남아있던 미술품들과 야당시절 물품 등 소장품을 챙겨와 관리하는 등 김대통령 내외를 위해 누군가 챙겼어야 할 일들을 이씨는 묵묵히 맡아 해왔다. 2000년 12월 김대중 대통령이 노벨상을 수상하기 위해 노르웨이를 방문할 때, 이씨는 권노갑 한화갑 김옥두씨 등 다른 동교동 가신들을 제치고 수행단의 일원으로 노벨평화상 수상식에 참석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주변에서는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김대통령 내외의 궂은 일을 도맡아 처리해 준 집사에 대한 김대통령의 배려라고 해석하기도 했다.

    그런 이씨가 이용호씨로부터 5000만원의 로비자금을 받은 혐의로 구속되던 날, 특유의 쉰 듯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내가 대통령과 재단에 천추의 한을 남겼습니다.”

    37년간 이름 없이 김대통령을 보좌했던 이수동씨, 임기 1년을 남겨둔 위태로운 김대통령에게 가장 무거운 부담을 안겨준 채 그는 자신의 생애를 통틀어 가장 확실하게 이름 석 자를 국민들의 기억에 남긴 채 구치소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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