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9월호

‘산업화 거인’ 존중하고 ‘민주화 청년’ 기억해야

‘국제시장 그후’ 구상하는 영화감독 윤제균

  • 구해우 | 미래전략연구원 원장 송홍근 기자 | carrot@donga.com

    입력2015-08-20 14: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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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덕수’ 가족의 민주화 시대 다룬 영화 준비 중
    • ‘칭찬’만 하는 ‘앙드레 김’, 보수-진보가 배웠으면
    • 문화융성? ‘일류’는 못돼도 ‘아류’ 돼선 안 돼
    • 싸이가 가수로 성공한 것은 ‘주제 파악’ 덕분
    ‘산업화 거인’ 존중하고 ‘민주화 청년’ 기억해야
    윤제균(46) 감독은 1969년 부산에서 태어나 고려대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1999년 태흥창업 주최 공모전에서 시나리오 ‘신혼여행’으로 입상해 영화계에 데뷔했다. 대학 졸업 후 입사한 LG애드에서 2000년에 나와 이듬해 ‘두사부일체’로 영화감독으로서 이름을 처음 알렸다.

    윤 감독이 연출한 ‘국제시장’은 관객 1425만 명을 동원해 ‘명량’(1761만 명)에 이은 역대 흥행 2위를 기록했다. 2009년 발표한 ‘해운대’에 덧붙여 ‘1000만 명 클럽’ 영화 2편을 최초로 내놓은 한국 감독이 됐다.

    “어른들께서” “꼰대들이”

    “아버지 내 약속 잘 지켰지예? 이만하면 내 잘 살았지예? 근데 내 진짜 힘들었거든예.”

    ‘국제시장’은 ‘덕수’(황정민 분)의 독백으로 대단원을 맺는다. 현대사를 버텨낸 ‘필남필부가 경험한 위대한 이야기’다. 6·25전쟁 흥남철수작전 때 아버지와 헤어져 “쪼꼬렛또 기브미”를 외치던 ‘꼬마 덕수’는 서독에 광부로 가 석탄을 캔다. 다녀와서는 전쟁이 한창이던 베트남으로 날아가 일한다.



    “아바이가 없으면 장남인 덕수 니가 가장”이던 세월을 산 ‘덕수’가 아내(김윤진 분)에게 말한다. “내는 그래 생각한다. 힘든 세월에 태어나가 이 힘든 세상 풍파를 우리 자식이 아니라 우리가 겪은기 참 다행이라꼬.”

    정치 이슈를 다루지 않은 이 영화를 두고 이념의 칼을 든 논박이 있었다. 보수와 진보의 헤게모니 다툼 탓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으로 상징되는 산업화 세대의 공적만 부각했다는 게 비판의 골자다. 산업화 세대 중엔 선거 때 보수 정당을 지지하는 이가 더 많다. 민주화 세대는 거꾸로다. 진영 다툼과 세대 갈등이 얽힌 것이다. ‘어른들께서…’라는 말 만큼이나 ‘꼰대들이…’라는 말이 회자된다.

    현대사를 관통하는 한국 영화 ‘국제시장’을 연출한 윤 감독을 8월 3일 만났다.

    ▼ 윤 감독을 가운데 놓으면 산업화 세대 ‘아버지들’, 민주화 세대 ‘친구들’, 세계화·정보화 세대 ‘자녀들’로 나눌 수 있겠습니다. ‘국제시장’을 통해 이들 각 세대에 전하려 한 메시지는 뭔가요.

    “거시적 목적을 갖고 영화를 준비한 게 아니에요. 지극히 개인적 관점에서 시작했습니다. 대학교 2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가족을 위해 일만 하다 떠나셨는데, 돌아가실 때 ‘고맙다’는 말 한마디 못해드린 게 짐으로 남았습니다. ‘나의 아버지’ 혹은 ‘우리 세대의 아버지들’의 일생을 그리다보니 줄거리가 현대사를 관통한 겁니다.

    영화를 준비하면서 현대사 공부를 적잖게 했습니다. 칼로 무 자르듯 할 수는 없으나, 박정희 대통령 서거 전후로 현대사가 나뉜다고 봐요. 1960~1970년대 산업화, 1980~1990년대 민주화가 큰 두 갈래죠.

    2000년 이후 정보화·세계화는 민주화와 함께 산업화 이후 시대에 속하겠고요. 산업화, 민주화를 압축적으로 이루다보니 어느 집을 가도 할아버지, 아버지, 손자 3대가 매우 다른 경험을 하며 성장했습니다. ‘국제시장’은 가족을 위한 아버지들의 헌신을 말하려 한 영화예요. 그래서 산업화에 초점이 맞춰진 것이고요. 2편을 만들어보려고 해요. 배우들에게도 이야기했습니다. 덕수 가족이 민주화 시대를 어떻게 헤쳐 나가는지를 다룰 것 같습니다.”

    ▼ 보수우파 · 진보좌파 간 논쟁이 ‘국제시장’을 놓고 벌어졌습니다. 진영 논리에 따라 아전인수(我田引水) 격으로 사안을 해석해 다투는 게 일상화했죠. ‘국제시장 그후’에는 산업화 · 민주화 세대의 갈등이 드러날 수밖에 없어 보입니다만.

    “1편에선 정치적 내용을 철저하게 배제했습니다. 수박 겉핥기로 다루느니 안 다루는 게 낫다고 봤죠. 2편에서는 정치를 다룰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민주화’라는 낱말이 정치의 언어거든요. 지금 시나리오 작업 중인데 줄거리는 계속 바뀔 거예요. 어떤 시각으로 접근하느냐에 따라 영화가 달라지겠죠. 한국 정치의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하는 부분을 영화를 통해 들여다보고자 합니다. 흑백논리, 진영논리 탓에 생긴 경직성이 국가 미래의 걸림돌이라고 생각합니다. 미천한 상업영화를 통해서일지라도 경직성과 관련한 문제를 깊이 있게 고찰해보겠다는 목표가 있습니다.”

    소통과 화합 외치는 영화

    ▼ 한 단계 더 도약하려면 산업화 · 영남을 대표하는 박정희, 민주화 · 호남을 상징하는 김대중 간 역사적 대화와 화해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윤 감독은 “보수우파와 진보좌파가 문화의 영역에서든 정치의 영역에서든 두 진영의 대화와 화해를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한국 사회가 경직된 것은 역지사지(易地思之)를 못해서라고 생각합니다. 이 대담에 나오기로 하면서 꼭 메시지로 남겼으면 좋겠다 싶은 한마디가 역지사지예요. 진영 다툼뿐 아니라 지역갈등, 빈부갈등 등도 역지사지에서부터 해법이 나온다고 봅니다. 역지사지가 안 돼 편을 갈라 다투는 거예요. 사안을 반대편의 처지에서도 한번 생각해보는 게 일상화했으면 좋겠어요. 일개 상업영화 감독일 뿐이지만 저만 해도 촬영할 때 끊임없이 관객의 위치에서 영화를 생각합니다. 관객이 관심 갖지 않는 영화를 만들어 어디에 쓰겠습니까.

    우파에 공적과 허물이 있듯, 좌파에도 공적과 허물이 있습니다. 예수는 ‘너희 중에 죄 없는 자 저 여자에게 돌을 던지라’고 했습니다. 누구나 공과(功過)가 있습니다. 그런데 과만 갖고 물고 뜯는 겁니다. 역지사지하는 것으로 대화를 시작해야 해요. 경영자는 노동자의 처지에서, 노동자는 경영자의 처지에서, 다수는 소수의 처지에서, 소수는 다수의 처지에서 생각해보자는 겁니다. 예컨대 사회 시스템에 불합리한 부분이 있대서 그 나름대로 노력해 부를 일군 사람을 무조건 폄훼해서는 안 되겠죠. 기업의 논리는 이윤 극대화잖아요.

    ‘국제시장’의 부모님 세대가 지금 70~80대예요. 젊은 세대가 그분들더러 뭐라고 합니까. ‘꼰대’라잖아요. 올바르게 인정하지 않는 겁니다. 누구에게나 ‘치열했던’ ‘거인 같았던’ 삶과 시절이 있습니다. 젊은 세대가 역지사지해야 해요.

    젊은이들이 영화 시장의 메인 타깃입니다. 20~30대가 역지사지해봤으면 좋겠다는 게 ‘국제시장’을 연출한 이유 중 하나예요. 투자받는 데 어려움이 많았어요. 부모님 세대 이야기를 100억 원 넘게 들여 찍겠다니 투자자들이 ‘과연 될까’ 의구심을 가졌죠.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영화를 만드는 분도 많잖아요. 소통과 화합을 외치는 영화가 생각보다 많지 않아 그런 영화를 많이 찍고 싶다는 생각이 있어요.”

    ‘易地思之 달인’ 앙드레 김

    ▼ ‘국제시장’에서 남진, 나훈아를 비교하는 장면 있잖아요. ‘덕수’는 남진이 좋다는데, 다른 이들은 경상도 사투리로 나훈아가 좋다고 합니다. ‘남진’이 베트남에서 ‘덕수’의 생명을 구해주고요.

    “동서 간 화합을 말하고 싶었어요. 경상도 사람은 다 나훈아고, 전라도 사람은 다 남진인가요. 영화에서 경상도 사람 ‘덕수’의 목숨을 전라도 사람 ‘남진’이 살려주잖아요. 전 세계에 지역갈등 없는 나라가 없습니다. 시아파, 수니파 다툼을 보세요. 죽고, 죽이잖아요. 광주에서의 비극이 없었으면 지금과는 달랐을 겁니다. 얼마 전 남진 선생을 만났어요. 박정희 대통령 시절 가수로 활동했는데, 그때는 지금 같은 식의 영호남 갈등이 없었다고 하더군요. 어느 순간부터 뭔가 잘못된 거예요.”

    ▼ 보수우파 일부에서는 산업화의 상징 격인 박정희 전 대통령을 영웅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박 전 대통령이 모든 것을 잘했다는 식으로 말해요. 민주화 세대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잘했다면서 상대 쪽에서 한 일을 부정하는 식으로 말합니다. 공적과 과실을 실제대로 보면서 미래를 꾸려가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는 게 현실인 듯합니다. ‘국제시장’을 통해 민주화 세대가 산업화 세대를 존중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데 성공한 것 같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누구에게나 공과가 있는 거죠. 역지사지는 상대에 대한 인정으로 시작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역지사지를 쉬운 말로 풀면 ‘칭찬’입니다. 민주화 세대가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공적을 칭찬하고, 산업화 세대가 민주주의를 위한 헌신을 기억하고 칭찬하면 화해와 소통이 가능하겠죠.

    여담인데, 문화예술계에 칭찬만 하는 분이 계셨어요. ‘판타스틱하다’ ‘유니크하다’면서 함께 일한 연예인의 장점만 말합니다. 앙드레 김 선생 얘기예요. 누구와 작업하더라도 그 사람 장점만 얘기해요. 정말 단점이 없었을까요? 단점은 속으로만 생각하는 거죠. 연예인들이 앙드레 김 선생과 작업하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한 것도 칭찬만 해서 그런 거예요. 앙드레 김 선생을 보면서 배운 게 많아요. 역지사지는 상대를 인정하고 칭찬하는 거예요. 보수와 진보가 그런 태도를 본받으면 좋겠어요”

    ▼ 윤 감독은 어때요? 작업할 때.

    “주로 칭찬해요. 장점만 보려고 노력하고요. 단점은 알고만 있으면 됩니다. 도저히 용납하지 못할 단점을 가졌다? 그때도 다른 데 가서 그 사람 욕할 필요 없어요. 안 보면 됩니다. 우리 사회가 칭찬에 너무 인색한 것 같습니다.

    여야, 좌우, 노사, 부부가 상대의 장점을 칭찬해주면 좋겠어요. 연애할 때는 장점만 보이잖아요. 살면서 단점이 보이니 다투는 거고요. 나중에는 장점은 볼 생각도 안 하면서 죽이네, 살리네 하면서 이혼하고요. 어떤 사람이든 어떤 조직이든 어떤 지역이든 어떤 나라든 장단, 공과가 고루 섞여 있기에 좀 더 긍정적인 시선으로 장점을 많이 봐주는 사회가 되면 좋겠습니다.”

    ‘좋은 뉴스’ 채널

    윤 감독이 웃으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사회가 경직된 데는 갈등을 부추기는 언론의 책임도 있어요. 언론도 역지사지를 한 번 더 하고 글을 썼으면 좋겠습니다. 추상적인 생각이지만 나중에 기회가 닿으면 언론매체를 만들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어요. 거창한 언론이 아니라 작은 신문이든, 작은 케이블방송이든, 작은 인터넷 매체든 ‘좋은 뉴스’만 보도하는 겁니다. 하루 종일 그 채널만 틀어놓으면 기분이 그냥 좋아지고, 마음이 절로 따뜻해지고, 때로는 울컥해지고 그러는 곳이요.

    언론은 영화와 비슷하다고 생각해요. 영화는 ‘컷의 예술’이거든요. 똑같은 컷을 저와 신인감독이 같은 배우, 같은 스태프로 찍는다고 가정해봐요. 차이가 날 것 같아요, 안 날 거 같아요?”

    ▼ 당연히 차이가 나겠죠.

    “그런데 차이가 굉장히 작아요. 언뜻 보면 내가 찍었는지, 신인이 찍었는지 잘 모릅니다. 어떤 컷은 신인이 더 잘 찍을 수도 있고요. 영화 한 편을 완성하려면 2000~3000컷이 필요한데, 한 컷에서 0.1% 차이가 난다고 하면 열 컷이면 1%죠, 100컷이면 10%고요. 1000컷이 모이면 100%, 2000컷이 모이면 200% 다른 영화가 나오는 겁니다.

    언론에서 일하는 분이 많잖아요. 한 사람이 쓴 기사 하나는 전체 언론을 보면 있으나 없으나 상관없는 겁니다. 그런데 별 볼일 없는 기사라도 그것을 읽은 사람이 10명이든 100명이든 있잖아요. 그게 쌓이면 여론이 되고 세상이 바뀌는 겁니다. 기사 하나하나 쓰는 게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얘기하고 싶은 거예요. 언론도 역지사지해 다른 이의 장점을 주로 봤으면 좋겠습니다. 대중이 실제로는 갈등을 다룬 뉴스보다 좋은 소식, 울컥하고, 감동적인 보도를 더 좋아하거든요.”

    ▼ 윤 감독과의 대담은 ‘신동아’와 미래전략연구원의 광복 70돌 연중기획 ‘국가미래전략을 묻는다’의 아홉 번째 순서인데요. 앞서 여덟 분도 바람직한 국가의 미래와 관련해 윤 감독과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그만큼 많은 분이 대화와 소통, 역지사지의 필요성을 느낀다는 거겠죠.”

    ▼ 세계화, 정보화가 이뤄지면서 시대가 격변합니다. 젊은 세대는 산업화 역군이던 할아버지 세대, 민주화에 헌신한 아버지 세대와는 또 다른 환경에서 고민이 많습니다. 젊은 세대가 꿈과 도전정신을 갖게끔 하려면 어떤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까.

    “딱 하나 아닐까 싶어요. 기회의 균등.”

    ‘산업화 거인’ 존중하고 ‘민주화 청년’ 기억해야
    우리 몸속 ‘문화의 피’

    ▼ 박탈감을 느끼는 젊은이가 많은 것 같아요. ‘한국이 싫어서’ ‘헬 코리아’ 같은 담론도 나옵니다.

    “기회의 균등이 갈수록 사라지고 있어요. 교육 문제가 특히 그렇고요. 우리 세대만 해도 학교 공부 열심히 하면 그만이었거든요. 어릴 때 학원 다녀본 적이 없어요. 과외는 불법이었고. 차라리 그때가 좋았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을 겁니다. 요새는 혼자 공부해서는 좋은 대학을 못 간다고 합니다. 자녀 2명 사교육비가 월 100만 원 넘는 게 현실입니다. 서민 처지로 역지사지해봅시다. 말도 안 되는 기회의 불균등인 겁니다. 더구나 철학을 가지고 이뤄져야 할 교육마저 돈벌이 수단이 돼버렸어요.”

    ▼ 지난 7월 아시아-태평양 프로듀서 네트워크(Asia Pacific Producers Network) 어워드에서 ‘아시아를 빛낸 영화인’으로 선정됐습니다. 영화의 역사는 근대화를 주도해온 서구 세계, 특히 20세기 문명을 선도한 미국이 주도했습니다. 21세기에도 미국 영화의 주도적 역할은 지속되겠지만, 좀 더 다양한 흐름이 만들어지는 것 같습니다. 한국 영화의 미래를 어떻게 보는지요.

    “세계에서 자국 영화 점유율이 50% 넘는 나라는 한국, 인도 두 나라밖에 없는 것으로 알아요. 저는 굉장히 낙관적이에요. 희망적이고요. 스크린쿼터가 폐지됐는데도 자국 영화가 죽지 않은 나라가 우리와 인도밖에 없어요. 영화는 사람이 만드는 거잖아요. 영화인의 힘을 믿어요. 우수한 인재가 영화산업으로 유입되고 있어요. 한국 영화의 르네상스가 1990년대 말부터 시작됐는데, 그후 내로라하는 인재들이 영화산업에 들어와 치열한 경쟁을 통해 수준이 높아져 고무적입니다.

    인구 5000만 명의 한국 영화 시장이 1억3000만 명의 일본 시장보다 큽니다. 영화는 아시아에서 한국의 수준이 가장 높고요. 영화뿐이 아니에요. 뮤지컬, 대중음악도 원조인 미국, 유럽에는 못 미치지만, 그 외의 나라에서는 우리가 최고예요. 만드는 능력이 뛰어난 것은 즐기는 사람이 많은 덕분입니다.”

    그는 “예전부터 우리 민족이 음주가무에 능했다고 하잖아요. 문화 방면으로 매우 뛰어난 민족인 것 같아요”라면서 웃었다.

    ▼ 젊은 세대가 선망하는 직업 중 하나가 영화감독이죠.

    “연예인 되려는 친구도 많죠. 민족의 특성인 것 같아요.”

    ▼ 대륙문명과 해양문명의 교차로에서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내고 그 속에서 잘 노는 것 같습니다.

    “맞아요. 몸속에 문화의 피가 흐르는 것 같아요. 반도적 특성도 있고요. 한국인처럼 잘 노는 사람들을 본 적이 없어요.”

    ▼ 동과 서, 전통과 미래를 가로지르는 ‘비빔밥 문화’라고 생각합니다.

    “비보이도 우리가 세계 최고잖아요. 하여튼 특이해요. 문화와 관련한 창조력이 뛰어난 민족입니다.”

    ▼ 창조하는 것뿐만 아니라 보는 것도 좋아하죠. 영화 한 편을 1000만 명 넘는 사람이 보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우리 국민이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남들이 200년, 300년 걸려서 이뤄낸 일을 불과 30년 만에 해냈잖아요.”

    ▼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 70년 동안 세계에서 가장 모범적으로 산업화, 민주화의 기적을 이뤄냈죠. 21세기에는 산업화, 민주화를 바탕으로 문화의 꽃도 피우고 있고요. K-팝, K-드라마, K-무비가 세계인을 몸달게 합니다. 그런데 이 같은 한류(韓流)가 지속가능한 것이냐에 대한 우려의 시선도 있습니다. 한류의 성과와 한계 및 지속적 발전을 위한 과제를 짚어주십시오. 문화융성은 ‘선진 대국’의 조건이기도 합니다.

    “하루아침에 무너진 홍콩의 전철을 밟을 것 같지는 않아요.”

    ‘아류 혐오’와 ‘비빔밥 문화’

    ▼ 홍콩은 왜 그랬다고 봅니까.

    “우선 사람들이 중국, 미국 등으로 떠났습니다. 그러면서 창조력이 사라졌어요. 또한 ‘아류’가 많았습니다. 제가 아는 ‘영웅’ 시리즈만 대여섯 편이 됩니다. ‘영웅본색’이 성공하니 아류가 쏟아져 나온 거죠.

    우리는 아류작이 없어요. 오히려 아주 싫어해요, 아류를. ‘해운대’를 찍었더니 재난 영화를 만들려던 사람들이 모두 다 덮어버렸습니다. 중요한 차이예요. 일류는 못 되더라도 아류가 돼서는 안 됩니다. 누구 따라 했다, 비슷하다는 말이 나오면 욕을 엄청나게 먹습니다. 영화인이 죽기만큼 싫어하는 게 아류작이라는 말을 듣는 겁니다. 문학에서도 표절한 것이 드러나면 한방에 훅 가잖아요. ‘비빔밥 문화’도 거론하고 싶습니다. 그냥 가져오는 게 아니라 섞어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버립니다. 우리 민족의 DNA에 창의력에 새겨진 것 같아요.

    한류의 지속을 위해 정부에서 뭘 어떻게 해줘야 하는 게 아니라 기만 살려주면 좋을 것 같아요. 규제 같은 것 풀어주면 더 신나게 일할 겁니다. SM, YG 같은 회사들이 정부 특혜나 지원으로 성장한 게 아닙니다. 시장에서 정말 치열하게 경쟁해요. 10년 넘게 연습생 생활을 시키기도 한다더군요. 그런 치열한 경쟁을 뚫고 나온 아이들이니 인정받는 거죠. 저만 해도 ‘해운대’ 끝내고 골방에 처박혀 3년 동안 ‘국제시장’ 시나리오를 준비했습니다. 자만심만 조심하면 된다고 봐요.

    SM, YG가 직원 채용할 때 삼성전자에 합격할 만한 스펙을 가진 이들이 몰린다고 합니다. 영화 쪽도 비슷해요. 유능하고 뛰어난 친구들이 유입되고 있어요. 아침에 세수하면서 ‘나의 경쟁 상대는 지금 입봉하는 신인감독들’이라고 마음을 다잡습니다. 잘 만드는 친구가 진짜 많아요. 도태될까봐 두렵죠. 40대 중반을 지나 후반으로 가는데 뒤처지면 안 되니 지금도 시나리오 쓰면서 치열하게 노력하는 거죠.”

    ▼ 중국 경제가 빠른 속도로 성장하면서 중화권 문화시장이 확대됐습니다. 요사이 한국 문화산업의 주요한 흐름 중 하나가 한·중 합작사업입니다. 중국과의 합작이 느는 상황에서 한국적 정체성을 제대로 지켜내고, 발전시킬 수 있을지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습니다. 돈의 파워, 시장의 파워, 문화적 파워가 훨씬 큰 중국의 하위문화 시장으로 전락하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도 있고요.

    “누구와도 붙어볼 만”

    “저도 중국 쪽 제안을 많이 받는데, 크게 우려할 부분은 아니라고 봅니다. 역지사지로 생각하면 편할 것 같아요. 한국 감독, 한국 배우를 중국 쪽에서 마구 영입합니다. 한국 문화예술인과 함께 가려는 이유가 뭔지 생각하면 답이 나와요. 중국 쪽의 능력이 떨어져서 그런 겁니다. 중국에 뛰어난 감독이 있으면 한국 감독을 데려갈 이유가 없겠죠. 중국 영화감독들은 대부분 예술학교 출신이에요. 작품성 높은 영화를 만드는 감독은 많습니다. 중국의 고민은, 돈은 넘쳐나는데 상업영화에 특화한 감독이 별로 없다는 데서 비롯합니다. 상업영화를 잘 만드는 감독이 늘어나면 더는 한국에 추파를 보내지 않겠죠.

    중국 상업영화의 역량이 커지면 우리가 도태될 것이다? 아니에요. 우리는 가만히 있습니까. 중국 감독들은 한계가 있어요. 제약이 너무 많습니다. 영화가 정부의 통제 대상이거든요. 일례로 무조건 전체관람가로 제작해야 하기에 창의력, 상상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대중이 열광하는 영화에서 중국이 한국을 따라오려면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거예요. 한국에서 ‘변호인’이 1000만이 되고, ‘국제시장’이 1000만이 되는 것은 제작 환경이 자유롭기 때문입니다. 할리우드는 우리보다 제약이 더 없죠. 문화상품을 생산하는 능력은 한순간에 바뀌지 않는다고 봐요. 문화·예술 쪽에서 우리 민족이 전 세계 어느 민족보다 창의력이 뛰어나다고 생각하기에 누구와도 붙어볼 만하다고 봅니다.”

    ‘산업화 거인’ 존중하고 ‘민주화 청년’ 기억해야
    ▼ 세계 각국의 박물관이나 전시회에 가보면 아시아 문화 중 중국과 일본의 문화는 또렷이 구분되는 반면 한국 문화는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한국 문화의 정체성과 관련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습니까.

    “대륙과 해양의 문화가 뒤섞여 있어요. 우리는 혼합, 융합 능력이 뛰어납니다. ‘비빔밥 문화’라는 표현이 정답인 것 같아요. 국가색이 옅습니다, 우리는. 외래의 것과 우리 것을 섞어 새로운 것을 끄집어냈는데, 그것은 당연히 우리 고유의 것은 아니죠.”

    ▼ IT 분야에서도 한국의 원천기술 개발 능력은 떨어집니다. 그런데 원천기술을 바탕으로 획기적인 상품을 만들어내는 일에는 탁월해요.

    “외국 유학생이 한국에 와 가장 놀라는 게 오전에 인터넷 가입 신청을 하면 오후에 와서 설치해주는 거라고 해요. 밤늦은 시각에 배달 음식을 시켜 먹는 것에도 놀라워하고요. 배달 문화도 IT 비즈니스로 만들어버렸습니다. ‘배달의민족’ ‘배달통’ ‘요기요’ 같은 비즈니스 모델을 보면 혀를 내두르게 됩니다. 스펀지 같아요, 외래의 것을 가져와 우리 것과 융합하는 능력이. 문화에 대한 수용력, 흡수력, 재(再)창조력이 뛰어납니다.”

    “내가 산 게 영화지, 뭐”

    ▼ 장이머우(張藝謀)는 중국을 대표하는 감독으로 일컬어집니다. 민중의 삶과 고통, 봉기를 그린 ‘붉은 수수밭’(1988), 중국 공산당 통치의 불가피성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영웅’(2002), 개혁·개방의 성공을 우회적으로 과시한 ‘황후화’(2006)를 거쳐 중국 현대사 최대의 잔치인 2008년 베이징올림픽 개막식을 연출했습니다. 공산당이 통치하는 현대 중국의 문화적 연출자 역할을 하는 것으로 평가받는데요. 같은 감독으로서 장이머우를 어떻게 평가합니까.

    “중국의 ‘국민감독님’이신데, 저하고는 뭐, 비교가 안 되는, 위에 계신 분이죠. 중국에서 문화적으로 엄청난 역할을 하는 분이죠. 능력도 대단하고요. 존경합니다.”

    ▼ 장이머우 같은 이가 한국 영화계에서도 나와야 하지 않을까요.

    “일단 저는 아닌 것 같습니다. 사람이 살면서 중요한 것 1번이 주제 파악인 것 같아요. ‘하고 싶은 것’과 ‘잘하는 것’은 다릅니다. 대중이 공감을 느끼는 영화를 찍는 상업 영화감독으로는 자신이 있지만, 작품적인 부분에서는 장이머우 감독과 비교하면 햇병아리죠. 장이머우 감독은 작품성 높은 영화를 만드는 감독으로 시작해 상업성 또한 갖췄고, 문화적 연출자 구실도 했습니다. 저는 식자층, 평론가, 언론이 아니라 대중의 인정을 받는 데서 행복을 느낍니다. 상업영화 감독으로서 새로운 것을 만드는 데는 일조할 수 있을 것 같아요.”

    ▼ 장이머우를 국민감독이라고 표현했는데, 공산당이 전폭적 지원을 해줬습니다. 전체주의 사회이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죠.

    “한국 어느 유명 감독이 정부 돈 300억 원을 받아 국가 홍보 내용을 담은 블록버스터 상업영화를 찍었다? 욕을 바가지로 먹을 겁니다. 우리 영화인들이 자부심, 자존심이 강해요.”

    ▼ 대담 막바지인데 사적인 질문 하나만 할 게요. 첫 직장인 LG애드에선 얼마나 근무했나요. 또한 앞으로 어떤 감독으로 기억되고 싶습니까.

    “1996년 초에 들어가 2000년 초에 나왔으니 햇수로 5년 일했죠. 광고 제작 일을 한 것으로 짐작하는 분이 있던데, 1년 빼고는 관리직에서 일했습니다. 예산, 결산 짜는 일을 했죠. 1996년에 산업은행, LG애드 두 군데 합격했는데, LG애드 연봉이 산업은행보다 1000만 원쯤 적었어요. 광고회사 가면 재밌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전공(경제학) 탓에 예산, 결산 일하다 전략, 비전 업무를 했죠. 산업은행 업무나 별반 차이 없는 것을 한 거예요. 회사 다니면서 시나리오 공모전에서 입상했습니다. 그랬더니 ‘왜 이런 애를 여기 뒀냐’며 카피라이터로 업무를 바꿔줬습니다. 1년가량 카피라이터 일을 했어요.

    월급쟁이로 일해봤기에 샐러리맨들의 심리와 사정을 잘 압니다. 앞으로도 평범한 사람들이 웃고, 울고, 공감하는 영화를 만들고 싶어요. 봉급생활자로 일한 경험을 가진 우리 세대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좋겠다는 말에도 100% 공감합니다. 저는 ‘두사부일체’ ‘색즉시공’ 같은 재밌는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에요. ‘국제시장’을 찍었대서 대단한 감독도 아니고요.

    ‘국제시장’은 앞서 말한 대로 거시적인 어떤 것을 담은 영화가 아니라 불효자식이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께 ‘고맙다’는 말씀을 드리려고 만든 영화입니다. 길을 걷는 어르신 누구에게 묻더라도 그분의 인생은 하나의 영화면서 역사예요. 풍진 세월 헤쳐온 60, 70, 80대 어른들을 보면 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분들이 ‘내가 산 게 영화지 뭐’ 이러시잖아요.”

    내가 잘할 수 있는 것

    ▼ 끝으로 영화감독을 꿈꾸는 청년들에게 조언을 해준다면.

    “예전에 영화계가 투명하지 않던 시절, 영화인은 열심히 일해도 돈을 못 버는 ‘가난한 직업’이었습니다. 지금은 바뀌었어요. 경제적으로도 여유 있고, 명예도 좋은 직업입니다. 청년들에게 해주고 싶은 조언의 1번은 철저한 자기 검증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내가 뭘 잘할 수 있는지 알아야 해요. 누군가 가수 싸이에게 ‘당신이 성공한 첫 번째 조건은 무엇이냐’고 물었답니다. 싸이는 ‘주제 파악’이라고 답했다고 해요. 제 생각도 같습니다. 싸이가 비(정지훈)처럼 멋있는 이미지의 가수가 되려 했다면 세계적으로 이름난 사람이 될 수 있었을까요.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을 밀고나가야 해요. 저 역시 이창동, 김기덕, 박찬욱 감독님처럼 작품성, 예술성 있는 영화를 만들려고 했다면 주제 파악을 못한 거죠. 저는 코미디 감독으로 출발해 사람들이 울고 웃고 공감하는 쪽으로 한 우물을 파면서 관객에게 사랑받았습니다.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거예요.”

    윤 감독은 대담 내내 ‘겸손’하고 ‘소탈’했다. 그가 ‘국가미래전략을 묻는다’ 대담을 통해 꼭 전하고 싶었다는 메시지를 풀어 적는 것으로 글을 마친다.

    易·地·思·之.

    맹자(孟子) ‘이루편(離婁編)’에 나오는 ‘역지즉개연(易地則皆然)’이라는 표현에서 비롯한 말로 다른 사람의 처지에서 생각하라는 뜻이다. 무슨 일이든 자기에게 이롭게 생각하거나 행동하는 것을 뜻하는 아전인수(我田引水)와 대립된 의미로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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